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픈 역사 3
-내게 상처를 준 세 사람
*
첫 번째 상처를 준 사람
6·25 전쟁 직전
사범학교 입학시험 보러 갔을 때
면접 보던 선생님
“너는 선생 할 수 없다. 절대 못 한다.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데 어떻게
선생 하노? 시험만 잘 쳤다고 합격 되는 게 아니다.“ 하시었다.
나는 그때 급성중이염을 앓아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어릴 때 선생이 꿈이었던 나에게
상처를 준 이 사범학교 선생님을
나는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
*
두 번째 상처를 준 사람
천신만고 끝에 야간대학 졸업하고
교사 자격증 따서 중학교 선생으로 취직하려는데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났다.
사범학교 출신의 정변 주동 장군님은
“사범학교 사범대학 출신 외는 교단에서 떠나라”는
새 법을 만들어 일반대학 출신 교사들을 다 쫓아내었다.
나는 어릴 때의 꿈이 이루어져 참 즐거웠는데 그만 교단에서 쫓겨났다.
아니, 먹고살 밥통이 떨어졌다.
나는 오랫동안 이 검은 색안경을 낀 장군님을 원망하며 살았다.
*
세 번째 상처를 준 사람
주경야독으로 대학원을 어렵게 졸업하고
모교의 교수가 되고 싶어 이력서를 내었는데
“너는 대학교수가 될 수 없다. 대학교수가 되려면 서울대학교를 나와야 한다”고
퇴짜 놓은 은사님이 계셨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 잘한다고 칭찬까지 해 주셨던 분이었는데
내 앞길을 가로막는데 앞장서시는 게 아닌가.
아직도 살아 계시는 이 선생님.
나는 아직도 용서 못하고 있다.
내게 상처를 준 이 세 사람
내 인생이 끝나는 날 용서 할 것이다.
명당죽집
언제나
나는 산책하다가 배가 고프면
대구 반월당에 있는 명당죽집에 간다.
여기에는 친구인
원로시인이 혼자 앉아 있다.
이가 다 빠져 홀쭉이가 된
정시인은
죽 아니면 식사를 못하신다.
명당이 어디 있느냐?
마음속에 있는 것이 명당이다.
정시인에게는
이 명당 죽집이 명당이다.
‘친구 따라 강남간다’더니
어느덧 나도 덩달아 명당죽집이
점심시간의 명당이 되었다.
3000원짜리 호박죽이나 녹두죽 한 그릇이
나의 산책길에 원천이 되는
삶의 명당음식이다.
박수의 힘
젊은 날
처음으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파바로티
노래가 끝나도 박수치는 사람이 없었다.
객석에서 한 아이가 일어나더니
“아빠, 최고야!”하고 소리쳤다.
그제서야 객석의 다른 관중들도 한 사람 두 사람
일어나더니 박수를 치기 시작하였다.
파바로티는 훗날 세계적인 테너 가수가 되었다.
어려울 때 박수쳐 주는 것이 가족이다.
시인 만세 시대
요즈음은 만세 부를 시대도 아닌데
시인만이 만세를 부른다.
얼마나 만세 부를 사람이 없기에
시인이 만세를 부르나.
전달에는 부산에서 부르더니
전주에는 강릉에서 부르고
오늘은 대구에서 부르는구나.
시인이 시를 쓰면서
조용히 살아가지 못하고
극장 안에서, 백화점 옥상에서
만세를 불러야 하는 시대여!
하기야 세계에서 시집이
제일 많이 팔리는 나라
오늘도 시인 만세다.
감동의 극치
서울에 살고 있는
신현득 시인의 전화가 걸려왔다
“김교수님! 내가 증손자 봤어요.”
전화기에 울린 그 감동적인 목소리에
나도 덩달아 감동을 했다.
“그래요? 축하해요!”
나도 모르게 전화기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문득 내가 감동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아들을 낳았을 때는 신기했다.
학교 강의를 마치자마자
그놈의 아들이 보고 싶어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던 때를 떠올렸다.
그보다 첫 손자를 봤을 때의
감동은 대단히 컸다.
아들 낳았을 때는 그리움의 대상이라지만
손자 봤을 때는 감동의 대상이다.
요즘은 둘째 손자의 전화만 받아도
우리 부부는 감동을 한다.
아! 신현득 시인처럼 증손자 볼 수 있는
감동의 극치를
나도 생전에 볼 수 있을까?
나에게는 아직도 열두 개의 이빨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머리카락만이 빠지는 것이 아니다
이빨도 하나씩 빠져나갔다.
이빨이 하나씩 빠져나가니
인공 이빨을 대신 심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생이빨과 인공 이빨이 막상막하가 되었다.
며칠 전에는 아침밥을 먹다가
앞니 하나가 또 빠져 나갔다.
빠진 이빨을 소중하게 싸서 단골치과에 갔더니
그것은 내버리고 인공 이빨 하나를 대신 심어 주었다.
나이가 드니 아침마다 거울을 들여다 보고는
이빨을 점검하는 버릇이 생겼다.
오늘 아침에 남은 이빨을 헤아려보았더니
아직도 열두 개의 이빨이 남아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열두 척의 배를 가지고
마지막 해전에서 왜군을 물리쳤듯이
나는 남은 열두 개의 이빨을 가지고
앞으로 스무 해를 더 살아가고 싶다.
아! 재수 없으면 백 살까지 살랑가?
나의 이력서
서울대학교를 안 나왔습니다.
미국 유학도 못 갔습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서 살았으니까요.
기독교 장로도 못 되었습니다.
일요일도 하루 종일 일했으니까요.
시골 초등학교만 빼고 중,고등학교, 대학, 대학원
12년 꼬박 야간에만 다녔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나를 두고 박사, 교수, 시인이라고 불러줍니다.
여학교의 단발머리 여학생 제자 천 명
영남이공대학의 국어수업 받은 제자 이천 명
영남대학교와 대구대학교 국문학과에서
연극과 문학을 배운 제자 천 명
대구한의대에서 배운 제자 육백 명
포항공대 제자 사천 명이나 되지만
지금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청구푸른마을 4층 아파트
우리 집 방구들 위에 혼자 누워서
허무한 이력서를 다시 써봅니다.
아프리카 속담
내가 10여 년 전
아프리카 캐냐에 갔었을 때
속담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
‘엄마의 젖꼭지는 아무리
만져도 괜찮지만
아버지의 고환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된다’
짐바브웨, 잠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돌아다니며 빅토리아폭포, 캐이프타운,
희망봉까지 다 올라가보았지만
사파리도 신나게 돌아다녀 보았고
타이거우즈가 즐겼다는 온통 푸른 골프장까지
가보고 또 즐겼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내 머릿속 깊이 남아있는 것은
이 아프리카 속담 한 가지 뿐이다.
아픈 역사
50대, 한쪽 눈 망막이 떨어져 나갔고
60대,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다.
70대, 화장실에서 넘어져 왼쪽 고관절이 부러졌고
80대,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졌는데 왼쪽 갈비뼈
두 개가 부러졌다고 X-레이 찍어준 의사가 말해주었다.
나는 화가 나서 갈비뼈 두 개에 금이 갔다고 우겼더니
의사선생은 부러졌다고 고칠 방법은 없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90대, 어디에 누워야하는지?
모든 것을 알아서 처신해야 한다는 것을
늦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절대고독
늦은 오후
무릉역에서 기차를 타고
안동역으로 가는데
기차 안에는 승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혼자 이구나”라는 생각에
공포심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어머니가 적어준 주소만 달랑 들고
안동 시내 외가에 가서 하루 밤 자고
중학교 입학시험 치고는 기차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되는 것인데
기차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지만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아는 사람 하나 없다는데
나는 외로움을 느꼈고
공포심 같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열네 살 때 경험했던 그날의 고독은
여든이 되도록
두 번 다시 겪어보지 못하였다.
첫댓글 오랫만에 이 주의 시인 김원중 선생님의 시를 읽으니 코끝이 찡합니다.
모쪼록 이 가을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재수 없으면 백살까지... "라는 말이 재미 있어서 제가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말로서의 상처...그 것도 폭행
당해 본 사람은 잘 알겠습니다
인생이 끝나는 날 용서 하시겠다는 말씀도 이해하고 싶습니다
진솔한 작품들
충분히 감상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동의 시간입니다.
환절기 건강 잘 챙기시고
부디 강령하소서.
선생님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