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어머니에게도 청춘이 있었을까.
딸아이가 말했다.
“119라도 불러서 병원에 가야 하지 않을까? 아빠가 이렇게까지 아팠을 때가 없잖아.”
“글쎄다. 아빠야 더위 먹었으니까 여기서 쉬면 좀 났겠지만, 그보다 할머니가 걱정이야. 위독해서 오늘 밤이라도 가야 할 텐데.”
아내는 내가 정말 불볕더위 때문에 공연이 끝나고 쓰러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니, 나 역시도 이 모든 게 공연 전에, 습하고 더운 면사무소 밖 벤치에서 심할 정도로 연습하느라 더위를 먹었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딸아이의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본 뒤, 나는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대여섯 살 때였다. 어머니는 젊고 예뻤다.
어머니는 B 시에서 나를 데리고 기차를 탔다. 완행열차의 느릿느릿한 운행과 일정하게 들리는, 기분 좋게 덜컹거리는 소리, 좌석에서 묻어 있는 오물과 삶은 달걀의 구수한 냄새, 담배 연기 등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할머니 생신이었다. H 역 앞에 내린 어머니는 하루에 두어 번밖에 없는 버스 대신, 신작로를 따라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한 손엔 가방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어린 내 손을 잡고 할머니 댁으로 걸어갔다.
평소에 아침 일찍 장사를 가서 밤 10시에 돌아오는 어머니를 그날, 종일 옆에서 볼 수 있어 좋았던 나는 한여름 뙤약볕 속에서 두어 시간 동안 걸어가는 내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신작로에서 귀에 익숙한 ‘소양강 처녀’와 남진의 ‘가슴 아프게’를 흥얼거렸다.
중3 때였다.
사춘기였던 나는 학교에 가기 싫었다. 한동안 나는 아침에 가방을 메고 버스정류장에 서 있다, 학교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일쑤였다. 주로 바닷가 아니면 바다가 보이는 공원에 갔다. 그곳에서 하릴없이 배회하거나 바다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한날 날 미행하였고 그날도 내가 바닷가 근처에 마냥 앉아 있을 때였다.
“공부하기 싫나?”
어머니는 내 옆에 앉아 주섬주섬 보따리에서 사이다와 떡을 꺼냈다.
“나도 어떤 땐 장사하기 싫을 때가 있다.”
어머니는 그날 나처럼 하루 장사를 접었다. 당신은 장사를 하루 공치면 쌀 한 되와 연탄 석 장이 날아가는데, 하며 내게 웃으며 말했다.
가슴 속에 늘 걱정거리였던 막내아들이 늦은 나이에 겨우 제대로 된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자, 그때까지 장사를 멈추지 않던 어머니는 간혹 내 집에 오셨다. 아내가 몇 번이나 자고 가라 붙잡아도 어머니는 내일 장사를 해야 한다며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러다가 손주가 유치원에 다닐 때 어머니는 장사를 접고 처음으로 여유 있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때 어머니 집과 뚝 떨어진 곳에서 아내와 맞벌이했는데, 아이가 유치원 마치는 시간에 데려오고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 어머니는 두말없이 당신의 집에서 매일 지하철,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그 먼 곳까지 오셔서 손주를 돌봐준 후 돌아갔다. 그때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우리 집에서 자고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