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케전투(1972.4.11-4.26)
안케패스 전투는 1972년 4월 11일부터 4월 26일까지 맹호부대(수도사단) 기갑연대와 월맹군 3사단12연대간에 안케패스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합니다.
베트남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1번도로에서 갈라져 나와 베트남의 항구도시 퀴논에서 캄보디아 국경지대까지 동에서 서로 관통하는 도로가 19번 도로입니다.
19번 도로는 내륙지방의 플레이쿠에 주둔하고 있던 월남군 제 2군단의 유일한 보급로로서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았습니다.
안케패스는 이 19번 도로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산등성이 입니다.
해발 500미터 내외의 산악지대에 정글이 얽혀있는 지형이며
이곳을 장악하면 당연히 19번 도로가 끊겨 내륙의 월남군이 고립될 것입니다.
안케패스에는 여러 개의 고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곳이 638고지로써 여기서 안케패스 일대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안케패스 전투의 시발점이자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전장도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이곳은 원래 미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1970년 미군들이 철수함에 따라 맹호부대 수도사단 기갑연대 예하 1중대가 인수받아 수비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1중대는 638고지 부근의 완만한 구릉에 기지를 설치하고
안케패스의 안전통행을 감시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대기지보다 높은 638고지에 기지를 설치하지 않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장차 화근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1972년 3월말 월맹군의 "춘계 대공세"의 일환으로서 월맹군이 이곳을 공격목표로 삼은 것입니다.
1972년 4월11일 새벽, 1중대 기지에 분대규모의 베트콩들이 출몰하여 습격을 가해왔으며 그 날 오전에 플레이쿠로 가던 화물트럭 한대가 안케패스 도로상에서 폭파되자 1중대가 638고지에 적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그 곳을 수색 매복함으로써 안케패스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전투는 중대규모로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매복수색이 의외로 강력한 저항을 받아 중도에서 돌아오게 되고 다음날 19번 도로상의 교량 및 도로 몇군데가 추가로 차단되었으며 중대기지 역시 82미리 박격포와 B-40 적탄통 75미리 무반동총 공격을 받자 당시 기갑연대장은 적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수색중대와 1대대 3중대를 안케패스에 투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제 전투는 중대규모에서 대대급의 작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적의 규모를 불과 중대급으로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오판하에 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을 고유의 건제를 유지하지 않고 혼성편성하여 (1대대 3중대, 2대대 6중대, 3대대 10중대, 11중대를 1대대장이 지휘하는 짬뽕부대)
순차적으로 적진에 분산투입함으로써 아군의 피해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심지어는 주월 야전사 부사령관과 사단장이 1중대 기지를 순시하는 도중에 82미리 박격포 공격을 받아 부랴부랴 헬리콥터를 타고 사단사령부로 돌아가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시 수도사단 정보처는 적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전투개시 5일동안 포로는 물론이고 적의 시체조차 습득하지 못했으므로 적의 규모나 상대의 부대소속조차도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월남군 22사단 47연대가 정보를 입수하여 월맹군 제 3사단 12연대라는 첩보를 제공하였는데 사단이나 연대에서는 이 통보를 과장된 허위정보로 치부해버립니다.
거듭된 공격과 공중폭격, 포병사격에도 불구하고 작전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에서 안케패스 차단으로 인해 보급이 차단된 월남군 제 2군단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마침내 작전은 연대급으로 확대됩니다.
작전은 강력한 화력지원하에서 극히 치열하게 시행되었습니다. 특히 이 전투에서
월맹군의 화력도 만만치 않아서 82미리 박격포나 75미리 무반동총으로 인한 아군의 피해도 많았으며 그들의 엄격한 사격군기 라던지 갈증과 배고픔을 견디며 전투를 수행하는 인내심은 주목할만한 것이라고 봅니다.
어쨌든 작전기간 내내 아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으며 마침내는 사단장이
돌파구를 열지 못하면 해당 지휘관을 지휘조치하겠다는 경고까지 내릴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치열한 격전 끝에 마침내 아군은 안케패스 주변의 주요 고지와 거점을 점령하였고 맹호 기갑연대 제3대대가 잔적 소탕을 실시하는 가운데 APC 네 대가 안케패스를 지나 적의 저항을 받지 않으면서 연대 전술지휘소가 있는
'빈케'에 무사히 도착함으로써 19번도로 개통을 확인하고
16일간에 걸친 맹호 수도사단 기갑연대와 월맹군 3사단 12연대 및 지방 베트콩들간에 벌어진 안케패스 전투는 끝나게 됩니다.
안케패스 전투는 주월 한국군이 실시하였던 모든 단일 전투 가운데 최대의 인명피해를 기록한 전투이자 가장 치열한 격전이었다고 합니다.
그 원인으로서는 병력의 혼합편성, 단조로운 공격패턴, 적 규모(월맹 정규군 1개연대규모)를 오판하고 병력을 집중운용 하지 않은 점 등이 있습니다.
전과 : 적사살 705명, 개인화기 70정. 공용화기 13문
손실 : 전사 75명, 부상 109명
귀국이 얼마남지 않은 장병들의 희생이 컸던 점이 정말 안타까우며그분들의 넋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안케패스 전승비에 세겨진 비문]
여기는 자유의 십자군 대한의 건아들이 피흘려 싸워 이긴
영원히 기념해야할 성지다. 1972년 4월 월맹군의 대공세에 의하여 월남 전역이 풍전등화의 위험을 고할 때 주월 한국군 예하 맹호사단은 이곳 안케패스에 침공해 온 월맹 정규군 3사단 12연대의주력을 완전 섬멸 시킴 으로써 월남 전사의 길이 빛날 전승의 금자탑을 세웠다.
적은 중부 고원 지대를 점거할 목적으로 군사요충인 케패스 맹호 기갑연대 전술 기지에 4월11일 부터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이 전투는 4월26일까지 만15일간 638고지 일대를 중심으로 피아간 시산혈해의 작전이 수없이 되풀이 되었던 악전고투는 생지옥을 방불케 하였다.
그러나 상승 맹호의 대한 건아들은 우방 월남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피 흘려 싸워 이김으로써 편재상 중부월남의 생명선인 19번 공로를 재 개통 시켰고 불리한 월남 전황 가운데 유일의 최초 승리를 거둠으로써 새로운 전환점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승리의 이면에는 우리 맹호 건아들의 고귀한 젊은 피가 이 땅에 수없이 뿌려 졌음을 한-월남 양 국민은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먼 이역 땅에서 평화의 수호신으로 장렬히 산화해 간 여러 전몰 장병들의 충혼을 길이 추모하고 빛나는 승리를 기념 하고자 주월 한국군 맹호사단의 이름으로 이곳에 전승비를 세운다.
1972년 10월1일
한국군 베트남 파병
국군은 1964년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 파병을 시작으로 1973년까지 약 8년 6개월 동안 연인원 32만명이 참전하여, 전투를 비롯한 의료 건설 및 대민지원 활동을 통해 남베트남 정부의 평정사업을 지원했다. 사망 5천여 명, 부상 1만여 명의 국군 피해가 났다. 게릴라전 과정에서 발생했던 일부 양민학살 문제나 고엽제 피해 등의 문제를 제쳐 두고 30여 년 전 베트남전에 참전한 국군의 활동상황 정리하면 표면적으로 그렇다. 그럼 한국은 참전의 대가로 무엇을 얻고 싶었을까?
결국은 경제발전이 한국정부가 미국으로부터 보장받고 싶었던 대가였을 것이다. ‘한강의 기적’과 베트남전 파병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으로 근무했던 채명신 장군은 베트남참전을 계기로 한국은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파병의 확대를 두고 1966년 3월 7일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가 이동원 당시 외무장관에게 보내온 ‘브라운 각서’를 근거로 제시한다. 실제로 베트남 참전 군인들이 벌어들인 ‘달러’는 한국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브라운 각서의 주요내용>
1. 국군 현대화계획에 필요한 상당수의 장비를 제공한다.
2. 한국군의 증파로 인해 한국 정부의 경비 일체를 미국이 부담한다.
3. 파월병력 감소에 따른 병력보충을 위한 소요경비를 미국이 부담한다.
4. 간첩활동을 봉쇄하기 위한 장비와 시설을 제공한다.
5. 서울과 주월군 사이에 전용 통신시설을 제공한다.
6. 군원 이관을 중단한다.
7. 주월 한국군을 위한 물자 용역 장비 등은 가능한 한 한국에서 조달한다.
8. 한국 민간 기술자의 고용을 확대한다.
9. 한국의 수출진흥을 위해 기술원조를 강화한다.
10. 1965년에 약정된 AID 차관 외에 추가 차관을 계속 제공한다.
11. 1억5천만 달러의 신규 원자재 차관을 제공한다.
12. 주월 한국군의 처우를 개선한다.
베트남의 자연과 역사
베트남은 중국과의 국경에서 카마우곶까지 남중국해를 따라 남북으로 좁고 길게 뻗어 있으며, 수도 하노이에서 호치민까지 거리는 1750km이다.
국토의 70%가 산지와 늪지로 되어있고, 고산 도시가 많은 것이 특징이며, 북서부의 중국과 라오스의 국경 부근이 최고부를 이루며, 이곳으로 부터 라오스 국경을 따라 남쪽으로 뻗어 있다.
특히 베트남 중부에서는 산맥이 바다에 급박하여 평지가 적다.
중국의 윈난성에서 발원하여 베트남 북부를 흐르는 송하강은 길이 1,200km이며 베트남 영내를 약 600km 흘러내리다가 통킹만으로 유입한다.
베트남의 역사 중심지인 송꼬이 델타는 연간 160억 톤의 물과 8,000만 톤의 진흙이 운반되어 형성된 삼각주로,대부분의
해발고도가 3m 이내이며 델타 주변은 25∼40m, 메콩 델타는 1∼2m로 매우 낮고 평평하다.
이들 비옥한 평야는 베트남의 2대 벼농사지대로 주민의 대다수가 이곳에 집중되어 있고, 전국토 중 경지는 4%, 경지
개발이 가능한 곳은 17%, 초원은 1%, 산림지대는 30%이다.
베트남의 기후는 북회귀의 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고지대를 제외한 전지역이 열대몬순기후를 이룬다.
대체로 이 우기, 11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가 건기이다. 북부에서는 6∼7월, 중부와 남부에서는 8∼9월에 강우량이 많다.
►고대왕국
일설에는 비엣(Viet)족이 중국 전국시대 월국의 유민이라고 주장하나, 베트남인들은 BC 3000년 경 동산 문화를 이루었던 락비엣(Lac Viet)족을 자신들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베트남의 역사는 약 4천년 정도로 추정되며 설화에 의하면 랑롱꿘과 어우꺼가 시조이다. BC 3세기말 통킹만과 북부 안남에 널리 퍼진 "월"의 일부 부족인 어우락은 BC 214년 진시 황제에 의해 정복되었으나 진이 멸망하고 광동지방의 호족 찌에우다(조타)가 독립했고, BC 208년 어우락도 합병하여 "남월국"을 창건하였으나 중국 한족은 락비엣족의 영토를 침범하여 군(郡)을 설치하고, BC 207년에는 한(漢)제국의 행정구역의 하나로 편입시킨다.
►중국 지배
BC 111년 한무제에 의해 "남월국"이 정복된 이후, 약 1100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나 베트남의 중남부 지방은 인도문화 영향권에 놓이게 되어 힌두교 참(Cham)족의 참파왕국이 출현하였다. 베트남인들은 중국의 지배 시절 민족 의식을 싹 틔우기 시작했으며 중국으로부터 불교, 유교, 도교 사상을 전파 받게 되었다. 베트남인들은 중국화 정책과 중앙 집권적 정치에 반기를 들고 수많은 봉기와 반란을 일으켰다. 40∼43년에 있었던 쭝(Trung)자매의 항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3년간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루어 냈다. 그 후 리남데(Ly Nam De)장군의 활약으로 544∼602년간 자치정치가 이루어졌다. 중국의 침략은 계속되었고 베트남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베트남을 안남(安南)으로 명명했다. 938년 응오퀴엔(Ngo Quyen)장군의 박당(Bach Dang)강 전투 승리로 천년 중국 지배가 무너지기에 이르렀다.939년 남한군을 격파하고 응우옌이 "응오"왕조를 수립, 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게 되나, 이내 다시 중국 송나라의 지배에 들어간다. 하지만 마침내 972년 중국은 베트남의 독립을 정식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전통왕조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기까지 약 950년간 베트남은 독립을 유지하는데 이 기간 동안 서쪽의 라오스와 중부의 챰파(챰족)를 공격하여, 남방으로 세력을 확대한다. 응오퀴엔 장군이 중국 당나라를 물리치고 베트남 역사상 처음으로 독립왕조인 응오(Ngo)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968년 丁部領이 북부를 통일하여 대구월(大瞿越)이란 국호로 응오를 뒤이은 딘(Dinh)왕조를 일으켰으나 주권을 중국에 양도하고 속국을 자처하게 된다. 이후 레(Le)왕조의 집권이 있게 되고 1010년에 리(Ly: 李)왕조가 출현한다. 리타이또(Ly Thai To)가 세운 리왕조[李王朝]는 국호를 다이비엣(Dai Viet: 大越)으로 정하고 북으로는 송나라, 남으로는 크메르, 참족과 맞서 싸우며 독립을 유지시켜 나갔다. 자주통치를 확고히 한 200여간 행정, 조세 체제가 정비되고 농업이 육성되는 등 문인정치가 자리잡게 되었다.
하노이에는 베트남 최초의 대학 반미에우(Van Mieu)가 생겨 유교교육제도로 관리를 뽑게 되었다. 이후 리왕조 내정 혼란으로 인해 쩐(Tran)왕조가 새롭게 정권을 잡게 되었다. 쩐왕조[陳王朝]는 남부 참파왕국과 연합 당시 천하를 휩쓸던 원(元)나라 징지스칸의 침략을 막아냈다. 중국의 명(明)나라가 원나라를 멸망시키고(1368년) 통일을 이룬 뒤 1407년 베트남을 침략해 20년간 직접통치를 하게 되었다. 이에 레러이(Le Loi)와 응우엔짜이(Nguyen Trai)가 나타나 명과 10년간 전투를 벌인 끝에 명군을 물리치고 1428년 "대월국"이란 국호의 베트남의 황금시대 레(여)왕조[黎王朝]를 세운다. 레왕조 치하에서 중국식 관료주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국가적 기반이 확립되었다. 국경은 점차 남쪽으로 밀려났는데 15세기에는 중부 이남지역에 참족이 세운 참파왕국을 격파하고 남방으로 지배영역을 확대하였다. 문화적으로도 독자적인 베트남 문화를 창조하며 발굴하는 황금의 시대였다. 16세기 "레"왕조가 쇠퇴하여 북의 찐(정)씨와 남의 응우엔(원)씨의 군주세력으로 분열되었고 17세기에는 약50년에 걸쳐 남북조간의 항쟁이 계속 되었다. 남의 응우엔 왕조는 챰파를 정복하고 남하하여 크메르(캄보디아)인의 영역인 코치시나에 진출, 크메르의 내분을 이용해 17세기 중반 동지역을 점령했다. 17, 8세기 베트남 역사에 중대한 사실은 북쪽의 찐(정)씨와 남쪽의 응우옌(Nguyen)씨에 의해 베트남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남북조의 대립은 중부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으로 쌍방 모두 멸망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18세기 중엽 베트남 중부 떠이선(Tay Son)家 출신의 응우엔락, 응우엔후에, 응우엔후 등이 봉기하게 되었다. 이를 떠이선의 반란이라 말하며 억압받고 굶주리고 가난한 농민들이 대거 합세하게 되었다. 이들은 남부지방을 계속 공격해 사이공에 근거를 둔 응우엔 군주를 무너뜨리게 되었다. 그 후 응우엔후에(Nguyen Hue)는 북부지방 찐家을 쳐 제압하고 자신을 광쭝(Quang Trung)황제라 불렀다. 이후 18세기 말엽 살아남은 응우엔(원)씨 일족인 응우엔푹안[阮福映]이 농민난인 떠이선[西山黨]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프랑스의 힘에 의존함으로써 점차적으로 프랑스의 힘이 강화되었다. 응우엔[阮]씨는 영역을 메콩강 방면에까지 확대시켰고 19세기에 거의 현재의 영역을 확립하였다. 이후 프랑스의 지원아래 반대 세력을 없애고 1802년 통일된 "남월국"을 수립하여 중부 후에(Hue)시를 수도로 정하고 쟈롱(가릉)帝로 명명한다. 이 과정에서 떠이선의 진압에 도움을 준 프랑스 상인들에게 상업 이권을 양도하게 되었다. 아들 민망(Minh Mang)황제는 더욱더 유교를 숭상하여 베트남은 중국사상과 전통에 빠져들게 되었다. 아버지가 외국인에게 양도한 이권을 도로 빼앗고 외국인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탄압은 티에우찌(Thieu Tri)황제 때 극에 달해 많은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하고 추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프랑스 선교사 처형사건을 계기로 프랑스는 1858년 베트남을 무력침공하여, 1859년에 사이공, 62년에 프로콘도르섬을 점령하고, 1873년 남부 베트남(코친차이나) 전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1883년 수도 후에(HUE)가 공략되고 중부베트남(安南), 통킹(북부베트남)이 보호령이 된 뒤 1887년에는 아르망 조약체결로 완전히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프랑스 식민지
1858년 프랑스 해군의 다낭(Da Nang) 공격으로 베트남 영토로는 최초로 남부의 코친차이나가 프랑스의 지배하게 들어갔다. 베트남인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프랑스는 3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베트남을 식민지화 하였고, 이로 인해 베트남 영토는 안남, 통킹, 코친차이나 3부분으로 분할하여 프랑스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프랑스는 1867년 코친차이나를 식민지화했고, 1883년 안남과 통킹지역이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선포되었다. 내부분열로 무력화된 응우엔(Nguyen)왕조의 제왕들은 프랑스의 조종대로 움직이며 명목상의 왕위를 지키고 있었고, 마침내 1887년 안남과 통킹,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보호령과 코친차이나를 한데 묶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성립되었다. 하노이에 총독부를 두고 다시 1899년 라오스도 합병하여 2차대전 말까지 통치한다. 식민통치기간 중 프랑스는 중국상인을 앞세워 쌀과 고무 등 베트남의 주산물을 수탈해갔다.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메콩 델타지역을 개간토록 하여 옥토로 만든 프랑스인들은 베트남 국내의 절박한 식량부족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생산된 쌀의 대부분을 유럽으로 수출하였다. 또한 주류, 소금 등을 제조, 분배하는 전매회사를 세워 베트남인들에게 강매하여 원성을 유발시켰다. 노동자들은 가중되는 세금부담과 악화된 노동조건에 저항하여 점차 반란군이나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통치기간 동안 왕조 권위회복을 목표로 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양그룹에 의해 항불운동이 전개되어 공산주의자 그룹이 주도권 확보한다.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은 1차대전 직전 파리에서 정치수업을 쌓고 있던 민족주의자 호치민이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던 1920년 파리에서 태동하기 시작했다. 1924년 모스코바에서 일정기간 공산주의 학습을 받은 호치민은 중국 민족주의 운동의 산실이었던 광동에서 그 곳에 거주하고 있던 베트남 망명객들을 규합했다. 1925년 혁명청년동맹을 결성했고, 이어 1930년 이를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재편했다.
►2차대전
1940년 9월 일본이 베트남 점령을 개시하자 호치민은 1941년 30년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베트남으로 돌아와 베트남 독립 동맹회-비엣민(Viet Minh)을 창설, 독립연맹을 강화시켜 나갔다. 비엣민은 유격대를 조직하여 프랑스인과 일본인들을 동시에 공격하였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을 물리쳐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미국정보기관(OSS)을 통해 미국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1945년 3월 일본군은 북베트남에 진주하여 프랑스를 무력으로 격퇴하고 80여년의 프랑스의 베트남 통치를 종식시킨다.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연합국 정상들은 포츠담회담에서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을 분할, 북쪽은 중국군이 그리고 남쪽은 영국군이 주둔하도록 합의했다. 중국군이 진주하기 전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즉각 하노이를 장악하고 남부의 사이공까지 통제해 간다. 이것이 "8월 혁명(cach mang thang tam)"이다. 이후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빌미로 16도선의 북에는 중국의 국민당 군대가, 남에는 영국군이 진주하고 프랑스는 영국 관리하의 남부에 군대를 파견하여 군사적으로 재개입한다. 7년 동안 프랑스는 베트남 독립을 반대하였고 호치민이 프랑스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인다 1946년 3월 호치민정권은 프랑스와 잠정협정을 체결, 한때 "프랑스연합내 인도지나연방을 구성한 국가"로 인정되었으나 실질적 독립을 추구한 베트남과 연방내 자치국으로 한정한 프랑스측이 대립하여, 1946년 11월 하이퐁만 관세에 관한 법적권리를 둘러싸고 베트남과 프랑스인 사이의 협상 결렬이 계기가 되어 두 나라는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개시하였다. 하노이에서 무력충돌(동년 12월)에 이어 전면전으로 발전, 호치민정권은 지방으로 철수한다. 이후 호치민 지휘하의 비엣민이 중국의 군사지원을 받아 우세해지자 프랑스는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는데, 당시 서방 세계는 인도차이나 전쟁을 공산주의의 팽창정책과 중국공산당의 확장에 대한 견제책의 일환으로 규정하였다. 1949년 프랑스는 제2차 대전후 퇴위 망명한 응우엔조 최후황제 바오다이와 교섭하여, 그를 수뇌로 한 "베트남국"을 수립했으나 호치민의 월맹군은 북부 산지에서 중국 지원아래 프랑스군에 대한 공세를 펴 결국 1954년 5월 "디엔비엔 푸 전투"에서 프랑스를 이겨 프랑스를 인도지나 에서 철수시켰다.
►베트남전쟁
한편 49년 7월 인도지나에서 전쟁을 몰아내기 위한 국제회의가 제네바에서 개최되어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휴전협정 등을 54년 7월 21일에 체결하여 제네바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경계로 하여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며 소련이 지원하는 북부와, 미국이 지원하는 남부로 임시분할되었고 잠정 군사경계선 설정과, 국제감시위원회 설치 등이 정해져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56년에 실시키로 한다. 북부 월맹은 2년후 총선에 대비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화 개혁을 착수하여 정권확보 기반을 마련했고 남부 월남에는 1955년 바오다이제 퇴위후 캐톨릭주의자이며 반공민족주의자인 고딘 디엠을 대통령으로 한 "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되어 강력한 반공정책 및 정권강화에 열을 올려 독재적 성향을 보인다. 1955년 10월 국민투표에서 승리한 지엠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공산주의자 제거작업에 착수하였다. 무차별적인 체포와 정권의 잔혹성으로 남쪽에서의 공산주의 활동이 위축되었다. 1958년 남부 공산지도자들은 북부 중앙당의 보다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 마침내 1959년 5월 당중앙위원회는 남부에서의 무장투쟁을 요구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정권의 부패와 독재, 앙의시위에 대한 정부군의 발포로 국민적 반감이 증폭되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의 전쟁기반이 약화되자, 미국은 지엠의 제거를 고려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는 불교도 및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反디엠-反美" 운동이 격화되고 월맹 지원의 게릴라활동도 활발하여, 60년에는 월맹지도아래 공산주의자 및 반정부 지식인으로 구성된 "베트남 민족해방 전선"이 결성되어 정부전복 활동을 강화한다. 1963년 11월 1일 마침내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사쿠테타가 일어나 지엠은 총살되고 이때부터 군부지도층 사이에 정부 전복음모, 쿠테타 시도등의 권력투쟁이 빈발하게 되었다. 남베트남의 계속되는 정치 불안으로 전황이 불리해진 틈을 타서 북베트남은 '호치민 루트'라고 불리는 라오스와의 국경선의 통행로를 보수, 확장하여 남부에 대한 공세준비를 강화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64년 8월 2일 통킹만 사건(통킹만에서 작전중이던 미구축함 매독스호와 너조이호가 북베트남 해군의 함포공격을 받아 미국이 해안지역 북베트남 군사시설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고 이어 미의회는 군사력 사용을 허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사건)을 계기로 65년 본격적인 북베트남 공격과 월남에 전투부대 투입을 개시하였으며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해방전선"과 전투도 격화되었다. 1964년 8월 2일 통킹만에서 작전중이던 미구축함 매독스호와 너조이호가 북베트남 해군의 함포공격을 받은 '통킹만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미국은 해안지역 북베트남 군사시설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고 이어 미의회는 군사력 사용을 허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게 된다. 한편, 사이공의 정치적 혼란은 1965년 응우엔 반 티에우(Nguyen Van Thieu)가 주도하는 군사혁명위원회의 권력장악으로 어느정도 일단락 되었으나, 미군의 거듭되는 증파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의 게릴라전 앞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민간인 피해만 심화되었다. 북폭은 65년부터 68년 10월까지 계속되었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의 구정대공습을 기점으로 미국의 베트남개입 정책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같은 해 3월 31일 미국의 존슨대통령은 처음으로 북베트남과의 협상을 위해 폭격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수개월에 걸친 미국과 북베트남간의 협상 끝에 마침내 1969년 파리평화회담을 앞두고 1968년 10월 31일 폭격이 중단되고, 티우 대통령의 반대로 연기되었던 휴전협상도 닉슨대통령의 취임 직전 개시되었다. 그러나, 72년 12월 18일부터 29일까지 2차 북폭이 12일간 주야로 계속되어, 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5배 분량의 폭탄 10만톤이 투하되었다. 이후 1973년 1월 27일 파리에 서 휴전협상이 정식 체결되었고, 그 다음날 오전 8시 전쟁이 공식 중단되었다. "협정후 60일내 철수" 합의에 따라 미국은 철수하였으나 전투는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북베트남은 월남을 무력으로 통일키로 하고 총공세를 벌여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정권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30년간의 긴 전쟁은 종식되었다. 통일이후 남부에서는 구체제 해체와 사회주의화가 추진되었다. 이와 함께 남베트남공화국 임시혁명정부가 남베트남의 정권을 장악하자, 75년 11월 남북통일에 관한 정치협의회가 이룩되었다. 이 협의회의 결정에 의해서 1976년 4월 남북 베트남의 통일 선거가 실시되어 6월에는 통일국회가 열렸고, 7월에는 남북이 통일되어 현재의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으로 베트남은 200만명의 사상자를 냈고 미국은 650만톤의 폭탄을 투하, 헬기 5000대 손실, 5만8천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한국은 64년 9월부터 10년간 연인원 31만2,853 명을 파병시켰다.
►통일베트남
전쟁의 종식과 더불어 미국은 통일 베트남에 대한 전면적인 경제제재조치 단행한다(1975.4.30). 한편 1978년 베트남군과 캄보디아군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고, 화교들이 정부의 정책으로 불이익을 받는다는 이유로 베트남을 탈출하면서 캄보디아,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폴 포트 정부를 무너뜨리고 친베트남 정권을 수립하자 중국이 이에 대응해 중월(中越)전쟁이 일어나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1980년대초 베트남은 라오스, 캄보디아에 자국 군대를 주둔시키며 인도차이나반도 대부분을 장악하여 몇몇 국가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한편 폴 포트의 추종자들은 캄보디아 내 베트남군에 대항해 전투를 벌려, 마침내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해 1989년 철군을 완료했다. 1986.12월 제6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도이모이정책을 채택하여, 시장 경제체제 도입을 선언하였고, 1991. 6월 제7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당 서기장 및 다수의 보수 강경파 인물들이 개혁파 인물들로 교체되는 한편 정치부문 개혁은 통제하되 경제부문의 개혁은 과감히 추진키로 결정한다. 이를 위하여 92.4월 국민기본권 보장, 사유재산 인정, 국회 및 정부조직 개편, 외국투자 자본 비국유화 등을 담은 헌법을 개정하고 1992년말 한국과 국교를 수립하여 무역협정,투자보장협정, 항공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이후 미국은 1994년 2월 대베트남 엠바고(북부 베트남 30년, 통일 베트남19년)를 해제하고 1995년 1월 양국 수도에 연락 사무소를 설치하여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베트남의 현대사
1.서구의 진출과 프랑스의 제1차 베트남 점령
파리와방전교회를 세웠다. 이 전교회를 통하여 많은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남북 베트남과 캄보디아로 파견되어 후일 프랑스가 이들 지역에서 지배권을 차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70p)
18세기 말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원료의 구입과 생산품의 판매를 위한 시장의 확보가 필요해짐에 따라 유럽의 나라들은 19세기를 전후하여 제국주의적인 팽창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베트남에 대한 중대 위협은 북방의 대륙에서 왔으며, 남쪽 바다로부터 온 적은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응 우옌 왕조는 대 중국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주의를 기울였으나,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유럽인에 대해서는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따라서 나라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271p)
민 망 황제에 이르면 서구에 대한 응우옌 왕조의 정책은 훨씬 경직되어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했으며 프랑스와의 관계도 크게 변했다. 이런 정책의 변화를 초래한 책임은 많은 부분 유럽 측에 있었다. 그들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이 응우옌 왕조의 지배자들에게 깊은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1819년 영국의 싱가포르 점령에 의구심을 품은 쟈 롱 황제는 1820년 임종시에 아들 민망 황제에게 유럽과 관계를 맺을 때 각별히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이후로도 프랑스는 몇 차례 통상관계의 개선을 요구하다 실패했고, 1830년에 이르러 양국관계는 결국 단절되었다. 또한 영국이 1824년에 미국이 1832년에 같은 요구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72p)
티에우 찌 황제는 민 망 황제의 정책을 이어받아 서구, 특히 프랑스를 비교적 우호적으로 대했다. (273p)
티에우 찌 황제는 1947년 다시 태도를 바꾸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문제의 발단은 당시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기 위하여 다 낭에 온 2척의 프랑스 군함이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던 베트남 함대에 발포하여 이를 침몰시키고 다수의 사상자를 낸 데 있었다. 격노한 황제는 베트남영내에 있는 모든 유럽인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뜨 득 황제는 민 망 황제나 티에우 찌 황제의 정책을 계승하여 서구에 대한 쇄국적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영국, 미국, 스페인, 프랑스의 사절들이 제기한 통상 요구를 어느 하나도 수락하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을 점차 강화하여 박해명령을 연이어 내렸다. ~이런 탄압으로 1848년부터 1860년까지 처형당한 사람은 유럽인 선교사가 25명, 베트남인 사제가 300명, 그리고 평신도가 2만명 이상에 달했다.(275p)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통치 아래 해외 팽창정책을 추구하여, 베트남에 대해서도 침략을 구실을 찾고 있었다. 침략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집단은 카톨릭 교회와 상공업자 및 해군이었다. (275p) 프랑스는 1857년 4월 베트남 개입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코친차이나 위원회(La Commission de la Cochinchine) 를 구성하고 많은 선교사들을 불러 증언을 들었다. 선교사들 중의 한 사람인 펠르렝 신부는 종교문제뿐만 아니라 정치문제까지 언급하면서 베트남에 신속히 개입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아울러 개입은 베트남 카톨릭 신자들이 도우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위원회는 1787년 조약이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장교들이 응우옌 아인 푹을 도와 주었으므로 베트남에 대해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중국 주둔 병력과 본토 원정군을 파견하여 사이공과 하노이를 점령하는 작전을 세웠다. (275p)
1858년 청국과 톈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주국 방면에 있던 해군의 이동이 가능해진 프랑스는 리고 드 주누이의 지휘 아래 13척의 전함과 2,500명의 병력을 나 낭으로 파견했다. 이때 스페인도 전년에 통킹에서 디아스 주교가 처형된 데 대한 보복으로 마닐라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 450명을 파견했다.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은 1858년 9월 1일 다 낭 항구를 점령하고 그곳에 5개월 동안 머물렀다. 이로써 프랑스는 베트남 식민지화의 첫발을 내딛었던 것이다. 중부지방의 가톨릭 개종자 수는 북부나 남부에 비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종래 학자들의 주장처럼 그들의 지지가 결코 적었던 것은 아니다. (276p)
프랑스군은 곧 사이공 부근의 요충인 미 토를 빼앗고 뒤이어 쟈 딘 성을 점령했으며 비엔 호아의 일부도 장악했다. 승리를 확신한 프랑스군은 비엔 호아의 일부도 장악했다. 승리를 확신한 프랑스군은 비엔 호아의 응우옌 바 응이를 통해 후에 조정에 영토의 할양과 선교 및 통상의 자유 등을 포함한 14개 항목의 강화조건을 제시했다. (278p)
이때 후에 조정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대립되어 있었다. 전자는 가톨릭 문제에 강경하면서 현실적 무력보다는 도덕성을 중시했다. 이와 달리 후자는 유럽 무기의 우월성과 장기간의 투쟁으로 인한 농민의 고통을 이유로 가톨릭 문제 때문에 협상을 거부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프랑스가 영토는 점령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반란과 프랑스군의 공격이라는 내우외환에 직면한 응우옌 조정은 우선 내란을 평정하기로 결정하고, 그래서 프랑스와는 협상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278p)
뜨 득 황제로부터 협상의 전권을 위임받아 사이공에 파견된 주화파 두 사람, 판 타인쟌과 럼 주이 티엡은 프랑스 군함에서 보나르 제독과 한 달 가까이 교섭한 끝에 1862년 6월 5일 이른바 1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베트남이 그리스도교 포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코친차이나의 동부 3성(비엔 호아, 쟈 딘, 딘 뜨엉)과 콘 썬 섬을 프랑스에 할양하며, 다 낭, 바 랏, 꽝 응우옌의 세 항구를 프랑스와 스페인 양국에 개항하고, 은 400만 량의 배상금을 10년 내에 지불한다는 것 등 전부 12개 항목이었다. 뜨 득 황제는 협상단을 파견할 때 포교의 자유와 영토의 할양은 절대로 불가하다는 뜻을 밝혔지만, 두 가지 문제 모두 후에 왕조의 의지대로 될 수 없었다. 조약은 나폴레옹 3세와 뜨 득 황제가 최종적으로 서명함으로써 비준되었다.
뜨 득 황제는 처음부터 통킹 델타에서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을 뿐 남부 영토를 프랑스에 할양할 뜻은 전혀 없었다. (279p)
보나르 제독은 코친차이나의 동부 3성을 점령한 후 프랑스인의 감독 아래 베트남인 관리를 임명하는 간접 통치방법을 도입했다. 그 결과 후에 정부로부터 은밀히 크고 작은 지원을 받는 베트남인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280p)
2. 응우옌 왕조의 개혁 실패와 식민지로의 전락
전통적인 보수세력에 의해 지배되면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무감각했던 후에 조정은 코친차이나 6성을 상실하고서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충격은 단순한 충격으로 끝나 버리고, 일본의 메일지 유신과 같은 적극적 개혁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281p)
서구 지향적 개혁을 주장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응우옌 쯔엉 또를 들 수 있다. ~응우옌 쯔엉 또가 주장한 개혁의 주요 내용은 첫째가 관료제도의 개편이었다. 그는 관리의 수를 줄이고 대신 봉급을 올려 부패를 막도록 건의하는 동시에, 서구의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행정과 사법의 분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군사학교를 세우고 외국인 교관을 초빙하여 장교를 훈련시켜 근대식 군대의 창설을 돕게 하자는 것도 그의 주요한 건의사항이었다. 이들 계획의 재정적 뒷받침을 위해 그는 조세제도의 개혁을 주장했다.(281p)
어떤 이유로든 후에 조정이 개혁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상황에서, 남부 베트남을 점령한 프랑스는 두 번째 단계로 이번에는 방향을 선회하여 북부의 통킹 지방에 대한 공략을 감행함으로써 베트남 전체를 식민지로 만들고자 했다. 프랑스가 코친차이나를 점령한 목적 중의 하나는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 중국 서남부의 윈난 성에 이르는 무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283p)
1874년 1월 하노이에 도착하자마자 필라스트르는 가르니에에게 점령한 도시들에서 프랑스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러고는 후에 조정과 협상을 시도하여, 그해 3월에는 뒤프레와 응우옌 왕조의 대표인 응우옌 반 뜨엉 사이에 이른바 제2차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응우옌 왕조는 코친차이나의 6성에 대한 프랑스의 주권을 인정해 주었다. 응우옌 왕조는 또한 자신의 대외정책이 프랑스의 정책에 부응하도록, 프랑스의 국익에 반하는 제3국과의 조약은 체결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한편 통상을 위해 홍 강을 개방하고 티 나이, 하이 퐁, 하노이에 프랑스 여사의 주재를 허락했다. 프랑스측은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며, 군함과 무기를 제공하고, 군사교관, 기술자, 재정전문가, 교수 등을 파견하여, 제1차 사이공 조약에 규정된 전쟁 배상금을 면제해 주기로 했다. 카톨릭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언급하여, 선교사들의 자유로운 왕래를 허락했고 그 결과 가톨릭 신자의 수는 점차 늘어났다. (287p)
1879년 프랑스에서는 레옹 강베타가 이끄는 온건 공화파가 권력을 잡았다. 그는 “프랑스의 진정한 미래는 통킹에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베트남에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당시 해군 장관 또한 무력으로라도 영토를 확장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1879년 코친차이나에 부임한 최초의 민간인 총독 르 미르 드 빌레 역시 신속한 무력 개입을 적극 권유했다.
“과일은 충분히 익어 따먹을 때가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따든가 산산이 터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 후에 조정은 저항하겠지만 무능합니다.
프랑스가 개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1881년 말에 찾아왔다. 통킹 지방에는 흑기군 등 중구인 군벌이 할거하는데다 반란도 일어나 혼란이 계속되었지만 후에 조정은 이를 통제할 눙력이 없었기 때문에 제2차 사이공 조약에 의해 확정된 홍 강의 개방은 현실적으로 이행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288p)
리비에르는 지시를 어기고 베트남 관리와 충돌을 일으켰으며, 그러고는 가르니에와 마찬가지로 하노이를 기습공격하여 1882년 4월 25일 점령했다. (289p)
뜨 득 황제가 사망한 후 1년 남짓한 동안 네 명의 황제가 바뀜에 따라 궁중에서는 음모가 난무하고 따라서 대외정책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1883년 8월 아르망과 쿠르베는 다수의 군함과 육군을 이끌고 통킹에서 중부로 내려와 투언 호아 강 어귀에 있는 투언 안을 공격하여 8월 20일 함락시키고 후에를 향해 진격했다. 이미 세력이 약화되어 저항이 불가능해진 응우옌 왕조는 휴전을 요청하기로 결정하고 쩐 딘 뚝과 응우옌 쫑 헙을 사절로 보냈다. 8월 25일 이들 두 사람과 아르망 사이에 이른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때 코친차이나의 행정은 이미 독자적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고 누구나 이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프랑스가 북부와 중부를 점령하고서도 이를 코친차이나에 병향시키지 않고 별도의 보호령으로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더욱이 응우옌 왕조의 지배자나 관료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조약에 의해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국임을 인정하고 대외관계는 프랑스를 통해서만 하기로 약속했다. 프랑스는 통킹 지방의 모든 주요 도시에 베트남 관리들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 주차관을 임명했다. 한편 통킹의 베트남 군대는 즉시 철수하고, 프랑스군이 진주하여 홍 강의 개방을 보장하고, 대내적인 반란들을 진압하며 외국의 침략에 대응한다는 규정도 두었다. 안남 지방으로부터 남부의 빈 투언 성이 코친차이나에 편입되고, 북쪽의 타인 호아, 응에 안, 하 띤은 통킹에 부속되며, 나머지 지방에서는 관세와 토목에 관한 사항을 제외하면 응우옌 왕조와 그의 관료들이 프랑스의 간섭 없이 통치하게 되었다. (292p)
베트남과 프랑스 사이의 이런 새로운 관계에 대하여 베트남의 종주국으로 행세해 온 중국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아르망 조약이 체결된 직후 청조는 자신들이 승인하지 않는 베트남의 여하한 국제조약도 무효임을 선언했다. (292p)
188년 5월 리훙장은 청조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측의 대표인 프랑스와 푸르니에와 톈진에서 강화조약을 맺었다. (제 1차 톈진조약) 이 조약에서 중국은 통킹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즉시 철수시키고, 베트남과 프랑스 사이에 맺어진 기존의 조약들은 물론 앞으로 체결된 조약들까지도 존중하기로 약속했다. 반면에 프랑스는 중국의 남쪽 국경을 보장해 주고 필요한 경우에는 보호도 해주기로 했다. 이렇게 청이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해 주자 베트남 조정에서는 리훙장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청은 프랑스에 대한 강경노선을 급선회했다. / 청불전쟁
양측은 협상을 시작하여 1885년 6월 리훙장과 파트노르트 사이에 수호통상화평조약(제2차 톈진조약 또는 월남신약)이 체결되었다.
응우옌 왕조는 청불전쟁 후에도 여전히 존속했지만, 어디까지나 명목상이었을 뿐 실질적으로 베트남의 모든 영토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프랑스 관리들의 통치를 받았고 후에의 황제는 의례적인 행사에만 참여했다. (294p)
3. 프랑스의 식민 지배정책
1885년 청불조약의 체결로 이제 프랑스는 대외적으로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고 베트남에서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제일 먼저 점령한 코친차이나는 식민지로, 그리고 안남과 통킹은 보호령으로 하여 베트남을 통치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하나로 묶지 않고 삼분해서 통치했다. 코친차이나 총독은 본국 식민주의 지시를 받고 안남과 통킹에는 고등 주차관을 두어 외무부 관할 아래 두었다.
1887년에는 세 지역을 보호국인 캄보디아와 함께 인도차이나 연방(Union Indochinoise)으로 만들어 식민부로 이관시키고 총독이 다스리게 했다. 또한 1893년에는 보호령인 라오스, 1900년에는 조차지인 광저우만이 인도차이나 연방에 추가되었다. 이에 앞서 1888년 프랑스는 하노이와 하이 퐁 및 다 낭을 통킹과 안남으로 분리시켜 코친차이나처럼 직할 식민지로 만들었다. (294p)
촌락행정은 종래와 같이 촌락의 지배층인 기목들로 이루어진 기목회의가 맡았다. 그러나 프랑스는 촌락과 프랑스 행정기구를 연결하는 임무를 하층 지배층 출신의 이장에게 맡김으로써 기목회의의 권위는 점차 약해졌다. (296p)
코친차이나 식민주의자들의 주장을 어느 정도 무시하고 인도차이나 연방이 각 지역을 통괄하면서 그 나름대로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 것은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 총독에 이르러서였다. 사실 이후 반세기 동안 인도차이나 통치의 기틀을 그가 세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298p)
그는 식민지평의회에 대항하기 위해 파리 정부에 5개 연방의 대표자로 구성되는 인도차이나 평의회의 설치를 요청하여 승인을 받았다. (299p)
식민지 재정이 안정되자, 두메르는 곧 토목사업을 위한 기초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인도차이나가 부유한 식민지로 유지되려면 도로와 철도가 부설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한편 토목건축보다 비용을 적게 들였으면서도 큰 성과를 거둔 것은 1899년에 설립되 프랑스국립극동연구원이었다. 이 연구원은 프랑스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이기도 했지만, 연구원이 남긴 인도차이나의 문화, 지리, 역사, 관습, 종교 등에 관한 연구 성과는 오늘날 높이 평가되고 있다. (301p)
두메르의 뒤를 이어 총독이 된 사람은 폴보(1902-1907)였다. 보의 의도는 프랑스인이 베트남인을 대하는 태도 자체를 어느 정도 바꾸어보자는, 말하자면 프랑스인과 베트남인 사이의 협력이었다. (301p)
1911년 11월에 급진 사회주의자 알베르 사로가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런 사로의 개혁정책은 베트남인들 사이에 혁명의 씨앗을 뿌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뒷날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의 전쟁에서 그것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305p)
뗏 공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노이 지도자들은 혁며에 의한 통일이 가능하다고 확고하게 믿었다. 1972년 3월 말 지압 장군은 이른바 ‘춘계 대공세’, 일명 ‘부활절 공세’를 감행하여 12만명의 하노이 정부군이 소련제 탱크와 대포의 지원을 받으며 휴전선을 넘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 앞에 사이공 정부군과 미국은 일시 당황했고 하노이 정부군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973년 1월 27일 미국, 사이공 정부, 하노이 정부, 그리고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1969년 이후 민족해방전선의 명칭)의 대표가 공식적으로 평화조약에 각각 서명했다.
1975년 4월 말 남부 베트남이 공산화되었다.
미국의 재개입이 불가능함을 확인한 하노이 정부는 1975년 1월 사이공 정부군에 대한 전면전에 돌입했다. 닉슨의 뒤를 이은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의회에 남베트남과 캄보디아에 대한 추가 원조를 요청했지만 의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미국의 지원이 끊기자 사이공 정부 내에서는 반 티에우 세력이 점증했다. 이를 이용하여 하노이 정부의 남부군 사령관인 반 띠엔 중은 3월 초 우선 반 메 투옷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감행했다. 하노이 지도자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사이공 정부군은 제대로 응전도 해보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3월 19일 꽝 찌 시가 함락되고, 25일에는 후에마저 북베트남군의 손에 떨어졌다. 3월 29일 남베트남 제2의 도시 다 낭은 후퇴하는 사이공 정부군과 피난민이 뒤섞인 혼란의 와중에 함락되었다.
3월 25일 하노이 정치국은 전략을 바꾸어 5월 중순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사이공을 함락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4월부터 사이공 점령을 위한 하노이 정부의 마지막이자 최대의 공세인 ‘호 찌 민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때 사이공은 대혼란에 빠졌고 미군 비행기는 사이공 정부의 주요 관리와 가족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티에우는 4월 21일 대통력직을 사임하고 부통령인 쩐 반 흐엉이 그 직을 물려 받았다. 흐엉은 곧 북베트남군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4월 26일 다시 온건파인 즈엉 반 민에게 대통령직을 위임했다. 민 역시 협상을 시도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4월 30일 마침내 사이공마저 하노이 군대에 점령됨에 따라 베트남 공화국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995년 하노이 정부는 정부군과 베트공을 포함하여 110만명이 사망하고 60만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산업시설의 파괴까지 고려하면 베트남 전역은 거의 황폐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쟁의 복구는 차치하고라도 하노이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남부사회를 사회주의 체제로 전화시키는 것이었다. 모든 상공업 부문은 국영화되고, 농촌 경제는 집단농장체제로 바꾸어야만 했다. 또한 타락한 서구 부르주아 문화는 뿌리뽑고 대신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의 뿌리를 내려야 했다. 아울러 남부를 북부와 통합하는 일 역시 시급한 과제였다.
승리한 북북 지도자들은 공산당 간부와 군대를 중심으로 이런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유능한 전략가요 전사이긴 했지만 이런 문제를 척척 잘 해결할 수 있는 행정가는 아니었다. 그 때문에 문제를 너무 졸속하게 해결하려 하다가 오히려 더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적잖은 수의 임시혁명정부 지도자들이 급격한 남북통합에 반발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하노이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미숙함을 깨닫기까지는 거의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리하여 1986년 마침내 ‘도이 머이’ 정책이 채택되면서 베트남 사회는 겨우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베트남의 독립투쟁 역사
베트남의 역사 베트남문화의 복합성 베트남의 국명은 월남이란 한자어의 베트남어 발음으로, 월남이란 1802년 베트남 최후의 전통왕조인 阮朝(1802~1945)가 세워지면서 당시 청나라의 승인하에 제정된 국호로부터 유래한다. 한때 월남의 별칭이었던 안남이란 말은 당이 월남에 설치한 안남도호부에서 연유한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우리와 많이 유사하여 일본과 더불어 중국문화권 내지는 한자문화권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근대에 들어와서는 우리가 일본의 식민침략을 받았듯이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는 두 나라 모두 남북이 나뉘어져 수 십년간 대치상태에 있다가 1975년 통일된다. 이러한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때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매우 유사한 역사적 전개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은 베트남 역사의 일면에 불과하다. 시각을 달리하면 베트남은 우리와 전혀 다른 역사적 성격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중국세계의 일부로서만 이야기되는데 비해, 베트남은 북으로 중국과의 관계에서 보면 중국적 세계의 일부였지만, 남으로 눈을 돌리면 거기에는 문화를 달리하는 참파(Champa, 占婆, 현 베트남의 중부해안을 따라 말라요-폴리네시안 계통의 인종들이 세운 소국들의 포괄적 명칭)와 크메르족의 캄보디아 등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접촉 내지는 그들 영토의 점령을 통해 인도와 인도네시아 문화를, 그리고 근대에는 유럽 문화를 받아들여 복합적. 중층적 성격의 문화의 성격을 더하고 있다. 베트남역사의 특징 월남인들은 지금도 음력 2월 6일을 민족적 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이 날은 서기 40년에 徵側과 徵貳의 자매(흔히 춘니 자매라고 한다)가 일으킨 중국의 한 왕조에 대한 대규모 반란이 3년 만에 실패해 그들이 자살하였다는 날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앞으로 전개될 월남사의 험난한 대외항쟁의 노정의 시작을 본다. 월남사에 있어 대외투쟁의 방향을 보면, 첫째가 중국과의 끈질긴 투쟁, 둘째가 참파. 캄보디아. 라오스. 시암 등 남방에서의 쟁패전, 그리고 세째가 프랑스에 대한 가열한 투쟁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어느 것이든 단속적이 아닌 끈질긴 것이라는 점이 또한 특색이다. 그들의 역사는 이 세 방향의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월남인은 국가의 초기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고 독립을 위한 싸움을 끈질기게 전개했을 뿐 아니라, 독립이 되어 독자왕조를 세워 중국과의 봉공관계가 유지되는 동안 어느 한 왕조도 중국의 침략을 받지 않은 왕조가 없었다. 800년 동안 중국은 일곱번에 걸쳐서 월남을 침입하였는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중국의 침략이 빈번하였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침략도 모두가 실패로 돌아가버렸다는 데 있다. 아마도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기이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청의 쇠퇴후 프랑스의 침입을 받지만 끈질긴 저항으로 프랑스로 하여금 월남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프랑스의 바통을 이은 미국도 월남인의 끈질기고 거센 저항으로 미국 역사상 최초의 전쟁 패배라는 수모와 자존심의 상처를 안겨준다. 중국지배기 동남아시아에서 중국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는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1000년 이상이나 중국문화의 유입을 받아들여왔다. 월남의 신화 중에는 월남인의 조상이 중국의 炎帝 신농씨의 三世孫에 연원한다는 것이 있다. 비록 중국문화의 강한 영향을 입고 있지만 그와 동격이라는 자긍의 표현인 것이다.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정치적 지배는 대략 기원전 219년의 진나라 시황제의 남쪽 정벌에서 비롯된다. 이 남중국의 땅에 중국은 남해(지금의 광둥). 계림(지금의 광시), 그리고 베트남 북부에 이르러 象郡 등을 두었다. 진나라가 망한 후 지금의 광둥을 도읍지로 하여 남월이라는 나라가 생겨 세력을 떨쳤으나 한나라 무제가 기원전 111년에 남월을 멸망시키고 이 땅에 九郡을 두어 교주자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한 나라는 많은 중국인 죄수들을 이 지방에 보냈으므로 그 언어며 습관이 날로 그들 사이에 스며들게 되었다. 그런데다 관리를 보내어 적극적으로 교화정책을 폈기 때문에 화전농업에 중국식의 농경법이 혼합되고 혼인의 습관 등도 중국식으로 바꾸어졌다. 하지만 외국의 지배가 베트남인의 뜻에 맞지 않아 압정이 계속될 때는 자주 반란이 일어났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오늘날 베트남 국민으로부터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추앙되고 있는 춘착. 춘니자매의 반란이다. 춘자매는 교지군 출신인데, 춘착의 남편이 불법으로 중국관헌에 잡힌 것에 분개하여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40) 그들의 군세는 급증하여 춘착은 한때 왕을 지칭하기까지 했는데, 한나라는 마원장군으로 하여금 3만의 병사를 이끌고 이 난을 진압하게 했다. 그후에도 베트남에는 평화와 반란이 계속 반복되었다. 한편 저항운동과는 다른 일면에서 중국관리들과 접촉하는 소수의 베트남인 사이에 중국문화가 서서히 전파되었다. 기원 후 2백년 경에는 월남인 李進이 그곳 지방장관이 되어 월남인과 한 중앙정부의 박사와의 토론을 요청할 정도였다. 당대에는 한국의 신라, 일본의 헤이안기처럼 적지 않은 당과거 출신을 배출하였다. 독립왕조기 오랜 중국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또 고도의 중국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중국에 동화되지 않는 월남인의 생명력은 마침내 서기 939년에 吳權(고구엔)에 의한 월남 최초의 독립왕조(吳朝:938~968)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이는 중국에서 당이 망하고 五代의 혼란이 게속되던 시기에 해당한바 그뒤 丁朝(968~980). (前)黎朝(980~1010)를 거쳐 李朝(1010~1225)에 이르러 비로소 장기적인 안정 왕조가 세워졌는데, 과거제, 구품관인제 등 중국적 통치체제를 받아들인 이조는 그때까지의 월남인의 활동범위인 북부월남을 처음으로 넘어서서 남쪽의 참족의 국가 참파(占城의 후신)을 공략하여 지금의 廣平(강빙). 廣治(강찌)省 지방을 영유하기에 이르렀다. 참파는 인종면이나 문화면에서 인도화된 나라로서 중국적 문화에 바탕을 둔 북방의 국가와 달랐다. 한편 참파의 서남방에 위치한 오늘날의 캄보디아, 眞臘(진랍)과의 투쟁도 이 왕조때 전개되었는데 이는 동경(통킹)평야에 근거를 둔 월남인의 남진정책의 표현이었다. 이 당시의 캄보디아는 그 화려한 앙코르와트의 창건자로 이름난 수우랴바르만 2세 치하였는데 월남은 李朝의 신종 때 10년 동안에 세 번이나 캄보디아를 침입하였다. 캄보디아는 때로 월남을 공격할 뿐 아니라 남방 참파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는 사이이기도 하였다. 이조 다음의 陳(찬)왕조가 1225년 성립하면서 북방 몽고의 압력을 받아 여러 번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과감하게 물리쳤을 뿐 아니라, 서쪽의 라오스, 남쪽의 참파를 쳐서 이들에게 조공을 받기도 했다. 월남은 당시 세계 어느 곳에서도 패배를 로르던 원의 침입을 세 차례나 승리를 거둔 것(1257, 1284, 1287)은 월남인들은 지금도 크게 자랑하는데 족히 그럴 만한 저항이요 통쾌한 승리였다. 월남과 참파를 나누는 海雲關은 이 무렵에 월남령으로 귀속되어 앞으로의 월남세력의 남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었다. 물론 월남의 남진이 항상 용이했던 것은 아니고, 陳朝 후기에 가면 참파의 북진에 적지 않은 곤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陳朝에 이어 短命의 胡朝, 그리고 연이은 명대 중국의 직접 통치를 겪은 뒤, 1427년 後黎(레)朝가 성립하거니와, 참파가 다시는 월남에 대항할 힘을 못갖게 되는 것은 後黎朝의 성종(탕통) 때였다. 월남에 반기를 든 참파의 제15왕조 2대째 왕인 반 라 자드안의 10여만 군이 성종에 의해 격파되고, 수도 비자야(오늘날의 平定)는 함락되고 왕도 포로가 되었다. 이어 월남은 참파라는 장애를 넘어서 그 남쪽의 캄보디아 서남령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중부월남에 이웃한 라오스에 대해서도 정복의 손을 뻗어 버마 국경지대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렇듯 참파의 사실상 영유와 라오스에의 지배권 확립이 이루어진 黎朝의 성종 대는 우리 나라의 조선 세조. 성종대에 해당된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의 월남 남부는 이 무렵에도 완전히 월남화되어 있지 못한 정복지였던 것이다. 16세기 초엽에 권신 莫씨의 찬탈을 계기로 혼란이 일어나 남북 항쟁의 대립형세가 전개되어, 阮氏가 順化를 배경으로 남방정권을 이룩하여 남쪽으로 진출함으로써 대북방 정권(鄭氏)에 대항할 힘을 기르려 하면서부터 남진의 성과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오늘날의 사이공이 위치하게 된 메콩델타 유역에 월남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캄보디아는 월남을 종주국으로 삼아 조공을 바치게 된다. 이너 1739년과 1755년에 차례로 완씨는 캄보디아와 교전하여 캄보디아의 해변 영토를 완씨령으로 편입하였다. 따라서 오늘날의 월남이 불과 200여년 전에야 형성단계에 들어간 것과, 남부 월남이 마지막을 월남에 귀속된 지역이라는 사실은 월남의 남북문제를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전통의 관련 하에서 살필 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西山의 완씨 삼형제의 반란이 남방의 완씨 영내에서 일어나 이른바 新阮(西山당)과 舊阮간의 싸움이 벌어지자 구완은 조상 전래의 근거지인 순화에서 밀려나와 嘉定(갸딩, 오늘날의 사이공 근처)으로 쫓겨나면서 서남 해안지대는 결정적으로 월남화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 쟁란 때문에 문화적 중심이 변경지로 이동함으로써 그 곳의 문화수준을 높여 전국적인 문화수준으로 향상시킨 예는 중국사의 경우 동진이나 남송의 남천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으며, 현재의 대만도 그 현저한 예라 할 것이다. 그뒤 嘉定은 구완세력을 축출한 서산 삼형제 중 東定王 阮文呂(구엔 반 류)의 통치 중심지가 됨으로써 남부월남의 월남화를 더욱 촉진하게 되었다. 비록 서산당의 지배는 짧았지만, 월남의 북부. 중부. 남부를 포함한 오늘날의 월남 전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한 것은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서산당을 격파하여 새 왕조를 세운 舊阮一族 출신의 阮朝는 서산당에 의한 통일을 바탕으로 월남전역을 단일체제로 통치한 최초의 왕조가 되었다. 이때가 1802년이니 지금으로부터 200년이 채 못된 아주 가까운 때의 일이었다. 프랑스의 침략과 베트남인의 독립운동 월남의 남부는 월남사의 남진방향의 종점으로, 월남전통에 가장 늦게 젖음으로써 남부는 북부나 중부에 비해 월남적 전통이 약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남부가 월남전토중 가장 일찌기 식민지화 되었다는 사실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월남 남부를 침략의 첫 희생물로 삼았던 프랑스인의 대월남 진출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전국적 통일의 바탕 위에 선 최초의 왕조인 완조의 창건과 때를 같이하였다. 완조를 창건한 阮福映(구엔 푹 앙) 즉 후일의 嘉隆(갸롱)帝가 서산당에 쫓기어 사이암灣의 섬들을 전전하였을 때 프랑스 신부 피뇨가 완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었던 것이다. 피뇨가 얻어온 의용병과 무기. 탄약은 阮福映의 대서산당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프랑스는 구완에 대한 군사원조의 대가로 베트남 남부지방에 대한 할양을 요구하여 점령하고 이를 '코친차이나'라 하여 직할 식민지화하였다.(1862) 그리고 뒤이어 1873~1885년 사이에는 베트남의 중부와 북부를 점령하여 이를 각각 '안남'(1884)과 '통킹'(1884)으로 명명하고 남부와는 달리 명목상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완조의 군주는 폐위되지 않고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프랑스 지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독립운동은 전통주의, 민족주의, 공산주의의 세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전통주의란 1900년 이전 까지의 전통적 문신계층을 중심으로 완조에 대한 충성심에서 전개된 운동이다. 이 저항운동은 이른바 勤王運動으로 대표된다. 1900년 경부터는 중국어 번역서들을 통해 들어오는 서구의 근대적 사상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운동이 潘佩珠(판 보이 쩌우)와 潘周楨(판 쭈 진)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儒者 출신 潘佩珠는 중국의 변법운동이나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은 자강조국을 만들고자 활동하였다. 그는 1906년 월남 유신회를 조직하여 초기의 손문과 비슷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우선 일본에 접근하여 일본으로부터 무기를 원조받아 봉기하려 하였다. 그가 단신 일본으로 가서 의지한 사람은 중국의 변법파 망명객 양계초였다. 그의 도움으로 일본의 朝野와 접촉하고 이후 일본을 월남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고자 하였다. 그가 아무 소개도 없이 양계초를 찾아가 독립운동의 뜻을 밝히고자 필사하여 양에게 준 것이 뒤에 양의 알선으로 1905년에 출판된 <월남망국사>인데 이는 당시 우리나라의 뜻있는 사람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는 경고의 글로서 유명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프랑스가 해외에 정세를 살피거나 신학문을 배우는 것을 꺼려 월남인의 해외유학을 금지하였는데, 이에 대항하여 일본으로의 유학을 권장하는 東遊運東을 전개하였다. 한편 潘周楨은 근대적 사설학교인 東京(통킹)義塾에 적극적이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난 뒤에는 그에 자극받아 군주제 아닌 공화제 독립을 꾀하여 1912년 월남광복회를 조직하고 중국국민당과 손잡고 광동성 일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종사한다. 월남 광복회보다 더 근대적인 독립운동 조직으로서는 阮大學(구엔 다이 혹)의 월남국민당과 월남공산당이 있다. 중국 국민당을 본따 河內(하노이)에서 결성된 월남국민당은 1930년 초 조급하게 봉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다음에는 항불운동의 주도권이 베트남 공산당으로 넘어갔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이 시기의 무장봉기에 부정적이었다. 인도차이나공산당(베트남노동당)의 지도 베트남의 현대사의 전환점에는 4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1930년 2월의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결성과 그 활동이고, 둘째는 1945년의 8월혁명의 성공과 노농국가의 수립, 셋째는 1954년의 7월의 반불항거의 승리로 국토의 절반을 해방시켜 사회주의로의 진전을 이룩한 것이며, 넷째는 1975년의 춘계 대공세와 봉기의 성공으로 반미 구국항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전국토의 해방 및 사회주의 개조와 건설로 전진하게 된 것이다. 월남공산당은 阮愛國(구엔 아이 곡, 후일의 호지명)에 의해 지도되었는데. 일찌기 파리에서 프랑스 공산당 창립에 참여하였던 그는, 1925년 광동에서 「월남청년동지회」를 결성하였고 그뒤 1930년에 월남공산당(뒤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이라 함)으로 결집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중 일본이 불령인도지나에 진주하자, 본국없는 식민정부(프랑스 본국은 독일에 항복하였다.)는 일본에 충실히 협력함으로써 식민통치를 유지하였고, 일본도 프랑스의 식민통치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일은 삼가하였다. 2차대전의 종결이 가까와서야(1945.3) 일본은 그때까지도 명목적으로 존속하고 있던 保大(바오 다이)황제로 하여금 안남(중부)과 동경(북부)의 독립을 선언케 했지만, 이 역시 일본인 고문이 통치하는 또 하나의 식민정부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권위가 시드는 전환기를 이용하여 월남독립군은 불군을 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불군에 속한 월남인병사를 탈영케하여 조직을 확대하면서 일본의 패전을 맞았다. 이것이 2차대전 후 동경지방에서의 월남인정권의 기초가 되었다. 호지명이 이끄는 좌익세력은 지하활동을 하다가 중국에서의 항일 국공합작에 힘입어 중국을 근거지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중심의 하나는 1941년에 결성된 월남독립동맹의 성립이었다. 그러므로 월남에서는 바오다이를 중심으로하는 표면기구와 월남독립동맹으로 대표되는 지하세력이 공존하다가 2차대전의 종결을 맞아 새로운 사태로 전개되었다. 胡志明(호치민)과 베트남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자 호치민은 일제봉기를 명령하고 8월 19일 하노이를 손에 넣는다. 9월 2일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한 그는 정부주석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영국. 중국과 거래 끝에 다시 베트남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해방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새로운 투쟁이 호치민의 어깨에 지워졌다. 그러나 이번에 선택한 무기는 총이 아니라 협상이었다. 1946년 3월 그는 타협적 온건주의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베트남을 완전 독립이 아닌 프랑스연합. 인도차이나연합의 일부로 남아 있도록 프랑스와 타협했다. 그러나 그는 인민들 앞에 나가 "싸움보다도 교섭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5년만 지나면 교섭에 의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데, 지금 어떻게 5만이나 10만 명의 사람 목숨을 희생시킬 수 있단 말인가?"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호치민은 결코 무분별한 전쟁지상주의자는 아니었다. 무력투쟁과 외교교섭을 적절히 섞어 장기적인 이익을 취하는 것이 그의 일관된 전략이었고 타는듯한 눈매와 꿰뚫는 듯한 목소리, 신념에 찬 몸짓과 명확한 전망, 그리고 불가사의한 친근함은 대중을 자신의 편으로 삼는 가장 뛰어난 무기였다. 그러나 파리와 하노이의 불안한 동거는 이내 깨졌다. 1946년 11월 프랑스군은 하이퐁의 베트남인 주거지역을 포격해 6천명을 살해했고, 호치민은 대불항전을 지령한다. 30년이 지나서야 끝을 맺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던 베트남전쟁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프랑스와의 전쟁의 고비는 1954년의 디벤비엔푸 전투였다. 호치민의 가장 충실한 동지이자 또 하나의 영웅인 보 위엔 지압이 이끄는 부대는 디엔비엔푸 프랑스군 요새 주변의 지하로 400km에이르는 참호와 갱도를 뚫어 요새를 함락시켰다. 그결과 북위 17도선을 잠정경계선으로 해 베트남을 남. 북으로 분할하는 제네바협정이 체결되었다. 프랑스군은 물러갔지만 '세계질서의 수호자' 미국이 그 자리를 메웠다. 1945년부터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한 미국은 1955년 고 딘 디엠이 월남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본격적으로 그를 지원했다. 1960년 12월 월남의 공산주의자들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했고, 호치민은 베트콩을 지원했다. 베트콩에 물자와 인력을 지원하던, 북베트남~라오스~캄푸치아~남베트남으로 이어지는 밀림 속의 그물같은 보급로는 '호치민 루트'로 불렸다. 미국의 개입도 확대됐다. 특히 1964년 통킹만을 초계하던 미 제7함대의 매독스호의 피습을 신호탄으로 1964~65년의 동계 공세, 1965년 11월의 이에드랑 계곡전투., 1967년 11월의 중부고원전투, 1968년 구정공세 등 극으로 치닫는 전투가 끊임없이 계속됐다. 한국. 뉴질랜드. 오스트리아 등이 참전해 국제전의 양상도 띠었다. 끝을 알 수 없던 전쟁은 1970년 닉슨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방향으로 겨우 물줄기를 틀었고 1973년 월남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의 티우 정권은 독재와 탄압정치를 계속했고, 1975년 1월 북베트남의 전면공세와 미군의 철수 속에 급속히 몰락했다. 그러나 전쟁의 맨 선두에 서서 싸움은 이끌었던 호치민은 승리의 영광을 안지 못했다. 그는 1969년 9월 3일 심장병으로 숨졌다. 평생을 독신으로 보낸 까닭에 그의 임종을 지켜보는 가족 하나 없이. 뒷날 베트남인들은 이 '살아있지 않은' 영웅에게 사이공시의 이름을 호치민시로 바꿔 존경과 애정을 표시했다.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하고 줄곧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했지만 호치민은 공산주의의 면모와 함께 민족주의자의 냄새를 짙게 풍겼다. 농민이 대부분인 현실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해 독특한 혁명의 길을 창조했다. 그에게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는 칭송은 결코 과분한 것이 아니다.
http://blog.naver.com/zinnie78/140005219240에서 발체
베트남 근대사의 연대별 중요 사건
1930년 ~ 호치민 인도차이나 공산당 설립
1940년 ~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점령(일본군은 프랑스에게 베트남을 위탁통치 시킴)
1945년 ~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베트남 독립선언
이때, 제네바 협정에 의해 중국군이 베트남 북부점령, 남부 사이공은 프랑스군이 점령.
1946년 ~ 중국군 철수. 프랑스군의 베트남 통치, 베트남과 프랑스군의 전쟁발발
1954년 ~ 디엔비엔프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 항복
남북이 본격적으로 분할, 북부는 호치민의 공산당, 남부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민주주의
1956년 ~ 남부 사이공의 대통령 선거로 디엠정권 집권.
불교탄압과 지도층의 부패로 정국혼탁.
1963년 ~ 민 장군의 쿠테타로 디엠 사망, 티우 대통령 집권
1964년 ~ 베트남전 개전,존슨정부의 항모 파견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의무병 130명, 태권도 교관10명)
1968년 ~ 북부 베트남의 구정 공세(베트남 남부 주요100개 도시가 3~5일 동안 월맹군에 점령)
구정 공세 후 미국의 반전 여론으로 2만5천명의 미군철군
1970년 ~ 미국의 캄보디아(호치민 루트) 폭격
1973년 ~ 미군 철군
1975년 ~ 4월30일 베트남 통일
호지명(胡志明 호찌민)의 생애 및 투쟁사
호찌민(호치민. 베트남어: Hồ Chí Minh/ 胡志明 듣기 (도움말·정보)), 1890년 5월 19일 ~ 1969년 9월 2일)은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원래 이름은 응우옌신꿍(베트남어: Nguyễn Sinh Cung/ 阮生恭)이며 자(字)는 땃타인(베트남어: Tất Thành/ 必成), 호(號)는 아이꾸옥(베트남어: Ái Quốc/ 愛國), 츄옹(베트남어: thu Weng/ 秋翁)이다. 가명으로는 응우옌 아이꾸옥(베트남어: Nguyễn Ái Quốc/ 阮愛國), 리떠이(베트남어: Lý Thụy/ 李瑞) 등을 사용하였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호 아저씨(베트남어: Bác Hồ/ 伯胡)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호찌민이라는 이름은 깨우치는 자라는 뜻을 지녔다. 호치민은 가명과 필명이 160여 개 이상 되었다.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 운동의 주요 인물로 베트남 공산당, 베트남 독립연맹 등을 창건하였고, 1945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고 총리(1946-1955)와 대통령(1955~1969)을 지냈다.
호찌민은 1920년 대 초 사이공에서 프랑스 선적의 배에 선원으로 취직하여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가 유학하던 중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0년에는 중국에서 베트남 공산당(현 베트남 노동당의 전신)을 창건하여 이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베트남으로 돌아가 항일 독립 전쟁을 하였다. 전쟁이 종결된 1945년 9월 2일 프랑스 의 괴뢰로 전락한 응우옌 왕조의 황제 바오다이를 폐위시키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1946년, 프랑스와 독립 협상을 추진하였으나 프랑스가 협상 전에 베트남 남부에 임시 정부를 설치한 뒤 이를 코친차이나 공화국으로 발전시키자 이에 반발, 협상을 결렬시킨 뒤 반프랑스 전쟁을 감행하였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최종 승리하여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미국, 소련 등이 가담하면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면서 북베트남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전쟁을 지속하였다.
호찌민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9월 2일 베트남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 호찌민은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피식민지 국가의 정치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저명한 사회주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베트남어뿐만 아니라 영어, 중국어의 여러 방언과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타이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에도 능했다.
호찌민은 프랑스가 식민 지배를 하던 시기인 1890년 5월 19일 베트남 북중부 지방의 응에안 성 호앙쭈(Hoàng Trù)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응우옌신삭(Nguyễn Sinh Sắc, 阮生色)은 가난한 유학자였고, 어머니 호앙띠로안(Hoàng Thị Loan)역시 농사를 짓고 서당 훈장도 하였던 유학자의 딸 이었다. 세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누나의 이름은 밧리엔(Bạch Liên 白蓮, 후일 응우옌띠탄(Nguyễn Thị Thanh)으로 개명)이었고 프랑스 육군의 사무원으로 일하였다. 형 응우옌신키엠(Nguyễn Sinh Khiêm, 후일 응우옌땃닷(Nguyễn Tất Đạt0으로 개명)은 흙점도 치고 전통 의학으로 진료도 하였다. 또 다른 형 응우옌신뉘언(Nguyễn Sinh Nhuận)은 어려서 죽었다. 호찌민의 아명은 신꿍(Sinh Cung)이었다.[1]
호찌민은 아버지 밑에서 한자와 유학을 공부하였고, 일상에서 베트남어 구어(口語)를 표기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었던 꾸옥응으도 익혔다.[2]
1900년 8월 아버지가 후에의 말단 공무원이 되었지만, 1901년 2월 어머니가 병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아버지도 관직에서 오래 가지 못하고 얼마 뒤 면직되었다. 호찌민은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인 탓에 정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는데도 역사와 고전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였다.
호찌민은 베트남인 관리를 양성하는 프랑스-베트남학교에 입학했지만, 재학 중 반프랑스 민족주의적 사상을 가졌다고 하여 퇴학당하였다. 1904년 휴에 있는 프랑스어 문법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봄에 졸업했다. 그 뒤에 판티에트에서 소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나 월급이 박봉이라서 곧 그만두고 사이공으로 올라가 기술훈련원 견습생이 되었다. 그 후 1911년 응우옌 바(Nguyễn Ba)라는 가명으로 가명을 프랑스의 6000톤급 증기선(船)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 호의 견습 요리사로 승선, 프랑스에 건너갔다. 그러나 곧 그만두고, 선원으로 아프리카의 여러 항구와 프랑스와 알제리, 튀니지, 콩고 등의 프랑스 식민지와 미국, 유럽 제국을 돌았다.
►미국 생활과 프랑스 생활
1912년에 선박 요리사 보조로 일하며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1912년과 1913년에 뉴욕의 할렘과 보스턴에서 살았다. 파커 하우스 호텔(the Parker House Hotel)에서 빵 굽는 일을 했다. 1914년에는 배편으로 영국에 건너가, 영국 런던에서 하인, 견습공 등으로 생활하였고, 런던에서 생활하다 1917년 다시 프랑스 마르세유로 건너갔다. 그 뒤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정원사, 청소부, 노동자, 웨이터, 댄서, 사진 수정자, 요리집의 화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였다. 1918년에는 다시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정치적 시야와 사회 부조리에 대한 비판 의식은 갈수록 성장하였다. 미천한 직업을 전전하면서 1917년과 1918년 사이에 브루클린의 부유한 가정에서 일했고, 제너럴 모터스에서 생산라인 관리자로 일했다고 그는 말했다. 이 기간 동안 할렘에서 마커스 가비의 영향을 받았으며, 한국의 민족주의자들과 만나서 정치적 전망을 넓힌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현재의 런던 칼튼 호텔 주방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페이스트리 쉐프의 견습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쉐프인 오거스트 에스코피에(Georges Auguste Escoffier)에게 배운 적도 있다. 1917년 파리로 옮겨갔지만 그 해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9년에는 프랑스 사회당에 입당하여 정치활동에 나선다. 1919년 1월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 강화회의에 베트남의 독립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파리 체류 시절 그는 응우옌 아이꾸옥(阮愛國)이라는 가명을 썼다. 이때 쓴 아이꾸옥이라는 이름은 후일 그의 호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 사는 베트남인들을 조직화했고, 청결함과 신뢰를 쌓을 것, 집 주변 청소 정리 등을 하고 질서의식을 가질 것을 호소하였다. 1919년 6월 베르사유 회의에 베트남대표로 출석하여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이때 언론에 조명되면서 일약 유명해졌다.
►공산당 활동
1920년 프랑스 사회당 투르대회에서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지지파에 가담하였다. 러시아 공산혁명의 성공과 레닌의 반제국주의 정책에 자극을 받은 그는 1920년 12월 프랑스 사회당을 탈당하고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0년 호찌민은 마르크스주의를 배워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고, 재프랑스 베트남인 애국자단을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응우옌 아이 꾸옥》(阮愛國)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호찌민은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고 있는 베르사유 사무국에 애국단을 대표해 출석하였다.[3] 그는 "베트남인과 프랑스인을 법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할 것, 프랑스 의회에 베트남 대표가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것" 등 8개 항으로 이루어진 《베트남 인민의 요구서》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3] 그러나 조선의 대표단이 그랬던 것처럼 이 요구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호찌민은 회담장 복도에서 쫓겨났다.[3] 그러나, 이 사건으로 그는 유명해졌다. 이때, 그는 제국주의자들은 절대 스스로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고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소련에 호의를 가지게 되었다.[3](→파리 강화 회의)
1921년 프랑스 공산당의 지원으로 프랑스 식민지 인민연맹을 결성하고, 인민연맹의 기관지 《르 파리아(Le Paria[4])》를 편집·발행의 책임을 맡았다. 《르 파리아》에서 그는 프랑스, 독일, 영국의 식민지 정책의 부당성과, 프랑스의 베트남인 차별의 해악을 고발하였다. 호치민은 프랑스에서 노동자 계층의 많은 지도자들과 사귀었는데, 수년간 프랑스에서 반제국주의, 반식민지 투쟁활동을 벌이고나서 1923년말 모스크바로 갔다.
1923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아시아 담당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24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 출석, 동아시아 담당 상임위원이 되었고, 1925년까지 코민테른의 학교에서 공산주의 혁명사상을 익혔다.
►공산주의 운동과 혁명 활동
1924년 1월 블라디미르 레닌이 병으로 죽은 뒤 그는 러시아의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 Pravda>지에 레닌에 대한 고별사를 실었는데 그 내용은 당원들을 깊이 감동시키면서 주목받았다. 1924년 6월 17일부터 7월 8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5차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회에 적극 참여했다. 이 회의에서 그는 발표문에서 프랑스 공산당이 식민주의 정책을 좀더 맹렬히 반대, 비판하지 않는다며 비판했다.
1924년 12월 호치민은 중국 광둥 성 광저우(廣州)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리 투이(Ly Thuy)라는 가명을 썼다. 12월 그는 광저우에서 베트남 혁명청년협회(약칭은 탄 니엔(Thanh Nien))를 조직하고 사회주의적 민족운동가들에 대한 교육을 시작했다. 이 협회의 회원들은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한 반감을 가진 인사들, 식민지하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인사들, 정치적 신념 때문에 인도차이나에서 추방되었던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광저우를 중심으로 인도차이나 민족주의의 근거지를 마련했다. 그는 다시 소련으로 되돌아갔고 코민테른의 학교에서 사회주의 혁명 사상에 대한 공부를 계속했다.
1925년 다시 광저우로 돌아와 혁명청년협회의 일을 맡아보았다. 그러나 1926년부터 중국 국민당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장제스(蔣介石)가 1927년 4월 광저우에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추방하자 호치민은 다시 소련으로 피신하였다. 1928년 브뤼셀과 파리를 거쳐 타이의 사이암으로 갔다. 사이암에서 체류하며 그는 태국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활동, 이때는 소련에서 그를 동남아시아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표로 임명하여 2년 동안 이 직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중국 남부에 남아서 활동을 전개했고 그 근거지를 윈난성 쪽으로 서서히 이동해갔다. 1928년 베트남 혁명청년협회의 단원들은 1929년 5월 홍콩에 모여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는 하노이나 휴, 사이공 같은 베트남의 대도시에 청년 운동가들을 파견, 적극적인 조직활동을 펴기 시작했으나 호치민의 부관들 가운데 몇 사람은 지도자의 부재 속에 소극적으로 임했다. 이때 호치민은 모스크바로부터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으나, 자금의 부족과 중국 국민당, 일본군, 프랑스 총독부 행정기관 등의 단속과 방해로 활동은 순조롭지 않았다.
당초 그는 서신과 편지로 홍콩에 체류중이던 베트남 혁명청년협회 회원들과 공산당 결성을 추진하였으나, 자금과 인력, 여건의 어려움으로 뒤로 미루게 된다.
►인도차이나 공산당 설립
혁명가로서 자질을 배운 그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중국 남부 및 타이로 파견되었으며 베트남의 주변에서 혁명운동을 계속하였다. 중화민국에서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어 북벌이 시작되면서, 그도 광둥 성으로 가서, 《베트남 청년혁명동지회》를 창립했다. 1930년 1월 호치민은 사이암에서 베트남으로 돌아온 후 공산당 창당을 주관했다.
1930년 2월 3일 에 영국령 홍콩에서 그때까지 조직되었던 3개의 공산주의 조직의 대표를 모아 하나로 묶어 《베트남 공산당》을 창립했다. (곧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개칭) 홍콩 체류 시절 그는 '리 투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베트남 공산당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지나치게 소시민적이고 민족주의적이라는 스탈린의 충고를 받아들여 당 이름을 1930년 10월 인도차이나 공산당(PCI)으로 고쳤다. 그가 스탈린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은 베트남 공산당이라는 이전 이름에 내포된 소시민계급 민족주의의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였으며, 국제적으로 더 폭넓게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PCI는 베트남의 폭력적인 반란운동과 동시에 발족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탄압은 잔인했고, 공산당 인사들에 대한 무차별 사살과 고문 등의 행위를 가했고, 무력 충돌과 인력 손실이 계속되었다. 홍콩 체류 중 그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로부터 폭력 혁명분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해 말 코민테른에 의하여 권한을 부여받고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개칭하였다. 중국 서남부에서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를 결성하였고 중국 서남부와 베트남 북부지역까지 근거지와 연락소를 두었다. 《청년》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면서 조직을 홍보, 프랑스 식민통치 하에서 가난에 찌든 젊은이들이 동조하면서 이들을 포섭, 점점 당의 세력을 강화해 나갔다. 중국 서남부의 본부에서 훈련받은 베트남인들을 인도차이나 지하조직으로 파견하였다. 1931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검거 탄압을 피해 홍콩으로 피신하였다. 1931년 6월 6일 홍콩 체류 중 영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1933년 그곳 프랑스 경찰이 도망범 인도에 대한 승인을 영국 정부로부터 받자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곳을 빠져나와 상하이(上海)로 도망쳤다. 1933년 여름 오랫동안 은신해 있다가 그해 가을 열차편으로 소련의 모스크바로 갔다.
반프랑스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대 운동 [편집]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7차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회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이 대회에서는 1930년대 초부터 호치민이 오랫동안 주장, 요구했던 프랑스 인민전선(Popular Front, 파시즘에 대항하는 비공산당 좌파와의 동맹)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원들에게 민족 해방을 위해서는 비공산당 좌파, 개량주의자들과도 연대해야 하고 온건 성향의 우파들까지도 끌어들여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가 직접 키우고 훈련시킨 당원들로부터도 의심과 오해를 샀으나 결국 1936년 인도차이나의 공산당원들은 호찌민의 설득과 권고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반식민주의 입장과 강경 투쟁론에서 한발 물러나 비공산당 좌파는 물론 온건 우파를 포함한 '반파시즘 식민주의자들'과의 협력을 고려했다.
1936년 프랑스 총리인 레옹 블룸(Léon Blum)의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는 좌파 세력들이 좀더 자유롭고 적극적인 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호치민은 1930년에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법정에서 받은 사형선고 때문에 베트남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망명생활을 하였다. 1937년 중순에 귀환을 계획했으나 1937년 블룸의 인민전선 정부가 무너지자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인도차이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이 되살아났다. 1938년에 이르러 인민전선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악조건에서 싸우게 되었다.
1938년 호치민은 중국으로 돌아가 화북 지방으로 가, 옌안(延安)에서 마오쩌둥(毛澤東) 등과 2개월 정도 같이 생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편집]베트남 독립 운동 [편집] 베트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9년 프랑스와 독일이 전쟁 중일 때, 프랑스의 패배를 예상, 호치민과 그의 부하인 보 구엔 지아프, 팜 반 동은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상을 진척시킬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프랑스가 독일에 패하였다.
1940년부터 중국 윈난성 쿤밍에서 중국 공산당 조직과 함께 활동하며 본국을 향해 홍보, 선전 전술을 활용하였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식민지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독일 정부와 손잡은 일본 정부는 남방진출의 일환으로 1940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에, 1941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주했다. 친독일 비시 정권과의 좋은 관계 유지를 위해 그는 기존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와 공동 통치 체제를 폈다.
호찌민은 1941년 1월 3인조·5인조 동지들을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파견하여 지하 조직을 구성하고, 각 지역의 청년 당원들을 모집하게 하고, 한편 지식인들을 포섭하게 하였다. 호찌민은 홍콩, 모스크바, 옌안(중화민국), 윈난 성 등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인도차이나 정세의 급변으로 1941년 2월, 윈난 성에서 국경을 넘어 조국 베트남의 까오방 성으로 들어왔다. 5월 그는 여기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남 독립을 위한 통일전선 조직인 《베트남 독립동맹》(월맹, 통칭 비엣민[5])을 조직하고, 즉시 일본군에 대한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어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 총봉기(總蜂起)를 목표로 단원을 모집하고 세력을 키웠다. 그는 이때부터 응우옌 아이 꾸옥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호치민이라는 필명을 정식 이름을 사용하였다. 베트민이 결성되면서 베트남 고유의 민족주의가 다시 강조되었다.
중국과 미국의 승인 획득 [편집]그러나 프랑스와 영국, 일본 등 제국주의 세력과의 전쟁을 위해 부득이 무장세력을 많이 보유한 중국 장제스 정부의 도움, 지원을 받아야 되었다. 2차 대전 후반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보고 일본의 패배를 예상한 그는 사회주의 성향을 철저히 숨기고, 중국과 미국에 전략적으로 접근하여 지원을 받아낸다. 1942년 중국 국민당의 간부를 만나기 위해 중국 쓰촨 성 충칭을 방문하였다가 프랑스와 일본의 스파이로 오인되어 중국 국민당 특무대에 의해 체포, 감금되었다. 장제스는 공산주의자인 호찌민을 믿지 않았고 그는 18개월간 구금당한다. 수감 시절 그는 매일 일기를 쓰는 한편, 〈옥중 서신 (Notebook from Prison)〉이라는 책을 집필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한문 단편 시들의 모음집으로 우울한 단상, 금욕적인 사고, 혁명을 주창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한문에도 능했던 그는 혁명활동의 차질을 받았으나 침착하게 대응, 중국 국민당 측을 설득했다.그는 동료들이 중국 남부의 최고 사령관인 장 파쿠에이와의 타협을 통해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에 반대하고 장 파쿠에이의 권익을 지지하겠다는 조건에 동의해 그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장 파쿠에이는 장졔스를 설득했고 그는 1943년 9월에 석방되었고, 이때 그는 베트민이 단순히 프랑스나 일본과 싸우는 독립운동 단체가 아니라 임시 과도정부이며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프랑스와 영국,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한편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부 수립을 약속, 그의 설득이 통하여 그는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월맹이 임시과도정부임을 승인받았다.
미국의 극동군 사령부에서는 특별히 낙하산 부대까지 투입하여 월맹의 활동을 지원하였는데 이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호치민은 미국이 프랑스, 스페인과 갈등하고 있다는 상황을 잘 이용하였고 미국의 지원으로 독립 전쟁을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되었다. 1944년말 그는 미국 군대와 접촉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미국의 첩보기관 미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약칭 OSS)와도 협력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베트남 독립동맹의 게릴라들이 중국 남부 산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그러나 1945년 프랑스 측에서 미국측과 교섭, 그가 공산주의자임을 들어 후원 중단을 요청하자 미국은 베트민의 지원을 중단한다.
독립 선언과 투쟁 [편집]독립 선언 [편집]1945년 1월부터 호찌민은 보 구엔 지아프의 요원들로 구성된 특별 기습부대를 지휘하며 서서히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지대를 넘어 1945년 봄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비밀리에 잠입하였다.
군사적으로 일본에 비해 열세인 편이었기 때문에 1942년, 중국 국민당군의 지원을 요구하려고 중화민국에 들어갔지만 공산당의 세력 확대를 싫어하는 국민당의 지방 군벌 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13개월간 각지 감옥을 전전하다가 석방되어 1944년말에 간신히 근거지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본군이 인도차이나를 점령하면서 모든 프랑스 관리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했다. 그는 다시 기회를 찾기 위해 노력하며 전황과 동태를 수시로 파악하였다.
1945년 8월초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호치민은 자신을 의장으로 하는 민족해방위원회가 결성하고 일본,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고 궐기하였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의 패전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민족해방위원회는 지상으로 올라와 총봉기하였다. 하노이, 훼에서 연일 시위가 일어났으며 월맹은 베트남 중부와 북부 지역을 빠르게 장악하였다.
일본군이 항복한 1945년 8월 13일 호찌민은 전국민에 총봉기를 호소했다. 4일 후 8월 17일에는 비엣민 주도하에 전국적인 민중봉기(베트남 8월 혁명)가 일어나 비엣민 군이 하노이에 입성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가 항복문서에 조인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그 해 9월 2일, 호찌민은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신께서는 인간에게 신성 불가침의 권리들과 생명, 자유, 행복을 누릴 자유를 주었다. ”
그러나 베트남의 중부와 남부에는 프랑스의 세력이 강했고, 이들은 독자적으로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수립한다.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바오다이 황제의 폐위와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였으며, 바로 호치민은 정부의 국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베트남의 분단
그러나 연합군의 협정조항 중에는 중국의 장졔스의 중국 국민당 군대가 일본군을 대신하여 16°선 북쪽을 장악하고, 남부는 프랑스가 혼란을 수습할 때까지 당분간 맡는 조항이 있었다. 그는 이에 반발하였지만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자 고민하기 시작했다. 샤를 드골 장군이 집권한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베트남의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였다. 10월 6일 드골은 자크 르클레르 장군을 사이공에 급히 파견, 10월 2일부터 8일까지 지나자 중무장한 프랑스군 기갑사단이 코친차이나 지역에 도착했다. 45년 12월 그는 남베트남을 장악했으나 프랑스 기갑사단의 출현으로 퇴각했다. 호치민은 계속 싸우는가 협상하는가를 두고 고민했다. 결국 협상하기로 결정했으나, 한편으로 군사 훈련을 계속하여 언젠가는 싸워야 할 것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였다.
호치민의 전략은 프랑스 군대를 이용, 북쪽에 있는 중국 군대를 퇴각시키게 하고 나서 독립의 승인, 르 클레르 군대의 철수, 베트남의 재통일을 보증할 프랑스와의 협약을 맺는 데 주력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협상을 강행, 1945년 10월 말부터 대표단을 보내 프랑스와의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프랑스 군대가 독립에 대한 대화를 거절하자 호치민과 프랑스 군대 양측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1946년 3월에 가서야 교착상태가 풀리면서 협상을 다시 진행하였다.
►독립 협상 결렬
1957년, 호찌민그러나 프랑스 정부가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군을 증파하자 호찌민은 프랑스 정부와 끈질긴 교섭을 통해 1946년 3월 하노이 협정을 성립시켜며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받게 되었다. 본 협정 조인을 위해 프랑스로 간 그는 프랑스 정부가 코친차이나를 분리하고 그곳에 친프랑스적인 정권을 수립시킨 사실을 알고 타결 직전에 교섭을 결렬시켰다.
1946년 3월 대치 상태가 다소 풀리자 호치민 편에서는 프랑스군에 제시한 요구에 대해 보다 폭넓은 지지기반을 얻으려는 생각에서 베트남 독립동맹 이외의 당들도 새로운 정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 쪽에서는 중국 군대의 철수를 얻어내기 위해 외교사절단을 중국에 보냈다. 중국 국민당군이 베트남 북부에서 철수하자 르클레르 군대 일부도 북쪽 하이퐁에서 물러났다. 호치민은 3월 6일 중국 군대의 철수가 확정된 뒤 프랑스군과의 협정에 조인했다. 협정조항에 따르면 베트남은 '자치정부·군대·재원(財源)을 가진 자유국'으로 인정되었으나, 계속해서 파리 시에 있는 프랑스 정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행사하는 프랑스 연방에 통합되어 있었다. 3월 18일 르클레르는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하노이로 들어갔고 군대는 제한구역에서만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퇴각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베트남과 프랑스의 극단주의자들과 베트남의 민족주의자들은 그 협정에 대해 불만스럽게 생각했고, 호찌민이 식민통치를 연장하려 한다 또는 사적인 욕심으로 음모를 꾸민다는 등의 비방이 계속되었다.
1946년 6월부터 9월의 프랑스 정부에서 주재한 2차 협정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고 파리에서 프랑스 정부와 2차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20일부터 11월 23일 우연히 하이퐁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고로 결렬되었다. 그해 11월 하이퐁에서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군대 사이에 충돌이 있은 후 프랑스 순양함은 하이퐁에 포격을 가했다. 거의 6천~8천 명의 베트남인이 포격으로 죽는 바람에 우호적인 화해에 대한 기대도 무너졌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희생 현장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하이퐁을 방문한 호찌민은 분개했다. 이 무렵부터 심장질환 등으로 고생하던 그는 병든 몸에 환멸을 느끼면서 좀더 호전적으로 보복하자고 나서는 추종자들의 요구를 즉각 수용한다. 12월 19일 그는 전쟁을 선언했고 이로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1946년 12월 퐁텐블로 회의가 결렬되자 프랑스에 대한 항전(抗戰)을 직접 지휘하였으며, 코친차이나 공화국과 그 후신인 베트남국이 프랑스의 괴뢰 정권임을 강조,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협력, 협조를 요청하였다.
프랑스군은 하이퐁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므로, 12월 19일 호찌민은 《전국민에 항전을 호소한다!》라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철저한 항전에 돌입하였다. 이것이 7년간에 걸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이다. 베트남군은 평야에서 철수하여 북부 산악 지대에 틀어박여 저항을 계속하였고 보응우옌잡이 인솔하는 게릴라 부대는 장비가 우수한 프랑스군을 압도하였다. 그는 북베트남의 산악 지대에서 은신하면서 전쟁을 지휘하였다. 1947년 중반 북베트남의 어느 야산에 피신해 있던 호치민은 다시 파리와 접촉, 일시적으로 휴전하였으나 파리에서 제시한 조건은 황실의 복원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의 코친차이나 공화국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 후신인 베트남국을 지원했다.
1948년 프랑스 정부는 1945년 8월에 혁명을 지지하여 사임했던 전 응우옌 왕조 안남 제국의 황제 바오다이를 다시 안남의 황제에 앉혀주겠다고 제안했다. 프랑스가 바오다이의 복위를 조건으로 낸 것은 베트남의 전통 지배계층을 지지하여 월맹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황제와 귀족들의 복귀와 신분제 사회는 있을 수 없다며 호찌민은 반발했고, 그는 3차 협상은 전면 백지화했다. 이어 지압의 지휘를 받는 베트민 군대에 유격 게릴라 전쟁을 명령, 게릴라 전법과 테러 행위를 동원해 프랑스군과 바오다이의 군대를 봉쇄하거나 기습작전으로 승리하였다.
1953년말 베트남의 중부와 북부 지방 대부분은 베트민에게 장악되었고 좀더 큰 도시들도 사실상 포위상태에 있었다. 또한 베트남 남부에도 베트민이 심어둔 첩자들이 암약하면서 프랑스의 정책을 방해, 교란했다. 프랑스군은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교전한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기습공격으로 승리, 프랑스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 결과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고 프랑스군이 철수함으로써 베트남은 80년에 걸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과 중공의 내정 간섭과 프랑스, 미국의 막후 개입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다. 결국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은 17도 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분할되었다. 그는 이에 반발하였으나 소련과 중공이 개입한 것을 알게 되면서 침묵하였다. 이후 그는 '우리는 폭격 위험 아래서는 절대로 협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결사 항전의 뜻을 밝혔다.
1954년 5월 말부터 7월 21일까지 8개국 대표들이 베트남 독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트남 대표들과 함께 제네바에 모였다. 이때 베트남 대표는 2개 대표단이 파견되었는데 호찌민 지지자들로 구성된 팜반동의 북베트남의 대표단과 바오다이와 그 지지자들로 구성된 남베트남의 대표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베트남은 이미 1945년부터 프랑스의 지원으로 코친차이나 공화국이 수립된 이래 프랑스와 미국의 영향력하에 사실상의 정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54년 5월부터 2개월간의 회의 끝에 8개국 대표들은 베트남이 따르기로 되어 있는 1가지 협정을 체결하고서 회의를 끝냈다. 협정에서 1956년에 실시하기로 예정된 선거 전까지는 베트남을 17°선의 경계로 나누었다가 선거 후에는 베트남인들이 통일된 정부를 세우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팜반동 등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바오다이의 지지자들도 공산 정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함으로써 통일 정부에 대한 결론을 보지 못한다.
또한 이 조약에서는 1946년 프랑스와의 협정에 조인했던 호치민이 이 조약을 받아들이고 프랑스나 미국, 일본 등 어느 나라에 대해서든 저항을 중단해야 된다는 조건부가 달렸다. 그러나 협상 막판에 베트남 총선거에 대해 바오다이의 지지자들과 미국, 프랑스는 부정적이었고, 결국 미국과 남베트남의 선거기한 연기 주장이 관철되면서 그의 뜻은 관철되지 못한다.
►농지 개혁과 외교 활동
1945년과 1946년, 1947년 그는 베트남 공산당 내부의 트로츠키 주의자들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였고,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친일파, 친프랑스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과 항일, 항프랑스 전쟁에 가담했던 민족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공개비판을 가한 뒤 무자비한 숙청과 처형을 지시했다. 호찌민과 그의 동료들이 장악한 북베트남은 남쪽의 광대한 농업지역과는 단절된 지역이었고, 수산업 외에는 자원이나 유산이 빈약하였다. 경제 건설을 목적으로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호찌민은 중국과 소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소련에서도 소극적이었고, 중국에서도 다소 소극적이었다. 불리한 상황에서 호치민은 더욱 탄압적이고 철저히 전체주의적인 통치를 계속해 나가게 되었다.
1955년부터 1956년 농지 개혁을 통해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면서 다시 탄압과 숙청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인들에게 '호 아저씨'로 알려진 것처럼 이미지 홍보 효과와 독립운동을 통해서 인심을 얻은 호치민은 마음만 먹으면 대단한 인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그는 부득이 지주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구 왕당파까지 숙청하는 등의 공포정치를 감행한다.
그는 소련과의 관계가 긴밀했지만 아시아 혁명 당시 중국이 맡았던 초기 역할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시아에서 중공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소련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는 한편, 소련과의 관계를 활용하는 일에 몰두하였으며, 베트남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강대한 공산주의 두 동맹국 사이에서 능숙하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1955년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방문하는 한편 1958년에는 중립국이던 인도의 뉴델리와 자카르타를 방문하여 외교 관계를 형성하였다. 중국과 소련과의 갈등이 계속되자 호치민은 1960년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과 중국 사이의 중재를 하기도 했다.
또한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중, 소 양쪽을 중재하는 한편 양쪽 모두를 지지한다고 하는 등 협상을 시도하였다. 또한 주변의 인도, 캄보디아 등과의 외교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결국 그는 두 공산주의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결과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그는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원조를 받았다.
►베트남 전쟁
1959년 북베트남에서 다시 전쟁에 개입했고 남 베트남에서도 고 딘 디엠 정권에 대한 게릴라(베트콩)들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미 프랑스가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에서 철수했지만, 당시 프랑스와 일본에 이어 베트남에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제네바 협정에 서명하는 대신 남부 베트남에 친미적인 정권인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 적극적인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시작했다. 그러나 베트남 공화국 정부가 제네바 협정에 따라 정해진 통일 선거를 보이콧하면서 반대파에 가혹한 탄압을 가하자,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독재 정치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어 1960년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 결성되었다. 해방전선은 베트남 노동당의 지원 아래 부패한 남베트남 정부와 격렬한 싸움을 시작했다.
남베트남의 정치적 불안정과 계속되는 해방전선의 투쟁에 베트남이 공산화가 될 것을 우려한 미국은 1964년 8월 2일에 발생한 통킹 만 사건을 구실로, 1965년 2월 7일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며 베트남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 기간을 통틀어 미군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군에 비해 우세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 남베트남 정부의 독재와 부패로 베트남 공화국의 정치적 지지도가 추락하면서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 지지를 얻기 시작했고,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바탕으로 해방민족전선은 주요 도시와 간선도로를 제외한 농촌 지대를 거의 완전하게 그 세력하에 두어 베트남 공화국군과 베트남에 주둔해 있는 미군에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여기에 소련과 중국의 군사적 지원, 특히 케싼 전투와 1968년 구정 공세를 계기로 사실상 미군이 전쟁에서 주도권을 잃자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의 지지도는 급감했고 결국 닉슨에게 후임을 내주었다. 이어서 1969년 제37대 대통령에 취임한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본격적으로 협상하기 시작했다.
►죽음과 그 이후
1966년 7월 17일 그가 발표한 성명서 가운데 '베트남 국민의 가슴에 독립과 자유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라는 구절은 북베트남인들의 통일전쟁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는 주제, 구호가 되었다. 만년의 그는 심장병으로 1940년대 중반부터 오래도록 고생하였고 제대로 된 진료를 받지 못했다. 호찌민은 생전에 남베트남을 정복하고 통일을 달성하는 데 최소한 3~5년 이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가 죽은지 7년만에 1976년 남베트남은 몰락하고 만다.
미군이 베트남과 협상을 시작하면서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즈음인 1969년 9월 2일, 24번째 독립선언 기념일을 앞두고 호찌민은 갑작스런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79세가 되던 해였다.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고, 재를 3등분하여 도자기 상자에 담아 북부, 중부, 남부에 뿌려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거대한 묘에 전시되었고,[6] 베트남 국민은 4일부터 11일까지 7일간을 전국민 애도 기간을 정하고 그를 추모했다.[7]
그가 죽을 당시 유산으로는 옷 몇 벌과 낡은 구두가 전부였으며 사적으로 재산을 축재하지 않았다. 그가 죽은 지 6년 후인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 성립되었고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은 호찌민 시로 개칭되었다.
베트남전쟁의 원인
1.베트남 전쟁에 대해
고 딘 디엠의 친미정권이 반공정책을 강화하자 남부 베트남 내의 공산주의자들이 1960년 12월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 월맹에게 조종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1963년 11월 장군 두옹반민의 군부 쿠데타로 고 딘 디엠은 실각하였는데 이때부터 베트남의 정국(政局)은 쿠데타의 악순환에 휩쓸려 무려 10여 차례의 쿠데타를 겪은 후 1965년 6월에는 장군 구엔 반 티우의 정권이 들어섰다. 티우 정권은 1966년 새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1967년에는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통령과 상·하 의원을 선출하였는데, 1969년 2월에 공산군의 전면공격이 개시되었다.
한편, 이보다 앞선 1965년 8월 ‘통킹만(灣)사건’을 치른 미국은 베트콩의 활동은 곧 월맹의 침략행위라는 견해를 표명하고 북폭(北爆)을 개시하였다. 베트콩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미군은 소탕전에 직접 뛰어들어 작전을 유리하게 이끌었고 민생안정·농촌건설에 주력하는 ‘평정계획’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이 전쟁에는 동남아시아의 집단방위를 목적으로 하여 한국을 비롯하여 필리핀·타이·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도 파병하였다. 1969년 2월 공산군이 베트남에 대하여 전면 공격을 개시하자 미국대통령 닉슨은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 계획’을 발표하였다.
1972년 1월 미국과 월맹 간의 비밀회담이 계기가 되어 1973년 1월 파리에서 미국·베트남·베트콩(남베트남의 공산당)·월맹 간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공산군은 협정을 위반하고 맹렬한 공격을 재개하여 1975년 1월 푸옥빈 성도(省都)를 함락, 점차 베트남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자 4월에 대통령 티우가 사임하고, 트란 반 후옹을 거쳐 장군 두옹 반 민이 난국 수습의 중책을 맡았으나 대통령 민의 평화협상 제의를 베트콩은 거절했다. 1975년 4월 30일, 월맹군이 사이공을 점령하자 30년에 걸쳤던 베트남전쟁은 막을 내렸다.
2.베트남전쟁의원인 : 당시는 세계가 냉전 체제였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미국과 중공의 대치상태였습니다. 베트남의 공산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개입을 하려고 하는데 직접적인 원인이 없었습니다. 미국은 베트남의 통킹만에 군함을 정박시켜 놓고 베트남내전에 개입을 하려하엿는데
공교롭게 통킹만의 미군함에 벼락이 떨어지면서 미국은 베트남의 공격이라고 우기고 베트남전에 직접적인 개입을 하게 됩니다.
이 사실은 통킹만에 정박하여 잇던 군함장늬 자서전에도 나옵니다.
3.베트남전쟁의경과 : 미국이 많은 구수품을 동원하여 베트남전에서의 우위를 점하려 하였지만 미국은 베트남의 지리적인 여건 및 그들의 민족성에 직간접적인 점령을 못하고 지리한 전쟁만 계속됩니다.지리한 전쟁끝에 미군은 물러 나고 베트남은 공산화가 됩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도 같이 철수하게 됩니다
4.베트남 전쟁 피해상황
미국의 전비 지원을 받으면서 싸웠던 프랑스군은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참담한 패배를 하고 베트남에서 손을 떼기까지 사망 및 행방불명자 92,299명, 부상이 117,928명(질병 48,672명) 총계 210,22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월남의 패망과정
▣ 미국, 수렁에서 발을 빼다
미국이 월맹과 휴전을 위한 비밀협상에 돌입한 것은 1968년 5월10일이다.
그 무렵 미국은 직접 전비(戰費)와 간접 전비를 합쳐 연간 495억 달러(1968년), 508억 달러(1969년)를 퍼부었고,
주월 미군 병력도 53만6천명선을 파병할 정도로 개입의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월남은 독자적인 힘으로 自主국방을 할 의지도 없이 미군의 도움만 요청했고, 이 와중에 정권은 부패와 내부분열을 거듭했다. 미국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진행되는 베트남전쟁의 수렁에서 발을 빼기 위해 월맹의 레둑토와 비밀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1973년 1월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 협상 끝에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회담이 열렸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미국의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
(20억 달러는 미국 직접 원조, 20억 달러는 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피폐한 월맹의 경 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월남·월맹·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등이 서명했다.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4개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위원단은 하노이와 사이공,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했다.
그리고 월남과 방위조약을 체결, 월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약속했다.
미군이 철수하지만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北爆)을 재개하기로 했다.
미군은 철수하면서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무기를 월남에 양도했다.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세계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처럼 철저한 제도와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적어도 휴전체제가 10년은 갈 것으로 낙관했다.
미국의 골칫거리였던 베트남전이 휴전되면서 全세계에는 평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닉슨의 데탕트 정책, 한반도에서 1972년부터 시작된 남북대화 등, 세계 평화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大勢)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착각이었다. 월맹은 미군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피폐해져 전쟁수행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평화회담에 나섰으며, 전략은 변함이 없으되 전술만 약간 바꾼 셈이었다.
레둑토가 키신저와 평화회담을 벌이는 한편에선 1950년대 중반에 수립된 대남(對南) 기본전략을 더욱 공고히 다듬었다.
그것은 「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창출하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조국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북한의 대남전략과 한치의 오차도 없다.
▣ 주월 연합군의 철수
1973년 1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그해 봄에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했다.
자유월남의 온 국민이 들떴고 나라 전체가 평화 무드에 젖었다.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낙관했다.
월맹군이 도발하면 즉시 美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對월맹 경제원조도 중단하며, 월등한 월남군의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누구도 공산군의 남침을 믿지 않았다.
월남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경제력 우위를 바탕으로 공산측 지배를 월남내에서 소멸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 믿음이 국방을 소홀히 하고, 극심한 정쟁(政爭) 의 원인이 된 것이다.
휴전무렵 월맹은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부족, 물자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기찬 대남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 려, 학생, 직업적 좌경인사, 반전(反戰)운동, 인도주의 운동 등 가능한 모든 운동체가 총동원되어 티우정권 타도를 외쳤다.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 「구국(救國) 평화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세력」이라 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
이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문제는 이 순수한 반부패 운동조직에 공산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反정부세력으로 변질됐다는 점이다.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한 공산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했다. 이들은 호치민이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인민혁명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다.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 명, 인민혁명당원 4만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월남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캄보디아 국경선 근처 빈룽성內의 지하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정부의 각 부처,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회의 내용이 하루 후면
상세히 보고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에 공산 프락치가 침투해 있었다고 한다.
반면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때 마다 대공 전문가들이 쫓겨나는 바람에 월남 대공기관과 정보기관은 형체만 남았다. 그들은 對월맹 정보수집은 물론, 월남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도 무력했다.
한 나라를 가장 쉽게 망하도록 하는 길은 그 나라 정보기관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 휴전협정의 붕괴
1974년 10월, 월맹의 하노이에서는 닉슨 대통령이 사임되는 시점에 극비리에 비밀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 레준 서기장은 월맹이 남침공세를 편다 해도 월남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못할 것이라며 남침전쟁 결론을 내렸다.
1975년 1월8일,
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을 월남 공격에 투입하기 위한 군사력 배치가 개시됐다.
이 총공세를 현지에서 지휘하기 위해 월맹군 육군참모총장 반띠엔둥 대장이 1975년 2월5일 하노이 공항에서 AN-24기 를 타고 극비리에 이륙했다.
반띠엔둥 대장 은 2월6일 호치민 루트를 타고 중부월남 고원지대의 전략요충인 반 메뚤의 서쪽 밀림지대에 잠입했다.
그가 중부월남으로 잠입한 사실을 기만하기 위해 하노이에서는 그와 비슷한 가짜 반띠엔둥이 볼가 승용차를 타고 매일 저택에서 월맹군 총사령부로 출퇴근을 했다.
반띠엔 둥은 배구를 즐겼는데, 운동시간이 되면 가짜 반띠엔둥이 나와 배구를 하는 등 철저히 위장을 했다. 거덜이 난 월남 정보기관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자유월남 지도자 티우 대통령 생각은,『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명이 있고.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월맹도 북폭으로 거덜났는데 저들이 무슨힘이 있어서 침략할 생각을 하겠느냐?』며 월맹은 경제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것으로 낙관하여 우습게 보고있었다.
평화에 눈이 멀어 有備無患(유비무환)을 잊었고, 군(軍)도 총체적으로 부패되고 있었다.
월남은 몇 개월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극심한 혼란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거대 여당이었던 대월당(大越黨)이 분열하여 각개약진을 거듭했다.
1975년 9월에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지역감정이 드샜고 분열이 심했다.
정치인들은 대선(大選)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과 갈등을 연출했다.
그 무렵 반공을 외치고, 조국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익 인사들은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다. 1973년까지 年 평균 840명이 암살을 당할 정도였다.
티우 대통령이 수상으로 지명하려 했던 유명한 반공(反共)지도자 웬반흥, 사이공대학의 우익 학생지도자, 반공을 주장하는 언론인들이 암살되면서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은 침묵을 선택했다. 고질적인 사회악이었던 뇌물과 마약,매춘과 도박이 정치권의 혼란과 맞물리면서 전염병처럼 전국을 휩쓸었다.
정부의 부 정부패는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계층간에 갈등이 조장됨으로써 공산 프락치들의 활동 공간은 점점 넓어져 갔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군내(軍內) 부정부패였다.
당시 월남 정규군은 58만명이었는데, 이 중에 10만명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 심지어 장군들이 운영하는 사(私)기업에 파견돼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마저 있었다.
이처럼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군인들을 「유령군인」,「꽃 군인」이라 불렀다.
▣ 패망으로 가는 지름길
비록 독재는 했지만 청렴결백했던 고딘디엠 대통령 시절엔,
월남군은 용맹하게 공산군과 맞서 싸워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티우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지도층의 부패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티우 대통령의 사위가 입대했는데, 이름만 군적에 둔 채 외국유학을 떠났다.
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입대한 다음 뇌물을 써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월남 지배층은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황금 만능주의에 빠져 천민자본주의의 극단을 보였다.
반면 국가에 대한 의무는 등한시함으로써 체제 파괴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후방이 부패와 혼란에 빠지고 사회전역에 정의감이 상실되자, 일선의 군인들은『저따위 썩은 정권과 나라를 위해 내가 왜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하며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이것이 월맹보다 월등한 경제력과 막강한 화력을 가진 월남군대가 허수아비처럼 붕괴한 가장 큰 원인이다.
1975년 3월10일 새벽 2시, 월맹 공산군이 중부월남에서 총공세를 감행했다.
각지에 분산 고립돼 있던 월남군은 곳곳 에서 패퇴하여 밀리기 시작했다.
월맹군의 사이공 진격이 가까워옴에 따라 월남군이 크게 위협을 당하고 있는 시점에서 구엔 반 티우가 이끄는 월남정부는 사이공 주변에 방어선의 구축을 서둘렀다.
그러나 월남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은 월맹 군대가 사이공에서 북동쪽으로 241km 떨어진 다리아크 지방 중심지인 반 메 투오트를 공격한 3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월맹군은 월남군의 저항없이 마을을 장악했으므로 월남의 북부 지역이 공산주의자의 수중에 떨어질 위험에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수많은 탱크의 지원으로 월맹군은 1973년 1월의 휴전선을 형성했던 타치한 강을 건너 남쪽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티우 대통령의 "전선사수"라는 공약에도 불구하고 저항도 없이 무질서한 퇴각만을 계속해온 월남군은 월남의 북부 절반을 월맹군에게 포기했다.
식민시대의 수도였던 후에시는 월맹군이 월남의 2대도시이자
한때 주월 미 해군사령부였던 다낭시를 장악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할 때, 이미 수많은 공포에 질린 피난민은 때때로 월맹군의 대포와 로켓에 의해 공격을 받으며 해변으로 이동했다.
미국은 해군 수송선을 피난민의 철수를 돕기위해 파견했으나
월맹군이 해안을 공격해옴에 따라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3월말 현재 월남군은 사실상 지리멸렬한 상태에 빠졌다.
정보소식통에 의하면 군대의 절반이 도망중이고 월맹군의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의 사이공 공격이 임박해 오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면서 사이공은 패배주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다. 하노이 라디오방송은 베트콩이 티우 대통령을 제외한 월남정부 지도자와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월맹군에게 허를 찔린 티우 대통령은『즉각 정쟁(政爭)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한편 국제휴전감시위원단에게 『공산군의 북위 17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미국에는 방위공약의 이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어느것 하나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티우 대통령의 對국민 호소가 발표되자「구국(救國)평화회복 및 反부패 운동세력」의 지도자 짠후탄 신부는 이렇게 답했다.
『중부월남 고원지대에서 反민주, 反독재 부정부패를 일삼는 티우 정권에 항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그곳에 월맹군은 없다. 티우는 책임지고 사퇴하라.』
짠후탄 신부는 미국의 대월(對越)방위공약을 믿었고, 더 이상의 월맹군 공세는 불가능 하다고 착각했다. 따라서 이 기회에 티우 대통령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어 몇개월후 실시될 대선에서 자기들이 미는 후보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이런 발언을 한 것이다. 다른 야당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와중에 웬까오끼 前 부통령은 티우 대통령 제거를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내부분열로 실패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 의지가 없으면 최신무기도 고철이다
반띠엔둥이 이끄는 월맹군이 중부월남 고원 지대에서 승리를 거둔 후 월남군은 지리멸렬,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다가 50%의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1975년 3 월26일 다낭이 함락됐고, 이후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을 달리듯 일사천리로 南下할때「유령군인」,「꽃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배와 비행기로 월남을 탈출하고 있었다.
1975년 4월21일 티우 대통령이 하야(下野)하고 재야(在野) 정치인 정반 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때까지 미국은 대월(對越) 방위공약은 이행되지 않았다.
1975년 4월29일 월맹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다.
사이공에는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다. 라이케에 주둔중이던 월남군 제5사단장 레웬비 장군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 사단 병력을 이끌고 사이공으로 진격하기 위해 월맹군 포위망을 공격했다.
이 와중에 월남군 제5사단은 월맹군 1군단 대병력과 결사항전을 벌이다 궤멸당했다.
사단장 레웬비 장군은 조국의 패망을 비통 해 하면서 권총으로 자결, 조국과 운명을 함께 했다.
1975년 4월30일 월맹 공산군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월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 했다.
정오가 지나서 월맹 국기가 사이공의 대통령궁에 게양되었다.
9일간의 월남 대통령이었던 두옹 반 민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조건 항복했고, 사이공은 호지명 시로 개칭되었다.
수많은 월맹군의 탱크와 중공제 트럭이 사이공으로 밀려 들어왔다.
사이공의 대부분 시민들은 베트콩의 도착을 환영했다.
수천의 월남병사들은 사이공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군 헬리콥터에 자리를 얻을 수 없어 강에 있는 보트를 타려했으나 많은 수가 자리를 얻지 못했다.
게다가 공산주의자들은 외부와의 통신을 중단했다.
파리 보고에 따르면 임시 혁명정부 대표는 사이공의 함락을
"베트남을 위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승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미국의 철수는 전쟁수행 만큼이나 무질서하게 보였다.
지난 며칠간 포드 행정부는, 사이공으로부터의 미군 철수에 대해 첨예하게 대립해 왔다.
포드 대통령은 결국 공항이 총격으로 패쇄된 후에 긴급 헬리콥터로 철수를 명령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철수작업이 지난밤에 끝이 났다.
미 국방성이 추정한 시간보다 5배나 더 걸린 19시간이 걸렸다.
저녁 7시 52분 11명의 마지막 해병 대원이 대사관을 떠났다.
그들은 미국 역사상 가장 분열된 전쟁을 치루고 철수한 마지막 병사들이었다.
위험상황으로 판단한 후 약 1천명의 미국인과 5천명 이상익 월남인이 남지나해의 해군 수송선으로 공중 이송되었다. 또 더 많은 사람들이 작은 보트로 이 지역을 떠났다.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7만의 월남인들이 미국에 다시 정착하게 될 것이라고 추산했다. 주월 미국 대사인 그레엄 마틴은 사이공에서 해군선으로 안전하게 철수된 직후 미국 정책을 비난했다.
"만약 우리가 한 국가로서 수행해야 할 과업이라고 판단한 후 이 과업을 계속 한다면, 또 우리의 공약을 지킨다면 우리는 철수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말하고 전 대통령 구엔 반 티우의 강력한 지지자로 여겨지는 마틴은 모국을 부끄럽게 여기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다.
티우는 공산주의자들이 월남과의 협상을 거절하면서 그들에 의해 사임하도록 강요받았는데 미국에 대해 충분히 할 말이 있었다.
비록 그가 10년 동안 워싱턴의 지지를 받았지만 티우는 미국을 믿을만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그는 국무장관 키신저를 가리켜 월남에 월맹군의 진주를 허락한 장본인이라고 비난했다.
월남 대통령 정반 민은 포로가 됐고,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월남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미국의 방위공약은 없었고 대신 사이공 함락 직전, 월남군 장성과 그 가족을 헬기에 실어 남지나해상의 항공 모함으로 철수시킨 후 미국으로 망명시켰다.
그러나 월남군 제2군단장 만푸 소장, 특별부대사령관 반토 소장, 제4군단장 웬꼬아 남 중장, 제5사단장 레웬비 준장, 제7사단 장 웬반하이 준장 등 5명은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고 모두 권총자결했다.
사이공 함락후 월남의 군인·경찰·공무원·지도층 인사·정치인들은 모두 체포돼 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고, 이 중 다수(多數)는 생사불명 상태가 됐다.
공산정권은 형무소가 모자라자 과거 월남군 부대시설을 형무소로 개조해 그곳에 죄수들을 수용하기도 했다.
反체제 운동을 벌이던 종교인, 학생, 민주 인사들도 모조리 체포 수감됐다.
그들의 수감 명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反체제 활동을 하던 자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한편 월남 국민들은 소형선박을 이용해 목숨을 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명, 이중에 배가 전복돼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명,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명으로 집계됐다.
베트남전의 실체, 월남전의 진실
제 1차 베트남 전쟁 1946년 ~ 1954년 -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제 2차 베트남 전쟁 1959년 ~ 1975년 - 미국과의 독립전쟁
베트남에서는 30년 전쟁이라고도 부릅니다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간첩, 빨갱이들 때문에 자유월남이 망한 전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건 틀린 말입니다.
베트남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베트남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베트남은 왕조국가였는데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1885년 베트남 전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속하게 됩니다. 1940년 프랑스는 독일 나치에 패해서 베트남에서의 프랑스 입김은 약해졌는데 이 틈을 타서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치민은 베트민(베트남 민주공화국, 월맹)을 세우고 독립운동을 전개합니다.
베트민은 1945년 8월 혁명을 통해 프랑스를 쫓아냈지만, 양아치같은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났으니 베트남은 다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며 극동원정군을 파견합니다. 프랑스 극동원정군은 사이공에 베트남 괴뢰국을 세워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려 했고, 호치민은 이에 맞서 하노이에 북베트남을 세워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됩니다. 그리하여 1954년 제네바 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양측은 치열하게 싸웁니다. 북베트남은 민족의 독립을 주장했고,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제를 폐지하고 국민들에게 공평하게 토지를 분배했습니다. 자신의 땅을 갖게 된 베트남 국민들은 북베트남을 절대적으로 지지했고, 그 결과로 프랑스가 쫓겨남으로써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는 공식적으로 해체됩니다.
제 1차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제네바 협정에 따라 총선거를 통해 베트남 정부를 탄생시키기로 했는데, 프랑스 앞잡이 노릇을 하던 남베트남의 고 딘 디엠 장군은 총선거를 거부하고 스스로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됩니다. 그리고 토지개혁으로 땅을 분배받은 농민들로부터 다시 땅을 빼앗고, 남베트남의 민족주의 운동가들과 공산당원들을 대학살합니다. 고 딘 디엠 정권의 이러한 횡포는 미국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남베트남 국민들은 고 딘 디엠 정권에 저항하면서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한 대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며 무장투쟁을 벌입니다. 1963년 사이공에서 불교 승려가 고 딘 디엠 정권에 항의하며 분신자살을 하였고, 미국 내에서도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것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아집니다.
미국의 지원이 약해지자 고 딘 디엠은 군부에게 살해되고 새로 집권한 남베트남의 군사정권이 북베트남과 유화분위기를 조성하자 베트남을 잃을 것을 염려한 미국은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일으켜 베트남에 대규모 군사력을 투입합니다.
( * 통킹만 사건 : 남지나해를 거쳐 통킹만에 접근한 미 해군 구축함을 북베트남군이 공격했다고 미국이 날조한 사건.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직접적 대규모 군사개입을 위한 구실을 얻기 위해 이 사건을 날조했다. 1971년 미국 뉴욕타임스가 1945년부터 미국이 베트남에서 정치군사적인 공작을 벌여왔음을 기록한 기밀문서인 펜타곤 보고서를 폭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미국은 북베트남에 100만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하고, 55만명이 넘는 군대를 파견했지만, 베트남 국민들의 게릴라 전술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내에서는 미국은 베트남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닌 단순한 침략자라는 것과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분노해 반전여론이 높아졌습니다.
결국 미국과 베트남이 정전협정에 합의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1975년 끝나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6만명이 넘는 군인이 목숨을 잃었고, 베트남은 민간인을 포함해 20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나라 군인들도 5천여 명이 전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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