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 뇌 영혼 신
심리학과 신앙에 관한 허심탄회한 대화
말콤 지브스(1926~ )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자연과학 연구에 박사학위를 받은 후, 에이델라이드 대학교와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심리학 초대 교수. 영국 왕립학회 초대 회원. Neuropsychologia 의 편집장. 에딘버러 왕립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영국 학계에서 심리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확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분야에서 그가 이룬 학문 성을 인정한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와 스털링 대학교, 에딘버러 대학교는 그에게 명예학위를, 엘리자베스 여왕은 대영제국 훈 위 3등 훈장을 수여했다.」
[서문]
저명한 과학자이자 영국왕립학회 회원이었던 로버트 보일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명목상 그리스도인에서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는 경험을 했다. 그 후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소위 검토된 신앙examined faith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 하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감정이 끌리면서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또한 머리가 발견의 여행에 나서면 배운 내용들로 인해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에 따라 알고 싶은 마음도 더욱 커진다. 심리학 및 신경과학 같은 학문의 연구 결과들은 머리와 가슴 모두가 참여하는 <검토된 신앙>을 발전시키라는 새로운 과제를 제시한다.
영국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는 그리스도인 학생은 외톨이라고 느낄 수 있는데 교회에서 배운 교수들의 선언과 자주 충돌하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과 신경심리학 같은 과목들에서 특히 그렇다. 미국의 전형적인 그리스도인 심리학과 학생은 그리스도인들과 교우관계를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영국 학생보다 사정이 낫다. 하지만 그들 중 많은 학생이 심리학 수업에서 배우는 내용과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의 충돌로 인해 고민하고 있다.
모든 것을 다 공부할 시간적 여유가 있는 학생은 없다. 모두가 압박감을 느낀다. 과학의 발전으로 전통적 기독교 신앙이 맞고 있는 도전들을 논하는 중요한 책들이 점점 늘어가지만 그 책들을 살펴보고 싶어도 모두 살펴볼 시간이 없다. 흔히 그런 책들은 저명한 과학자, 철학자, 신학자, 성경학자들의 글을 한 테 모은 것이다. 진행중인 논쟁에는 중요한 기여를 하지만, 전문가들이 전문가들을 위해 썼기 때문에 흥미를 느끼는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사실 어렵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얘기하듯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진정한 믿음은 강요로 생기지 않는다는 원리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는 인식이 점증하고 있다.
이 책에서 나는 4년제 심리학 우등 과정을 밟는 가상 대학생과 이메일로 대화하는 형식으로 그 핵심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고 했다.
이 책은 학생들이 실제로 제기한 질문들을 다룬다.
우리 모두는 기독교 신앙의 여러 측면에 대해 의문과 수수께끼를 안고 있고, 정직하게 그것을 나눌 때 힘과 격려를 얻을 수 있다. 우리에겐 이런 식의 힘이 되는 나눔이 필요하다.
N.T 라이트가 상기시켜 준 대로, 우리 시대에 인기를 얻고 있는 끈질긴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기독교는 사람의 생각을 차단하고 진지한 사고를 중단하고, 실생활의 확고한 진실과는 단절된 얄팍한 환상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거짓말이다.
하지만 진실은 , 진정한 기독교는 바울이 서신(에베소서)에서 줄 곳 말하듯이 또 이 서신의 자매편인 골로새서에서도 말하듯이 진리를 더 깊은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게 한다.
부모님은 심리학 공부를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세요. 그것 때문에 제 기독교 신앙이 망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시거든요. 교수님은 심리학을 가르치시잖아요. 다른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교수님의 직업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이나요?
안타깝게도 심리학을 신앙의 최대 적이라고 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어. 그렇지 않아도 미국의 교수 집단 중에서 심리학과 교수들의 종교성이 가장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지.
심리학에 대한 세 가지 주요 흐름을 감지할 수 있을 거다. 첫째, 심리학 지식은 주로 사람들의 마음과 감정의 문제를 다루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이야. 둘째, 우리 마음과 뇌에서 벌어지는 일을 연결하는 학문이라고 보는 입장으로 열심히 잡지를 챙겨보고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사람들에게 친숙하지. 셋째, 다윈의 생각을 좇아, 단순한 형태의 동물에서 진화된 인간의 심리적 특성들을 다루는 학문으로 보는 입장이 있어.
안타깝게도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심리학과 종교의 우호적 관계는 달라지기 시작했어. 먼저 20세기 초,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발달했지. 그러다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행동주의가 한동안 심리학을 주도했단다. 공교롭게도 두 이론 모두 과학계가 아닌 대중매체에서 큰 인기를 끌었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억압, 죄책 콤플렉스 같은 정신분석학 용어들이 문학작품, 드라마, 일상 대화에서 불쑥불쑥 등장했지. 이런 일을 하도록 조건화되었다거나 저런 일을 하지 않도록 억제되었다는 등의 행동주의 용어들도 널리 사용되었어.
마음을 뇌와 연결시키는 두 번째 입장과 마음의 진화론적 등장을 추적하는 세 번째 입장은 21세기의 전형적인 대학 심리학 교과서에서 강한 지지를 받고 있지.
교수님이 말씀 하신 두 번째와 세 번째 입장, 그러니까 마음을 뇌와 연결시키고 인간 심리의 진화를 추적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 같아요.
놀랄일은 아니지.~~~ 교수진 대부분은 지난 세기 중반에 심리학의 주류였던 행동주의 시각에 반발하며 일어난 소위 인지혁명의 후예들이거든.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과 하워드 가드너 교수는 인지혁명에 대한 매혹적인 책을 썼어. 그 책에 조지 밀러 교수의 회상이 소개되어 있는데, 밀러 교수가 MIT심리학과에 있을 무렵, 대표적인 행동주의자 스키너 교수는 하버드에 있었지. 밀러는 1956년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소규모 국제 컨퍼런스를 마치고 이렇게 썼어. “심포지움을 마친 후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제 인간 실험심리학, 이론언어학, 인지과정에 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구성 요소로 하는 더 큰 통일체가 모습을 드러내고 미래에는 그 개별 학문들의 공통 관심사가 점점 다듬어지고 조율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확신, 이성적이기 보다는 직관적인 확신이었다.
2. 마음과 뇌는 어떤 관계인가
마음이나 정신활동이 특정한 행동을 만들어 낼 경우, 그 행동은 다시 뇌(마음의 물리적 기초)의 이화학적 구성이나 활동에 일시적 또는 만성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제가 하는 생각과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 저의 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뇌-마음 과학이 제 신앙을 근거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을까 좀 겁이 나요. 만약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겠어요?
2009년에는 신과 뇌를 연결시키는 도발적 제목의 책이 한 권 나왔단다. 신경방사신학자와 정신과 의사가 공동 저술한 이 책의 제목은 <신은 어떻게 뇌를 바꾸는가?How God Changes your brain>였지. 이런 유의 연구를 신경신학이라 부르는데, 이 연구를 활용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종교인들도 있지. 그런가 하면 이것으로 신에 대한 신앙이 진화론적 뇌 발달 과정에서 남은 찌꺼기에 불과함을 입증했다고 보는 무신론자들도 있고.
이런 몇 가지 문제를 다룬 책으로 <신앙의 눈으로 본 심리학 Psychology Through the Eyes of Faith. IVP>를 권하고 싶구나.
마음이라는 단어가 맥락에 따라 여러 의미로 쓰이는 것이 혼란스러워요. ~~~성경에 나오는 마음이라는 단어의 용례가 심리학에서 쓰이는 내용과 어떤 식으로 건 직접적인 연관이 있나요?
마음이라는 말이 나올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렴. 대략적인 지침은 될 거야. 첫째, 여기서 마음은 인지적 신경과학자들이 쓰는 것처럼 정신생물학적 통일체의 심리적 측면을 줄여 쓴 과학 용어인가? 둘째, (성경의 많은 문맥에서 그렇듯) 하나의 태도 또는 공유된 태도와 신념의 집합(예를 들어, 빌 2:5, 롬 12:2)을 말하는가? 네 질문에 대한 답은 거의 언제나 “아니다”일 거야. 과학과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은 그 뜻이 같지 않아.
심리학과 신경과학의 연구 속도가 가속화되면 정신 작용이 뇌 속에서 벌어지는 일로 모두 환원되어 버릴까요?
마음과 뇌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역사가 깊지. 수 천 년 전 , 우리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들이 이 문제를 생각했어. 그들은 신나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경험했고, 평화로운 생각을 하면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춘다는 것을 알고 잇었어. 이런 주관적 증거는 마음이 심장에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지. 기원전 5세기의 철학자 엠페토클레스는 마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 영혼을 심장과 혈액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이것을 심혈관설 이라고 하는데 ~~~ 비슷한 시기에 크로톤의 알크마이온은 정신 기능이 뇌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단다. 이 견해를 뇌수설이라 불렀지. 두 이론은 향후 이 천년 동안 경쟁했어.
현대에는 정신작용과 뇌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까요?
오늘날에는 소위 인지신경과학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어. 때가 되면 이 명칭이 신경심리학이라는 용어를 대체할 것 같기는 하지만, 어떻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 한쪽에 있는 마음과 행동, 다름 쪽에 있는 뇌, 어떻게 하면 이 둘의 관계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이 신경과학의 궁극적인 목표로 남을 거란 말이지.
나는 마음과 뇌가 하나의 복잡한 시스템의 두 측면이라고 본단다. 이런 상보적 의미에서 마음의 활동은 이화학 시스템인 뇌의 물리적인 작용에 의존하지. 그 시스템에 이상이 발생하면, 우리가 마음이나 정신활동이라 부르는 시스템을 구동하는 일에도 변화가 생겨. (그런 의미에서 심리치료사도 환자 뇌의 식별 가능한 일체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상황을 파악 해야 하지)마음이나 정신활동이 특정한 행동을 만들어 낼 때도, 이것은 다시 마음의 물리적 기초에 해당하는 뇌의 이화학적 구성이나 활동에 일시적 또는 만성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어. 따라서 둘의 연관성이 긴밀해져도 하나의 복잡한 시스템에서 마음이나 뇌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아.
인간의 뇌가 생각, 감정, 행동을 어떻게 다루는지 이해한다면 유서 깊은 마음-뇌 문제가 풀리겠지.
마음이나 정신활동이 특정한 행동을 만들어 낼 경우, 그 행동은 다시 뇌(마음의 물리적 기초)의 이화학적 구성이나 활동에 일시적 또는 만성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제가 하는 생각과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 저의 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래 그런 뜻이야.
런던에서 택시를 탔다가 운전사가 대도시의 작은 샛길까지 다 아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을 거야. 그들은 택시 운전사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2년 동안 연수과정을 밟는단다. 런던의 몇몇 연구자들이 현대의 뇌 스캔 기법을 활용해서 이 택시운전사들의 뇌와 대조군인 일반인의 뇌를 연구했어. 뇌에서 기억에 긴밀하게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진 부위인 해마를 연구했는데, 택시 운전사 연수과정에서 해마의 크기와 모양이 달라지고, 그 결과 대조군과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얻었어. 그들은 이런 결과를 바탕으로 뇌는 환경의 변화에 반응하여 소위 국소적인 가소적 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어.
3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저는 제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긴다고 믿어요. 그런대 새로운 연구결과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고민스러워요.
이탈리아 판사는 살인 유죄판결을 받은 한 여성의 뇌 영상과 유전적 증거를 검토한 뒤 감형을 선고했어.
2009년 스테파니아 알베르타니는 여동생을 살해한 후 시체를 유기한 혐의를 인정하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지. “네이처”지의 기사에 따르면, 알베르타니의 변호인이 인지신경과학자를 증인으로 세웠어. 그는 열명의 건강한 대조군과 엘베르타니의 뇌를 비교한 뒤 앞띠이랑(억제에 관여한다고 알려짐) 과 뇌섬엽(공격성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짐)을 포함해 알베르타니의 뇌에 구조적 이상이 있음을 보여 주었지. 유전학자가 나와서 그 여성에게 폭력성을 갖게 만드는 유전자가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기까지 했어. 그녀의 뇌에는 마오아(MAOA)라는 소위 폭력 유전자도 있었는데, 이 말은 신경전달물질 수치 조절에 개입하는 효소 수치가 낮다는 뜻이야. 판사는 이 새로운 증거를 참작해서 알베르타니의 형량을 이십 년으로 감형했어.
사람의 행동이 뇌의 원활한 작용에 영향을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가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뜻인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확신을 정당화하려는 이론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어. 우선 양립주의자들이 있지. 그들은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해. 반면 자유의지론 자들은 자연에, 그 중에서도 특히 뇌가 기능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비결정성이 있어야 자유의지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지. 이 비결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부분의 자유의지론 자들은 물리학에서 말하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많이 의지한단다.
저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읜리를 잘 몰라요
간단히 말하면 한 쌍의 물리량을 정확히 측정 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거야. 한 쌍의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지, 전자의 운동량이나 위치 하나만 놓고 보면 정확한 측정이 가능하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정확하게 측정하면 나머지 하나를 측정할 때의 정확성은 불가피하게 그만큼 떨어진다는 거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테니스공처럼 큰 물체가 아니라 전자 같은 소립자에만 해당한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마음과 뇌의 관련성을 그렇게 강하게 주장하시면서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유지하실 수 있나요?
수 백 만개의 뉴런들이 수백만 가지의 방식으로 상호 연결되면서 이상적인 동적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 신경생물학의 요소들이 대뇌피질에서 구현되어 온전한 인간의 인지적 특성을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어, 이런 복잡한 시스템들은 새로움을 보여 준다는 면에서매우 흥미롭단다 세세한 내용까지 다 알지는 못해도, 내가 이해한 바로는 소규모로 만든 동적 시스템의 수학 모델에서도 같은 시스템 모델을 돌리면 그때마다 늘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거야. 인간 뇌의 복잡성에 비하면 이런 시스템들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물리적 뇌가 어떻게 물리화학 법칙들과 뉴런의 작용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창발적 특성들을 만들어 내는지 설명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고차원적 창발적 특성들은 상의하달식 효과와 상당히 유사해. 이런 식으로 보면, 생각, 믿음, 기억은 동적 신경 시스템의 패턴 변화에 의해 나타난다고 볼 수 잇고. 이런 패턴들이(정신활동 자체의 물리적 기초가 되고 그것을 지지하는) 저차원의 신경생리적 현상에 상의하달식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겠지. 이것은 결국 물리적 특성의 관점에서 마음-뇌를 설명하는 것과 ㅅ애각, 믿음, 기억 같은 심적 개념들의 관점에서 동일한 시스템을 설명하는 일이 양립 가능하다는 의미란다. 두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설명을 다 동원해야만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시스템 전체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
4 결정론, 유전학 그리고 신 유전자란 무엇인가
저는 데이비드 마이어스가 쓴 심리학 교과서의 본성, 양육, 인간의 다양성이라는 장을 읽은 후에, 우리 행동이 우리의 유전적 구성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확신하게 되었어요.
제가 만난 기독교 설교자들은 대부분 누구나 복음을 들으면 똑같이 자유롭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해요. 하지만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에 끼치는 영향을 배우고 “신(神) 유전자”에 대한 최근의 발견 내용을 듣고 나나 그 말이 맞나 싶어졌어요. 유전자 구성 때문에 종교를 갖는 일이 더 쉬운 사람이 따로 있는 걸까요?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교수님이나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유전적으로 타고난 것일까요?
10퍼센트의 아동이 왼손잡이로 태어나는 이유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어. 손의 비대칭성은 뇌의 비대칭성과 이어져 있는데, 그것 역시 제대로 밝혀진 내용이 없어.
손잡이 유형이 집안 내력이라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만, UCLA의 인간유전학, 신경과학, 정신의학과 교수인 대니얼 게쉬윈드는 이렇게 말하지. “손잡이 유형은 유전적 영향이 있지만, 키나 몸무게 같은 다른 복잡한 특성들과 마찬가지로 복잡하다. 단일한 유전자가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환경적 요소도 강하게 작용한다.”
몇몇 연구는 가장 두드러지는 인간의 5대 성격특성을 검토했단다. (1) 외향성, 주도성 (2) 우호성, 친화성, 친근성 (3) 성실성, 순응성, 성취 의지 (4) 정서적 안전성 (이것의 반대는 불안과 신경중) (5) 문화, 지성, 경험에 대한 개방성,, 외향성 연구 결과는 475쌍에서 많게는 1만 2,777쌍에 이르는 쌍둥이들을 대상으로 한 다섯 팀의 대규모 연구에서 얻었고 통상 상관관계 형태로 표현되지. 일란성쌍둥이의 상관관계는 0.45부터 0.65에 이르고, 이란성 동성쌍둥이는 0.13에서 0.28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단다. 이 차이에서 분명한 유전적 영향을 볼 수 있어.
그 동안은 성격에서 나타나는 가족 유사성의 상당 부분을 환경이 설명한다고 생각했지만, 대부분의 연구에서 공통환경의 효과는 0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났지. 성격의 특성 같은 것들은 여러 복잡한 유전적 요인에서 나온다는 것이 현재의 대체적인 의견 같아. 종교성은 아주 복잡한 개념이어서 대체로 성격적 특성으로 여기지.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단일한 종교성 유전자가 존재한다면 다들 아주 많이 놀랄 것 같구나.
단일한 종교성 유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연구된 것 중에서 사람의 종교성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요인은 무엇인가요?
쌍둥이 연구의 대표주자인 린던 이브즈는 유전적. 사회적 요인이 종교에 끼치는 영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수집했어. 그는 2004년에 이 자료를 개관하면서 종교적 신앙에 대한 쌍둥이 사이의 상관관계는 순전히 환경적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어.
이브즈가 한 연구에서 사용한 기질과 성격 목록의 정의에 따르면 자기 초월성은 자신을 넘어선 더 넓은 시각과 행동을 통해 경험의 의미를 찾거나 경험에 의미 부여를 하는 역량이야.
이브즈는 교회출석의 개인차를 만들어내는 데 유전적 요인들이 작지만 의미심장한 역할을 한다는 결론을 내렸단다.
우리가 종교적 태도, 행동, 신념 등에 관해 내리는 선택은 개인의 성향 및 능력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유전적인 영향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가족 간의 종교적 유사성은 유년기와 사춘기에 공유한 환경적 요인에 상당 부분 기인 하지만, 성인기에는 유전적 요인들도 관여한다고 볼 수 있다. 종교성과 반사회적 또는 이타적 행동 간의 유전적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추가 증거도 있다. ‘신 유전자’를 발견했다는 주장은 시기상조에다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모든 유전적 영향은 많은 유전적 요인의 종합적인 효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신 유전자는 없다”
5 벤저민 리벳의 실험은 자유의지 신화를 무너뜨렸다.
벤저민 리벳이라는 사람이 1983년에 발표한 논문. 움직이겠다는 의식적 결정이 움직임이 시작된 다음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 논문이라고 하더군요.
피험자들에게 자리에 앉아서 텔레비전 화면을 보라고 했고. 화면에서는 점 하나가 시계 방향으로 2.5초마다 한 바퀴씩 돌아가고 있었어. 피험자들은 손가락을 움직이기로 자발적으로 결정하고 그렇게 결정한 순간이 언제인지 화면에 있던 점의 위치로 알려야 했어. 그와 동시에, 연구자들은 피험자의 머리에 부착한 전극을 이용해 피험자의 두뇌에 나타나는 준비 전위를 기록했지. 그들은 준비전위가 나타나는 시점이 피험자가 손가락을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나 의도를 보고하기 평균 350밀리 초 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어. 게다가, 이것은 손가락이 실제로 움직이는 시간보다 훨씬 이전이었지. 손가락의 움직임도 손가락에 부착한 전극으로 감지할 수 있었거든. 그러니까 이 준비전위는 대뇌피질의 전 운동 영역premotor-motor area 에서 이루어지는 뉴런들의 활동으로 생겨나는 것처럼 보였어. 아마 그런 의도된 행동에 앞서 뇌의 여러 다른 부위에서 일어나는 활동들도 있을 거라고 봐. 리벳 연구의 중요성은 행동을 하겠다는 의식적인 의도보다 뇌가 먼저 작용하는 것 같다는 점을 보인 것에 있었어.
이런 연구 결과들의 발표는 후속 연구로 이어졌고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리벳이 첫 번째 실험 결과를 발표한 후 지난 3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더 알고 싶어요.
리벳 실험의 해석을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고 아직 일반적인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지. 마크 핼릿과 동료들은 움직이겠다고 의식이 의도하는데 걸리는 평균 시간이 실제로 움직이기 1.42초 전임을 발견했어. ~~~그들의 결론은 “전통적인 결과와 우리 결과의 차이점은 뇌의 지시로 움직임이 시작된 직후부터 다층적인 인식을 거쳐 의도된 자각이 생겨남을 시사한다.”
의식과 자유의지에 대해, 핼릿은 수 세기에 걸쳐 크게 두 견해가 형성되었다고 지적하지. 하나는 이원론적 견해란다. 이 견해는 뇌와 마음이 별개고, 과학자들은 뇌를 연구하며 핼릿의 표현대로 의식은 ‘마음의 별개의 특성’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견해는 “일원론”이야. 핼릿은 이 견해를 지지하면서 증거를 따져 볼 때 이원론의 이해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마음은 뇌의 부산물이라는 거지. 너도 알다시피, 나는 제한적인 일원론을 지지한단다. 마음과 뇌는 단일한 실체의 두 양상이라고 본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그래서 내 견해는 ‘이중 양상 일원론(마음과 뇌가 하나의 복잡한 시스템의 두 측면)’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어.
6 모든 게 뇌 안에 있다
fMRI는 뇌에서 활동하는 뉴런의 산소 소모량을 측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해. 뉴런은 활동하면서 혈류에서 산소를 가져오고 헤모글로빈의 자성에 변화를 주지. 그런데 fMRI에 있는 강력한 자석은 헤모글로빈 분자들을 일렬로 늘어 세운 다음 회전해서 에너지를 방출하게 만들어, fMRI는 이 에너지를 측정해서 우리가 생각하거나 느끼거나 구체적인 행동을 계획할 때 어떤 부위가 더 활성화되는지 알려 주는 거야.
의식과 마음이 같은 것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인간이나 다른 동물들이 마음에 힘입어 시시각각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처리하고 그 정보를 숙고한 후 그 너머를 예측하고 계획하며 행동한다고 말하지. 그리고 의식은 마음의 도구 중 하나라고 주장해. 마음이 의식보다 큰 것이지. 이렇게 보면, 마음이란 고차원적 인지 과정들의 집합을 가리키고. 의식은 인지 과정들에서 나오지만 그런 과정 대부분은 의식의 작용 없이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겠지.
인간의 모든 행동은 어느 층위에서는 분명 생물학적이지만, 생물학적 설명으로 복잡한 행동을 단순하고 단일하고 만족스럽게 기술할 수 있다거나 분자 단위에서의 설명이 인간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분석 수준으로 유일하거나 최선이라는 뜻은 아니다. 사회심리학자들이 제시하는 도덕적 개념들은 가장 작은 구성 요소의 개별적 행동 하나하나를 파악하지 않고도 고도로 복잡한 활동을 이해하게 하고, 그로써 복잡한 시스템의 행동을 기술할 유효한 수단이 된다.
7 그러면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신경생리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고 존 에클스 경은 마음과 뇌의 긴밀한 연관성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인간에게는 몸과 뇌와 상호작용을 하는 비물질적인 불멸의 영혼이 있다고 믿었지. 이런 견해는 기독교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확고하게 자리잡았단다.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성을 부여하셨고 불멸의 영혼을 주셨다는 거야.
제임스 바(James Barr)는 지금까지 제시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다섯 가지 해석을 유용하게 정리해 놓았어. 첫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가진 불멸의 영혼을 말한다. 둘째,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이성적 추론을 말한다(아우구스티누그와 아퀴나스가 주장했고 루터와 많은 종교개혁가들이 받아들인 입장). 셋째, 두 발로 걷기 같은 인간의 신체적 특징을 말한다. 넷째, 바가 ‘가능성’이라 이름 붙인 것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인간의 소명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현재 모습이 아니라 ‘감당하도록 부름받은 일’이지. 다섯째는 하나님 및 다른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 부분을 강조한 사람이 칼 바르트야.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관계를 맺을 능력일 뿐 아니라 관계 자체지.
여러 철학 사상과 기독교 사상은 영혼과 마음의 속성들이 본질적으로 같다고 여겼다.
8 초심리학과 임사체험은 영혼의 존재를 입증하는가
초심리학과 심령연구에 대한 교수님의 생각을 말씀해 주세요. 마음과 뇌가 단일한 통일체의 두 양상이라는 교수님의 견해를 반박하지는 않나요?
심령연구는 무엇보다 죽은 사람들과의 접촉에 초점을 맞춘다. 초심리학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거나 마음으로 벽을 투시하거나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들의 존재 여부를 다루지 몇 년 전 미국 국립과학원 회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90%가 그런 현상이 존재한다는데 회의적인 것으로 나타났어. 초감각적 지각이 진짜라면 인간의 마음과 뇌가 통합된 전체의 두 양상이라는 널리 받아들여진 과학적 이해의 일부를 뒤집어야 하겠지. 과학사를 보면 가끔씩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 과학적 선입견을 뒤집기도 하잖아.
현재의 내 견해를 간략하게 요약해 보마. 초상현상의 종류에는 텔레파시, 투시, 예지 가 있다.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에 대해서 현재까지 나온 모든 증거는 분명히 부정적이야.
텔레파시나 ESP는 어떤 면에서 내가 앞서 언급한 골상학과 다소 비슷하다. ESP는 검증 실험을 통과하지 못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초심리학에 대해 재현 가능한 현상과 그것을 설명할 이론이 필요하다고 말한단다.
유체이탈체험이 일어날 때 뇌의 어떤 부위가 주로 활성화되는지도 모두 밝혀지고 있는데, 측두엽과 두정엽의 경계 부위가 그곳이야. 스위스의 신경과학자 올라프 블랑크는 뇌의 특정 부위에 전기 자극을 주자 그전까지 유체이탈 체험을 해 보지 않은 환자가 유체이탈 체험을 했다고 보고했어. 그 실험은 환자가 완전히 깨어 있고 주위 환경을 인식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졌지. 환자는 침대에 누워있는 자기 모습과 그 주변을 위쪽에서 내려다보고 있다고 말했어.
9.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
10 인간은 다른가
동물의 문화에 대한 최근 연구를 혹시 아니요?
앤드루 화이튼은 2005년 빅토리아 호너, 프란스 드 발과 함께 ‘네이처’지에 침팬지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도구 사용의 문화 규범에 대한 동조라는 제목의 논문을 게재했단다. 침팬지 무리가 사용하는 지배적인 방식과 일치하는 도구 사용법을 발견한 일부 침팬지 무리에게서 인간 문화의 특징이라고 여겨지는 다수 동조 편향이 보인다는 연구 결과를 알린 것이지. 2010년에는 캐나다의 맥마스터 대학교 연구팀이 ‘디스패치’지에 동물 전통:뜻밖의 동물에게서 발견한 모방 학습의 실험적 증거라는 제목의 논문을 게재했어. 연구자들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흔히 인간과 가깝다고 여겨지지 않는 동물인 몽구스를 연구했어. 그들의 논문은 이렇게 시작해. “인간 외의 동물들이 자연 상태에서 ‘문화’를 가질 가능성이 근래에 큰 관심을 끌었다.” 그들의 연구는 사회적 학습을 통해 단일 개체군에서 행동이 전통으로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단다.
동물에게도 ‘도덕률’이 있느냐는 거죠, 만약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 하나가 사라졌다는 뜻인가요?
11 이타주의, 이타적 사랑과 아가페의 차이가 무엇인가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인간의 행동이 동물들 사이에도 분명히 있는 것 같아.
다른 동물들이 인간의 도덕적 행동에 버금가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해도, 그 행동이 반드시 우리와 같이 심사숙고를 거친 결과라고 볼 수는 없다. 동물이 다른 동료들의 권리를 염두에 두고 자신의 이익을 가늠하고, 사회에 더 큰 선을 생각하고, 해서는 안될 일을 했다며 평생 죄책감을 느낀다고 믿기는 어렵다.
12 언어는 인간만의 고유한 것인가
동물들이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
13 나의 뇌에 신 영역이 있는가
캐럴 올브라이트와 제임스 애슈브룩의 책 <신은 인간의 뇌 어디에 사는가?>가 나오면서 뇌와 종교 체험을 연결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폭넓은 관념이 생겨났지.
뇌와 영상에 대한 과거의 논의가 이 부분에서 도움이 된다고 본다. 이 주제를 많이 다룬 이들이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사도 바울의 체험에서 논의를 출발하지. 그들은 바울이 간질환자였을 것이라고 추측한 다음, 바울의 종교성도 전형적인 간질 환자의 그것이었을 거라고 추정해.
최근의 한 연구로 소위 일부 간질 환자의 과도한 종교성이 측두엽 간질이있는 사람의 특성만은 아니라는 게 드러났어. 게다가 과도한 종교성과 측두엽 간질이 함께 나타나는 개인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되풀이 되는 측두엽 발작파와 과도한 종교성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보이지 않아. 하지만 이런 상황임에도 사람들은 종교적 체험 일반과 특별히 종교적 인식을 뇌의 특정 부위의 선별적 활동과 연결해서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어.
기도와 명상 같은 것들을 뇌에서 벌어지는 일로 설명할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시지는 않으시나요? 그렇다면 하나님, 종교, 영성은 뇌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뜻인가요?
퍼싱어의 가설에 따르면, 종교 경험의 원인은 측두엽 발작이라고 알려진 측두엽 내의 일시적이고 국지화된 전기 활동이야. 퍼싱어는 우리가 신을 경험하는 이유가 측두엽이 진화론적으로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해. 측두엽의 구조가 다르게 발달했다면 신에 대한 체험은 생겨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지.
일부 저자들은 대뇌변연계가 영적, 종교적 경험의 토대가 된다며 그 중요성을 주장한단다.
이 모든 연구는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고 있어. 프로이트의 말처럼 종교적 신앙이 모두 망상이라면, 인간이 망상적 생각과 신념에 빠지게 하는 뇌를 발달시키는 게 과연 인간에게 유리할까? 이것이 어떻게 인간 생존에 보탬이 될까? 이 논증을 거꾸로 말하면 이렇게 돼. 신이 존재하고, 인간과 관계를 맺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면. 그 관계가 발전하도록 하는 물리적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거지.
알렉산더 핑걸커츠와 앤드루 핑걸커츠 논문의 주요 결론은 다음과 같다.
- 종교적 경험은 특정한 어느 한 신경계뿐 아니라 평소에는 종교와 상관없는 활동에 개입하는 여러 개가 동시에 활성화되어야 일어나는 것 같다.
- 관련 문헌들을 자세히 분석했지만 종교적 경험 도중에 뇌 영역의 특정 반구가 일관되게 활성화되는 현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종교 경험에 대해 거의 50년 가까이 뇌전도 연구를 진행했음에도, 종교적 경험에 내재하는 신경생리학적 기반에 대한 분명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종교적 경험에는(노르아드레날린작동계를 제외하고) 뇌 속의 모든 주요 신경 전달계가 다 참여한다.
- 지금으로서는 신경과학이 종교적 경험에 대한 신뢰할 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 하지만 생물학적, 심리학적 차원에서 종교적 경험을 전반적으로 기술하는 데에는 현재의 인지신경과학도 어느 정도 힘을 보탤 수 있다.
14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끄시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법에 대한 다양한 ㄱ녀해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성을 얼마나 사용해야 할까요? 감정과 느낌에는 얼마나 의존하죠?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는 일은 어떨까요?
첫째, 성경에는 극적인 인도를 받는 사례들이 있어. 사울이 회심할 때 들은 내적 음성과 마태가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은 일 등 말이야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성경 어디에도 이것을 표준으로 삼으라는 말씀은 없어. 타당한 일이지.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는 것은 정신병리학적으로 강력한 신호일 수 있으니까. 적절한 약물 치료를 받으면 환상과 음성은 사라질 수 있어.
둘째, 신경과학은 지성과 감성 또는 감정의 엄격한 구분이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의 모습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한단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뇌의 안와-전두피질(전두엽의 안구쪽 영역)이 손상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심층연구를 실시했어. 연구를 마친 후 그는 이런 뇌 손상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밝히는 소위 신체표지이론을 발전시켜. 그는 <데카르트의 오류>에서 이 점을 상세히 다루었어.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은 경험의 도움으로 사건에 대한 자동반응을 발전시키고, 이것은 세계에 대한 지식과 짝을 이루어 움직이지. 결정을 내릴만한 적절한 지식이 우리 의식에 없을 때, 우리는 미묘한 느낌과 직관의 인도를 받게 돼. 여기에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의심, 어떤 행동은 옳은 일이 아닐 거라는 느낌 등이 포함되지. 이런 자율 반응은 많은 상황에서 우리의 행동을 인도 한단다. 다마지오 이론은 우리가 일상에서 내리는 복잡하고 합리적인 판단의 상당 부분을 정서에 의존하며, 의사 결정을 내리는 순간순간 정서가 우리를 인도한다고 말해. 이유는 모르지만 종종 이것 또는 저것이 옳은 일이라고 그냥 느낀다는 거지.
셋째, 우리는 과거의 지혜에서 배워야 해.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지성과 감성이 어떤 식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 지금과 같은 지식을 갖추기 훨씬 이전의 시간으로부터 배워야한다는 거야. 피터 엔스는 이렇게 강조해. “장래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고대의 사고방식에 뿌리를 둔 책으로서, 극복 해야 할 장애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신학적으로 볼 때 긍정적이라는 견해를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단다. “그리스도인들이 등을 돌려도 우주의 기원과 생물의 기원에 대한 현대의 과학적 설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고대 근동이라는 맥락을 고려할 때 이스라엘 신앙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잇다는 사실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5 신경심리학이 심리치료와 상담에 도움이 되는가
나는 심리학과 기독교 신앙의 통합을 말할 때 심리학을 있는 모습 그대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해. 심리학에 대해 논의하면서 성격이나 상담에만 초점을 맞추는 등 작은 부분에만 한정하고 전체 그림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온전한 논의가 될 수 없다고 봐. 이미 보았다시피 , 심리학은 신경과학, 인지과학과 관련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해.
16 종교적 신앙은 21세기 민중의 아편인가
17 영성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우울증을 앓는다고 하면 믿음에서 떨어져 나왔거나 뭔가 감추고 있는 죄가 있을 거라고 말하는 식이지. 다행히도 지금은 이런 생각이 전만큼 흔하지는 않아. 풀러 신학교 교수였던 저명한 그리스도인 루이스 스미즈는 이런 식의 심각한 사실 왜곡을 반박할 요량으로 그의 책 <하나님과 나>에 자신의 우울증 경험을 털어놓았어. 그는 그 기간에 무력감에 사로잡혔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지. 스미즈는 자신의 회복을 이렇게 묘사했어. “그러다 하나님이 돌아오셨다. 내 두려움을 뚫고 들어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떨어지도록 두지 않겠다. 내가 언제나 너를 붙들어 주리라. 하나님이 검은 구덩이에 빠져 있던 나를 기쁨의 세계로 곧장 들어 올리신 것 같았다. 스미즈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지. “그날 이후로 나는 신경증적 우울증에 시달리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솔직하게 덧붙일 말이 있다. 하나님은 매일 아침 내게 다가오셔서 20밀리그램의 프로작 캡슐을 권하신다. 나는 매일 아침 캡슐 한 알을 삼키며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18 과학의 설명으로 종교를 부정할 수 있는가
기도 중에 뇌의 특정 부위가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가 하면, 같은 사실을 신에게 바치는 기도가 특정한 뇌 영영\r의 선별적 활동에 불과함을 보여 주는 증거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지요. 어떻게 하면 과학적 연구 결과를 기독교 신앙과 적절히 연결시킬 수 있을까요?
과학적 기술 記述로 종교를 포함한 인간의 삶을 생물학적. 물리적. 심리적 작용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믿게 될 가능성은 언제나 있지.
프랜시스 크릭은 그의 책 <놀라운 가설>에서 이렇게 썼어. “당신은 신경세포들과 그것들이 모인 분자들의 방대한 집합체의 움직임일 뿐이다… 당신은 뉴런들의 묶음에 불과하다.”
나는 크릭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따라가며 그가 놀라운 가설에 대해 쓴 글도 종이에 묻은 잉크에 불과하고 그 메시지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말했다.
노벨상을 수상한 로저 스페리는 환원주의(한 영역의 대상, 속성, 개념, 법칙, 사실, 이론, 언어 등을 다른 영역의 그러한 것들로 대치하려는 사고의 형태.)의 위험을 경고하며 이렇게 썼어. “메시지의 의미는 잉크의 화학성분에서 찾을 수 없다.”
영국의 저명한 신경과학자 콜린 블레이크모어 교수가 채널 4의 “기독교와 역사” 시리즈에 등장해서 ‘신과 과학자’에 대해 말하는 대목에서였지. 그는 “언젠가 과학이 종교적 신앙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비롯한 모든 것을 설명하기를 바란다고 말했어. 그는 인간이 개발한 뇌의 여러 특성이 신을 믿는 성향을 필연적으로 만들어 낸다는 입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아. 그렇다면 신에 대한 믿음은 뇌 속 뉴런들의 선별적 재잘거림에 불과한 것이 되겠지.
이런 식의 논리는 문제가 있어. 언젠가 과학이 종교적 신앙을 향한 인간의 욕구를 비롯한 모든 것을 설명할 가능성이 있다는 그의 견해에도 똑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는 거야.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그의 견해 또한 그의 뇌에 있는 뉴런들의 재잘거림에 불과한 것이지. 실제로 이런 식의 환원주의적 접근은 논의를 진전시키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되고, 사람들이 믿거나 믿지 않는 이유로 제시하는 논증을 절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오래 전에 프로이트가 이미 심리학을 사용하여 종교를 부정했다는 거예요. 종교는 다 소망투시라고 주장했다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심리학자들이 종교에 관심을 가질 때는 그 뿌리와 열매, 곧 종교의 기원에 대한 문제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집중했어.
종교를 무의식적 소망의 산물로 보는 정신분석적 설명이나 종교를 부정하려는 설명의 주요 문제점은 그런 설명이 불신앙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거야. 이것은 륌케(Rumke)가 그의 작은 책 <불신앙의 심리학>에서 예리하게 보여줬어. 륌케는 프로이트의 생애를 꼼꼼히 살핀 후 아버지와의 불화와 로마가톨릭 신자였던 유모에게 보인 극도의 거부감 등에 주목했어. 그리고 프로이트 본인의 이론에 근거할 때 그런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면 성인이 된 후 종교, 특히 신을 아버지 같은 존재로 보는 종교를 거부하는 합리적인 신념 체계를 만들어 낼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고 했지. 프로이트는 정말 그렇게 했어. 오늘날의 무신론 회의론자들도 이런 식으로 특정한 문화적 영향을 반영한단다.
의심은 믿음의 반대말이고 믿음 없음을 보여 준다고 말했고, 의심이 죄라고 하는 친구도 있었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애기를 들으니 50년 전의 심리학이 떠오르는 구나. 당시 대표적인 성격심리학자는 하버드의 고든 올포트였어. 그는 그리스도인이었는데 <개인과 종교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이라는 책을 썼지. 이 책의 ‘의심의 본질’이라는 장에서 올포트는 건설적 의심이 더 큰 믿음을 낳는다고 주장했어.
예이여르 호이카스는 <로버트 보일>을 집필하면서 보일의 단편적인 자서전을 인용해서 그가 회심한 후에 회개하고 그의 양심 속에 오랫동안 잠들어 계셨던 그리스도께 반응하기로 맹세했다고 썼어. 그런데 기독교의 일부 근본 교리에 대한 극심한 의심이 보일의 뒤를 쫓았지. 의심에 이어 우울증이 찾아왔고 기독교가 자살을 금지한다는 사실만이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막아 주었어.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지. 어느 날 성만찬이 끝나고, 하나님은 그가 그분의 은혜를 받고 있음을 다시금 느끼게 하셨다. 그 후에도 보일은 가끔씩 그가 내 신앙의 질병이라 부른 것에 시달렸지만 덕분에 자신이 믿는 종교의 근거를 살피게 되었다. 의심은 그가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설명해내도록 만들었다. 호이카스는 보일이 결코 의심하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도 자신의 믿음을 정당하게 의심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에 주목했어.
정직한 질문은 더 깊은 믿음으로 가는 성경적인 길이야. 애톨 딕슨(Athol Dickson)은 이 사실을 상기시키며 자신의 경험을 나눴지. “어린 시절 나는 교만한 사람만이 감히 주님께 질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때로는 질문하는 것이 겸손한 일임을 배웠다. 질문 안에는 내게 답이 없고 하나님께 답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질문은 하나님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고,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
딕슨은 그의 책에서 하나님께 질문하는 사람들이 성경 곳곳에 나온다고 지적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질문을 하지. 창세기 18장을 봐. 모세도 그래. 딕슨은 여기서 명심해야할 교훈이 “묻는 것은 의심하는 일이 아니라 신뢰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어.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 “하나님께 불충하는 일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그분께 여쭤 볼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는 뒤에서 이런 말도 했어. “하나님께 묻기를 두려워 하는 것은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벧전 3:15)는 베드로의 권고와 정반대의 결과를 내 삶에 초래했다. 하나님께 묻기 시작할 때까지 그랬다. …..나는 무엇을 믿는지 알았지만, 왜 믿는지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 알 뿐이었다. 경외심으로 가장한 편집증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내게 설명하라 명하신 더 깊은 진리를 알 수가 없었다.”
의심의 과정을 이해한다면 자신이 믿거나 믿지 않는 근거가 타당한지 파악할 수 있는 더 나은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자 B.F. 스키너와 신경심리학자 로저 스페리에 대해 말씀 하셨어요. 이분들이 종교에 대한 견해를 갖고 있었나요? 종교를 부정하는 설명을 시도했나요?
스키너 교수는 지난 세기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고 종교를 부정하는 설명을 시도했어. 그는 행동을 만들어내고 조정하는 기법을 개발했는데. 이 후 그 기법을 써서 사회의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추측했지. 그리고 어떤 종교는, 그의 행동 수정 기법처럼 보상과 처벌 체계에 근거한 게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어. 그래서 지옥은 궁극적 처벌에 해당하고 일부 종교 집단이 그 위협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사용했다고 보았지.
그러면 저의 기독교 신앙을 제가 가진 신경과학적. 심리학적지식과 어떻게 연결해야 할까요?
기독교 철학자 스티븐 에번스(Stephen Evans)는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적 신앙과 심리학 지식을 연결시키는 여섯 가지 방법을 소개했어. 그가 책을 쓸 당시에 사람들이 가장 널리 받아들인 입장은 동일한 사실에 대한 두 가지 별개의 관점이 있다는 것이었어. 바로 믿음의 관점과 과학의 관점이지. 에번스가 관점주의자들이라 부르는 이들은 과학 연구의 진실성을 유지하고 때때로 자기도 모르게 은밀히 들어오는 개인의 철학에 그것이 더렵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이야. 그는 관점주의가 과학의 불완전함을 암시한다고 보는데, 이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 과학의 경계라고 할 만한 영역이 따로 있다고 보는 이들이 있어. 이 견해에 따르면 실제의 어떤 영역은 과학 탐구자들에게 엄격한 출입 금지 구역이야. 그는 그런 사상가들을 영역주의자(territorialist)라고 불러. 반면, 과학적 접근은 실재를 인식하는 여러 가능한 방식 중 하나일 뿐이라고 보는 이들을 관점주의자라고 부르지. 오랫동안 이 문제를 생각해 온 메리 밴 르우웬(Mary van Leeuwen)은 관점주의에 한계가 있다고 말해. 관점주의가 기독교와 심리학의 관계에 대한 최종 답변이 되기에는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들이 너무 많다.
나는 관점주의 모델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앞으로도 여러 측면에서 그럴 거라고 봐. 관점주의 모델에 따르면 기독교와 심리학은 3차원 구조물에 대한 평면도와 입면도라고 할 수 있어. 둘 다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지만, 둘을 부적절하게 섞으려 하면혼란이 생기지. 둘은 경쟁 세력이 아니라 각각이 묘사하는 실재의 전체 그림을 보여 주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보아야 해. 이것을 전적인 관점주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지.
시각계의 작동 방식에 대해 가장 널리 논의된 모델은 데이비드 밀너와 멜 구테일이 제안한 모델이야.
우리는 주위 세상을 바라볼 때, 시각, 후각, 촉각, 미각을 통해 정보를 습득한다. 연구자들 사이에서 대체로 합의가 된 내용은, 시각계가 다소 다른 두 기능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야. 하나는 세계에 영향을 주는 기능이고 또 하나는 세계를 표상하는 기능이지. 뇌가 이 두 목적을 어떻게 달성하는지를 신경심리학자, 신경생리학자, 신경과학자, 최근에는 컴퓨터 과학자들이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어. 너도 알다시피 발생학적으발 볼 때, 중추신경계의 일부라 할 수 있는 눈의 망막은 광수용체를 때리는 전자기 복사를 뇌가 이해할 수 있는 생리적 신호로 변화시키는 동시에 그 신호들에 대한 몇 가지 계산을 수행해. 망막에서 뻗어나온 많은 투사 신경로 또는 전도로가 여러 종류의 정보를 일차시각피질과 피질의 상위 시각 영역으로 전달하지. 밀너와 구테일은 이렇게 주장했어. “운동의 시각적 제어를 담당하는 시각 부호와 체계에 필요한 조건과 시지각을 담당하는 체계의 조건은 다를 수 밖에 없다.”그들의 지적을 더 들어보자. “포유류 시각계의 다른 경로는 분명 다른 종류의 시각 분석에 특화되어 있지만[광대역 경로(깜빡임, 움직임 인식)대 반대색 경로(색상, 패턴처리), 대세포 경로(동작처리)대 소세포 경로(형태, 색상처리)], 어떤 지점에서는 이 별개의 입력 자료들이 다른 방식으로 결합 및 변화되어 다른 목적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두 피질 경로는 대상의 본질적 특징과 그것들의 공간적 위치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지만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변화는 두 경로가 다른 목적을 위해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은 두 시각 경로는 각기 준 독립성을 갖추고 있지만, 그럼에도 주 경로의 영역에는 상호연결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
이것은 과학과 신앙을 통해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지식을 건설적으로 연결시키고 통합할 방법에 대한 유용한 은유가 아닐까? 시각계가 두 경로에서 입력 자료를 분석하여 사용하고 결국 효과적인 활동에 적용하듯, 우리는 과학 연구의 결과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에 근거해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정리. 분석. 처리. 통합하는 거지.
19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현재 과학 연구 상황을 볼 때, 앞으로 어떤 중요한 변화들이 있을까요?
[Review]
뇌 과학의 발달로 인체의 모든 신비가 속속 밝혀지고 그와 연계된 인지 심리학은 신앙을 과학의 한 분야로 다루려고 하는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뇌의 어느 부위에 종교를 관장하는 부위가 있다느니 종교가 유전적 성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인지 등에 대한 연구 발표들이 시중에 쏟아져 나오는 책을 통해 쉽게 접하게 된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이런 과학 심리학적 지식과 신앙을 어떻게 연계해야 할까? 딜레마에 빠져있다.
나이가 들고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게 되고 가끔 철학이나 심리학. 뇌 과학. 진화론에 관한 책들을 보게 되면서 아내는 걱정한다. 그런 사상들이 은밀하게 신앙을 혼란에 빠뜨리게 될 거라는 우려 때문이다. 스스로도 그런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음으로는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하면서도 그런 지식이 없을 때보다, 신앙에 대한 더 많은 의구심이 생겨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무엇을 믿느냐에 대해서는 확고하지만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이런 일 때문에 성경을 보는 시간이 줄어들고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든다면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 책을 접하고 책 구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내용의 핵심에서 벗어난 군더더기 말들이 많고 그렇다고 어떤 사항을 명쾌하게 주장하지도 않는 것이 불편했다. 읽기를 포기했다가 다시 읽으면서 주제 하나하나가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과학은 인간의 정신작용을 뇌의 작용과 연계해서 해석하려는 소위 인지심리학의 발달로 수많은 연구 자료를 쏟아내고 있다. 이 책에서는 마음과 영혼, 자유의지, 운명, 초 심리학, 임사체험과 같은 주제를 넘어 신의 존재에까지 도전하는 과학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존 스토트’는 저서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서 “우리에게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더 많은 것이 있다.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구원은 둘 다 불완전하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 즉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 시작과 완성 사이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시대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문명을 외면하고 피할 것이 아니라 도전하는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조지 오웰이 표현한 이중사고(double-think)라는 표현으로,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마음속에 두 가지 상충하는 견해나 신념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 능력, 이중 귀 기울임을 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한 편지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 비교하면 그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세상의 모든 지식은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표현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한편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벧전3:15)’는 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앞으로 10년 이내에 인간을 앞지른다는 성급한 과학자들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인간이 만든 로봇이 인간의 마음을 읽는 순간 인간은 로봇의 전원을 내려야 한다고 하지만 정말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만큼 인간의 마음은 인간이 마지막으로 지켜내야 할 보루다. 과학은 오늘날 마음을 넘어 신의 존재까지도 뇌세포 안에서 찾아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사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거시적 안목으로 보는 것으로 해결될 수도 있다. 욥기가 주는 교훈은 왜 선한 사람이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가이다. 욥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크고 원대함을 깨닫는 순간에 해답을 얻었다. 이 책의 저자도 그와 같은 표현으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상충한 과학과 신앙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조언한다. 전자나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물리량이 자연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들어서 오늘의 현실을 거시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직면한 문제들은 아주 작은 것으로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지식이 얼마나 미약한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한 말이다.
이 책은 오늘날 쏟아져 나오는 단편적인 수많은 이야기에서 우리가 맛보는 명쾌한 답변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조금 실망스럽다. 주제의 범위가 너무 넓고 큰 그림을 보는 것처럼 약간 두루뭉술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큰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면에서 유익하다. 이 책의 서두에서 밝힌 대로 이 책은 상담심리를 배우는 대학 우등생에게 질문과 답변형식으로 쓰였기 때문에 뇌 과학, 신경 심리, 인지심리 등 최신 언어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는 접근하기가 혼란스럽다. 이 책은 또한 그의 최근작으로 원제는< Minds, Brains, Souls and Gods>, 2013년에 출판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2015년에 번역 출간되었다. 1926년생으로 이 책이 출판된 즈음에 구십이 넘었을 나이다. ■
[책의 본문]
“안타깝게도 심리학을 신앙의 최대 적이라고 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어. 그렇지 않아도 미국의 교수 집단 중에서 심리학과 교수들의 종교성이 가장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지”
“하지만 그들 중 많은 학생이 심리학 수업에서 배우는 내용과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의 충돌로 인해 고민하고 있다.”
"현재의 내 견해를 간략하게 요약해 보마. 초상현상의 종류에는 텔레파시, 투시, 예지 가 있다.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에 대해서 현재까지 나온 모든 증거는 분명히 부정적이야."
"나는 심리학과 기독교 신앙의 통합을 말할 때 심리학을 있는 모습 그대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해. 심리학에 대해 논의하면서 성격이나 상담에만 초점을 맞추는 등 작은 부분에만 한정하고 전체 그림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온전한 논의가 될 수 없다고 봐. 이미 보았다 시피 , 심리학은 신경과학, 인지과학과 관련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해."
"정직한 질문은 더 깊은 믿음으로 가는 성경적인 길이야. 애톨 딕슨(Athol Dickson)은 이 사실을 상기시키며 자신의 경험을 나눴지. “어린 시절 나는 교만한 사람만이 감히 주님께 질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때로는 질문하는 것이 겸손한 일임을 배웠다. 질문 안에는 내게 답이 없고 하나님께 답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질문은 하나님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고,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
"딕슨은 그의 책에서 하나님께 질문하는 사람들이 성경 곳곳에 나온다고 지적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질문을 하지. 창세기 18장을 봐. 모세도 그래. 딕슨은 여기서 명심해야할 교훈이 “묻는 것은 의심하는 일이 아니라 신뢰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어.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 “하나님께 불충하는 일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그분께 여쭤 볼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는 뒤에서 이런 말도 했어. “하나님께 묻기를 두려워 하는 것은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벧전 3:15)는 베드로의 권고와 정반대의 결과를 내 삶에 초래했다. 하나님께 묻기 시작할 때까지 그랬다. …..나는 무엇을 믿는지 알았지만, 왜 믿는지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 알 뿐이었다. 경외심으로 가장한 편집증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내게 설명하라 명하신 더 깊은 진리를 알 수가 없었다.”
"의심의 과정을 이해한다면 자신이 믿거나 믿지 않는 근거가 타당하지 파악할 수 있는 더 나은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
"나는 관점주의 모델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앞으로도 여러 측면에서 그럴 거라고 봐. 관점주의 모델에 따르면 기독교와 심리학은 3차원 구조물에 대한 평면도와 입면도라고 할 수 있어. 둘 다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지만, 둘을 부적절하게 섞으려 하면 혼란이 생기지. 둘은 경쟁 세력이 아니라 각각이 묘사하는 실재의 전체 그림을 보여 주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보아야 해. 이것을 전적인 관점주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지."
"우리는 주위 세상을 바라볼 때, 시각, 후각, 촉각, 미각을 통해 정보를 습득한다. 연구자들 사이에서 대체로 합의가 된 내용은, 시각계가 다소 다른 두 기능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야. 하나는 세계에 영향을 주는 기능이고 또 하나는 세계를 표상하는 기능이지. 뇌가 이 두 목적을 어떻게 달성하는지를 신경심리학자, 신경생리학자, 신경과학자, 최근에는 컴퓨터 과학자들이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어."
"이것은 과학과 신앙을 통해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지식을 건설적으로 연결시키고 통합할 방법에 대한 유용한 은유가 아닐까? 시각계가 두 경로에서 입력 자료를 분석하여 사용하고 결국 효과적인 활동에 적용하듯, 우리는 과학 연구의 결과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에 근거해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정리. 분석. 처리. 통합하는 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