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 日 月 年乾 악비 1103년 8대운
己 甲 乙 癸
巳 子 卯 未
98 88 78 68 58 48 38 28 18 08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壬 癸 甲
巳 午 未 申 酉 戌 亥 子 丑 寅
壬子 대운
34세 1136년 丙辰년에도 악비는 무승정국군절도사(武勝定國軍節度使)로서 북정(北征)을 계속하였다.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乘勝長驅)하자 그 위명(威名)이 천하에 알려져 그의 직위(職位)도 나날이 높아졌다.
35세 1137년 丁巳년 2월 25일에는 군인(軍人)으로서 최고계급(最高階級)인 태위(太尉)에 진급하고 호북경서로선무사(湖北京西路宣撫使)로서 활약하였다.
38세 1140년 庚申년 악비장군(38세)은 하남북제로초토사(河南北諸路招討使 : 總司令官)로서 금의 정예군(精銳軍)을 언성(?城)과 영창(穎昌 : 滿洲地域)에서 깨고 황룡부(黃龍府)를 치겠다고 호언(豪言)했다.
39세( 1141년 辛酉년)에 역적 누명을 쓰고 살해되었다.
39辛酉년 [酉子 巳亥 卯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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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子 대운 10년, 군대에서 최고에 올랐어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子卯형으로 卯 양인을 파손한 공로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壬子 대운 ; [子卯 未子 巳] 眞 자묘형이 됩니다.
아쉽게도
辛亥 대운에 사망합니다.
辛 정관 대운은 분명 길신 길 대운입니다.
辛酉년은 重官이 사망 원인은 아닙니다.
이유는 양인 乙이 투출하면 관살혼잡을 기뻐합니다.
38庚申년 관살혼잡 운에 총 사령관이 됩니다.
그럼 무엇이 사망하게 했을까요?
명리적 답은 분명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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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비연보
9세(1111)부터 벌써 사서삼경(四書三經), 좌씨춘추전(左氏春秋傳)과 손자병법(孫子兵法)
그리고 오기병법(吳起兵法) 등을 즐겨 읽었다.
16세 戊戌년에 결혼.
17세 己亥년 장남 운(1119년 6월 5일생)이 태어났다.
19세 1121년 辛丑년에 병서와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20세 1122년 壬寅년에 북송 의용군에 자진 입대하나 부친 사망으로 귀향
22세 1124년 甲辰년에 다시 군에 재 입대.
23세 1125년 乙巳년 금나라와 주전론 주장
24세 1126년 丙午년 항전파인 악비는 강왕의 신하에 편입 (3월 17일에 둘째 아들 탄생)
25세 1127년 丁未년 북송이 금나라에 망함.
25세 1127년 고종(高宗)의 황제위(皇帝位)에 추대(推戴)하고 남송(南宋)시작
28세 1130년 庚戌년 창주방어사(昌州防禦使)로서 금군대파 건강 수복.
29세 1131년 辛亥년에 고종은 진회를 재상(宰相)으로 등용(登用)해서 금과의 화의(和議)를 성사(成事)시키려고 생각했다.
30세 1132년 壬子년에는 무안군승선사(武安軍承宣使)로서 활약(活躍)
진회는 재상 직에서 떨어졌다.
31세 1133년 癸丑년에 금은 제군(齊軍)과 함께 남송 침공 작전(南宋侵攻作戰)을 폈다.
남송의 서북부가 위태로워졌다.
악비(31세)는 진남군승선사(鎭南軍承宣使)로서 조정의 허락을 얻어 그가 주둔(駐屯)하고 있던 강주(江州 九江)를 떠나
제군을 공격하여 3개월 만에 잃었던 땅을 되찾았다(精忠旗下賜). 이것은 남송에 있어 최초의 대승(大勝)이었다( 1133년 癸丑년 악비 나이 31세)
고종과 함께 남쪽으로 피신한 악비는 정원장군(靖遠將軍),
31세 갑인 1134년 임명된 청원군절도사(淸遠軍節度使)를 거쳐
32세 1135년 甲寅년 악비는 후호군도통제(後護軍都統制)로서 동정호반(洞庭湖畔)에서 세력을 펼치던 농민반란군(農民叛亂軍)을 진압(鎭壓)했다.
33세 1136년 乙卯년 선무부사(宣撫副使),
34세 1136년 丙辰년에도 악비는 무승정국군절도사(武勝定國軍節度使)로서 북정(北征)을 계속하였다.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乘勝長驅)하자 그 위명(威名)이 천하에 알려져 그의 직위(職位)도 나날이 높아졌다. 이해에 자친 요씨(姚氏)가 강주(江州)에서 사망했다
34세 1137년에는 선무사(宣撫使)로 임명되어 장강과 회하 사이의 일부 지역을 수복했다.
35세 1137년 丁巳년 2월 25일에는 군인(軍人)으로서 최고계급(最高階級)인 태위(太尉)에 진급하고 호북경서로선무사(湖北京西路宣撫使)로서 활약하였다. 이 해에 5자 정(五子霆 1137년 2월 ~ ?)이 군중에서 태어나고 금은 중대한 정책변화(政策變化)를 보여 제를 폐지하고 남송에 대한 평화공세(平和攻勢)로 나왔다.
악비장군은 이때야말로 중원회복(中原回復)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고종의 결단을 촉구했으나 고종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화파(講和派)인 진회(秦檜)를 재상에 재임용.
36세 1138년 戊午년에 강화파 진회 재상(宰相)에 재임용(再任用)하고 강화에 나섰다.
악비장군은 반대론에 편들어「화호(和好)는 치욕(恥辱)」이라면서 진회를 규탄(糾彈)했다.이로 인해
37세 1139년 己未년에 악비장군은 군무(軍務)에서 해직되고 문관(文官)으로서의 최고직(最高職)인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부임했다. 그리고 금과의 화의(和議)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실권자(實權者)인 진회가 실현시킨 강화는 1년을 끌지 못했다.
왜냐하면 금에서 주전파가 득세(得勢)하여 전쟁(戰爭)이 재연(再演)되었기 때문이다.
38세 1140년 庚申년 악비장군(38세)은 하남북제로초토사(河南北諸路招討使 : 總司令官)로서 금의 정예군(精銳軍)을 언성(?城)과 영창(穎昌 : 滿洲地域)에서 깨고 황룡부(黃龍府)를 치겠다고 호언(豪言)했다.
39세 1141년 辛酉년에 수도(首都)로 돌아온 악비장군은 일선의 총사령관직(總司令官職)에서 해임되고 추밀부사(樞密副使 : 國防次官)에 전보(轉補)되었다. 그 자리는 요직(要職)이었으나 그는 악가군의 지휘권(指揮權)을 잃어야 했다. 군(軍)을 움직일 수 없는 그는 발톱이 빠진 호랑이처럼 힘을 쓸 수 없었다.
39세( 1141년 辛酉년)에 역적 누명을 쓰고 살해되었다.
39辛酉년 [酉子 巳亥 卯未]
그뒤 138년만에 남송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