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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기행 2
채 희 탁
누가 나에게 한 사나흘 오붓한 여행할만한 곳을 추천하라면 나는 서슴없이 남도 여행을 권할 것이다. 보성 강진 해남 보길도 까지 둘러 온다면 아름다운 반도의 산해절경은 물론 남도의 해산진미도 맛 볼 수 있다. 또 가슴 뜨거웠던 조선(朝鮮)사람 몇 분을 만나 뵙고 오늘 내가 선 자리를 확인해 볼 수도 있다.
여행은 머리를 하얗게 비우고 떠나야 제대로 맛이 있다. 대분망천(戴盆望天)이니 짐을 이고는 하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단체여행도 나름의 뜻이 있지만 부득이 가는 것이 아니라면 한 둘이 가야 기대이상의 남는 것이 있다. 휴게소로 버스가 들어서면 사람들은 차가 멈추기 무섭게 일제히 어딘가에 통화를 하는 참 재미있는 광경들을 볼 수 있다. 모두 정말 바쁘게 사는구나 하는 흐뭇한 생각을 하다가, 그 내용을 엿들어보면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하나같이 남편, 부인, 자녀 등에게 밥 챙겨 먹으라는 걱정들 전화이다. 그만큼 우리네 삶이란 것이 선뜻 집 나서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1) 보성
상쾌한 남도 여행의 시작점은 보성에서부터가 제격이다. 우선 녹차 밭을 찾아 들어서면 눈앞에 펼쳐지는 이국적 남방 풍경에 가슴이 확 트인다. 좁은 나라 안에 참으로 볼 것도 좋은 곳도 많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 울창한 메타콰이어 숲은 다른데서는 보기 힘든 너무도 색다른 경치이다. 끝없이 펼쳐져 일렁이는 초록이랑의 파도를 바라보며 펄떡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긴 호흡으로 깊이깊이 폐부를 푸르게 물들여본다. 이런 자리에 서서 단둘이 있어보고 싶은 그리운 사람 하나쯤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는 참 멋없는 사람이 아닐까.
2) 강진
남도 여행에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은 강진이다. 육지 깊숙이 고개를 들이민 강진만이 칠량, 대구, 마량포구를 더듬고 있다. 고려청자의 8활을 생산했다는 강진, 포구마다 자기소요 가마터다. 그 맥이라도 이어보겠다는 것인지 아직도 옹기종기 옹기공장이 모여 있다. 그릇의 역사를 살펴보면 묘하게도 그 국가와 민족의 흥망성쇠와 똑 닮은 괘도와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릇은 생활필수품이자 그 시대의 문화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곳에 온 김에 청자에서 귀얄 덤벙 인화 분청 막사발과 조선백자에 이르는 우리네 그릇의 역사까지 한번 되짚어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우리 어머니는 그릇을 그륵이라고 하네’ 라는 유행가 가사가 문득 생각난다. 강진만을 감도는 어귀 어디쯤에 그륵을 가득 싣고 개성을 향하는 고단한 사공의 노래 한 자락이 아직 걸려 있을 것 같다.
강진에는 동백과 자생 녹차나무가 지천이라 소나무가 아니어도 사철 푸르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품고 있는 만덕산, 이 산이 일명 다산이다. 마침 때맞추어 왔음인가. 절집 들머리에 빼곡한 동백 숲에는 페르시아 붉은 카펫을 깔아놓은 진풍경이다. 사람들은 왈츠를 추는 듯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차마 눈뜨고 못 볼 광경이다. 동백은 어찌하여 꽃잎을 꽃비처럼 흩뿌리지 못하고 모가지 채 뚝뚝 떨어지는가. 꺾으며 스러지는 그 열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비로소 동백을 충절의 상징으로 비유하는 말뜻을 짐작 할 것 같았다. 잠시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진 이름 모를 순절자들을 떠올려 보게도 하였다.
3) 백련사
백련사 선방 뜰아래로 가만가만 지나가면 200여 년 전의 추사와 방장 혜장의 이야기소리가 두른두른 들린다. 동국진체라는 대웅보전 현판에서 원교(李匡師)라는 끼 넘치는 조선의 선비 한 분을 잠시 만날 수 있다.
4) 다산초당
누가 뭐래도 오늘 강진을 찾아 온 첫째 이유는 다산선생 때문이며 다산초당에서 그의 체취를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호송 포졸마저 돌아가 버린 낮선 남도 땅에 버려진 선비 정약용(丁若鏞), 처량하게 달빛을 맞으며 배회하는 그를 거두어들인 사람은 동문 밖의 주막집 노파였으니 세상에 귀한 이는 누구이며 장한 일을 하는 이는 누구인가. 영일만 장기에서 이배된 이날은 고려청자에서 잊혀진 강진이 또 한 번 고난 역사의 명승지로 태동하게 될 날일 줄이야. 4년간을 신세 진 주막 골방에는 생각과 말과 행위와 차림새를 마땅히 선비답게 살고픈 선생의 마음, 사의재(四宜齋)석자가 늘 붙여 있었다. 백련사를 찾은 다산은 우연히 혜장을 만났고 훗날 혜장선사의 도움으로 고성사 요사(寮舍)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고 있었다. 또 다시 외가 원척 윤 단의 주선으로 귤동 뒷산 기슭의 외딴 초라한 초가로 거처를 옮기니 이곳이 다산초당이다. 다산에 대해 말할 때 외 가집 해남 윤 씨와의 인연은 결코 빠트릴 수 없다. 선생은 이 초당에서 해남윤씨의 자제(子弟)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강진에서의 세 번째 안식처로 삼아 해배까지 11년을 머문 곳이다. 다산이라는 아호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 초당이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마과회통을 비롯한 일천여권에 달하는 선생의 방대한 저술의 산실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백련사는 바로 등 너머에 있다. 그 절에는 주역을 완역할 만큼 유가(儒家)에 통달한 승려 두륜산 대흥사의 명강사 혜장선사가 있었다. 20대에 구산선문 두륜산문의 수장이 된 기고만장하던 젊은 실력자 혜장은 주막에서 생활 하던 다산선생을 우연히 만났고 스스로 제자가 되었다. 그의 유가(儒敎)지식은 결국 다산에게서 구체화된 것이다. 사십에 요절한 혜장은 실력만큼 세상에 불평불만도 많았던 모양이다. 선생은 그에게 아암(아이 같다)이란 별명을 주었고 그는 죽을 때까지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아암은 추사(金正喜)선생과 오랫동안 편지로 유(儒)불(佛)을 토론 해 왔다. 어느 날 추사께서 백련사로 그를 찾아왔다. 연인처럼 그리워하며 편지만 주고받았던 두 사람의 역사적 만남이다. 아암은 추사에게 자기의 스승을 소개하고 싶어 초당으로 가는 오솔길을 달리듯 앞장섰다. 의기투합한 한 선비와 승려가 도포와 장삼자락을 휘날리며 존경하는 이를 만나러 내달리는 모습은 상상만 하여도 상쾌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다. 이십년 연배 다산과 추사도 이렇게 첫 만남을 가졌다. 희대의 걸출 세 사람은 밤을 새울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지금 초당 뜰에는 반반한 돌 하나가 놓여있다. 이 돌이 그날 밤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으며 밤새도록 몸을 달구어 찻물을 끓여대던 부뚜막(茶竈)이다. 모르면 모를까 어찌 감히 밟고 앉아 쉬기를 엄두라도 못 낼 돌이다. 걸어서 20분쯤 걸리는 초당과 백련사 사이에 그 오솔길이 잘 복원되어있다.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해 보던 그것은 자유다.
지금의 기와집 초당건물은 근대에 새로 지은 것이다. 보정산방(寶丁山房) 관어재(觀魚齋)라는 추사의 명필체 현판이 걸려있다. 물론 글씨는 친필의 모작이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은 추사체의 집자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이라는 현판은 다산선생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띄어난 조형미는 이미 회화계의 명품으로 인정하는 작품이며 감히 넘보기 어려운 두 분 선생의 단아한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다산의 거처에 보정산방이라는 제호를 붙인 것은 추사의 깊은 뜻이 담겨있다. 김정희는 24세 때 생부 김노경(金魯敬)이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연경에 갈 때 자제군관으로 동행하여 홍유석학(鴻儒碩學)으로 불리던 담계(覃溪)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서재에 걸린 보소재(寶蘇齋)라는 제호를 보았다. ‘담계는 소동파를 보배로 여긴다.’ 는 뜻인 줄을 알았다. 추사는 돌아와 자신의 서재에 ‘담계를 보배로 생각한다.’는 뜻으로 보담재(寶覃齊)라는 재호(齋號)를 달았다. 아호도 완원을 취하여 완당이라 지었다. 보정(寶丁)이란 ‘정약용을 보배로 생각한다.’는 추사의 마음을 담아 바친 예물이다.
초당 뒤 바위벽에는 정석(丁石)이라는 글씨가 깊이 새겨져있다. 선생의 정신과 육신의 상징물이다. 의지가 흐트러질 때마다 마음을 다잡으며 깊이깊이 정질을 하였을 것이다.
이 초당의 문지방을 수도 없이 드나든 또 한사람이 초의선사다. 다산은 동다기(東茶記)를 쓰고 선사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었으니 두고두고 아름다운 차 이야기로 전해지는 차의 법전이 되었다. 혹시 다산선생의 넋을 빼앗곤 했다는 초의의 범패(梵唄)소리가 가끔 이방에서 낭랑히 퍼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5)천일각
초당 옆 언덕에는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근래에 세워졌다. 이 자리는 다산께서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는 형님 정약전을 그리며 아침마다 문안 절을 올리던 자리다. 손암(巽庵)정약전(丁若銓)은 한국최초의 어류도감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 흑산도에서 집필했다. 귀양지 흑산도가 얼마나 가슴에 사무쳤으면 검을 흑(黑)자를 사랑자(慈)자와 통하는 검을자(玆)자로 고쳐 사랑하는 섬 자산도라 부르고 싶었을까. 두 분의 삶에서 ‘하늘은 할 일 없는 사람을 내지 아니하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天不生無祿之人地不長無名之草)라는 말을 새삼 깊이 음미하게 한다. 억울한 유배생활, 언제 어느 때 사약사발이 당도할지 국왕의 은총이 내려올지 알 수 없는 귀양살이다. 하지만 원망하기보다, 있는 자리에서 할 일이 찾아 하는, 그래서 그들은 위대한 인물이다. 혹자는 이들의 귀양살이를 ‘방대한 조선의 보물을 저술하기 위한 하늘의 뜻’이었다고 말한다. 지나친 비약이고 불경이라 할지라도 그렇게라도 위안해보고 싶은 심정에서 하는 소리일 것이다.
6) 다산 기념관
최근에 지은 기념관에는 부인의 비단치마를 잘라 만든 그리움의 시집 하피첩(霞帔帖)과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전시되어 있다. 수원성을 설계한 대 과학자가 아들에게 닭장 짓는 방법을 일러주며 닭을 키워서라도 생계를 꾸릴 것을 당부하는 편지다. 몰락 양반가의 궁핍한 삶과 선생의 섬세한 인간적 면모가 싸하게 가슴을 후빈다.
7) 구강포, 동천여사
유배의 땅이라는 선입견 때문인가. 구강포 갯둑에 서걱거리는 억새소리가 공연히 서러운 노래처럼 들린다. 마냥 일어서고 가라앉는 묵은 갈대머리가 민중의 손짓인양, 들릴 듯 말 듯 강진의 속삭임으로 웅얼거린다. 강진에서 가슴 뜨겁게 살고 스쳐간 다산, 추사, 혜장, 초의의 우정과 애증과 열정의 이야기들이 섞여 들린다.
‘만약에 그때--’ 라는 가정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 비정한 역사의 본성이다. 가슴 치며 대하사극(大河史劇)의 한 장면을 음미하게 하는 곳이 강진이다. 근래에 복원해놓은 동천여사(東泉旅舍)에는 사의제 석자가 여전히 편액으로 여직 걸려 있다. 뜰에 걸터앉아 애써 그 뜻의 끄나풀이나마 찾아보려했지만 그 정신만은 복원할 길은 없는 듯 아쉬울 뿐이다. 다만 선생이었기에 스스로 할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세상을 원망하지 아니하는 것’ ‘화를 당하고 복을 받는 이치는 오래된 의문이라. 충신 효자가 반드시 화를 면하는 것도 아니요, 음탕하고 일탈된 자가 반드시 복이 적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선하게 사는 것이 복을 받는 유일의 길이니 군자는 다만 힘써 선을 다하며 살 뿐이다.’(禍福之理古人疑之 久矣 忠孝者未必免禍 淫逸者未必薄福 然爲善 是受福之道 君子 强爲善而已) 여유당 문집에 실린 글 한 줄을 떠올려본다.
8) 영랑생가
강진을 더욱 따뜻하고 유명하게 하는 자랑거리 ‘모란이 피기까지 나는 아즉 나의 봄을 지둘릴래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남도의 방언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나의 처갓집 이웃에 전직국회의장을 지낸 김 모 씨가 살았다. 그는 늘 ‘지둘러’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이 기다리는 뜻인 줄 진즉 알고 있다.
나는 시를 잘 모른다. 아름다운 시어를 구사하는 시인들이 그저 부럽다. 제 눈에 안경이듯 알아듣기 쉽고 줄줄 읽어지면 명시인줄 알 뿐이다. 영랑 김윤식 시인의 염원과 다산선생이 기다리든 그것들은 무엇과 어떻게 다를 것인가. 복원을 한답시고 반듯반듯 기계로 깎아 끼운 돌과 나무가 왜 그리도 정나미가 떨어지는지 또다시 나의 비판의 병끼가 도지려나보다. 뒤뜰의 아름드리 동백이 투두둑 꽃 한 송이를 떨어뜨린다. 청성만 떨지 말고 파란 하늘이나 한번 쳐다보란다.
9) 대흥사
귤동을 나와 남으로 돌아서자 남으로 달리던 반도는 급하게 멈추어 두륜산으로 솟아 앞을 가로막는다. 이런데서 절경을 주절거리는 것은 천박한 짓일 뿐이리라. 조용히 입 다물고 피안교를 건너 드디어 피안의 땅 대흥사로 들어선다. 그러나 여기도 인간의 허접한 속성은 유감없이 빛나고 있었다. 살아있는 자들의 알량한 상식으로 죽은 자들의 자유를 빼앗아 고승의 부도들을 한 치 흐트러짐도 없이 한 줄로 세워 놓았다. 서산대사의 부도 앞에 잠시 목례를 올리고 살아 있는 자들의 무례에 용서를 바랄뿐이다. 대웅보전이라는 거칠한 글씨의 현판이 걸려있다. 말로만 듣던 원교 이광사선생의 동국진체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까막눈으로 실감할 뿐이다. 다만 기구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니 그저 덩달아 한 번 귀하게 여겨본다. 우쭐하던 서예가 추사께서 어느 날 대흥사에 들렸을 때 원교 선생의 글씨를 비웃으며 자신의 솜씨로 쓴 새 현판을 바꾸어 달았다. 뒷날 제주도의 10년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오던 추사께서 비로소 자신의 옛 소행(所行)을 사과 하고 다시 옛것을 달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월이 알려준 신중과 겸손 세상에 널리 회자된 추사의 일화다.
10) 병영면
1656년 네덜란드사람 하멜 일행이 제주도로 표류해왔다. 내막은 모르겠으나 그들은 강진 병영에서 7년을 살았다. 나중에 몰래 일본으로 달아난 것을 보면 억류생활을 한 것이다. 온 동네에는 그들의 방식으로 쌓은 독특한 화란식 빗살무늬 흙돌담장이 400년이 다 되도록 남아있다. 앉아서 네덜란드 문화를 보고 세계를 넘나들던 개척자들의 체취와 자취를 보는 특별한 재미가 아닐 수 없다. 아마 내가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면 곧 떠나갈 땅에다 뭣 때문에 이처럼 단단한 건물을 지을 마음을 가졌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사건은 조선을 유럽에 알리는 개기가 되었고 1998년 하멜의 고향 네덜란드의 호르큼시와 자매결연 하고 활발한 교류를 통해 2007년 하멜 기념관을 세웠다. 이를 두고 격세지감이라 하는 것인가.
병영에는 또 한독지가가 세운 민속학습장 ‘와 보랑께 박물관’이 있다. ‘달갈 폴아 색우지름 삿당께.’(계란 팔아서 석유기름 샀습니다.) 곳곳에 걸려 있는 사투리가 정겨웠다.
병영성터를 중심으로 한 유적들이 500년간 한반도 남부의 군사중심지 흔적을 잘 간직하고 있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장면과 이야기를 다 알고 있는 즐비한 고목들은 오늘도 말없이 오늘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다.
11) 해남, 녹우당
남도는 갈 곳이 많아서 바쁘다. 해남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드넓은 해남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남 정씨와 윤씨네의 것이란다. 여기에는 두고두고 정씨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이야기가 하나 남아있다. 이 들판이 원래 정씨네의 것이었으나 정씨네가 해남 윤 씨와 혼인을 하기위해 절반을 주었다는 전설 같은 예기다. 신분과 계층이 엄연하던 조선사회였기에 잘못이해하면 오해의 소지도 있을법하다. 정말 윤씨네는 그 재산을 기반으로 도약할 수 있었는지 해남윤씨는 고산선생과 증손자 공재에 이르기까지 조선 제일의 명문가문을 구축하고 있다. 하인들만 해도 수백 명에다 보길도 섬을 통째로 소유하고 해남지방에 정자만도 25개나 가질 정도로 대단한 부자였던 해남윤씨의 밑천이 그것이었는지는 나로서는 잘 모를 일이다. 고산의 4대조인 윤 효정이 해남의 정씨 집안으로 장가들 때 토지를 많이 받은 것만은 사실인모양이다. 그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좋은 결과가 되었다니 잘한 일이라 할 수밖에.
해남에는 사적 167호 고산윤선도의 종택 녹우당이 있다. 평범하지만 인상적인 별채도 하나 딸려있고 집 앞에는 고산께서 살아있을 때부터 있었던 은행나무가 있다. 고산은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을 가르친 왕자사부다. 그 인연으로 효종은 스승을 가까이 있게 하기 위해 경기도 수원에 집을 지어 주었다. 병자호란 후에 해남으로 낙향하여 불러도 오지 않는 고산에게 효종이 그 집을 해남으로 옮겨 지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임금에게 하사받은 집을 버리고 올 수가 없어 뜯어서 배편으로 이곳으로 옮겨 왔다는 말도 있다. 녹우당이 그 집이다.
녹우당이라는 당호(堂號)는 성호 이익의 형(이복)이며 공재 윤두서의 친구인 옥동 이 서가 가을이면 사랑채 앞 은행나무에서 노란 잎이 마치 빗소리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하여 현판을 달았다고도 하고 일설에는 녹우당 뒷산(덕음산)에 고산의 선조가 이룩해 놓은 비자나무숲(樹林 천연기념물 241호)에서 바람이 불면 봄비 내리는 소리처럼 들렸다고 해서 붙였다고도 한다.
지금은 누가 살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주시장과 2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산의 13대손 윤영선(尹泳善)씨와 14대손 윤형식(尹亨植)씨가 지키고 있었으니 고은(孤山)이란 이름처럼 외롭지만도 않은 게 아닌가. 아무튼 넘볼 수 없는 부러운 일이기도 하다.
유물전시관에는 겸재(鄭敾) 현재(沈師正)와 함께 조선 삼재라는 공재(尹斗緖)의선생의 유명한 귀 없는 자화상(국보240호)이 있다. 이 그림은 선비가 자신의 모습을 떼어놓고 바라본다는 사실 자체로 인생을 성찰(省擦)하는 사색하는 철학적 짙은 훈기를 느끼게 한다. 수많은 주요자료들이 전시되어있으므로 시간이 바쁘지 않으면 과거로 세상으로 한번 돌아가 볼 수 있다. 특히 이곳의 서책들은 다산에게 많은 공부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공재는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일생이 평탄치 않았다. 선비가 낙향하여 그림의 세계로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각종 사정이 있었다. 공재의 그림에는 그때까지 감히 문인화에 등장하지 못했던 소재들이 나온다. 주로 신선이나 미인 정도였던 조선 사대부 회화 역사 300년 만에 서민이 회화의 주인공으로 부각된 가히 혁명적 사건이다. 농민, 뱃사공, 어부, 나물케는 아낙네와 짚신 삼는 농부 등 소위 속화가 당당하게 문인화의 한 장르로 대접받게 한 사람이 바로 윤두서다.
당시에 제작한 세계전도도 있다. 이런 곳에 올 때마다 늘 받는 느낌은, 양반은 양반일수밖에 없다. 라는 생각과 그들이 구축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철옹성 인맥으로 엮어진 세상을 보게 된다.
12) 토말
서둘러 달려온 곳은 땅 끝 마을이다. 과연 나의 어머니 한반도는 창덕궁 비원의 관람정이 연지에 두발을 걸치고 앉은 듯 여기서 바다에 발을 담그고 쉬고 있었다. 낙조가 어린다. 나는 그 발가락 옆에 기대어 한없는 포근함에 눈을 감으며 이내 고개를 저어본다. 누가 이곳을 토말(土末), 땅 끝이라 이름 붙이고 비석까지 새겨 세웠는가. 여기는 땅 끝이 아니다. 대양으로 나가는 바다의 시작이며 대륙으로 오르는 땅의 시작점인 것을 왜 끝이라고 못을 박아버리는가. 끝을 시작으로 보지 못하고 시작은 끝으로 향하는 출발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인생의 비극이다.
13) 보길도
백두대간이 남도로 뻗어내려 바다에 풍덩 빠지더니 끝내 그 여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기어이 한 번 더 솟구치고 수평으로 쉬더라. 거기가 보길도다. 나도 하룻밤 쉬어갈 양으로 짐을 풀고 세연정에 올랐다. 정갈한 운치 말고는 소문만큼 유명해 보이지 않는다. 고산이 신선 세계를 연상해서 만들었다는 정원이다. 잘 보존된 조선시대의 대표적 차경정원이다. 한참을 고민하고서야 신선계란 곧 평범한 우리네 가정이며 마음속에 있다는 뜻이 아닐까, 하고 얼토당토아니한 아전인수 격 자의적 해석을 해본다. 예송리 해변에서 붉게 무르익은 낙조를 바라보며 따뜻한 자갈밭을 맨발로 걸으면 여로에 지친 발바닥도 풀린다. 종일 햇살에 달구어진 까만 몽돌에 등을 지지고 누워서 하늘을 보면 남해의 별들이 눈앞으로 쏟아진다. 어렴풋이 어부사시사 후렴 한 조각이 파도에 밀려와 찰싹거린다.
동풍(東風)이 건듣 부니 물결이 고이인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동호(東湖)를 돌아 서호(西湖)로 가쟈스라
지국총(至匊悤:찌그덩) 지국총 어사와(於思臥:어여차) 어기여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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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다기의 저자가 다산이 아니라 이덕리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2007년경에 그런 말들이 나돌았는데 지금은 그것이 정설로 정해졌습니다. 저의 답사기가 2007년에 쓴 것이라 미쳐 수정이 안되 있었습니다.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동다기의 저자가 다산이 아니라 이덕리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2007년경에 그런 말들이 나돌았는데 지금은 그것이 정설로 정해졌습니다. 저의 답사기가 2007년에 쓴 것이라 미쳐 수정이 안되 있었습니다.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