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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재클럽(Y-Club) 원문보기 글쓴이: 因緣緣起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한 달 가까이 감기를 앓다가 쿨룩거리면서 이삿짐을 챙겼다. 7년 남짓 기대고 살던 오두막이지만 겨울철 지내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영하 20도의 그 팽팽한 긴장감을 앓던 끝이라 몸이 부담스러워할 것 같다. 눈에 덮인 빙판길을 오르내리려면 목이 긴 털신에 아이젠을 걸고 다녀야 하는데, 이런 일도 이제는 번거롭게 여겨진다. 장작 패서 나르고 개울에서 얼음 깨고 물 긷는 일로 인해 내 왼쪽 엄지가 자꾸만 시큰거린다.
언젠가 아랫마을 김씨로부터 무슨 이야기 끝에 어디 바다 가까운 곳에 자기 친구가 살던 집이 있는데, 그 집이 비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무심히 흘려 듣고 말았는데 얼마 전 뒤늦게 그 말이 문득 떠올라 내 귀가 번쩍 뜨였다. 그 집에 한번 가볼 수 없느냐고 했던 그러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북동쪽으로 크고 작은 고개를 넘고 해안선을 따라 한참을 올라간 지점이었다. 뒤쪽은 소나무가 무성한 산자락이고 앞은 바다가 내다보이는 곳에 달랑 오막살이 한 채가 있었다. 그야말로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였다. 삼칸 슬에이트 집인데 비워둔 지 오래되어 어설프디어설픈 그런 오두막.
김씨는 내가 좋다면 자기 친구한테 말해서 빌려 쓸 수 있다고 했다. 전기가 들어오고 뒷산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물이 양은 많지 않지만 식수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족회의 같은 걸 거칠 일이 없는 나는 그 자리에서 결정을 짓는다. 우선은 겨울 한철을 살아보기로 했다. 다시 또 새롭게 시작해 보는 것이다. 그 다음날부터 집 고치는 일에 들어갔다.
슬레이트 몇 장을 갈고 기름보일러도 부품을 사다가 고쳤다. 그 집에 어울릴 도배지를 그 근처 지물상에서 구해다 벽과 천장을 발랐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비닐장판을 걷어내고 종이장판으로 갈았다. 문짝도 하나 새로 해 달고 앞튓마루에 떨어져 나간 널빤지도 새로 끼웠다. 튓마루가 너무 거칠고 때가 끼여 그라인더로 갈아내고 기름칠을 했다. 전기 배선도 안전하게 다시 했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더니 이렇게 해서 새 오두막이 마련된 것이다.
혼자서 주섬주섬 이삿짐을 챙기고 있노라면,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저 세상으로 옮겨갈 때의 기분을 미리 가불해 쓰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인생은 나그네길.....'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면서 이것저것 새집에 가서 쓰일 것들을 챙겼다. 이사가 몸과 생활도구만 옮겨가는 일로 그친다면 별 의미가 없다. 삶의 형태와 그 습관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평소의 내 지론대로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 수 있도록 데리고 가는 것들을 극도로 제한하기로 했다. 이 다음 이 집에 누가 와 살더라도 크게 불편함이 없이 지내도록 배려하는 것이 먼저 살던 사람의 그 집에 대한 도리다.
우선 이부자리와 방석을 챙기고 몇 권의 책자를 상자에 꾸렸다. 전기가 들어오는 곳이지만 등잔과 초를 켤 사발을 챙겨 넣었다. 어디를 가나 차는 마셔야 하므로 다구도 이것저것 가렸다. 또 무엇이 필요한가 둘러보다가 숟가라 젓가락과 그릇들, 그밖에 소용되는 것은 현지에서 새로 구하기로 하고 최소한의 것으로 짐을 꾸렸다.
짐을 꾸리면서 돌아보니 서운해하는 것들이 더러 눈에 띈다. 조그만 장 위에서 목을 길게 뽑고 밖에서 돌아올 나를 어둠 속에서 기다리곤 하던 나무 오리. 두런두런 말을 걸면 잠잠히 받아주던 내 유일한 말벗인 그 오리가 내 떠남을 몹시 서운해하는 것 같다. 영하의 겨울철이면 마루방에서 내게 더운 체온을 아낌없이 내뿜어주던 무쇠 난로도 말은 없지만 서운해한다. 빈집에서 겨울 동안 할 일이 없어 얼마나 무료해할까 생각하니 안되었다.
그리고 마루방 들창가에서 선들바람이 불어올 때면 아름답고 청아한 음률로 내 귀를 즐겁게 해주던 막대 풍경도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마냥 시무룩하다. 이와 같은 유정有情들은 함께 지낸 세월만큼 정이 든 것이다. 밖에 나가 여기적 둘러보니 개울물 조리와 장작 벼늘과 헌식돌과 자작나무 전나무 돌배나무 산자두나무 등 나 눈에 익은 것들이다. 한동안 내 눈에 밟힐 것이다.
할애출가 割愛出家란 말이 있다. 애착을 끊고 출가한다는 뜻. 출가 수행자는 크고 작은 애착을 끊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인정이 많으면 구도의 정신이 해이해진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7년 남짓 그것들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보살핀 이인연 때문에 떠나면서도 마음이 가볍지가 않다. 나는 골짜기가 쩌렁 울리도록."겨울철 지내고 돌아올 테니 다들 잘 있거라" 하고 큰소리로 작별을 고했다. 바닷가 새 오두막에 도배를 마치고 나서 사흘을 묵었다. 아직도 쿨룩쿨룩 남은 기침을 하면서 익숙하지 않은 주거공간에서 나그네처럼 엉거주춤 지낸다.
집의 방향이 동남간아 바다에서 떠오르는 불덩이 같은 해를 방 안에서 맞이할 수 있다. 해돋이 때마다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이 세상 구석구석 두루 밝아지기를 염원한다.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장엄한 일출을 지켜보고 있으면 해에서 뿜어나오는 빛의 에너지가 내 몸에까지 전해지는 것 같다. 나무 일광日光 보살!
밤으로는 동해바다 일대에 오징어잡이 배들의 집어등集魚燈이 장관을 이룬다. 어족들은 눈부신 등불을 보고 무슨 잔치인가 싶어 모여들었다가 잡혀 한 생애를 마친다. 등불에 속는 것이 어찌 고기떼만이랴. 인간의 도시마다 벌어지는 밤의 유흥업소, 번쩍거리는 그 불빛 아래서 들뜬 기분에 흥청거리다가 무참히 한 생애를 마감하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다. 밤의 수상한 불빛에, 과장된 그 불빛에 속지 말아야 한다.
바다는 밤에도 잠을 자지 않는지 기슭에 밀려드는 파도소리가 내 베갯머리에까지 아득히 들린다. 뒷산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마침내 저 바다에 이르러 함께 출렁거릴 것이다. 개인의 삶도 때가 되면 한 생애의 막을 내리고 저 큰 생명의 바다에 이르러 하나가 되듯이. 나는 올 겨울 넓고 넓은 바닷가에서 살아 움직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내 삶을 새롭게 시작해 보려고 한다.
*Y-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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