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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생태문학이란 조류에 대하여
─ 가상대담 ─
공박사 Vs 허기자
2001년 5월 8일
허기자의 서재에서
허기자:환경․생태문학이라, 환경․생태문학이란 조류에 대해, 아니 유행에 대해 진실한 글 한 쪽을 써야 하는데 정신집중은 아니되고……. 벌써, 며칠째인가? 차라리 이럴 때는 공박사를 찾아 뵙는게 어떨까? 공박사, 공박사, 공박사라……. (허기자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린다.)
공박사:오랫만이군요. 허기자
허기자:아니, (깜짝 놀라며) 공박사님, 언제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 누추한 저의 서재를 다 방문해 주시고…….
(공박사는 정말이지 눈깜짝할 사이에 허기자의 서재에 나타나셨다. 아주 편안하게 한복을 차려 입으시고, 다소 긴 수염을 늘어뜨린 채 얼굴에는 밝은 미소와 맑은 눈동자가 더없이 평화롭다.)
공박사:오랫동안 그대를 보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대가 나를 간절히 원하는 것 같기도 하여 이렇게 불쑥 찾아왔네그려.
허기자:놀라운 일이군요. 제 마음속까지 다 꿰뚫어 보시는군요.
실은, 공박사님을 찾아뵐까 여러 차례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몇 가지 사안으로 도움을 받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번번히 신세를 질 수도 없고 해서 꾹 참아 왔지요. 혼자 어떻게 해 볼까 하고요.
공박사:오늘은 무엇을 그리 고민하고 계십니까?
허기자:실은, 동방문학 2001년 6월호 특집인 「환경․생태문학」에 대하여 글 한 쪽을 써야 하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저는 오늘날의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환경주의자나 생태학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문학의 대사회적 기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이 특정의 사회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락을 늘 경계하는 문학인 가운데 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공박사:그야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에게 환경오염의 실상과 원인, 그리고 생태학적 전문지식과 대처 방안 등을 요구하는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물론, 과학적인 지식과 현실사회에서의 활동도 중요하겠지만 문학인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되는 게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남보다 하나 더 아는 낱개의 지식이 아니라 대자연과 인간, 생명체와 생명체간의 관계 등에 대한 통찰력과 직관 능력을 갖는 일이지요. 물론, 그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과학적 지식도 있어야 하고, 그 부분적인 지식을 통해서 전체적인 혹은 유기적인 생명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이 있어야 하지요. 바로 그 눈이 통찰력과 직관에 뿌리를 둔 상상력이 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허기자:어차피,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입니다만, 환경․생태문학과 관련하여 궁금했던 몇 가지 문제들을 차근차근 여쭈어 볼까 합니다. 괜찮으시겠는지요?
공박사:모르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문제의 핵심, 그러니까 편견과 부분적인 지식에 치우치지 않고 문제의 근본을 인지하느냐 못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뭐, 가능한 대로 함께 생각해 보십시다.
허기자:(질문 내용을 요약한 것 같은 작은 수첩을 뒤적이며……)
요즈음, 우리 한국 문단사회에서도 지구촌의 환경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부의 시인․소설가․수필가 등은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의 실상을 문학작품을 통해서 직간접으로 폭로․비판하고 있고, 비평가들도 소위 ꡐ생태비평ꡑ이란 말을 쓰면서까지 환경․생태문학의 당위와 의미를 강조하고들 있습니다. 이런 문학계의 현상은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대 말에 그 절정을 이룬 듯합니다만 문단 사회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서 공박사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공박사: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지요. 한 마디로 말해, 존재의 당위가 서 있다는 뜻이지요. 환경․생태문학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자연환경이 많이 오염되어 있고, 그 결과가 직간접으로 우리들의 삶에, 생명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보니까, 관련된 과학자들이 하나 둘 입을 열기 시작했고, 또 환경오염을 방지하고자 하는 환경단체 소속원들의 감시활동․폭로․법적대응 등의 활동이 뒤따르고, 또, 일부의 문학인들도 앞다투어 환경오염 문제를 소재로 창작활동을 펴는가 하면, 일부의 선각자들은 인류의 건강한 미래사회를 위해 삶의 태도와 가치관 등에 커다란 변화를 요구하면서 새로운 가치체계를 나름대로 제시하는 등 일련의 움직임이 있는데 이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지요. 하지만,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에 대한 예견과 대비책을 일찌기 강구하지 못한 것은 인간의 지나친 이기심과 무지 탓임을 새겨야 하며, 인류의 앞으로의 과학적인 노력도 이 문제해결에 집중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허기자:공박사님, 제 질문의 요지는 우리 문학계의 환경․생태문학 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묻는 것이었습니다.
공박사:아, 알고 있습니다. 성미가 급한 듯하니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붐이 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나 역시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고, 또 문학으로서의 본질, 문학으로서의 한계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문학에서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는 것은, 문학은 작가의 상상력에 크게 의존하는 것인 만큼 또, 작가의 통찰력과 직관 능력에 좌우되는 것인 만큼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지하기 전에, 그러니까 가시적인 형태로서 사회문제가 되기 전에 문학작품 속에서는 현실적인 상황으로 이미 존재했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것이 곧 작가의 인류 미래사회에 대한 예견력이고, 통찰력이지요. 그런 점에서 우리 문학인들의 환경오염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고, 오늘날, 만인이 다 아는 환경오염의 실상과 그 결과로서 야기되는 생태계의 파괴현상을 작품의 소재나 제재로 취하여 폭로․비판함으로써 그것의 심각성을 알리고. 그 원인을 제거해 나가고자 한다면, 또 그래서 환경오염을 줄이고자 한다면 간접적인 문학을 통해서 하는 것보다 보다 직접적인 방법을 써야 그 효과가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문학인이 사회현상을 뒤따라가며 묘사․폭로․비판하는 정도로 그친다면 그것은 분명 유행이나 타는 삼류 문학인의 삼류 작품을 벗어날 수는 없다고 봅니다.
허기자:그렇지만 문학의 대사회적 기능, 역할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과거 7, 80년대에 붐을 일으켰던 소위 ꡐ민중문학ꡑ이 우리의 정치․경제의 민주화 운동에 크게 기여했듯이 오늘날 환경․생태문학이 더욱 융성하게 이루어짐으로써 환경오염을 줄이는데 크게 기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공박사:문학의 대사회적 기능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근본적으로, 문학은 독자 개개인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리고 크든 작든 영향을 미치지요. 문학은 같이 느끼고 같이 생각하게 하며, 또 전혀 몰랐던 사실을 일깨워 주기도 하면서 우리들의 사고 및 행동양식에도 변화를 가져다 주지요. 심지어는, 개인의 가치관을 송두리채 바꾸어 놓기도 하고, 개인들의 집합체인 사회에도 적지 아니한 영향을 미치지요. 문학에는 바로 그런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문학이 대 인간적으로, 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때에는 반드시 전제조건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ꡐ문학적 진실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허기자:그 ꡐ문학적 진실ꡑ이란 말에 대해서는 좀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공박사:ꡑ문학적 진실ꡑ이 무엇이냐? 물론, 중요하지요.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여, 작품 속의 상황과 그 속에서 보여주는, 작중인물이나 화자의 감정과 생각, 행동 등으로 나타나는 삶의 양태가 가지는 설득력으로, 현실사회 속의 독자들이 함께 느끼고 함께 생각하는 힘,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허기자:그렇다면, 작중인물이나 화자의 어떤 삶의 양태가 그런 힘을 가지나요?
공박사:작가에 의해 꾸며진 작중인물이나 화자의 감정과 생각, 행동 등을 현실사회 속의 인간들의 자(尺)와 눈(目)으로 잴 때 인간으로서의 필연성과 가능성으로 여겨지는 순간 그런 힘을 가지게 된다고 봅니다.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
허기자:ꡐ인간으로서의 필연성과 가능성ꡑ이란 어려운 표현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공박사:그러니까,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작품 속의 등장인물이나 화자의 감정․생각․행동 등을 현실사회 속의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추적하여 확인하는 과정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작가에 의해 구축된 작품 속 현실이라는 상황 속에서 작중 인물들이 보여주는 삶의 양태가 인간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감정과 생각과 행동이라면 필연성의 동감․동의를 얻게 되는 것이고, 현실사회 속의 인간들이 쉽게 보여줄 수 없거나 가지기가 힘든 감정․생각․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양태를 작중인물이나 화자가 보여주되 그 내용이 현실사회 속의 인간에게는 ꡐ그럴 수 있는ꡑ 인간의 잠재력 내지는 그것의 발현으로 인지될 때 가능성의 공감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작가에 의해 창조된 작중인물이나 화자가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지는, 혹은 가질 수 있는 삶의 양태라는 점에서 필연성과 가능성이란 말이 쓰였던 것이고, 문제는 그 필연성과 가능성이 내포하는 삶의 양태가 지극한 선과 악을 지향할 수도 있고, 지극한 미․추를 지향할 수도 있는데, 독자들의 동감․동의에 기초한 공감의 파장은 역시 인간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해 주는 쪽에 무게가 실리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선악미추의 당위 곧 현실적 설득력이 어느 정도이냐일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작품의 구조와 독자의 수용력에 전적으로 달린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허기자:공박사님, 여기 이들 작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송용구의 문학평론 「생명을 옹호하는 저항의 시」에 전문이 소개된 작품들입니다. 이 노트를 보셔도 되고, 여기 노트북 모니터를 보셔도 됩니다. 이게 더 편하겠군요.(노트북의 화면에 시 작품 「나무는 너희의 원수란 말인가?」 「마실 수 있는 공기」 「대구의 페놀 수돗물」 등 세 편이 차례로 뜬다.)
제가 소리내어 읽어 드릴까요?
공박사:괜찮습니다. 제가 천천히 눈으로 보겠습니다. (3~4분 후에) 앞의 두 편은 독일 시인의 작품이고, 뒤의 한 편은 우리 한국 시인의 것이군요.
허기자:예, 그렇습니다. 어떻습니까?
공박사:독일의 시 두 편보다는 한국 시 한 편이 나은 것 같습니다만, 문학이, 특히, 시가 현실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있는 그대로, 혹은 과장해서 폭로․비판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이미 시로서 결격사유가 되지요. 문학이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되고, 또 외면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문제는 언제나 ꡐ무엇을 어떻게ꡑ이지요. 아니 ꡐ무엇ꡑ보다는 ꡐ어떻게ꡑ가 더 중요하지요.
「나무는 너희의 원수란 말인가?」라는 이 작품을 자세히 보십시다. 다른 작품들도 대동소이하지만. 여기 첫행에서 13행까지는 나무들이 인간들에 의해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죽어 버렸고, 그럼으로써 새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여왕벌은 씨조차 말려버렸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지요. 그리고 나서 여기서부터 끝행까지, 그러니까, 14행부터 18행까지 다섯 행을 통해서 한 그루 나무를 사람처럼 받들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돌처럼 굳어간다는 화자의 주장이 기술되고 있을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기술․폭로하였고, 인간의 삶의 태도변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공감의 파장은 그리 크지 않지요. 비록, 이 작품만은 아닐 것입니다. 절대 다수의 환경시들은 시인의 눈에 비친, 환경오염의 실상을 직․간접으로 묘사하고들 있지만 그것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또 환경과 생명체간의 , 생명체와 생명체간의 유기적인 관계나 질서에 대해 깊이있게 알지 못함으로써 가시적 현상이나 습득된 지식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묘사가 쉬이 가능하지만 불가시적 인과관계나 생명현상에 대해서는 유기적인 통찰력이 따라주지 못하므로 생명력을 지니는 표현을 못해내는 것이지요.
허기자:공박사님, 이 작품은 어떻습니까? 최승호 시인의 「공장지대」라는 작품인데요, 문학평론가들이 많이 거론했던 작품 가운데 하나이죠.
공박사:이 작품은 제가 이미 평한 바 있어요.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알리는데는 효과가 있다 할지 모르겠으나 이쯤되면 언어유희 내지는 언어폭력이라 할 수 있지요. 왜, 이런 말이 가능한지는 『신시학파 선언』(1994년 초판, 동양서적)을 직접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허기자:그런데 문학평론가들은 왜 이 작품을 많이 거론해 왔을까요?
공박사: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야 문학평론가들이 시의 본질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지요. 문학평론가들은 대체로 시의 본질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시적 사고(思考)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쓰고자 하는, 전개하고자 하는 논리에 아니, 논리라고 할 것도 없지만 그리고 내용 전개상 필요한 것이라고 판단되면 한 편의 시조차 조각 조각내어 갖다 붙여대는 게 그들의 장기이거든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이해하기 쉽게 말해 보까요. 어느 평론가가 환경․생태시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해 평론 한 편을 쓴다고 가정할 때, 그는 아마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혹은 그동안 나름대로 준비해 놓은 자료들을 뒤적이며 환경오염의 실상을 직접적으로 폭로하고 있는 시들을 찾을 것이고, 그것도 가능하다면, 신문이나 문예지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거론되었던 것들로 고를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자신이 쓰는 글에 객관적 신뢰도가 부여되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지요. 그런 다음 자신의 평론 속에서 전개하는 내용에 부합되는 시구를 찾아 오려붙이기를 시작할 것이고, 그것의 마무리쯤에서는 평론가라는 직분을 의식하면서 무언가 충고해 줄 말이 없나 하고 궁상을 떨어대는 것이, 삼류평론가들의 글에서 흔하게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지요. 제가 이 집을 나가면 그 때 평론가들의 글을 유심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까 언뜻 보니까, 환경․생태문학과 관련 문학평론 목록을 가지고 계시던 것 같은데요.
허기자:예, 잘 알았습니다. 한 편 한 편 유심히 읽어 보겠습니다. 물론, 평론가들의 중언부언과 지식 자랑과도 같은 글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글도 글 나름이 아니겠습니까?
공박사:물론,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작품이나 평론할 것 없이 가능한한 정독을 해서 그것들의 옥석을 가려야 하고, 특히, 평론에서는 논리가 바로 서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썩은 지식이나 나열하는 식의 글과 앞뒤가 맞지도 않는,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조차 없는 글들이 많음엔 분명 문제가 있지요.
허기자:어디 평론뿐이겠습니까만은 창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박사:바로 그렇기 때문에 평론의 기능이 바로 서야 되는데 그러하질 못하니까…….
허기자:공박사님, 잠시 쉬시면서 차 한 잔 마신 다음 이야기 계속 하는 것이 어떨까요? 제게 맛이 아주 좋은 차(茶)가 있습니다. 중국의 남영전 시인이 선물한 것인데요, 맛과 향이 아주 각별합니다.
공박사:좋지요. 허기자의 손끝에서 우러나는 차맛 한 번 봅시다.
¶T
허기자:공박사님, 차를 마시면서 잠깐 비춘 이야기입니다만, 오늘날은 모든 학문이 세분화되어 발달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전공분야가 아니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더 깊이있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 자칫, 문학인들의 개인적인 경험의 글들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유치한 것이 될 수도 있어요. 따라서 우리 문학인들은 날로 전문화되어 가는 인접 학문세계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공부를 해야 자연과 인간을 비롯 세계에 대한 사유 자체를 깊게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이 문학의 깊이도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환경․생태문학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전문적 지식과 관심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공박사:문학활동을 하는 데에 있어서 과학적인 지식을 배제할 수는 없지요. 과학적 지식과 쏟아지는 새로운 정보 등은 문학적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해 주는 요소로서 중요하게 작용해 왔다는 사실만큼은 우리 문학인들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이나 정보 자체가 문학이 되지는 않듯이, 문학은 그들을 적절히 활용하는 입장이 되어야 하지요.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들에 문학이 지배당하면, 그것은 이미 문학으로서 성립되질 않아요. 그것은 차라리 과학적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해 주는 매체로서 수단에 지나지 않거든요. 또 그렇게 되면, 작가의 상상력이 작중인물과 화자에게 부여해 이루어지는 삶의 양태 속에 녹아 있어야 할 재미와 꿈이 사라져 버리기가 십상이지요. 그렇듯 문학이란 있는 그대로의 현실세계를 문장으로 옮겨놓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있는 그대로의 현실세계를 반영하되 그것에 작가 개인적인 꿈을 불어넣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구축해 놓는 것이거든요.
환경․생태시로 예를 드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오늘날 환경․생태시를 쓴답시고 그저 눈에 띄는, 혹은 전문가들이 정보를 제공해 주어 알게 된 사실로써 환경오염의 실상을 시문으로 옮겨 놓는다면, 살아있는 시가 되질 않습니다. 그것을 시라 한다면 환경․생태시는 너무도 많이 생산되어야 하고, 또 그것들은 결국 비슷비슷한 것들로, 그저 단편적인, 부분적인 환경오염의 사례들을 적절히 요약하여 알려주는 것으로서 족할 따름이지요. 물론, 약간의 개인적 감정이 달라 붙어서 말이오.
환경․생태시로서 살아있는 것이 되려면, 부분적인 환경오염의 원인과 실상을 폭로하면서 시인 개인의 감정과 바람을 그것도 상식적인 수준의 말로 첨부한다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시작(詩作)의 모티브를 제공한 ꡐ자극ꡑ으로서의 환경오염 실태를 통해서, 그것도 부분을 통해서 그것의 총체적인 본질을, 그러니까 환경오염의 근원적인 이유나, 그로인해 야기되는 생명체간의 관계나, 생명체 내부적인 질적 변화 등에 대한 인지로부터 나오는 시인 개인의 절박한 외침이어야 하되, 그것을 담아내는 문장이 기술(記述)로서 진술이 아니라 묘사․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더 쉽게 말한다면, 부분적인 혹은 개별적인 환경오염의 사례를 통해서 전체적인 환경오염의 본질을 정서적이고 함축적인 언어로 표현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환경오염의 실상을 느끼게 하고, 동시에 그것을 통해서 생긴 시인의 주관적인 감정과 생각 등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의 주관적인 감정과 생각 자체에 진실과 깊이가 있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요. 한 편의 시속에서 결국은 시인의 세계관을, 다시 말하면,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인 개인의 눈을 확인하게 되거든요.
허기자:공박사님의 견해를 듣노라면, 시란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무서워서 누가 시를 쓰려 하겠어요? (웃음)
공박사:사실, 그렇게 생각해야 정상입니다. 아까, 저에게 차맛이 어떻느냐고 물었지요? 녹차라 해서 맛이 다 똑같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진한 커피에 프림과 설탕을 타 마시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녹차를 마시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대개는 녹차맛이 혀에 감지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에게 녹차맛을 아무리 설명해도 그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아요. 그리고 녹차를 마신다 해도 녹차의 재료와 제조방법, 그리고 물의 온도와 수질 등 여러 요인에 의해 그 맛이 달라지는데 그 달라지는 세세한 맛과 향을 구분하며 음미하기란 쉽지가 않지요. 오랫동안 혀가 감지훈련을 쌓아야 가능해지듯 언뜻보아 환경․생태시로서 한결같게 보일지 몰라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맛과 향은 천차만별이지요. 우리 평론가들이 선별하는 작품을 보면, 그들은 녹차냐 커피냐를 구분하는 정도의 감식안을 가진 자들이라 할 수 있지요. 그것도 얼마나 진한 맛과 향이냐에 따라, 쉽게 말해, 그것의 농도만을 가지고 품격을 말하는 수준이지요. 또, 시인들도 그런 정도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면 지나친 혹평일까요? 별로 있어보이지 않는 녹차 속에 맛과 향이 그윽하듯이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는 시문 속에 용해되어 있는 시인의 세계관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허기자:옳으신 말씀입니다. 차제에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1990년대 초반만해도 ꡐ도시문명 비판시ꡑ와 ꡐ도시적 서정시ꡑ 등의 말이 비평용어로 쓰였었습니다. 그러다가 ꡐ환경시ꡑ니 ꡐ생태시ꡑ니 또는 ꡐ생태적 문화시ꡑ니 ꡐ녹색시ꡑ니 하여 다양한 말들이 비평용어로 쓰이고 있는 상황으로 바뀌었지요. 일련의 용어들에 대한 정확한 개념정리가 전제되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고 비평가 나름대로, 작가들 나름대로 편리하게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공박사:문학에서도 용어에 대한 개념 정리가 분명할수록 좋지요. 처음에는 ꡐ도시ꡑ라는 생활공간 속에서 느껴야 하는 문명사회의 갖가지 병리현상들이 시적 소재가 되었지요. 물론, 그것만으로도 큰 변화요, 시도였음엔 틀림없지요. 그러다가 환경오염문제가 절박하게 다가오자 각종 매스미디어들이 앞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고, 시인들도 직접 목격, 체감하는 상황에 이르렀지요. 그러다보니까, 환경오염문제를 다룬 시들이 많이 창작되고 있는데 일련의 시들을 놓고 환경시니 생태시니 하여 부르는 것 같습니다.
허기자:환경오염의 원인과 실상 등을 직간접으로 폭로 비판하는 일련의 시들은 ꡐ환경시ꡑ라 하면 될텐데, 왜 ꡐ생태시ꡑ라는 말을 쓰는지 모르겠어요?
공박사:그것은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와는 인과관계에 있는데, 바꿔말하면, 생태계 파괴현상은 환경오염이라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야기되는 결과라는 뜻이지요. 그런 탓에 환경오염 하면 생태계 파괴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고, 또 그 생태계 파괴라는 결과가 먼저 체감되다 보니까 환경시를 보아도 ꡐ생태시ꡑ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구분할 필요가 있지요. 환경오염의 원인․실상 등을 중심으로 직간접으로 폭로․비판하는 시를 환경시라 한다면, 동식물의 생태학적 진실을 직간접으로 반영하는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든 비정상적인 것이든 시를 생태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변화에 따라 그 환경은 인간에 의해 변화되어 가는 면도 있지만 인간 삶의 양태도 변하게 마련입니다. 인간 삶의 양태가 변한다는 것은 인간의 관심․욕구․사고방식(미의식)․행동양식․가치관 등의 변화로 언어와 인지능력 자체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하지요.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인간의 문학적 활동 가운데 한 방식인 시도 바뀌어 가는 것이지요. 때문에 바뀌어 가는 시적 관심․내용․특징 등 여러 요소에 근거한 합리적인 개념이 창출되어 쓰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허기자:잘 알았습니다. 제가 환경․생태시의 견본으로 보여드렸던 작품들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셨습니다만 좋은 대안은 없으신가요?
공박사:대안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으나, 문학은 문학으로 정도를 걸으면 돼요. 시가 시다워야 한다는 전제 아래서 시인 개인의 진실이 우선되야겠지요. 남북통일문제가 시인에게 절박한 문제로 다가오면 그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시로 쓰면 되는 것이고, 그렇듯 환경오염문제가 절박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개인의 정서적 반응을 솔직하게 시로 쓰면 된다고 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시를 쓰게하는 그 절박한 문제들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명분과 유행을 쫓아 시를 써대는 것은 사실상 위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앞서 녹차 이야기로 빗대어 말했습니다만, 시라고 해서 다 똑같지는 않아요. 천차만별인 시들 속에서 시공을 초월하여 사람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 것은 아주 드물어요.
따라서 시를 써대는 것보다는 자신의 세계관이 용해되어 나타나는, 의미깊은 시를 낳아야 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시란 애시당초 많이 쓸 수 없는 것이예요. 우리 시인들이 통일시나 환경․생태시를 쓴다고 할 때 오랫동안 통일문제를 연구해 온 전문가나 환경․생태학자들보다 아는 게 적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들보다 나은 장기를 살려 시를 써야 하겠지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바로 통일의 당위요, 환경․생태와 관련 시인 개인의 각별한 생각과 감정을 담아내되, 그들이 갖지 못하는 문장력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문장도 뒤지고, 그 문제의 사안에 대한 생각조차 짧다면 누가 시인의 작품을 읽고 감동하겠습니까? 시인은, 아무나 하는 것이 결코 아니지요. 그리고 시인들이 사회적 병리현상이나 당면과제에 초점을 맞추어 ꡐ목적시ꡑ를 쓰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환경오염이 심각하도록 가만히 있다가, 아니, 사는 동안 환경오염에 일조했던 사람들이 관련시를 쓰므로써 문제의 심각성을 홍보하는 요원으로 활동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예요.
오히려 저는 개인적으로 환경오염의 실상을 폭로 비판하는 쪽보다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찬미하는 쪽의 글이 훨씬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이란 대세에 휩쓸려 가면서도 대세를 역류하는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 예컨대 자연 예찬시를 쓰는 시인들을 보고 구시대적 인물의 구시대적 시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요? 자연의 아름다움을 진실로 느끼는 자는, 그 아름다움을 시로 쓰는 자들은 결코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을 것이며, 개인의 일신만을 위해서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세상 사람들은 대세에 휩쓸려 가며 옳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명분을 앞세워 떠들어 대는 이들에게 의미를 부여하지요. 그러나 진실은 그들쪽에 있기 보다는 그런 일에 무관심해 보이지만 소리없이 아름답게, 소박하게 개인적인 욕구를 줄이면서 사는 사람들쪽에 있다고 봅니다.한마디로, 세상이 바뀌고 사람들이 바뀌어 가도 여전히 바뀌지 아니한 사람들 쪽에 그 진실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허기자:대단히 고맙습니다. 차 한잔 더 할까요?
공박사:차 대신 쓴 소리 한 마디 할까요. 오늘날 한국문인협회 회원이 5,000여 명이 넘는다 하는데, 최소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사회를 보는 나름의 일관된 눈을 가졌으되, 그 눈에 비친 세계를 적절히 가공하여 바른 문장으로 재구성해 놓는 이를 진정한 문학인이라 한다면 그 수는 10%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지요. 우리는 나머지 90%에 해당하는 삼류작가의 삼류작품들을 가지고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지나 않는지 모르겠어요.
허기자:차 한 잔 더 내오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허기자가 차를 한 잔 더 내오는 사이 공박사는 없었던 듯 내내 앉아있던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텅빈 방안에서 차잔을 앞에 두고 허기자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