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금광평(江陵 鶴山 金光坪)
17. 고모부(姑母夫) 이야기<3>
금광평(金光坪)은 6.25사변 후 북에서 넘어온 피란민의 정착을 위해서 정부에서 당시 황무지와 다름없던 이곳을 개간(開墾)했는데, 후일 개간한 사람들에게 땅을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불하(拂下)를 해 주었다고 한다.
허허벌판에 쓸모없는 잡목들만 들어차 있던 벌판은 정부의 개간사업으로 마을 한쪽 작은 개천 주변에 기다란 늘레집이 들어섰는데 소문을 듣고 몰려온 피란민들에게 부엌이 붙은 방 한 칸씩 무상으로 배정해 주었는데, 당시 늘레집은 10여 호가 함께 붙어 있는 기다란 집이었다.
개간사업이 시작되면서 「개척대(開拓隊)」도 조직되었는데 늘레집 가운데 칸을 사무실로 꾸며 간판도 달고 개척대장(開拓隊長)도 뽑아 정부 측의 창구(窓口) 역할(役割)을 했다.
당시 개척 대장은 노(魯)씨 성씨를 가진 분이었는데 ‘노반장’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동네 사람들은 모여서 마을 회의도 하는 등 제법 마을의 틀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피란민들은 이북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많았고 수리조합(水利組合) 공사가 벌어지면서 경상도, 전라도 쪽에서도 품팔이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6.25 사변 직후라 인심이 흉흉했는데 특히 상이군인들의 행패가 심했던 것 같다. 목발을 짚은 상이군인들이 가게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는 것은 물론, 지서(支署:경찰서)에 들어가 순경들 따귀도 후려갈길 정도였다니..
또 북한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사람도 많아 툭하면 잡혀가 고생을 하기도 했는데 우리 마을에도 이북(以北/北韓)에서 피란 온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노(魯) 반장과 뭔가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노반장이 강릉 읍에 갔다 오다가 진재(長峴/모래고개) 입구에 헌병들 초소를 지나다가 걸려들어 바로 뒤의 골짜기에서 총살(즉결처분)을 당했다고 한다. 함께 오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그 과부가 조금 뒤에 따라오던 노반장을 헌병에게 손가락질하며 악질 빨갱이라고... 동네 사람들 귀에 들어가 다음 날 아침에 과부집에 몰려가 보니 야반도주.... 이미 집이 텅 비어있었다.
금광평은 마을역사가 오래고 명문가들이 많은 학산 본동(本洞)에 비하면 땅이 척박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땅뙈기는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개간 전에도 제법 벌판이 넓어 마을 위쪽인 옥봉(玉峰) 쪽은 수박이나 참외밭도 많았고, 감자밭도 굉장히 넓었다. 훗날 논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초기에는 보리나 밀, 조나 감자를 심어도 거름기가 없는 땅이다 보니 수확이 신통치 않았다. 그런데 그 척박한 땅에서도 청밀(호밀) 만은 잘 자라서 키가 2m 이상이나 자라고 제법 수확이 괜찮았다.
그러나 청밀은 밥을 하면 시커먼 색깔로 맛도 없었고, 식으면 돌덩이처럼 딱딱해졌는데 가루를 내어 국수를 하면 시커먼 색깔에 찰기(끈기)가 전혀 없어서 국수 가락이 흐물흐물하여 젓가락으로 집으면 뚝뚝 끊어지며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흙 파는 포크레인(Poclain) / 땅을 깎는 불도저(bulldozer) / 흙을 실어나르는 덤프(Dump) 트럭
6.25 사변 후, 법왕사(당시 七星庵) 입구의 큰골 입구를 막아 저수지(貯水池)를 만들었는데 당시 ‘제3공구 수리조합(第三工區水利組合)’이라 했고 지금의 ‘칠성지(七星池)’가 생겼다. 또 동막골 입구를 막는 공사도 있었는데 ‘제2공구 수리조합(第二工區水利組合)’이라 했고, 공사가 먼저 끝나서 지금의 ‘동막지(東幕池)’가 먼저 생겼다.
수리조합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금광평에 과수원 바람이 불었는지 돈푼이 조금 있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과수원을 만들었는데 어단리 쪽에는 제일 큰 과수원인 ‘만평(萬坪) 과수원’, 그 아래 금광리 쪽에는 남씨(南氏) 형제 중 동생의 과수원인 ‘남씨 과수원’이 있었고, 우리 마을인 학산리 쪽으로는 네 개의 과수원이 잇닿아 있었는데 남씨 형인 ‘재집 과수원’, 우리 ‘고모네 과수원’과, 강릉 시내에서 양조장(釀造場)을 하다가 우리 마을로 온 ‘대포영감 과수원’, 그리고 내가 중학교 입학할 때 책가방과 모자를 사 주었던 ‘이씨 과수원(현 임마누엘 과수원)’이 있었으니 내가 자란 금광평(金光坪)은 그야말로 온통 과수원 동네였던 셈이다.
당시, 마을 가운데에서 흙을 파고 실어나르느라 우리 마을은 항상 흙먼지로 자욱한 마을이었다.
수리조합 공사가 끝나자 대부분 논으로 바뀌었지만 지금도 과수원이 몇 개가 남아있다.
고모부는 당신 말씀으로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보았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판무식(判無識)’이셨지만, 말을 시작하면 청산유수(靑山流水)요, 세상 갖가지 일에 모르는 것이 없는 분이셨다.
어쩌다 한가한 시간이 있어 한 번 입이 열리면 동년배 어르신들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또래의 어린아이들을 앉혀놓고도 이야기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