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대, 중세 시대의 국립 고등 교육 기관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설립된 태학, 신라 신문왕 2년(682년)에 설치된 국학, 고려 성종 11년(992년)에 세워진 국자감이 있었고 고려 충선왕 2년(1310년) 성균관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국립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준공된 성균관이 있는데 고려 충선왕 2년(1310년) 개성에 있던 성균관과는 다른 건물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 성균관은 고려시대 국자감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서와 오경 등을 기본으로 했다. 교육방법은 강독(講讀), 제술(製述), 서법(書法)으로 이뤄졌다. 또한 성균관 내에는 오늘날 학생총회에 해당하는 재회(齋會)가 존재하여 학자의 사기를 진작하고 존중하는 기풍이 전통으로 내려왔다.[1] [2] [3]조선 태조 7년(1398년)에 태조는 숭교방(崇敎坊一明儉洞)에 성균관 건물을 준공하고 고려 제도대로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 유생들이 거처하는 재(齋)를 두었으며, 태종은 땅과 노비를 지급하고 친히 문묘에서 제사를 지냈고 왕세자의 입학을 명령하였다. 이후 이것은 상례가 되었으며 여러 왕을 거치는 동안 경기도 연해의 섬(島), 전라남도 해안의 어장(漁場)과 많은 땅이 부속되었다. 규모는 성종 때에 완성되었는데, 향관청(享官聽)과 존경각(尊經閣·도서관)도 이때 증설되었고, 현종 때에 비천당(不闡堂·과거장), 숙종 때 계성당(啓聖堂)이 세워졌다.
총책임자 관원으로 지관사(知館事·弘文棺, 또는 藝文館 大提學이 겸임, 현 총장에 해당)를 배치하고 동지관사(同知館事·겸직, 현 부총장에 해당) 1명, 전임관원으로 대사성(大司成·정3품) 1명, 제주(祭酒·정3품) 2명, 사성(司成·정3품) 1명, 사예(司藝·정4품) 2명, 사업(司業·정4품) 1명, 직강(直講·정5품) 4명, 전적(典籍·정6품) 13명, 박사(博士·정7품) 3명, 학정(學正·정8품) 3명, 학록(學錄·정9품) 3명, 학유(學諭·종9품) 3명이 있었다. 이 중 박사 이하는 정원 외에 봉상시(奉常寺)의 관원과 사학(四學)의 훈도(訓導)가 겸직한 것이었다.성균관은 조선 연산군 때 연산군의 실정을 공격하다가 탄압받기도 했다. 조선 시대 사립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서원이 있었다. 서원은 조선 유교의 여러 학파발전에 기여하였다. 조선시대 학교는 관학으로 성균관, 향교를 비롯해 경연, 세자시강원, 종학, 잡학, 서원과 사당 같은 사학 등이 있었다.
서당은 오늘날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와 비슷하고 서원은 사립대학과 비슷하고 향교는 거점국립대학이나 지방국립대학이나 공립대학 쯤에 해당하고 성균관은 국립대학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향교와 성균관은 관이나 나라에서 관리하였고 서당과 서원은 뜻있는 학자들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정착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조선시대의 전통 학교·교육제도는 구한말 개화기를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존재했다.[1]
근대적 의미의 대학으로는 1924년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만이 있었다. 까닭은 조선 말기부터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일어났지만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조선에는 경성제국대학 외에는 단 한 개의 민립 또는 사립대학의 설립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제국주의로 무장된 지배계층의 일본은 민중과 식민지 피억압 민족에게는 고등교육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차별의식에서 식민지 조선에 근대 대학을 설립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은 1920년 6월 이상재, 한규설, 윤치호 등 100명이 조선교육회설립발기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되었다. 모임에 참가한 인사들은 조선에 대학이 없음을 개탄하고 조속한 시일 내 민립대학을 설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 1월 이상재, 조만식, 윤치호 등이 모여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이어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3일간에 걸친 총회를 개최하였다. 총회에서 한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데 가장 선결 문제가 교육에 있으며, 문화의 발달과 생활의 양상이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에 있음을 선언하는 '민립대학 발기 취지서'를 채택하고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다.민립대학설립운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민립대학설립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료에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국립대학으로는 부산대학교와 서울대학교 [4], 여자대학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사립대학으로는 숭실대학교 [5]와 연세대학교 등 여러 대학이 대한민국 대학교의 시초라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그 연혁에 대하여 일부 논란이 있다.성균관대학교는 일정(日政) 때는 경학원(經學院)이라 불렀고 명륜당과 부속건물에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세워 교육하였으며 8.15 광복 후에는 재단법인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하고 단과대학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1996년 11월에 삼성그룹이 성균관대학교 재단을 인수하여 사립학교법(1963.6.26. 법률 1362호)에 의한 별도의 학교법인으로 만들었다.
각 대학에서 내놓는 연혁을 보면 가톨릭대와 연세대가 1885년, 이화여대가 1886년, 숭실대가 1897년, 고려대가 1905년, 동국대와 숙명여대가 1906년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여러 대학들이 2년제 전문대학을 포함하여 신학교, 성경학교, 강습소, 학당, 실업교육, 중등교육 등의 연혁까지 포함하여 대학의 연혁을 부풀리고 있듯 거의가 대한민국의 광복과 한국 전쟁 후 정상적인 학사 운영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미군정기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3년간 국내 고등교육계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서울대는 국대안 파동을 겪으면서 국대안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논란 끝에 안정화의 길로 접어들었고 사립 전문학교들의 대학 승격과 신규 대학의 설립이 이뤄졌다. 광복 후 전문대학으로 있던 연희전문, 보성전문, 이화여전 등이 종합대학으로 승격되고, 국립부산대, 국립해양대 등 국립대도 설립되었다.
또한 역시 2년제 전문대학의 형태로 운영되던 종로구 혜화동의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敎)가 1946년 9월 20일, 동국대로 설립인가를 받았고, 종로구 명륜동의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敎)는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종로구 낙원동의 단국대는 1947년 11월 1일에 광복 최초 4년제 대학으로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고, 한신대는 대한민국 최초의 신학대학으로 정규대학 인가를 받았다. 1948년에는 숙명여대, 중앙대, 한양대, 국민대, 1949년에는 건국대, 홍익대가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49년에 가인가를 받았던 경희대는 1952년에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고 일제때 평양에 있다가 폐교되었던 숭실대는 1954년 4월 15일, 당시 문교부로부터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한국대학신문의 광복이후 정규대학 설립인가 현황(1946년~1954년) 참조)[6] [7] [8]
광복 후 당시 문교부에 등록된 한국 내 《대학설립인가의 현황[6]》을 보면 이같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서울대학교는 원래 1924년 일제가 세운 경성제국대학교로 출발하였으나 해방후 정립한 1946년 8월 22일을 서울대학교의 개교일로 잡아 지금까지 기념해 오고 있다. 참고로 인가서를 기준으로 하면 이화여대가 신청일자가 1946년 6월 24일로 기록된 제1호 인가서를, 연희(연세)대는 1946년 7월 31일로 기록된 제2호 인가서를 미군정청 학무국으로부터 받았으며, 고려대는 신청일자가 1946년 8월 5일로 기록된 제3호 인가서를 받아 8월 15일에 전격적으로 발표한 종합대학 승격의 법률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대한민국의 출산률은 계속 줄고 있는데 대학의 진학률은 늘고 있다. 실제로 전산업 취업유발계수(투자액 10억원당 유발되는 취업자 수)가 2000년 18.1에서 2007년 13.9로 감소하였으며, 대학진학률은 1990년 33.2%에서 2009년 81.9%로 48.7%p 급증했다. 세계적으로 제조업 경쟁력을 보유한 독일도 대학진학률이 50%대임을 감안하면, 대한민국의 고학력 노동공급은 가히 장대비 수준이라는 전문인의 분석이 나오고 있다.[10] 그러나 2010년 조사로 40%의 국민이 대학 진학이 필수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점차 의식이 변화하고 있다.
2023년 기준으로,대한민국은 217개의 일반 종합개학과 136곳 정도의 전문대학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