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14연대 반란사건
1948년 10월 19일 제주도 출동을 명받은 국군 14연대의
1대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이하 40여명의 좌익 분자들은
반란을 일으켜 세 명의 대대장 이하 장교 22명 포함해서
40여명의 영내 군인들을 죽이고 시내로 진출했다.
이들은 미리 내통해둔 여수 시내 600여명의 남로당 분자들과
여수를 장악한 이들은 남로당의 비밀 지시로 역시 남로당
비밀조직원이었던 김지회 중위가 지휘권을 잡고 열차편으로 북상해서
같은 비밀 남로당원인 홍순석 중위가 지휘하던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순천까지도 접수했다.
이들은 국군의 반격으로 10월23일 순천, 10월 27일 여수가
탈환된 뒤 대부분 지리산으로 도주해서 공비가 되었다.
지창수는 벌교 토벌 단계에서 일찌감치 전사했고 김지회
홍순석등은
국군의 토벌에 쫓기며 지리산과 덕유산등을
전전하다가 다음해 4월 지리산 입구에서 사살 당했다.
[지창수의 최후에는 여러 설이 있다.]
그는 당시로는 부사관으로 나이가 많은 40세 정도였다.
반란군은 며칠 사이에 경찰관 공무원 우익인사들 800여명의
대학살을 자행했다.
반란군을 토벌한 국군과 경찰들의 보복적 살상도 극심해서
무고한 양민 역시 다수 희생되었다.
이 반란사건을 기회로 국군의 숙정작업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어서
군내의 좌익계 인사가 다량 검거되고 처형되었다.
6.25 사변이라는 국난을 앞두고 군내에서 좌익계를 소탕해서
다행이었다는
평가가 있으나 좌익 분자들에게 학살당한
우익 인사 가족들의 통한이나 국군 소탕전에서 억울하게
죽은 유가족들의 슬픔 역시 지금까지 풀지 못한 민족 갈등으로
남아 있다.
아래 사진들은 라이프지에 실린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의
사진들이다.
반란군들이 살해한 우익인사들의 유해
인적 끊어진 시가지에 쓰러진 우익인사.
며칠이 지났건만 좌익들 눈이 무서워 아무도 치우지 못했다.
반란군에게 원통하게 죽은 우익 인사의 주검
자녀들의 울음이 애처롭다.
유가족의 통곡 - 뒤에 폼잡고 서있는 멍청한 미군 군사
고문관 때문에 어색한 구도가 되었다.
비밀회원 위대한 지도자님이 주신 정보로 이 인간이 주한 미 고문단 소속
랄프 브리스라는 자임을 알았다.
약방 같은데 무슨 죄목인지 주인 부부가 한꺼번에 학살 당했다.
우익인사의 집단 처형.
벽에 총알 자국들이 선명하다.
왼쪽의 등을 지고 있는 사람이 토벌여단의 지휘관 송호성.
나중에 변절하여 북한측에 붙었다.
앞은 경찰 [정보담당 도경 사찰과장이나, 병력동원을 맡은 도경 경비과장],
그 오른쪽은 군산에서 내려온 12연대 백인엽 소령.
.
국군의 토벌개시 - 머리의 흰 띠는 반란군과의 구별을 위해서
표시한 것이나 일부 국군 토벌대[ 광주 주둔 4연대-14연대의 모체]가 반란군과 합류했기 때문에
구별의 의미가 없어졌다
사진 설명은 전투 막간을 이용해서 훈련을 하는 한국군이라고 했다.
용의자 연행- 3명의 여경 포함 37명의 동료들이 학살당한
여수 경찰들은 증오감에 붙타 올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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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계 청소년 담당 국막례 경사와 정운자 순경은 집에 숨어있다가
지방 빨갱이들에게 끌려 나오면서 무자비한 구타를 당했다.
놈들은 두 여자를 반군들 본부인 읍사무소에 끌고 와서도 죽창으로 찌르고
칼로 난도질을 계속했다.
견디다 못한 두 사람이 죽여달라고 애원하다가 죽어갔다.
그 사체들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끔찍한 방법으로 훼손되었다.
둘다 기혼으로서 인물이 무척 고왔다고 했다.
다른 여순경 박정운 순경은 사정을 모르고 출근하다가
지방 빨갱이에게 죽임을 당했다.
여순 반란 사건에서 희생된 경찰만 72명이 되었었고 거의 생매장이나
참수같은 잔인의 극을 다한 수법으로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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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된 뒤 구타당한 좌익분자.-
연락기[L- 5]의 이륙
.
북한 선전 담당들이 보면 좋아 할 사진- 군수지원 현황 파악차
내려간 미군 고문관들이 노획한 14연대 연대기를 들고 있다.
북한 미디어들은 미제놈들이 여수에서 인민들을 어쩌구
저쩌구하면서 50년은 우려먹었을 것이다.
오른쪽 대령은 아무래도 고문단장같다[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서---
죄송.-- 언젠가 이 분에 대한 글을 쓸려고 하는데 기대하시길. 좀 특이한
사람이다.]
윗 사진은 라이프 지 사진이 아니라 국내 저명한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을 추가 삽입한 것이다.
여수시내 수색에서 저항하다가 체포된 여학생들이다.
여수중학교 빨갱이 교감 송욱 때문에 많은 어린 학생들이
좌익화 됐었다.
골수 좌익화된 여학생들은 시내에 진입한 국군들을 유혹해서 허벅지에
숨겨둔 총신을 짧게 자른 칼빈 소총으로 사살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 뒤에 많은 어린 여학생들이 용서없는 죽임을 당했다.
반란군들은 여수 탈출 때 이 어린 학생들을 팽개치고 떠났다.
그러나 일부는 후에 탈출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월북하여 강동 정치 학원에 들어갔다가
다시 남으로 되돌려 보내져 목숨을 잃었다.
주먹밥으로 점심 때우기
.
사진설명에 연행되는 좌익분자들이라고 되어있지만 행색을 보니
토벌 진입전 미리 피해 나오는 가족같다.
토벌군의 수색 작전전 방송에 의해서 주민들은 미리
빠져나오고 있다.
작전동안 대기하는 주민들의 표정들에 불안과 공포가 역력하다.
.
여수 시내수색에서 체포된 통비분자들- 김지회가 지휘하는
일천여명의 주력은 이미 여수를 빠져나가 지리산으로 도주했다
여수 탈환후 찍은 사진인듯 - 국군의 탈환 뒤에 여수에
큰 불이 났었다. 이불은 반란군들이 지르고 도주한 것이
시 전역에 퍼진 것이다.
대화재를 바라보는 여수시민
화재 진압 의용 소방대원이 애쓰지만 별 소용이 없다.
토벌군의 의무병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있다.
공비화된 전 14연대소속 국군들 - 길게 자란 머리를 보니
여순 사건 한참 뒤의 토벌 작전에서 체포 된 것같다.
3,000여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반도중 2,333명이 포로가 되고
사살된 반도가 300여명, 김지회 홍순석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간 반도[반군+ 좌익 분자]들이 700명 정도다 .
포로가 많은 것은 14연대원 대부분이 멋도 모르고 좌익들에게
부화뇌동하다가 투항했다는 이야기다.
입산한 뒤부터 남로당 간부 이현상이 같이 입산하여 지휘했다.
김지회, 홍순석이 사살당한후부터 순천역앞 깡패 출신 이영회가
이 현상의 지시를 받으며 이 반군 부대를 총괄했다.
사진 설명은 통비분자인 어린 학생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 가운데 녀석은 도망 가려다가 벌써 두들겨 맞은듯
-- 허리띠도 풀려있고 ---
국군은 여수 탈환 뒤,여러 곳의 학교 운동장등에 40세 미만
전시민을 모아놓고 통비분자를 찾아내서 학교 뒤로 데려가
총살했다. 이때 거창 위장공비 사건으로 유명한 김종원이 일본도를
휘둘러 좌익분자들을 죽였다고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여수 경찰서장 고인수 총경도 반도들에게 일본도로 참수되었었다.]
통비분자로 지목된 자의 항의에 발길로 묵살하는 경찰
운동장에 강제 집결된 집식구가 걱정되어 주변에 몰려든 주민들.
99식 소총을 들고 운동장 주변 경비를 서는 사람은 대한 청년단원 같다--
반란군 의심 좌익 분자 색출
경찰과 대한 청년 단원들이 색출해낸 좌익 의심 분자
.
국군이 처형한 좌익들. 웃옷을 벗기고 총살했다.
이 여순 반란 사건은 지역에 큰 타격을 주고 국군의 역사에 오점을
남긴 사건이지만 글 앞에서 지적한대로 곧 다가올 북 도발 6.25사변을
위해서는 화가 복이 되었다는 시각을 가져 볼 수가 있다.
사건후 본격적인 숙군 사업이 진행되었는데 약 5,000명이 체포되었고
5,000여명의 군 좌익분자들이 탈영도주했다.
이 숫자는 국군의 10분지 1을 넘는 대규모다.
만약 국군이 이 좌익분자들을 안은채 남침을 받았었다면 남한은
손쉽게 적화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