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에서 나온 이야기
1. 사라예보의 총성
1924년 6월28일, 청명한 날씨에 오스트리아 영토인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는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페르디난트(Franz Ferdinant, 1863~1914)부처의 방문으로 온 거리가 떠들썩했다.
황태자 부처가 탄 포장덮개의 자동차가 막 다리에 도달했을 때, 구경꾼 속에서 이 자동차를 향해 폭탄이 던져졌다. 다행히도 폭탄은 수행원에게만 상처를 입혔을 뿐 황태자 부처는 무사했고, 범인도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시청에서 환영회를 끝마친 황태자 일행은 숙소로의 귀환예정을 바꾸어 부상당한 관리들의 병문안을 위해, 그들이 입원한 병원을 들르려고 했다. 그런데 운전사가 처음에 예정된 길로 가려다가 갑자기 병원에 들린다는 생각이 나서 급히 진로를 바꾸고자 차의 스피드를 잠깐 줄인 바로 그때, 군중들의 틈새에서 한 청년이 뛰쳐나와 황태자를 향하여 권총을 발사했다. 총탄은 황태자를 관통하였고, 옆에 앉아있던 황태자비까지 명중시켰다. 저격당한 황태자 부처는 병원으로 운반되는 도중에 절명하였다.
범인은 세르비아인 학생인 프린치프(Princip, 1894~1918)로서 역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열광적인 슬라브 민족주의자로서 비밀결사의 일원이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 사건을 일찍부터 오스트리아를 반대해온 보스니아의 이웃나라 세르비아의 책임이라 판단하고, 그와의 국교를 끊었다. 이리하여 사라예보의 한방의 총성이 전 유럽을 동란으로 몰아넣어 여기에 제1차 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현대사의 개막으로도 되었다.
2. 라 ·파이에트여, 이제 우리들은 프랑스에 왔노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에도 줄곧 중립을 지켜온 미국은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전개하여 무방비의 상선까지 습격하여 격침시키곤 했으므로 국내의 여론이 비등해지자 1917년 4월6일, 드디어 대독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게 되었다.
유럽전선으로 향하는 미군을 총지휘한 퍼싱(1860~1948) 장군이 프랑스에 상륙하여 첫 번째로 한 말이 이 ‘라 ·파이에트여, 이제 우리들은 프랑스에 왔노라’였다.
라 ·파이에트(1757~1834)는 프랑스혁명에서 활약한 자유주의적 귀족인데,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12년 전인 1777년에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 미국 독립전쟁(1775~83)에 참가하여 워싱턴이나 제퍼슨과도 친교를 맺었고, 또 독립군 소장으로 임명되어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자 일시 귀국했지만, 요크타운의 승리까지 줄곧 미국내에서 싸워 큰 공을 세웠다. 1781년에 프랑스에 돌아간 후는 내내 반체제세력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사람이다. 1776년의 미국 독립은 이 ‘두 세계의 영웅’ 라 ·파이에트의 헌신에 힘입은 바 컸던 것이다.
그로부터 140년, 독일군의 공격앞에 어려운 환경하에 놓여 있는 프랑스를 돕고자 멀리 대서양을 건너온 미군은 이제야 겨우 라 ·파이에트에 대한 보은시기가 왔다고 퍼싱장군은 생각한 것이다. 그런 생각과 뜻을 담은 것은 ‘라 ·파이에트여, 이제 우리들은 프랑스에 왔노라’였다.
3. 아라비아의 로렌스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알려진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1888~1935)는 영국의 웨일즈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축구나 크리켓 등 단체경기는 싫어하고, 주로 육체훈련을 줄겼다. 그리고 고고학에 대단한 흥미를 가졌는데, 그는 1910~14년간 대영박물관의 탐험대에 참가하여 아라비아와 시리아 지방 등을 탐험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제1차 대전이 발발하여 터키가 독일 측에 가담함으로써 영국은 이집트와 수에즈운하를 확보하는데서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정부는 터키 지배하에 있던 아라비아인을 회유 및 사주하여 터키에 대해 게릴라전으로 터키 후방을 교란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 작전계획의 실행책임자로 로렌스가 선발되었다. 그는 육군정보장교에 임명된 후 윙게이트 장군이 지휘하는 이집트파견군에 소속되어 1914년 카이로에 파견되었다. 그는 카이로에서 아라비아로 잠입하여 게릴라대를 조직하고 그 대장이 되어 여러곳에서 신출귀몰하는 습격작전으로 터키군 후방을 교란함으로써 터키군을 몹시 괴롭혔다. 1917년까지 헤자즈에서 이렇게 싸우다가 다음해에는 알렌비 장군의 참모가 되어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 진주하여 여전히 아라비아인들로 조직한 게릴라대로써 터키 군을 괴롭혔다. 이러한 투쟁과정에서 아라비아인을 사랑하게 된 그는 아라비아의 독립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약함으로써 신망을 얻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당시 식민지 대신으로 역시 파리회의에 참가했던 처칠의 아랍문제 고문으로 활약했으나 약속했던 대로 독립이 아랍인들에게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몹시 고민했다. 특히 파이살 1세를 이라크 왕으로 승인케 하는데 힘씀으로써 아라비아를 위해 노력했지만, 아랍민족에 대한 전승국들의 태도가 매우 미온적인데 실망하여 고문직도 사임하고 말았다. 그는 Shaw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1게 병졸로서 여러 군종에서 복무하던 중 1935년 5월13일 오토바이를 과속으로 몰다가 사고로 죽었다.
4. 세기적인 연애
영국의 에드워드 8세(1894~1972)와 심프슨 부인(1896~?)과의 사랑을 말한다.
조지 5세가 사망한 뒤 그의 장남인 에드워드 8세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1911년에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칭호를 받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배우던 중 제1차 대전이 일어나자 근위보병 제1연대에 배속되어 프랑스, 이집트, 이태리 등지에서 종군했다. 전후에는 세계 각국을 역방했고, 국내의 대공업지대로 방문하여 실업문제와 주택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스포츠를 매우 좋아했고, 또 퍽 멋쟁이로서 유행의 한 원천으로도 되었다. 게다가 여성에 대해서도 상당히 노련한 솜씨를 보였다. 그가 등극하자 일찍이 미국 신문들에 가끔 기사거리로 오르내리던 심프슨 부인과의 연애문제가 표면화하여 큰 정치문제로 되었다. 이것은 그녀가 미국인인데다가 황후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사랑을 버리느냐, 아니면 왕위를 버리느냐, 양자택일해야 할 백척간두에 서게 되었다. 여기서 에드워드 8세는 대영제국의 왕위를 버리고 감연히 심프슨 부인과의 사랑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이리하여 왕위에 올랐던 1936년 바로 그 해에 왕위를 동생인 조지 6세(1895~1952)에게 물려주고 윈저공의 칭호를 받은 다음해에 심프슨 부인과 정식 결혼했다. 이것을 사람들은 ‘세기적인 사랑’이라 하였고, 각국의 매스컴들도 역시 세계적인 토픽으로 다루었다. 이 부부는 만년에는 파리에서 살다가 1972년에 윈저공이 먼저 사망했는데 영국정부는 고국의 윈저궁전 성즈지 성당에서 그의 장례식을 지내주었다.
5. 4가지의 자유
미국 제32대 대통령 루즈벨트(1882~1945)는 제 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1월, 의회에 보낸 교서에서 4가지의 자유를 제창하였다. 4가지 자유란 ➀ 언론 및 표현의 자유, ➁ 종교의 자유 ➂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➃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루즈벨트의 이러한 기본구상은 1941년 8월11일, 처칠 영국수상과 더불어 발표한 ‘대서양헌장’, 1942년 6월의 ‘연합국 공동선언’을 거쳐 1948년 12월 10일,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 제3차 총회가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으로 발전하였고, 또 유엔헌장의 인권조항으로 명문화되었다.
‘세계인권 선언’은 물론 법적구속력은 없지만, 그 내용이 각국의 헌법, 노동법, 기타의 국내법에도 채택되었으므로 그의 도의적 의의는 매우 크다.
6. 철의 장막(iron curtain)
제2차 대전이 끝난지 약 2년 후인 1947년 9월, 미국에 초청된 영국의 전 수상 처칠경은 미주리 주 풀턴에서 한 연설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발트 해의 스테티로부터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대륙을 횡단하여 철의 장막이 내려져 있다…… 이 라인의 뒤는 모스크바의 지배에 복종하고……민주주의에 반대되는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자유민주주의 제국의 대립의식과 경계심을 명확히 제시한 말이다. 사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의 폐쇄성, 비협력성, 기만성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의 전형이 바로 북한 공산집단이다. 김일성 세습체제가 대한민국을 마치 북한보다 못사는 곳인 것처럼 역선전하면서 북한 동포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봉쇄하고 있다.
처칠의 ‘철의 장막’에 관한 연설이 있은 후, 이 말은 오늘날 모든 정치용어사전에 실려져 널리 사용되고 있다.
7. 뉴· 프론티어(New Frontier)
프론티어란 원래 미국역사에서 개척된 지역과 미개척지역의 경계선을 가리키는 말이다. 프론티어는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동부 13개주를 거점으로 개척자들이 서쪽과 남쪽으로 끊임없이 이동함으로써 미국의 발전을 상징하는 낱말로 쓰여왔다. 또한 프론티어는 미국사람들에게 자유롭고 평등한 활동기회를 부여하고, 여기서 배양된 개척정신은 민주주의의 건전한 기초를 양성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프론티어가 소멸된 현대에 프론티어에 new(새)라는 형용사를 붙여 1960년의 대통령 선거슬로건으로 사용함으로써 당선된 사람이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63) 제35대 대통령이다. 그는 뉴 프론티어 정책을 내걸어 선거인들의 프라이드에 호소하는 동시에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혁신적인 기분을 북돋우고자 했던 것인데 과연 이 표어가 적중됐던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이 뉴 프론티어 정신은 1961년 10월 쿠바위기 때 유감없이 발휘되어 쿠바에의 소련미사일기지 설치를 저지시켰지만, 아깝게도 1963년 11월13일 유세차 당도한 택사스 주 달라스 시에서 흉탄에 맞아 암살당함으로써 국내정책에서 그의 뉴 프론티어 정신에 입각한 경륜을 펴 보기도 전에 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