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백산 구간(저수령~옥돌봉)
[소백산국립공원]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佳谷面)과 경북 영주시 순흥면(順興面)의 경계에 있는 국립공원.
1987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국립공원의 중심이 되는 소백산 비로봉(1,440m)은 북쪽으로 국망봉(國望峰), 남쪽으로 민배기재와 연봉을 이루어 예로부터 태백산(太白山)과 함께 신성시되는 산이다.
서쪽으로는 고위평탄면에 해당하는 비교적 반반한 고지가 펼쳐지고, 그 사이를 고수리(古藪里) 부근의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국망천이 흐르면서 어의실[於衣谷]을 기점으로 하는 등산로를 이룬다. 동쪽은 비교적 경사가 급하며, 낙동강 상류의 지류인 죽계천(竹溪川)의 수원이 되는데 이 계곡은 등산로로 이용된다. 비로봉에서 죽계천을 따라 내려가면 석륜광산(石崙鑛山)이 있고, 이곳을 지나 더 내려가면 초암사(草庵寺)가 있다. 석륜광산에서 북동쪽으로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계곡이 아름다운 골짜기가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석천폭포(石川瀑布) , 성혈사(聖穴寺) 등의 명소가 있다. 이 골짜기에서는 산천어(山川魚)가 잡힌다.
비로봉에서 남서쪽으로는 4km 가량 비교적 평탄한 고위평탄면이 나타나는데 이를 따라 내려가면 연화봉(蓮花峰)이 있고, 다시 4km 가량 내려가면 제2연화봉에 이른다. 그 중간에 국립천문대가 있다. 이 산의 남쪽 약 4km 거리에 죽령(竹嶺)이 있으며 제2연화봉의 동쪽 비탈면에는 희방사(喜方寺)·희방폭포 등이 있고, 더 내려가면 국도와 중앙선 철도의 희방사역이 있다. 소백산 부근에는 예로부터 산삼을 비롯한 약초가 많고 정상 일대는 주목이 군락을 이룬다.
◆[저수령] 저수재 850m
죽령만큼 교통량은 많지 않지만 경북 예천군의 위치에서는 수도권이나 중부 내륙으로 접근하는 가장 가까운 길이다. 대간의 북쪽 사면을 목초지로 개간하여 소를 기르는 소백산목장이 언저리에 있다. 고갯마루에는 휴게소와 주유소가 있지만 이용자는 많지 않다. 예천 쪽 1Km 지점에 아담한 용두리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고려 태조 11년(928년) 12월, 고려국의 남쪽 성인 고창군(현재의 안동)을 후백제의 견훤이 포위하자 왕건은 유금필을 대장으로 삼고 저수봉으로부터 나아가 크게 이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저수재가 개척된 지는 오래된 것 같다. 우리말로 ‘돼지머리고개’처럼 생긴 곳이다.
이곳은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와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를 경계로한 도계(道界)지점으로 경북과 충북을 넘나드는 이 고개이름은 옛부터 저수령(低首嶺)이라고 불리워 왔다. 지금의 도로를 개설하기 이전에는 험난한 산속의 오솔길로 경사가 급하며 지나다니는 길손들의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는 뜻으로 불렸다고도 하고, 한편으로는 저수령에서 은풍곡(殷豊谷)까지 피난길로 많이 이용되어 왔는데 이 고개를 넘는 외적들은 모두 목이 잘려 죽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도로는 지방도 927호로 1994년도에 개설 완료하여 충북과 서울 강원지방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관광 및 산업도로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남쪽(예천방향) 1.6Km 아래 지점에는 멀리 학가산이 바라보이는 아늑한 산자락에 경상북도와 예천군에서 괘적한 휴계공원을 조성하여 이곳을 지나는 많은 길손들의 쉼터로 제공되고 있다.
[소백산 관광 목장]
소백산관광목장은 충청북도 단양군과 경상북도 예천군과 경계로 하는 백두대간에 소백의 주봉에서 흘러내린 촛대봉과 옥녀봉 사이에 둥지를 틀고 있다(충북 단양군 대강면) 해발 850고지 소백산 저수령에 조성된 35만평의 광할한 초지에 한우, 사슴, 흑염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수백 마리의 소떼가 어우러진 말 그대로 전원의 목장마을이다.
◆[촛대봉(촉대봉)]
소백산 마지막 봉우리. 저수령 건너편의 옥녀봉과 마주 서 있다. 서쪽 사면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편으로 목장용 초지가 넓게 조성되어 있다. 이곳부터 대간은 방향을 틀어 서진하면서 내륙의 중앙부를 동서로 관통한다. 세워놓은 촛대와 같이 높게 솟아 있다. ‘촉대’는 촛대의 한자어다.
◆[투구봉]
정상에 있는 투구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시루봉] 1080m
소백산의 산괴가 월악으로 이어지기 전에 두 개의 봉우리로 마감된다. 시루봉과 촉대봉이다. 산의 성질은 벌써 월악을 닮아 바위로 빚어졌다. 저수령에서 출발해 간단하게 등반하고 유황온천으로 향하는 잉ㄹ반 산행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떡쌀을 찌는 시루와 같이 생겨서 붙은 이름인데, 밑에서 무엇이 받쳐주는지 뭉뚝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다.
◆[배재]
싸리재에서 서쪽으로 1Km 남짓한 거리에 위치한다. 북쪽 구릉 너머로 지나온 삼형제봉과 도솔봉, 묘적봉 등이 부채를 편 듯이 펼쳐진다. 남쪽의 척 밑에 저수령으로 향하는 927번 국도가 산모퉁이를 이리저리 감돌며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마을의 ‘등뒤(背)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용두리의 등 뒤인지 남조리의 등 뒤인지는 모르겠다.
◆[유두봉]
자료 못 찾음.
◆[싸리재]
저수령이 없던 시절 예천 용두리에서 이 고개를 거쳐 남조리로 넘어가면 단양에 닿을 수 있었다. 지금도 걷는 거리로는 저수령보다 싸리재가 더 가깝다. 남조리의 단양유황온천으로 내려서는 등산로가 이곳에서 갈라진다. 공터가 있다. 이구간에는 우리말 지명이 특히 많다. 싸리재도 이름 그대로 ‘싸리고개’다. 싸리>사리>솔이(松)이므로 ‘솔재’일 수도 잇으나 현지의 형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흙목]
흙목 근처 예천군 상리면 두성리에 흙목마을이 있다. 토항(土項)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명풍수 ‘박성’이라는 사람이 산천에 제사 지낼 때 향을 피운 곳이라고 하여 吐香이라고 적기도 한다. 吐香이 土項ㆍ흙목이라 와전되었다고 한다.
◆[뱀재]
솔봉에서 남쪽 1Km 지점에 있는 공터다. 대강면 남조리와 상리면 초항리의 중간에 위치한다. 예전에는 양쪽을 넘나드는 고갯길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오솔길조차 보이지 않는다. 뱀처럼 길다고 하여 뱀재로 부른다. 우리말이다.
◆[솔봉]
도솔봉 구간의 한가운데에 해당한다. 첩첩산중이기는 하지만 조망이 매우 좋다. 동쪽으로 예천군 고항리의 시골마을 풍경이 발끝에 놓이고, 서쪽으로는 단양유황온천이 있는 남조리 일대의 농경지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솔봉은 ‘소나무봉’이다. 고항리의 ‘송전마을’도 소나무가 많은 산촌이다.
◆[모시골]
마을터가 모시 광우리 같다고 모시골이라한다. 풍기군수 겸암 유운룡이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했다는 겸암굴이 마을 북쪽에 있으며 웃모시골 아랫모시골로 나뉜다.
◆[묘적령]
묘적봉 남쪽 사거리의 안부로 대간은 이곳에서 경북 예천군과 단양군의 지경으로 들어선다.
◆[묘적봉]
칼바위능선과 1185봉을 지나서 만나는 경승지다. 봉우리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먼저 만나는 것이 정상이다. 정상은 바위와 흙과 나무가 잘 조화를 이루면서 오똑하게 올라앉았다. ‘묘(妙)하게 쌓여진(積) 봉우리’이니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든 어느 방향으로 바라보든 경관이 빼어나다.
◆[도솔봉] 兜率峰 1314m
도솔봉은 형제봉과 더불어 가장 한적한 육산으로 꼽히고 있다. “여지도서”에 (두솔산:兜率山)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도솔천에서 따 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도솔산에는 도솔산성이 있었는데, 대동여지도에 따르면 ‘등강성’이라 했다. 6.25 당시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 도솔천 [兜率天, Tusita]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欲界) 6천(六天) 중의 제4천.
통속적인 어원 해석으로는 ‘만족시키다’의 의미로 설명하여 지족(知足) ·묘족(妙足) ·희족(喜足), 또는 희락(喜樂) 등으로 번역한다. 장차 부처가 될 보살이 사는 곳이라고 하며, 석가도 현세에 태어나기 이전에 이 도솔천에 머물며 수행했다고 한다. 현재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여기에서 설법하며 남섬부주(南贍部洲)에 하생(下生)하여 성불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도솔천은 미륵보살의 정토(淨土)로서, 정토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소백산 국립공원에 속하는 도솔봉은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형제봉과 더불어 가장 한적한 육산으로 꼽히고 있다. 도솔봉은 소백산의 축소판이라 불릴만큼 한 키나 되는 철쭉과 진달래가 화원을 이루며 각종 고산식물이 많다. 또한 숲길 가득 수목이 울창하고 계곡마다 꽃피는 초본류가 무성하여 발길 닿는 곳마다 풍치가 그만이다. 정상 도솔봉을 주축으로 삼형제봉과 묘적봉을 거느리고 우뚝 솟아 있으며, 능선에는 바위지대와 억새등이 있다. 정상 암봉에 서면 중령에서 장엄하게 뻗어 오른 소백산의 장릉을 끝까지 바라볼 수 있어 황홀하고, 남쪽으로는 활같이 구부러지면서 황정산으로 이어내린 백두대간이 아련하기만 하고, 단양팔경으로 유명한 산야가 펼쳐져 보인다.
◆[삼형제봉]
우리나라에서는 ‘형제봉’이라는 산 이름이 유난히 많다. 대부분 엇비슷한 높이의 봉우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거나 나란히 늘어서 있는 형상을 산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봉우리가 두개면 ‘형제봉’, 세 개면 ‘삼형제봉’, 일곱 개면 ‘칠형제봉’으로 부르는 식이다. 이곳의 ‘삼형제봉’도 예외는 아니다. 부분적으로 암릉을 형성한다.
◆[죽령] 689m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과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경계의 소백산맥에 있는 고개.
높이 689m.도솔봉(兜率峰:1,314m)·연화봉(蓮花峰:1,394m)·국망봉(國望峰:1,421m) 등 높이 1,400m 내외의 높은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는 험한 지세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조령과 더불어 영풍-단양 간의 주요교통로였다. 옛날 어느 도승이 짚고 가던 대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아났다 하여 죽령이라 했다 한다. 서쪽 사면은 충주호로 흘러드는 죽령천의 상류 하곡과 연결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아달라이사금 5년에 이 고개를 사람이 통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전한다. 비교적 높고 험한 고개이므로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걸어다녀야 했던 시절에는 이 고개에 도둑떼가 들끓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도둑떼에게 아들을 잃은 할머니가 도둑소굴로 숨어들어 망을 보다가 사람들에게 신호로 "다자구야"라고 외쳐서 도둑떼를 사로잡는 데 공을 세워 이곳 주민들은 매년 대강면 용부원리의 산신당에 모여 다자구 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중앙선이 이 고개를 통과하기 위해 '또아리굴'이라 불리는 루프식 터널을 건설했다. 죽령에서 단양까지의 서쪽 사면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여 높은 곳까지 개간되었고 동쪽 사면인 경상북도 풍기 쪽으로는 산림이 우거져 있다. 부근에 죽령 봉수와 보국사, 희방사·죽죽사가 있다.
아흔아홉 구비의 험하고 힘든 고개로 유명한 죽령은 옛날부터 오르막 30리, 내리막 30리라 했다. 소백산맥이 영남과 호서를 갈라놓는 길목에 해당하며, 추풍령, 문경 새재와 더불어 삼국시대 이래 군사적인 요충지로 영남권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3대 관문의 하나로 각광받아 왔다. 삼국사기에 ‘아달라왕 5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竹竹(* 642년 대야성에서 백제의 윤충에게 죽은 죽죽과는 동명이인)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갯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祠堂)이 있다’ 했다. 그래서 죽령이라 한다. 일명 대재. 삼국시대 이래로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죽령사(竹嶺祠)라는 산신사당이 있었다. 대강면 용부원리 죽령역에서 풍기읍 희방사역으로 빠지는 중앙선 철도가 길이 4,500m의 똬리굴(죽령터널)을 통하여 죽령 산허리를 통과한다. 또 중앙고속도로 단양~풍기 구간이 죽령터널을 통과하여 나 있다.
죽령은 한동안 고구려의 국경으로 신라와 대치, 삼국의 군사가 엎치락 뒤치락 불꽃 튀는 접전장이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말년 신라 진흥왕 12년, 왕이 거칠부 등 여덟 장수를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략, 죽령 이북 열 고을을 탈취했으며, 그뒤 영양왕 1년 고구려 명장 온달장군이 왕께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서도 죽령이 막중한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를 지날 무렵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우왕 8년(1382년)과 9년에 각각 왜구가 죽령을 넘어왔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 죽령 산신당(용부원리) 설화
매바우(鷹岩) 마을(면사무소 직원들은 아예 그런 마을 이름들을 뭉뚱그려 용부원리(用富院里)라 하는데 조선 시대 용부원이 있었다)에는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산신당이 있다.
죽령의 산신은 ‘다자구 할머니’다. 단양문화원이 펴낸 『단양군 민속조사 보고 서(김영진ㆍ1992)』에 따르면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죽령에는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國行祭)가 있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봄가을로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보내 작은 제사를 지낸다”고 죽령 밑에 주석을 달았다. 지금의 죽령사(竹嶺祠)를 짓고 산신제의 틀을 갖춘 것은 대략 조선 중기로 보이는데 이때 등장하는 산신이 바로 다자구 할머니다.
당시 나라에 바치는 세금으로 삼베니 무명, 엽전 따위가 죽령을 통해 넘어가는데 고갯마루에 숨은 도둑들이 사람 물건 할 것 없이 빼앗고 헤치지만 관병도 이를 다스리지 못했다.
어느날 두 아들을 잃은 할머니가 죽령의 산적을 잡는 데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던 토포군과 미리 짜고 산적굴에 들어갔다. ‘들자구야’는 기다리라는 신호였고 ‘다자구야’는 공격 신호였다. ‘다 자구’는 모두 잔다는 뜻이고 ’들자구’는 아직 덜 잔다는 뜻이다. 산적에게는 이름이 ‘들자구’와 ‘다자구’인 두 아들을 찾는다고 둘러댄 터였다. 마침내 산적이 모두 술 취해 잠 든 사이 노파의 ‘다자구야’ 소리를 신호로 토포군이 들이닥쳐 산적을 섬멸했다. 이에 나라에서는 죽어 산신령이 된 ‘다자구 할머니’를 기려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후 나라에서 할머니를 찾으려 애를 태우자 관리의 꿈에 나타난 할머니가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산신이니 정 보답하고 싶으면 서울에서 연을 띄워 처음 앉는 자리에 사당을 짓고 1년에 제를 두 번씩 올려달라' 했다. 두 번째 시도 끝에 지금의 터에 연이 내려앉았고 그 자리에 서있던 옻나무를 베어 산신당을 짓고 나라에서 하사한 사당 옆의 토지에서 얻은 곡식으로 국행제를 올리는 풍습이 시작되었다 한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이 땅의 모든 국행제를 금지시켰다. 죽령 산신제 역시 마을 사람들의 손에 의해 근근이 그 명맥을 이었다. 매바우에선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과 9월이면 어김없이 산신제를 지낸다. 날짜는 초정(初丁)인데 초정에 부정(不淨) 이 들면 중정(仲丁)으로 넘겼다가 중정마저 부정이 들면 또 하정(下丁)으로 넘긴다. 도가(都家:제사 준비를 맡은 집)로 뽑힌 집주인은 목욕재계하고 3일 동안 기도를 올려 정성을 들인다. 매바우에선 마을 사람 누구라도 산신당에 대한 믿음은 가히 절대적이다.
그런데 현재 도가인 김성락 옹에 의하면, 김순재라는 면장이 부임하고선 그 땅을 빼앗아 사람들에게 전부 분배해준 뒤, 다자구 할미산신의 재산이 없어졌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군수와 문화원에 사정해 돌려주라고 했지만 이뤄지지 않고 그 후로 때마다 50만원씩 지원금을 받아 겨우 제사만 지내고 있다고.
- 죽령 터널
국내에서 가장 긴 터널로, 중앙고속도로 구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길이 4.6㎞. 죽령터널은 죽령고개를 관통해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을 연결한다.
◆[제2연화봉]
◆[연화봉] 蓮花峰 1394m
철쭉군락이 뒤덮여 있어 매년 ‘소백산 철쭉제’가 열리고 있으며 철쭉여왕 선발과 산신제 등 다채로운 행사가 거행되며 연분홍 철쭉과 울긋불긋한 등산객들로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곤 한다. 이곳에는 한국전자통신연구소의 국립 천문대와 공군 통신대가 자리잡고 있어 우리나라 천문공학의 요람이며 소백산의 여러 줄기에서 오르는 등산로의 합류 지점이다.
- 연꽃이 불교의 상징적인 꽃으로 된 이유
부처님은 설법을 하실 때에 연꽃의 비유를 많이 들었다. 또한 선가禪家에서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묘법妙法'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어느 날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부처님이 설법은 하시지 않고 곁의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대중에게 보였는데 제자 중에 가섭존자만 홀로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이것은 마음으로 마음을 속속들이 전하는 도리로서 선종禪宗에서는 세 곳에서 마음 전한(三處傳心)이치라 하여 중히 여기고 있다.
1. 처렴상정(處染常淨)
진흙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함박스런 꽃을 피우는 연꽃은 처염상정이라 해서 더러운 곳에서 피어나지만,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아니하고 항상 청정한 자태를 나타내는 꽃이다. 이것은 마치 불자佛子가 세속에 처해 있어도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아름다운 신행信行의 꽃을 피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보살菩薩이 홀로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 열반涅槃의 경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중생의 구제를 위하여 온갖 죄업과 더러움이 있는 생사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고해라는 사바세계에 피어난 한송이 연꽃과도 같다고 본다.
2. 화과동시(花果同時)
연꽃이 자랄 때는 씨방과 꽃잎이 함께 자라난다. 이것을 ‘연밥(蓮實)'이라 한다. 대부분의 꽃들은 꽃잎이 지고 차차 씨방이 여물어가지만 연꽃은 꽃잎이 막 피어날 때 씨방도 같이 여물기 시작한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가 늘 함께 있다는 불교의 진리를 상징한다고 본다. 현재 나의 몸과 내가 가진 생각은 바로 과거와 현재, 미래의 결정체. 즉 내 몸과 생각은 온 우주 허공을 하나로 꿰뚫고 모든 세월을 함축해서 현재 이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이다. 연꽃은 불교의 진리를 나타낸다.
3. 연꽃은 불성을 상징
물 속에 떨어진 연꽃 씨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않고 그대로 있다가 인연이 닿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움터 꽃을 피운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부처님의 성품은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썩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가 인연이 닿으면 부처님으로 꽃 피울 수 있다는 불교의 철학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다고 본다.
- 연화장세계 [蓮華藏世界]
<불교> 불교에서 그리는 세계의 모습. 연꽃에서 태어난 세계 또는 연꽃 속에 담겨 있는 세계라는 뜻으로, 그 모습은 교파와 종파에 따라 다르다.
불자들은 늘 연화장 세계에 살기를 꿈꾼다. 더나아가 이 사바 세상을 연화장 세계로 만들기 위해 많은 선지식과 많은 지도자들이 일생을 다 바쳐 노력과 봉사로 일관해온 모습을 보아 왔다. 많은 이들이 오늘도 자신의 삶보다는 온 인류를 위해 연화장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고 정진하고 있다. 연화장 세계는 청정과 광명이 충만되어 있는 불자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이상적인 불국토이기 때문이다.
연화장 세계를 일러 화장세계, 연화장장엄세계라고도 부른다. 비로자나불이 있는 세계이며, 한량없는 공덕과 광대장엄을 갖춘 불국토이다.『화엄경』에서는 연화장 세계가 삼신불, 그 가운데서도 노사나불의 서원과 수행에 의하여 현출된 이상적인 세계라 정의하고 있다. 이 세계의 가장 밑바닥에 풍륜이 있고 그 위에 향수해가 있으며, 이 향수의 바다 속에 한 송이의 큰 연꽃이 있는데, 이 연꽃 속에 있는 세계를 일러 연화장 세계라 한다.『범망경』에서는 노사나불이 1,000개의 잎으로 된 연화대에 앉았는데 그 1,000개의 잎이 각각 한 세계이고, 노사나불로부터 화현한 1,000의 석가모니불이 있는 1,000개의 세계가 있고, 한 세계마다 다시 100억개의 나라가 있다. 이 100억의 나라 하나하나에 다시 석가모니불이 있어서 보리수 아래에 앉아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화엄경과 범망경에서의 연화장 세계는 삼신불의 사상을 드러내면서도 불교의 깊은 진리를 구체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희방사] 850m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어느 날 두운조사가 신음하는 호랑이를 발견했다. 그 호랑이는 사람을 먹고 목에 비녀가 걸렸는데, 두운조사가 비녀를 빼주고 호랑이를 살려줬다.
그 후 호랑이는 두운조사의 은혜를 갚고자, 어느 양가집 규수를 물어다 주었는데 그 규수는 바로 경주호장의 무남독녀였다. 경주호장은 딸을 살려준 두운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이 절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절 이름도 은혜를 갚게 되어 기쁘다는 뜻의 희(喜), 두운조사의 참선방이란 것을 상징하는 방(方)을 써서 희방사(喜方寺)라 이름 지었다."
◆[제1연화봉]
◆[비로봉] 毘盧峰 1439.5m
우리나라의 산 중에는 비로봉이란 이름이 제법 많다. 그런데 그 공통점은 주로 산 정상 봉우리의 이름들이다. 묘향산 비로봉(1,909m), 금강산 비로봉(1,638m), 오대산 비로봉(1,563m), 치악산 비로봉(1,288m), 속리산 비로봉(1,057m) 등등. 비로(毘盧)란 불교 용어로 범어의 바이로차나(Vairocana)의 음역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준말이다. 원래의 뜻은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法界)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것으로 '부처의 진신'을 일컫는 말이다. 비로자나불은 종파마다 각각 달리 불리는데, 화엄종에서는 석가모니불, 진언종에서는 대일여래, 천태종과 법상종에서는 법신불 등으로 부르는 부처다. 절에서 대웅전이란 석가모니를 모신 전각이니 그 큰 영웅[大雄]이 바로 불교에서 으뜸이신 부처! 석가모니다.
- 비로자나불 [毘盧遮那佛, Vairocana]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 ·노자나불·자나불이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로 ‘태양’이라는 뜻인데, 불지(佛智)의 광대무변함을 상징하는 화엄종(華嚴宗)의 본존불(本尊佛)이다. 무량겁해(無量劫海)에 공덕을 쌓아 정각(正覺)을 성취하고, 연화장(蓮華藏)세계에 살면서 대광명을 발하여 법계(法界)를 두루 비춘다고 한다. 법상종(法相宗)에서는 노사나불(盧舍那佛)·석가불(釋迦佛)·수용신(受用身)·변화신(變化身)으로 쓰고, 비로자나불은 자성신(自性身)이라 하여 구별하고 있다. 또 천태종(天台宗)에서는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불을 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에 배치하여 설명하고 있고, 밀교(密敎)에서는 《대일경(大日經)》의 설을 계승하여 대일여래(大日如來)와 동체라고 한다.
비로자나불은 법신불로 즉 ‘공(空)의 인격화된 모습’이라 정의하고 있다.『화엄경』에서는 영원한 부처님인 법신불을 침묵의 부처님, 광명의 부처님으로 언급하며 비로자나불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우주의 만물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 하여 흔히 연화장 세계의 교주로 받들어진다. 따라서 비로자나불은 3천대천세계의 교주이며 우주 전체를 총괄하는 부처로 인정받고 있다.비로자나불의 산스트리트 표기는 바이로차나 붓다(Vairocana Buddha)이다. 바이로차나는 태양이 모든 곳을 밝게 비추는 특징 내지 태양 자체를 이름하는 것이다. 원래 ‘골고루’라는 뜻의 부사 ‘비(vi)’와 ‘빛나다’라는 뜻의 동사 원형 ‘루츠(ruc)’에서 파생된 것으로 불을 가리키기도 하고 때로는 달을 지칭하기도 했다. 포괄적인 의미로 태양의 빛이 만물을 비추듯이 비로자나불은 우주의 일체를 비추며 포괄한다는 뜻이다. 현생의 부처님인 석가모니 부처님도 태양처럼 온 누리를 비추는 부처님이라고 했다.
-정상석 뒷면의 서거정 비문
태백산에 이어진 소백산/ 백 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에 솟았네/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하늘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소백산] 小白山
조선조 유명한 풍수지리가이며 실학자인 격암 남사고(南師古)가 죽령을 넘어 가다가 이 산을 보고 '사람 살리는 산'이라고 말하며,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고 지나갔다는 산이다. 이처럼 소백산은 백두산, 태백산, 지리산과 같이 우리민족이 숭앙하는 산이었다.
소백산국립공원은 한반도의 등뼈와도 같은 태백산령의 줄기가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와 경상도를 갈라 큰 산계를 이루는 소백산령의 어깨 격인 영주 분지를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비로봉(1,439m), 국망봉(1,421m), 제1연화봉(1,394m), 제2연화봉(1,357m), 도솔봉(1,314m), 신선봉(1,389m), 형제봉(1,177m), 묘적봉(1,148m)등의 많은 영봉들이 어울려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운 산세로 수려한 경관을 보여 주고 있다.
겨울이면 특히 설경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한데, 소백산이라는 이름 또한 ‘눈을 이고 있는 산’이라는 의미이자, 작은 백두산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산이다.
◆[국망봉] 國亡峰 1420.8m
국망봉은 마의태자가 망국(亡國)의 아픔을 삼베옷에 새겨 경주 바라보며 통곡하던 한(恨)이 어린 산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 부왕 경순왕이 군신회의를 열어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마의태자는 천년사직(社稷)을 하루 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끝까지 반대했지만 좌절되었다. 경순왕이 나라를 왕건에게 물려주고 명산대찰을 찾아 다니다가 제천의 백운면 방학리 궁뜰에 동경부를 짓고 머무를 때 덕주공주는 월악산의 덕주사에 머물렀다. 신라회복에 실패한 마의태자는 엄동 설한에 베옷 한벌만 입고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도달하여 신라의 도읍 경주를 바라보며 망국의 눈물을 흘리다가 월악산의 덕주공주를 찾은 후 개골산으로 향했으며 이후부터 국망봉이라 불렀다는 유래가 전한다.
-죽계 구곡
소백산의 국망봉 석륜암골을 발원으로 하여 흘러내리는 물은 백운동으로 흘러서 사천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죽계구곡이다. 이 계곡은 물길이 굽이굽이 절경을 이루다가 백운동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데, 죽계란 대나무가 많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고려 때 이 고장 출신 안축이 지은 경기체가 ‘죽계별곡’은 바로 이곳을 소재로 한 노래다. 죽계구곡이란 중국 무이산의 아홉 경치를 읊은 주희의 ‘무이구곡’을 본떠 갖다 붙인 것이다.
흔히 퇴계 이황선생이 계곡의 절경에 심취하여 물흐르는 소리가 노래소리 같다 하여 각 계곡마다 걸맞는 이름을 지어주며 죽계 구곡이라 불렀다고 알려져 있으나, <순흥지>에 영조 4년에 순흥부사로 부임한 신필하가 지은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한다.
1곡 백운동 취한대, 2곡 금성반석, 3곡 백우담, 4곡 이화동, 5곡 목욕담, 6곡 청령동애, 7곡 용추비폭, 8곡 금당반석, 9곡 중봉합류라 한다.
◆[상월봉(상월불각자)] 上月佛 刻字 1394m
국망봉에서 상월봉을 바라보면 봉 오른쪽에 보이는 커다란 바위가 상월불각자다.
아곡문봉(我谷門峰)·밤실문봉·여의생(如意生)문봉·뒤시랭이문봉·덕가락(德坪)문봉·곰절(雄寺)문봉·배골문봉·귀기문봉·새밭(乙田)문봉 등 9개의 봉우리와, 아골문안골·밤실문안골·여의생문안골·덕가락문안골·곰절문안골·배골문안골·귀기문안골·새밭문안골 등 8개의 골짜기 끝이 표대봉(1,244m)에 모여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부채꼴을 이룬다는 이곳은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각기 다른 내용의 수양을 쌓는 문을 통과 해야만 불교의 득도에 이를 수 있다는 내용이다.
옛날 여러 스님들이 불교에 입문, 득도를 위해 법문(法門)을 오르려고 무수한 세월을 보내다 끝내 이르지 못했는데, 구인사의 중창조사인 상월원각대조사 상월 스님이 9봉8문을 올라 신선봉과 국망봉 사이의 암봉에 '上月佛'이라 새겨 놓았고, 그로 인해 그 암봉이 상월봉이라 불리게 되었다 전해지기도 한다.
아홉 봉우리가 산자락의 각각 다른 지능선에 볼록 솟아 일렬로 도열한 것이 매우 특이한 지형을 보이고 있다. 온달산성에 오르면 이 일대의 산세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지도상에는 상월불각자라는 표기만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이곳을 상월봉이라고 한다.
[소수 서원]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順興面) 내죽리(內竹里)에 있는 한국 최초의 서원.
사액서원이란 조선시대 왕으로부터 편액·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을 말한다. 최초의 사액서원은 '소수서원'으로 사액받은 '백운동 서원이다.
백운동서원은 조선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국내 주자학의 효시인 고려시대 학자 안향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설립했다. 그 뒤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와서 이를 보고 중국 백록동 고사처럼 조정에서 사액과 전토(田土)를 주도록 건의함에 따라 명종은 1550년(명종 5) 이를 권장하는 뜻에서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고 친필로 쓴 액(額: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학전(學田)·노비를 주면서 이들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면역(免役)의 특권을 내려 이것이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소수서원은 대원군이 전국적으로 서원을 철폐할 때도 그대로 보존돼 지금도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늦은맥이재]
1272봉과 상월봉 사이에 가장 낮은 허리부분이다. 새밭으로 내려가는 등산로가 갈라진다. 비로봉에서 구인사가 있는 백자리로 하산할 때도 이곳을 지나간다. 동쪽인 좌석리 상좌석으로는 계곡의 경사가 너무 급하여 능선을 넘나들 때 거쳐 가던 고갯마루로 보이지는 않는다. ‘느슨한’ 혹은 ‘낮은’ 고개라는 의미지만 해발고도가 1220m 정도로 낮은 고개는 아니다. 양쪽의 봉우리에 비해 조금 낮게 내려앉았을 뿐이다.
[신선봉] 1389m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판운리 판운삼거리 북쪽으로 뻗어 있는 길이 약 12km의 골짜기를 중선(中仙)이라 하는데 신선봉은 중선(중선마을) 동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봉우리이다. 중선이라는 지명도 신선봉(神仙峰)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신선봉은 안개가 봉우리를 감싸고 있을 때가 많아 신비로운 기운을 느끼게 하는 산으로, 옛날에 신선들이 장기를 두며 놀았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꼭대기에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고, 신선봉 아래쪽으로 신랑봉·각시봉 등의 바위가 있다.
◆[마당치]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는 아니다. 대간 능선을 따라다니며 약초를 캐던 심마니들이나 다녔음직한 고갯길이다. 헬기장이 있는 1032봉과 서족에 있는 1032봉 사이에 조금 내려앉은 허리목에 불과하다. 너른 쉼터가 있지만 주위에 샘이 없어 야영하기에도 적당치 못하다. 고갯마루가 마당처럼 평평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당치 성] 991m
마당치 성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 남천 양다리와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 마을을 경계로 해발 931m에서 1,041m에 위치하며 산성 둘레는 약 1,415m이다. 국망봉(1,420m)에서 형제봉(1,177m)으로 이어지는 소백산로 11.1Km 구간에서 마당치(991m)는 가장 낮은 고개이다. 영주시의 순흥면과 단산면, 부석면에서는 마당재를 넘어서 영춘의 양다리를 거쳐 남천 대어구로 가는 길이 고치재를 넘어서 의풍의 베틀재를 넘거나 하동면 주문리로 가는 길보다 너무 멀기 때문에 모든 군사나 물적자원은 마당재나 관적령(串赤嶺)를 넘어야 했다
[형제봉] 1177m
산의 정상 봉우리가 마주보고 있다 하여 형제봉이라 불리고 있으며 풍수지리학상 옥녀직금 형극(선녀가 내려와 비단을 짜는 형극)이라 하여 조선시대에 많은 풍수가들이 운집했다 한다. 일제 강점기에 변장술에 능하고 축지를 하며 백발백중의 명사수로서 독립군의 군자금을 만주로 보내던 김용제 선생과 김수배 선생이 매복중이던 악명 높은 일본 경찰 평석에 의하여 1923년 9월9일 오전 9시9분에 29세의 나이로 돌아가시니 모두 9자와 일치되는 기이한 일이 있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고치령] 770m
죽령이 양남지방에서 서울로 향하는 관문 역할을 했다면, 마구령과 고치령은 소백산을 경계로 주민들이 북쪽과 남쪽으로 오가던 길이다.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떠도는 장돌뱅이들이나 인근 주민들이 넘나들던 곳이다. 고치령(고치재)이 생활도로로 왕성했던 것은 강원도와 기호지방을 잇던 죽령길이나 마구령길에 비해 고치령이 순흥도호부와 영월을 잇는 최단거리였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신라시대 근처에 절을 지으려고 터를 잡았던 일로 ‘절터고개’라 불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옛고개라는 뜻의 ‘고치’가 되었다. 대동여지도엔 ‘곶적령(串赤嶺)’으로 적고 있다.
고치령은 조선시대 때 영월에 유배된 단종의 복위를 꿈꾸던 이들이 넘나들던 길이다. 단종 은 영월에,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은 순흥에 유배되면서 고치령을 통해 양쪽의 소식이 전해졌다 한다. 결국 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고갯길을 넘던 이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지금도 고치령의 서낭당은 단종을 태백산 산신으로, 금성대군을 소백산 산신으로 모시고 있다 한다.
◆[미내치]
마구령과 고치령 사이에 위치하면서 잠깐 허리를 낮춘 곳인데, 넘나드는 고갯길은 보이지 않는다. 이 부근은 비교적 밋밋한 능선으로 형성되어 있다. 쉬어가기에 좋은 공터가 있지만 부근에서 식수를 구하기가 마땅치 않다. 밋밋한 능선으로 별 특징도 없는데 이곳 사람들의 눈에는 예쁘게(美) 비쳤나보다. 은하수의 우리말인 ‘미리내’와 관계 있다는 주장도 있다.
경사가 완만하여 옛 주민들이 고개의 정상을 향해 걷다 보면 벌써 고개가 끝났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마구령] 馬駒嶺 820m
소백산 국립공원 경계 지역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고개로 경북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임곡리를 남북으로 이어주는 고개로, 장사꾼들이 말을 몰고 다녔던 길이라 하여 마구령이라 불린다. 동국여지승람(영천군 산천조)와 대동여지도에는 ‘마아령(馬兒嶺)’이라 적혀 있다. 현지 주민들은 ‘메기재’라 발음하는데, ‘메기’는 ‘길목’이라 할 때 쓰는 ‘목’의 사투리다.
마구령 북쪽의 남대리는 ‘정감록’에서 이르는 십승지 가운데 한 곳이자, 남사고가 양백지간에 숨어 있다고 이른 명당으로 꼽히는 마을. 첩첩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펑퍼짐한 터가 있어 순흥으로 유배왔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할 때 병사를 양성하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남대리는 현재 40가구 정도만 사는 한적한 마을이지만,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200가구가 넘었다. 1970년대 중반 화전민 이주정책 이후 주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갈곶산] 966m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영주시 일대는 낮은 구릉 사이에 형성된 전형적인 농촌이다. 북쪽의 충북 단양군은 온통 산릉으로 뒤덮여 마치 드넓은 바다같은 모습을 한다. 갈곶은 ‘가리곶’이 본딧말이다. 노적가리처럼 ‘둥글둥글’하면서도 꾈(串)만큼 뾰족하다는 뜻이다. ‘갈(葛)은 음차한 것이다.
바다로 돌출한 육지로 꽂 보다 크면 반도라 하고 반도의 말단부를 "곶"이라 한다.
갑(岬)=단(端)=관(꿰다 串) 장산곶,장기곶.호미곶.월곶.어랑단.수원단 등이 있다.
◆[늦은목이]
부석면 남대리와 물야면 오전리를 넘나드는 고개다. 차량은 오르지 못하는 곳이다. 종주자들이 구간을 끊거나 하룻밤 묵고 가기에 좋은 곳이다. 서쪽 100m 거리에 샘터가 있다. ‘늦은’은 ‘느슨하다’는 뜻이며 ‘목이’는 노루목이나 허리목 같이 ‘고개’를 뜻하는 말에 명사형 어미 ‘이’를 붙인 것이다. 따라서 ‘느슨한 고개’로 풀이된다. ‘낮은 고개’로도 볼 수 있다.
◆[선달산] 1236m
소백산령에 속한 산으로 주위에 매봉산(梅峰山:1,268 m) ·어래산(御來山:1,064 m) ·봉황산(鳳凰山:819 m) 등이 솟아 있다. 북쪽 비탈면을 흐르는 수계는 옥동천(玉洞川)으로 흘러들고, 남서쪽 비탈면에서 발원하는 수계는 내성천(乃城川)으로 흘러든다. 남서쪽에는 소백산국립공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동남쪽 기슭에는 국민관광지인 오전(梧田)약수가 있다.
신선이 놀았다고 하여 “仙達山”, 먼저 올라야 한다고 하여 “先達山”,남쪽 기슭에 신선굴(神仙窟)이 있어 선달산이라 한다. 또한 선비의 기품을 닮았다고 해서 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 선달 先達
조선시대 미입사(未入仕) 무과출신(武科出身).
조선시대의 무관(武官)은 식년무과(式年武科)·증광무과(增廣武科)·별시무과(別試武科)·알성무과(謁聖武科)·중시무과(重試武科) 등을 통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한정된 정원 때문에, 급제하여도 상위 입격자인 갑과(甲科)·을과(乙科)는 바로 임관되어도 병과(丙科)의 일부는 임관되지 못하고 자리가 날 때까지 대기하는 예가 많았다. 그런 경우에 선달이라고 불렀다.
- 오전약수
물맛이 가장 좋기로 조선시대 최고의 약수로 뽑히기도 했다. 중종 때의 풍기 군수 주세붕은 오전약수를 마음의 병을 고치는 좋은 스승에 비길 만하다고 극찬했다. 오전약수 전설에 의하면 오전리의 후평장과 춘양면의 서벽장을 드나드는 보부상이 주실령을 넘어 가던 어느날 쑥밭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약수를 일러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약수를 쑥밭약수터라고도 부른다. 또 옛날 이 근처에 살던 여인이 남자와 정을 통하기 위해 약수터를 찾았다. 그런데 그때까지 맑게 샘솟던 약수가 흙탕물로 변하고 뱀이 나타나 부정한 여인의 행위를 못하게 했다고 한다.
◆[박달령] 朴達嶺 1009m
선달산과 옥돌봉 중간지점에 위치한 박달령은 경상북도 봉화군과 강원도 영월군을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는 사연을 만들며 넘었을 박달령은 현재 임도가 개설되어 있고, 고갯마루에는 산령각이 있어 매년 4월 초파일에 고사를 지내고 있다. 옛날에 부보상(負褓商)들이 많이 드나들었다고 전해지며 그 부보상에 의하여 발견된 약수가 오전약수라고 전해진다. 2005년 12월 현재 고갯마루에는 산령각과 함께 정자가 있어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 박달의 뜻
배달(倍達)→백산(白山)의 다른 표기이다.
백산(白山)→백달(白達:밝달 .박달)→배달(倍達:ㄱ탈락)
배달은 백달의 음운변형이고,
박달은 백달의 모음변형이며,
백달은 백산의 다른 표기이다.
박달나무는 배달민족의 나무라는 뜻이며 우리는 백산(=배달)민족.곧 백두산 민족이다.
(대종언어연구소=박대종)에서 옮김
- 배달
배달은 고대 한국을 가리키는 말로 倍達이라는 한자를 사용하기도 하나 순 우리말로 추측된다. 배달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朝鮮)·한(韓)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말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으며, 고대로부터 계속 이어졌다는 증거 또한 없다. 일제 강점기 무렵에는 주로 단군 또는 고조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이후 개념이 확대되어 한국, 특히 한민족을 가리키는 순 우리말 표현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1979년에 공개된 《환단고기(桓檀古記)》에서 최초로 ‘배달’을 ‘환웅이 다스리는 나라’, 즉 신시(神市)라고 주장한 이후 이 주장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배달의 어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
《규원사화》에서는 ‘박달(朴達)’ 또는 ‘백달(白達)’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檀’, 즉 박달나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인식은 가장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규원사화》는 박달을 국가명으로 보지 않고 단군의 ‘단’을 의미하는 용어로만 사용되었다.
김교헌은 1914년 《신단실기(神檀實記)》에서 단군이 세운 국가, 즉 고조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조선을 단국(檀國)과 동일한 의미로 보았으며 배달이 단, 즉 박달의 어원이라고 보는 점은 《규원사화》와 동일하나 박달을 나무 이름이 아닌 고유 용어로 파악하였다.
최남선은 1918년 《계고차존(稽古?存)》에서 역시 박달의 어원으로 보고 있으나 그 본래 의미는 ‘백산’이라는 지명이라 보았다.
안호상은 1964년 《배달의 종교와 철학과 역사》에서 박달·배달을 두고 ‘밝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한밝산’이라는 지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유립은 1979년 《환단고기》에서 ‘신시(神市)’를 가리켜 배달이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 배달을 두고 상고시대부터 이어져 온 말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이 용어의 연원은 일제 강점기 이상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이 용어의 근거에 대하여 많은 비판이 있어 왔다.
신채호는 〈전후삼한고〉에서 배달의 말의 연원을 어윤적의 《동사연표(東史年表)》라고 들며 그 전래 과정을 통해 볼 때 믿기 어려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단군의 檀에 대해서도 壇을 사용하여 배달과의 관련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다.
- 박달령 산령각
박달령 산령각은 선달산(先達山)과 옥돌봉(玉石山) 중간에 위치한 박달령 고갯마루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의 산령각은 노후되어 1994년도에 중수한 산령각이다. 매년 4월 초파일에 오전리 마을에서 박달령을 찾는 사람들의 안녕과 마을사람들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고, 자연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는 고사(告祀)를 지내고 있다. 산신(山神)에 대한 고사는 오래전부터 인간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공존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토속신앙이다. 특히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고갯마루에 세워진 산령각은 마을어귀에 세워진 성황당(城隍堂)과는 조금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사찰에 세워진 산신각(山神閣)과도 다른 의미의 성황당이 박달령 산령각이 아닐까 생각된다. 박달령을 넘나들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안식처로서 통행의 안전과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고 이웃의 행복을 위해 고사를 지내고 기도를 올린 개방된 신앙공간이 박달령 산령각이다.
서낭신은 토지와 마을을 수호하는 신으로서 최근까지 가장 널리 제사지내던 신이다. 성황당은 중국의 성황(城隍)에서 유래하였다 하나 분명치 않으며 한국 고유의 민속신앙으로 보인다. 성황당은 서낭신의 봉안처인 동시에 거소로, 보통 신수(神樹)에 잡석을 쌓은 돌무더기거나 신수에 당집이 복합되어 있는 형태로 고갯마루, 한길 옆, 마을과 사찰 입구 등 전국 도처에서 발견되는 민간의 보편화된 신당(神堂)이다. 서낭신앙에는 내세관이나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이상이 없고 다만 현실생활의 문제로써 액, 질병, 재해, 호환(虎患) 등을 막아주는 마을수호의 관습에서 비롯된다.
지금도 고향마을에 더러 남아 있거나 없어진 마을이 많이 있는 성황당(城隍堂)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다. 박달령 산령각도 성황당과 괘를 함께하는 측면이 많이 있다. 그 성황당이 1960년대 후반부터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앙을 떠나 마을사람들의 공동체 형성의 공간이라는 긍정적인 면은 깡그리 무시되고 미신이라는 이름하에 많이도 때려 부셨던 메카시즘의 광풍이 몰려와 수많은 성황당이 폐쇄되는 운명을 맞았던 시절이 있었다. 농촌부흥의 기치를 내건 새마을운동이었다.
◆[옥돌봉] 玉石山 1222m
춘양 북서쪽 16km, 봉화 북쪽 14km 지점에 있다. 정상은 둔봉(鈍峰)을 이루나 능선이 방사상(放射狀)으로 뻗고, 특히 남쪽으로 뻗은 말단봉은 노암(露岩)의 대지를 나타내며, 남사면 일대는 수십 갈래의 깊은 계곡이 발달하여 아름답다. 옥석산은 남류하는 낙동강과 북서하는 남한강의 분수령이 된다.
특히 이 지역은 옛날 금강송의 주산지였다고 한다. 조선 수군의 거북선과 군함들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시대에는 전략물자였음이 틀림없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산에서 나무를 베어 춘양에서 집하한 후 운송했다 해서 춘양목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산림청에서 설치한 안내문에는 1980년대 까지도 그 귀한 금강송들이 제법 있었으나 솔잎혹파리로 인해 소나무 숲은 점점 쇠퇴하고 신갈나무가 그 자리를 대체해 나가고 있다고 적고 있다.
- 토종 '금강 소나무'
예부터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고 전해진 '금강소나무'는 토종의 대명사로, 국보 1호 숭례문이 화재로 전소되면서부터 세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금강소나무는 줄기가 곧게 자라며 꼭대기를 올려다 보면 좁은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나이테가 촘촘하고 나무에 윤기가 나 한눈에 봐도 뛰어난 품질을 자랑한다. 다른 소나무보다 몸통이 굵고 재질까지 단단해 최고의 목조 건축자재로 이름 높았고, 조선시대 이래 궁궐을 짓거나 임금의 관을 짜는데 주로 쓰여 왔다. 이런 까닭에 숭례문의 주요 뼈대 또한 금강소나무로 지어졌고, 숭례문 복원엔 수령 100년 이상에 지름 1m 안팎의 대형 금강소나무가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북 북동부는 금강소나무가 가장 울창한 지역이다. 금강소나무의 금강은 금강산에 자라는 형이라 해 붙여진 이름. 금강산 일대에서 자라난 금강소나무는 태백산령을 따라 남하했고, 봉화·울진 등지의 비옥한 동해안 내륙지역에서 최우량 형질로 거듭 태어났다.
봉화 춘양면 서벽1리는 최고의 금강소나무 군락지로 손꼽히는 곳. 일제 강점기 때 춘양의 우수한 금강소나무들이 춘양역으로 모여 반출됐는데, 형질이 너무나도 좋아 '춘양목'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정도다. 현재 서벽리 문수산 자락에는 1천500여 그루의 금강소나무가 살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남벌된 탓에 수령은 20~80년에 불과하지만 모든 금강소나무마다 페인트로 번호를 새겨 놓고 있다. 2001년 문화재용 목재 생산림으로 지정된 이후 이곳에서 반출되는 모든 금강소나무는 숭례문 복원 같은 문화재 보수와 재건용으로만 쓸 수 있도록 한 것. 영주국유림관리소가 금강소나무숲을 제대로 느끼며 산책할 수 있게 1.5km의 탐방로를 조성, 곳곳에서 토종 소나무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www.hd.h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