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감 북간도 탐방 (萬感 北間島 探訪)
KS KIM. 작성.
가깝고도 멀기만한 북한 끝 백두산 (장백산) 건너 마을, 연길로 가는 길은 비행기 탑승 후부터 매우 다름의 시작이었다. 대낮에 탑승한 비행기 안은 햇빛이 한줄기도 들어오지 않고, 기내 등만이 복도를 훤히 비추고 있었다. 탑승객들은 여행 또는 출장, 문학 탐방 등의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인데 창밖을 볼수 있는 창은 꼭꼭 닫쳐 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열러고하자, 승무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기내에 퍼진다. “인천 공항 출발부터 연길 공항 착륙시까지 창문을 절대로 열어서는 안되는 공항운행 규칙이 있으니 따라 주세요” 라고한다. “군사적 접경지역이라 보안이 엄하니 주의하세요”라고 당부까지한다.
마치 성냥갑 속에 놓여있는 기분이 엄습해온다. 연길 공항에 착륙해서도 트렉을 따라 공항을 벗어날때까지 감시의 눈빛들이 핑핑 돌고들 있었다. 문학 탐방을 온 것인데, 주객이 전도된 행진이었다.
공항을 벗어나 시내를 버스로 경유하면서 차창 박으로 보이는 중국어 간판과 한글 간판이 비슷한 숫자로 보이는 것을 보니 기분이 상쾌하게 전환된다. 중국내 소수 민족중의 하나인 조선족의 위용이 이곳 연길에서는 강함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이방인 취급받으며 이곳 거주 조선인들의 피와 땀이 느켜지는 것이다. 용정, 일송정, 해란강, 용문교를 지나면서 강산의 모습이 다르게 느켜지지 않고 늘 보아오던 남쪽 산야처럼 친숙한 것이다.
먼 옛날 선조들이 가꾸어 놓은 터전에 그 자손들이 살고 있는데 이념의 차이로 국경을 만들고 철조망까지 쳐놓은 형국이 안타깝기만 하였다. 수백년 후에는 또 어떠한 모습으로 간도 지역을 포함 두만강, 압록강 지역을 통제할지 모를 일이다.
저녁 숙소에 도착하여 새한국문학회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많은 분들이 열심히 준비해 오신 주체들로 열기가 넘쳤다.
윤동주 시인의 말씀처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연길에서의 첫밤을 맞이했다.
아침 일찍 기상하여 서파집산 코스로 백두산 (장백산) 천지에 오르기 위해 1,440여 계단을 오르고 나니, 득도하는 중생의 고행인가? 생각된다. 평소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다 같은 산인데 한라산 백록담이나, 그보다 조금 큰 백두산 (장백산) 천지이겠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부모님의 고향도 이북이라 꼭 한번은 보고 싶었으나 38선도 있고, 그리고 연길에 가면 뭐라도 보나 주저 했었다. 실제 고행후에 보아서 그런지 천지를 보니 속까지 후련해진다. 큰 천지의 모습에 애착이 느켜진다. 조상들의 혼이 서려 있는 천지 물이 북간도 남간도 지역을 지나 서해로 동해까지 흐르고 있다니 중국의 동북공정이 무색하게 느켜진다. 대자연의 이치를 거스릴 수 없는 듯하다. 이곳에서 독립투사들과 저항 시인 및 영웅분들 피와 땀이 산하에 뿌려진 곳이라 생각이 도달하니 숙연해진다.
당시 척박한 산하를 오직 두발도 뛰거나 걸으면서 한양에서 백두산 (장백산) 넘어 이곳 간도 지역 또는 하알빈까지 활동한 분들의 발자취를 보는 것 같다. 무거운 시간 속에서도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라는 윤동주 시인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어도 이를 실천하는 당시 분들은 어떠한 훈장도 상패도 생각하지 안았던 것이다. 오직 조국의 독립과 그 곳에라도 뼈를 묻어 달라고 하셨을 것이다.
백두산 (장백산)을 정상 근처까지 차를 몇번 갈아타면서 이동해서 힘든 하루였다. 다음날은 북파집산 코스의 백두산 (장백산)천지와 장백폭포를 보러 이동하였다. 멋진 풍경의 사진포착 위치마다 많은 사람들로 붐볐는데, 특히 많은 중국분들의 양보심은 극히 찾아보기 힘들었다. 멋진 것을 구경후 사진도 촬영했으면 자리를 양보해도 될덴데, 죽치고 있으니 뒷 사람들은 애가 탄다.
누군가 중국인들의 중원 사상이 일부에서는 그릇된 행동으로 표출된다고하며, 공산국가 체제 하에서 양보는 미덕이 아니라 제 밥그릇 못찾는 것이라는 초크가 있다고한다. 큰 땅덩어리에 걸 맞는 큰 생각이 있었으면했다.
마지막 날은 연길의 외곽 도시 도문이라는 곳으로 향하여 북한과 중국의 접경 지역 두만강가에 가보았다. 강폭이 생각보다 협소하여 큰 개울천이라 하면 맞을 것같다. 강변을 따라 철책선이 쳐있고 북한 쪽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의 건물들이 수십채 보였다. 이따금 북한측으로부터 월경하여 중국을 통한 탈출민들이 있다고 하였다. 다 같은 동포인데 도문 도시에 살면 중국내 조선인이고 북한 땅에 사면 고난의 행군에 내몰리는 팔자가 누구의 탓인가? 이상화 시인의 싯귀처럼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를 가슴에 묻고 온 문학 기행이었다.
2024.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