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 조직의 암세포
동물의 세계를 보면 약육강식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하이에나 무리는 좀 특별난 존재 같다. 그들은 서로 협동하여 무리를 지어 사냥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다른 맹수가 사냥한 사냥감을 빼앗는다. 표범이나 치타 등 독립 생활하는 맹수들이 주요 피해자인데, 때에 따라서는 무리생활을 하는 사자들도 하이에나 무리를 만나면 애써 잡은 사냥감을 포기하고 물러선다. 정글의 왕이라는 사자마저도 하이에나 무리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나 보다. 그래서 그런지 하이에나가 자기 무리에서 떨어져 다른 맹수의 공격을 받으면 통쾌함마저 느껴지는 ‘이런 감정이입이라니!’.
오늘 복음에서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건다. 그들이 건다는 시비가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니’(마르 7,2), ‘조상들의 관습을 지키지 않니’(마르 7,5) 따위의 것들이다. 그들은 조상들의 관습과 전통을 잘 지킨다는 명분으로 지금 자기 시대의 표징과 새로운 도전을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율법 학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렇습니다. 선생님.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은 과연 옳습니다.”(마르 12,32) 하며 그 가르침을 받아들인 율법 학자도 있었다. 이 한 사람의 율법 학자가 다른 무리의 율법 학자들의 속내를 고발한다. 바리사이 무리와 율법 학자 무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루가 10,29. 공동번역)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다.
제1독서인 신명기는 ‘신명기 법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느님의 법’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말한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신명 4,1)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 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신명 4,2)라고 강조한다. 진정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은 ‘화사첨족畵蛇添足’을 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27. 공동번역) 제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딴지를 걸며 시비를 거는 ‘무리’들이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6. 마태 23,4) 하기 싫거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면 열심히 하는 사람이나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사람 마음이 천사 같기도 하지만 때로는 하이에나 같아서 남의 것을 탐내고, 그것을 빼앗거나 없애버림으로써 자신들의 나태함과 불성실이 드러나지 않게 감춰버린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이시고 새로운 개명으로 구원을 알리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을 가지고 오셨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로 대표되는 세상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요한복음의 주요 주제 중 하나다
사람은 쉽게 비열해질 수 있다. 대쪽과 같이 강인하고 바위처럼 우직하며 뱀처럼 슬기로울 수 있기도 하지만 사람은 쉽게 야비해질 수 있다. 그런 처지에 빠지지 않으려면 평소에 마음을 갈고 닦으며 자기 성찰을 꾸준히 해야 한다. 놓치는 것이 없는지, 빠뜨리는 것이 없는지, 잘못 짚은 것은 아닌지, 좀 더 생각하지 못한 것은 없는지, 좀 더 봐야 할 것을 못 본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자신을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욕망을 마치 대의명분처럼 여기며 사람들에게 거짓을 강요하고, 그 욕망을 위해 ‘무리’를 앞세워 ‘권력’을 행사하는데, 그것은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암세포’일 뿐이다. 지금 당장 불편하고, 지금 당장 부작용이 염려된다고 하여 본질에서 벗어나 안전과 편리함을 쫓는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거짓’에 이른다. 잔잔한 물결은 안정적이고 편안하지만, 그 아래에는 많은 찌꺼기가 쌓여 썩는다. 그러나 거센 물결은 불안정하고 흙탕물을 일으키지만 보이지 않았던 찌꺼기들을 싹 쓸어간다. 새로운 역사는 늘 그랬다.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이루어진 ‘역사’는 없었다.
문제는 ‘의지’다. 사람의 의지요, 신앙인의 ‘믿음’이다. ‘자기 안위를 위한 믿음’은 안정과 편안함을 추구하겠지만, ‘하느님의 뜻을 위한 믿음’은 불편함도 고난도 불사할 것이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루카 12,51. 참조)
갈등과 분란, 이것은 과도기의 현상일 수 있다. 그런데 내적으로 약한 사람들은 이런 갈등과 분란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그러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여 자신의 반응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야 할 일인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의 본능은 자기 성찰보다 타인을 비방하는 편이 훨씬 쉽고 자신을 위해 안전하다고 여긴다. 이런 일이 무의식중에 일어나기도 하고, 의식 중에 일어날 수도 있다. 무의식중에 일어나면 자기 성찰이 부족한 무지의 소산이요, 의식 중에 일어난다면 자기의 부족함을 감추려는 비겁함의 소산이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 7,6-7)라며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하신다. 깨어있지 않으면, ‘마음 챙김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면 부지불식간에 내 마음이 나를 속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