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순재의 기념비적인 공연, 기립박수를 받을만 했다. 21일 아르코예술극장에서 관람한 배우 이순재 연기인생 60주년 공연은 이순재에 의한, 이순재를 위한 무대여서 더욱 빛이 났다. 60년동안 연기를 해온 노배우를 위해 기념사업회가 구성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도 연극사에 남을 미덕이지만, 대배우의 열정적인 무대를 보기위해 객석이 만원사례를 이룬 것도 흐믓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배우의 나이를 밝히는 것은 실례인줄 알지만 함경도 회령 태생의 이순재는 1935년 10월 10일 생이다. 만 81세를 넘어섰고 며칠 있으면 우리 나이로 83세의 고령이다. 이 노배우의 기념공연작은 아서 밀러의 고전명작 <세일즈맨의 죽음>이었다. 주인공 윌리 로먼의 극중 나이는 63세다. 놀라운 것은 81세의 배우 이순재가 이 무대에서 63세의 아버지 연기를 했고 관객들도 80대 노인이 연기한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분장을 한다고 해도 20년의 나이를 줄였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이것이 이순재의 힘이고 열정이다. 관객들도 믿기지 않는 현장의 아우라를 체험했으니 이또한 축복이 아닌가. 60년 연기인생을 걸어온 이순재는 결코 요령을 택하지 않았다. 지금도 원서로 된 희곡을 텍스트로 삼는 다는 그는 '최대한 원작 그대로'를 고집했다. 그동안 수도 없이 <세일즈맨의 죽음>을 보아왔지만 이번만큼 거의 자르지 않고 원작에 충실한 공연은 흔치 않았다.
휴식시간 포함 러닝타임 170분 동안 이순재는 그 기나긴 대사를 한치의 흐들림도 없이, 그것도 몇번씩 위험할 정도로 넘어져 가며 열연했다. 이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은 체력도 강해야하지만 정신력의 발로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번 공연이 인상적인 것은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이 이순재를 위해 혼신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배우중심의 연극을 구현해 냈다는 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잘 모르는 연출가 박병수가 모든 포커스를 이순재에게 맞춰주었고, 무대디자인(박경), 음악(우종민), 조명(김건영) 등이 조화를 이뤄 배우를 돋보이게 했다. 모든 출연자들이 노배우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1막에서 아내 역을 맡은 손숙이 윌리의 내적 고통을 아들들에게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호연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한 점은 '부자의 갈등'을 어느 <세일즈맨...>보다 치열하면서도 감정을 살려 폭발시켰다는 것이다. 큰아들 비프 역을 맡은 이무생은 아버지의 자랑이자 꿈을 가장 잔혹한 현실로 짓밟는 격정 연기로 이 연극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면서 이순재의 연기를 잘 받쳐주었다. 백부 역 이문수의 쩌렁쩌렁한 대사, 맹봉학의 우정 연기도 배우 연극에 일조를 했다.
1949년에 쓰여진 이 희곡이 60여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 현실에서 생경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심각한 '소시민의 비극'으로 투영되고 있다는 점이 무서울 정도였다. 가장의 실직과 청년세대의 구직난, 그리고 혼란한 정세 속에서 60년 연기 달인 이순재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시사하는 점이 매우 컸다.
커튼콜에서 뜨거운 박수가 길게 이어졌다. 노경식 남일우 김재건 손진책 김성녀 고인배 차유경 등 연극인들과 함께 분장실로 찾아가자 80대 이순재는 지친 기색은 커녕 일일히 포옹인사를 나누며 파안대소, 명실상부한 노익장을 과시했다. 억수 같은 겨울비가 쏟아져 일행과 뒷풀이를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