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오영재 추도사
기어이 가고 말았는가. 겨우 16살에 남한을 떠나 북한 땅에 외톨이처럼 살다가 1990년 겨우 생존해 계산 어머니를 알고 시를 써 보냈던 동생. 1992년 어머님 팔순 때는 영변에 있는 견 방직 공장에서 짰다는 당목 옷감으로 안 감을 대시고 버선도 지으시고 그래브 천으로는 속치마도 해 입으시라고 인삼과 함께 캐나다에 있는 조카 편으로 보내지 않았는가. 자기 이름으로 동생을 시켜 팔순 때 어머님께 드리라고 간절한 편지까지 보내더니 막상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 한국에 왔을 때는 어머님이 가신 지 5년이 지난 뒤였지. 어머님은 가셨지만 이렇게 많은 동생 가족들이 있지 않으냐고 위로했더니 “어머님은 해고 형들은 별입니다.”라고 서운해했던 표정을 잊지 못하겠네. 그때 자네는 우리가 보낸 팔순 사진을 돌판에 옮겨 컴퓨터로 찍어 합성사진을 만들어오지 않았는가? 나와 셋째 동생 사이에 정장한 자네를 끼워 넣고 또 홀로 계신 어머니 옆에는 아버지 사진도 넣지 않았는가? 얼마나 가족이 그리웠으면 그렇게 했겠는가를 생각할 때 가슴이 아팠네. 부모님 묘소 옆에 세운 비석에는 자기 이름도 삭여 넣었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땅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었네. 나는 공부를 하러 미국에 자주 다녔는데 그때 신원 조회 때마다 호적에 자네 이름이 있어 나는 연좌제가 두려워 1984년 어머니와 자네의 가슴에 못을 박고 실종신고를 해버렸네. 그래도 자네가 이산가족 모임에 왔을 때 어떻게 호적에는 자네가 실종되어버렸다는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자네는 가족 자유시간에 가지고 온 돌사진과 인삼주를 따르며 자네가 쓴 추모 시를 읽었었네
가셨단 말입니까/ 정년 가셨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어머니! 어머니!/ 나는 그 비보를 믿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떠날 때는 고은 시인과 합작 시 ‘만나고 싶었습니다’를 쓰고 곧 또 곧 만날 수 있을 것처럼 떠나더니 안부도 못 전하고 전화도 못 하는 가깝고도 먼 곳으로 떠나버렸네. 통일원에서는 아직 한마디도 소식을 전하지 못한 이산가족이 너무 많다며 우리의 요구는 들어주지도 않았네. 나는 NK 조선이라는 신문을 통해 겨우 자네의 문학 활동 소식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네. 그러다가 자네가 2011년 10월 23일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도 이 신문을 통해서였네. 나는 내가 자네 실종신고를 했다는 고백도 할 수가 없고, 애통해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화도 할 수 없어 망연자실했네. 그래 형제들이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부모님 묘소, 모란공원에 모여 11월 3일 자네의 추도예배를 드리고 있네. 뒤늦게라도 새로 묘비를 세우고 우리 가족과 자네 가족 이름도 비석에 삭인 것을 보기 바라네. 어머니를 그렇게 그리워하던 자네가 이제 세상을 떠났으니, 믿지 않은 자네는 하나님 품에 안긴 어머니도 볼 수 없는 스올에 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내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주님께 간구하네. “그렇게 보고 싶던 어머니를 지상에서 보지 못했으니 하늘나라에서라도 제발 만나게 해주십시오. 안 믿고 죽었으니 서로 딴 세상으로 갔을 게 아닙니까? 마지막 백보좌의 심판 때, 하나님께서는 신·불신자를 다 앞으로 모을 텐데 그때라도 만나게 해주십시오.”
오, 주여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언젠가는 내 사랑하는 조카들과 자네 식솔을 꼭 만날 수 있다고 믿네. 사랑하고 자랑스러운 내 동생이여, 자네처럼 외롭지 않게 살도록 품어 주겠네. 분단의 아픔을 내려놓고 부디 편히 쉬시게.
2911년 11월 3일
형 오승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