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시를 이렇게 읽었다-월간 우리詩 25.1)
포개지는 것만이 사랑이면
얼마나 쓸쓸한가
한 잎은 바스락 소리에 깨고
한 잎은 그 소리로 숙면에 든다
전율을 잃어 바람을 채집하는
갈색 부부의 새 서식지에서는
날선 욕망의 무게를 허공에 벗고
엄숙한 제의祭儀인 듯 어스름을 입는다
그래도 단풍 든 가슴이 있어
속 깊이 껴안은 불빛은 사위지 않으니
낡은 흙과 서리를 지우면
다시 아늑한 입동立冬인 것을
온기 남은 살갗으로 서로 얼굴을 비빈다
황홀 없이 가스락거리더라도
흠집투성이 경량의 사랑에겐
따스하고 벅찬 눈보라 빛 정원이다
먹먹할수록 더 선명한 것은
서늘한 잎맥에 팔딱이는 실핏줄뿐
맞닿은 울대를 뜨겁게 녹여주는
눈송이로 함께 수혈을 받기 때문이다
-박부민, 「포개지는 것만이 사랑이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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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무장한 위버멘쉬 (이령)
이 시는 사랑과 용기와 믿음의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사랑의 본질에 관한 처연한 사유의 전언이다.
용기와 믿음이 사랑의 본질이라면 시인이 이 시에서 전하는 ”속 깊이 껴안은 불빛“이라는 가치를 인식할 때 비로소 참다운 사랑은 성립된다. 저마다의 푸름을 뽐내며 돋아난 신생의 새잎들이 ”먹먹할수록 더 선명한“ 갈잎으로 서로의 배경이 될 때 ”낡은 흙과 서리를 지우면 다시 아늑한 입동立冬“을 맞이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지난한 생도 사랑을 실현하면서 극복되는 것이 아닐까.
”온기 남은 살갗으로 서로 얼굴을 비빈다
황홀 없이 가스락거리더라도
흠집투성이 경량의 사랑에겐
따스하고 벅찬 눈보라 빛 정원이다“-중략
붉게 물든 단풍은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던가?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를 이루고자 인간의 생은 어쩌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태어남과 동시에 그 자체가 몰락으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피투성으로 내던져진 생의 현장에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자아를 상실하는 파멸에 닿을 위험에 노출된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동행하는 것일지도 모르나 분명한 것은 파멸과는 상반되는 몰락의 길, 재창조를 전제로 하는 극복의 개념과 닿아있는 것이 또한 생일지도 모른다. 다만 시인의 전언대로 사랑은 분명 그 길의 유일한 등불이자 최상의 지침일 수 있다.
창조적 파괴, 위버멘쉬(초인)란 삶의 다단한 경험과 좌절, 지혜를 통찰한 시간의 훈습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며 내려놓고 타인을 품어 재창조될 때 시인의 표현대로 ”맞닿은 울대를 뜨겁게 녹여주는 눈송이로 함께 수혈을 받기 때문이다”라는 조화로운 인간형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인은 시의 서두에 “포개지는 것만이 사랑이면 얼마나 쓸쓸한가”라고 전제하고 “서로 얼굴을” 비비며 ”날선 욕망의 무게를 허공에 벗고 엄숙한 제의祭儀인 듯 어스름을 입는다“라고 고백한다. 과거에 비해 관계를 표면적으로 만드는 현대인의 사랑은 더 많은 자유를 제공 받지만 동시에 더 큰 책임과 불온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다사다난했던 24년을 마무리하며 25년 새해가 시작되는 이즈음, 사랑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 좋은 시와 더불어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인용한다. 개인의 욕망과 행복을 넘어 희생과 헌신을 통한 처연하면서도 진정한 사랑에 대한 시인의 연륜이 묻어나는 시, 독자를 향해 기투 하는 사랑관을 엿보며 마냥 춥지만은 않을 ”입동立冬“을 맞이하는 아침이다. (끝)
이령
2013년 계간《시를사랑하는사람들》로 등단
시집 『시인하다』, 『삼국유사대서사시-사랑편』
저서 『울진대왕소나무本 발화법』, 『문두루비법을 찾아서』
hewon1251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