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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아진 기온은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는다. 길고 긴 계절 여름이 떠날 줄 모른다. 텃밭에 심은 배추 모종은 뿌리 내릴 틈도 없이 말라 사라졌다. 물 조리개로 어설프게 수분 공급을 하지만 못 미친다.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살은 밭이랑 곳곳에 빈 자리를 남겼다.
텃밭에 심은 무와 배추가 한 뼘 정도 자랐다. 긴 가뭄에 살아남은 김장용 채소는 벌레들이 그냥 두지 않는다. 잎이 대여섯 장으로 늘어난 잎을 굵은 줄기만 남기고 몽땅 갉아 먹었다. 한 두 잎만 매단 채 버텨내고 있다. 단 한 차례도 약을 치지 않은 댓가다. 가족이 먹는 작물이라는 이유로 몇 년 동안 채소며 농작물을 키워 왔다. 수확물은 기대할 수준이 못된다. 토양의 힘을 높이기 위해 천연 퇴비를 내고 벌레는 손으로 잡아내는 수준이다. 남아 있는 배추 모종이라도 포기를 키워 가을 김장용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욕심으로 등에 짊어지는 분무기를 반 년 만에 창고에서 외출을 시킨다. 배추벌레 약과 진딧물 퇴치제를 섞어 텃밭으로 향한다.
밭 이랑에 고개 숙여 배추 포기를 젖혀 보는데 흔적만 있고 벌레 성충은 보이지 않는다. 몇 차례 망설인 끝에 결심을 한다. 왼 손으로 분무기 압축을 가하고 오른 손으로 노즐을 약제가 배추 포기 곳곳에 묻도록 휘접는다. 고추 농사를 지을 때 병충해 방제를 위해 뿌린 이후 처음이다. 수확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가. 인터넷 동영상을 찾아 친환경 방제 방법을 접해보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다.
밭 언저리와 집 앞마당을 버티고 선 단감 나무도 예외가 아니다. 찬바람이 끝난 초봄 가지치기를 한 후 여느 집에서 하는 방제를 하지 않았다. 나무 스스로 지탱할 만큼의 감을 매달고 있는 듯하다. 수확 시기가 가까워지면서 제 빛깔을 지닌 값어치 있어 보이는 열매가 몇 개나 될는지 알 수가 없다. 흙바닥에는 여기저기 나뒹구는 감이 발걸음에 채인다. 감 꼭지 근처에는 검은 반점이 군데군데 생기고 감 잎에는 벌레가 무더기로 기어 다닌다. 텃밭 복숭아, 자두, 대추도 나무마다 꽃이 진 후 열매가 열리는데 입으로 들어갈 만큼의 수확은 없다. 그나마 단감이 마지막까지 나무에 매달려 가을의 길목에서 노란 빛을 띠고 주인의 손길을 기다릴 뿐이다.
아내의 지청구가 시작되었다. 약 한번 치지 않고 열매를 얻겠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냐고. 한 두 그루 씩 심어져 있는 각기 다른 유실수마다 그 나무 특성에 맞는 방제를 하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다. 꽃피는 계절에 하얀색, 연분홍색 여러가지 꽃을 눈에 한 번 담는 일로 만족한다. 오히려 아내의 욕심을 멀리하고 싶다. 방제를 나몰라 하는 남편을 따라 다니며 내년에는 약을 치잔다. 당장의 재촉을 피하고 싶어 잠시의 틈도 없이 그러겠다고 대답은 앞선다.
자연은 인간보다 먼저 느끼는가보다. 사람들에게 여러 전조 현상을 알려주고 경고를 하건 만 알아채지 못한다. 온 지구가 동서양 구분 없이 극과 극의 모습을 나타낸다. 일 년 동안 내리는 비의 양이 며칠 만에 내리는 곳이 생기고, 몇 년 째 가뭄으로 고통 받는 지역도 있다. 지구가 들끓는다. 귀에 자주 듣던 말이 지구 온난화에서 지구 가열화라는 단어가 되었다. 성장 할 때부터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곤충과 작물은 흔적을 감추고 낯선 생물이 다가온다. 작물의 분포도 바뀐다. 작물 한계선만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경우 남부에서 중북부로 이동한다. 어쩌면 우리 세대가 다하기 전에 사라지는 종들이 늘어날듯하다.
무농약 친환경을 부르짓던 구호가 저농약 저공해로 바뀌는 것인가. 텃밭 농사를 짓는 도시 농부가 버티고 버틴 결과로 오늘까지 왔다. 어느 작물 한가지라도 약제 살포가 뒤따라야 결과물을 손에 잡을 수 있을 듯하다. 굵고 깨끗한 농작물은 그만큼 수 차례의 약제 처방으로 뽐내고 진열대 위에 자리 잡는다. 못 생기고 벌레 먹은 흔적이 있는 작물이 그나마 약물 살포가 적은 수확물이 아닐런지. 유통되는 작물들이 철저한 관리로 위해 요소를 점검하겠지만, 먹거리 만큼은 내가 키워 가족들이 먹겠다는 각오가 몸과 마음을 피곤하게 만든다. 텃밭 수확을 마치면 또 씨앗 파종 준비를 한다. 우리의 먹거리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