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숫자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유용한 천개(天蓋) 나무로는
'아몬드 나무[카나리움 하르베이(Canarium harveri)', 견과과류 열매를 맺는 '부켈라 오보바타(Burckella ovovata)'와
'바링토니아 프로케라(Barringtonia procera)', 타히티 밤나무인 '이노카르푸스 파기페루수(Inocarpus fagiferus)'
열대 아몬드 나무인 '테르미날리아 카타파(Terminalia catappa)' 가 있다.
중간 크기의 마무로 유요한 것으로는 마약 성분이 함유된 '빈랑나무 열매 야자나무',
사과나무인 '스폰디아스 둘키스(Apondias dulcis)' 뽕나무의 일종인 '안티아리스 톡시카라(Antiaris Toxicara)' 가 있는데,
특히 안티아리스의 껍질은 다른 폴리네시아 섬들의 닥나무처럼 옷으로 쓰이기도 했다. 가장 아래층은
사실상 참마, 바나나, 타로의 일종인 '키프토스페르마 카미소니스(Cyrtosperma chamissonis)'를 재배하는 밭이다.
이 작물들은 원래 습지 환경에서 잘 자라지만
티코피아인들은 배수가 잘 되는 언덕에 위치해 건조한 상태인 과수원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종을 선택했다.
이 처럼 다양한 층을 이루고 있는 과수원은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다른 태평양 열대우림과 비슷하지만
다른 곳의 경우 열대우림 나무를 식용으로쓸 수 없는 데 반해 이곳 식물들은 거의 모두 식용이 가능하다
과수원 이외에, 훤히 트이고 나무가 없지만 역시 식량 생산에 이용되는 두 가지 형태의 작은 지역이 있다.
하나는 작은 민물 늪지로 여기에서는 언덕의 건조한 토양에서 자라도록 적응된
자이언트 스윔프카로(giantswamp taro)의 변종 대신에
대체로 습지에 잘 적응된 자이언트 스웜프타로가 재배된다.
또 다른 한 곳은 휴경기가 짧고 노동집약적으로 운영되는 밭으로 세 가지 작물이 지속적으로 재배된다.
세 가지 작물은 타로, 참마, 그리고 남아메리카에서 도입해서 지금은 토종인 참마를 거의 대체한 마니옥(manioc)이다.
이 밭농사 지역은 잡초를 제거하거나 작물이 말라 죽지 않도록
풀이나 덤불로 밭을 덮어주어야 하는 등 거의 끊임없이 노동력을 투입해야 하는 지역이다.
과수원, 습지, 그리고 밭농사 지역에서 나는 주요 식량들의 대부분은 녹말질 성분이다.
닭이나 개보다 더 큰 가축이 없는 상태에서 티코피아인들은 단백질 섭취를 위해
적게는 섬에 단 하나 잇는 염수호에서 오리나 생선을 , 많게는 바다에서 나는 생선이나 조개를 이용햇다.
지속 가능한 해산물 어획은 족장에 따른 터부(금기)에 힘입은 바 큰데,
생선을 잡거나 먹기 위해서는 족장의 허가가 필료했으므로
이런 터부는 결과적으로 남획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티코피아인들은 매년 작물 생산량이 줄어드는 건기를 버티기 위해,
또 밭이나 과수원작물을 망쳐버리곤 하는 시이클론에 대비하기 위해 두 가지 형태의 비상 식량에 의존해야만 했다.
먼저 잉여 빵나무 열매를 움풀한 곳에 모은 후 발효시켜 2~3년 동안 저장해두었다. 이렇게 하면 녹말의 섭취가 가능했다.
다른 하나는 평소에는 식용으로 할용하지 않지만 기근시에는 아사를 막아줄 수 있는 열매, 견과 및
기타 식용 가능한 부분을 열대우림 나무들에서 채취하는 방법이다.
1976년 나는 역시 폴리네시아에 속한 렌넬 섬을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렌넬 섬에 있는 수십 종의 나무들을 일일이 가리키며, 섬사람들에게그 열매를 먹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답은 세 가지 중 하나였다. "먹을 수 있다", "먹을 수 없다", "훈기 켄게(hungi kenge)에만 먹는다."
'훈기 켄게'라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이 말은 1910년에 렌넬 섬을 강타한 대형 사이클론의 이름이었다.
이 사이클론이 렌넬 섬의 밭을 거의 파괴해 주민들은 아사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런넬 섬사람들은 평소에는 그리 좋아하지 앟아 잘 먹지 않았던 나무의 열매로 연명했다.
매년 두 개의 사이클론이 발생하는 티콮피아에서는 이런 열매의 중요성이 렌넬 섬보다 더 높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방법으로 티코피아인들은 지속적으로 유지 가능한 식량을 생산해왔다.
지속적인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전제 조건은 안정적인 인구 규모의 유지이다.
1928년부터 1929년에 걸쳐 최초로 티코피아 섬을 방문했을 때 퍼스는 섬의 인구 수가 1,278명이라고 기록했다.
1929년부터 1952년까지 인구는 매년 평균 1.4퍼센트씩 증가했는데
이런 완만한 증가율을 3000년 전 티코피아에 최초로 정착한 이후의 인구 증가율에 비하면
분명 낮은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설혹 티코피아의 최초 인구 증가율을 지금과 같이 완만한 1.4퍼센트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최초에 카누를 타고 들어온 사람이 25명이었다면
불과 1.8평방마일의 면적을 가진 이 섬은 1.000년이 지난 후에는 2,500만 명,
1926년에 이르면 2.500만 명의 1조 배에 이르는 사람들로 가득 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계산을 불가능하다. 인구가 그 같은 비율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도착하고나서 불과 283년이 지난 후에 벌써 현재와 같은 1,278명에 도달했을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티코피아의 인구는 283년이 지난 후부터 어떻게 항상 일정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퍼스는 1929년 당시에도 여전히 사용되던 여섯 가지 인구 조절 방법을 알아냈고
더불어 당시에는 쓰이지 않았지만 그 이전에는 사용되엇던 일곱 번째 방법까지 찾아냈다.
독자들 대부분이 피임약이나 낙태 등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방법을 사용해보았을 것이며,
이런 우리의 결정은 인구 압력이나 가족의 부양 능력에 따라 암묵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티코피아 사람들은 이를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즉 피임등 인구조절 방법을 사용하는 이유가 섬이 과밀해지는 것을 막고,
한가족이 가진 땅으로는 먹여 살릴 수없을 정도로 많은 자녀를 갖지 못하도록 예방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티코피아 족장들은 매년 '제로 인구 성장률(Zoro population Growth)'을 기원하는 의식을 행한다.
그렇다고 나중에는 개명을 했지만 같은 이름으로 같은 목적에서 창립된조직이 제1세계에도 있다는 것을 알지는 못한다.
티코피아의 부모들은 첫째 아이가 결혼 적령기에 도달했을 때에도 계속해서 자녀를 갖는 다거나,
남녀 비율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네 자녀 이상을 갖는 것은 잠롯이라고 생각한다.
티코피아의 7가지 인구 조절 방법 중 가장 간단한 방법은 질외 사정(coitus interruptus)이었다.
다른 방법은 출산을 앞둔 임사부의 배를 압박해서 혹은 뜨겁게 달군 돌을 배에 올려놓아 낙태시켰다.
유아를 산채로 땅에 묻거나 질식사시켰고, 신샹아의 얼굴을 꺾어 죽이는 유아 살해도 있었다.
가난한 집의 아들인 경우 독신으로 살있고, 이에 따라 혼기에 달한 여자들이 많이 남아돌았지만
첩으로 들어가느니 독신이 길을 택했다.
(티코피아에서 독신은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질외 사정을 통한 섹 스는 가능했으며,
경우에 따라 필요하면 유산이나 유아 살해라는 방법을 동원했다.)
자살도 인구 조절방법 중 하나였다.
1929년부터 1952년 사이에 모두 7명(남자 6명, 여자 1명)이 목을 매달아 자실했고,
12명(모두 여자였다)이 바다로 헤어쳐나가 자실했다.
이 같은 분명한 자살외에도 위험한 항해를 떠나는 '사실상 자살'이라는 방법도 사용되어
1929년부터 1952년 사이에 81명의 남자와 3명의 여자가 목숨을 잃었다.
젊은 독신자들의 죽음 중 3분의 1이 위험한 바다 항해로 인한 것이었다.
항해로 인한 죽음이 사실상의 자살인지, 아니면 젊은 이들의 무모한 행위로 인한 것인지는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인구가 많은 상태에서 기군이 들었을 경우 빈곤한 가정의 아들이 느꼈던 암담함도 자실의 충분항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한 예로 퍼스는 1929년에 '파 누크마라'라는 이름을 가진 족장의 동생이 섬에 심한 가뭄이 들어 기근이 닥치자
빨리 죽기 위한 목적에서 자신의 아들 두 명과 함께 바다로 나갔지만
결국 굶주리며 해변에서 천천히 죽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일곱 번째 인구 조절 방법은 퍼스가 섬을 방문했을 때는 행해지지 않았고
단지 주민들의 얘기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1600년에서 1700년대 초에 걸쳐 이전에는 커다란 해수만이었던 곳이
입구가 모래톱으로 막히면서 염수호로 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풍부했던 조개류가 사라지면서 수산 자원도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해당 지역에 살던 은가 아리키(Nga Ariki) 부족은 더 많은 땅과 해안을 확보하기 위해
은가 라베가(Ngga Ravenga) 부족을 공격해서 몰아냈다.
또 한 두 세대가 지난 후, 은가 아리키 부족은 남아 있던 은가 파에아(Nga Faea) 부족마저 공격했는데,
은가 파에아 부족은 섬에서 살해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카누를 타고 바다로 나섰다.(사실상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만의 폐쇄와 마을 흔적 등의 고고학적 증거로 확인되었다.
티코피아 섬의 인구를 조절하는 데 일조했던 이 7가지 방법들은
20세기에 들어 유럽의 영향으로 대부분 사라지거나 감소되었다.
솔로몬 영국 식민 정부는 바다 항해나 교전을 금지하는 한편,
선교사들은 낙태 , 유아살해, 자살을 비난하는 설교를 했다.
그 결과 인구 수는 1929년의 1,278명에서 1952년에는 1,753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1952년에는 13개월 사이에 두개의 파괴적인 사이클론이 불어와
티코피아 농작물을 절반으로 감소시킴으로서 기근을 초래했다.
솔로몬 영국식민 정부는 식량을 보내 위기에 즉각적으로 대처하는 한편
티코피아 사람들로 하여금 인구가 적은 솔로문 제도의 여러 섬에 정착할 수 있도록 장려함으로써
티코피아 인구를 분산시켯다.
오늘날 티코피아 족장들은 티코피아에 거주하는 이누의 수를 1,115명으로 제한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 유아 살해, 자살, 기타 현재는 받아들일 수 없는 여러 방법으로 유지하던 인구수준과
거의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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