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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시낭송 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시향미애
< 겨울에 관한 詩 모음 >
겨울 강가에서 /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다
겨울의 빛 / 강연호
우듬지에 겨울 햇살이 이명처럼 매달려 있다
초록이 없으므로 햇살은 더이상 빛나지 않는다
나무는 제 발치께를 우두커니 내려다본다
발로 쓸어모으는 기억은 누구에게나 허전한 법이다
한때 웅숭깊었던 그늘의 넓이를 가늠하며
나무는 체온계를 문 아이처럼 생각에 잠긴다
텅 빈 고요가 압박붕대에 묶인 허리춤을 더듬는다
동그랗게 말린 이파리 몇 장이 마저 떨어져
이미 탕진한 삶을 둔탁하게 덧칠한다
저 잎들이 움켜쥔 허공조차 내 몫이 아니었구나
바람도 없는데 나무는 진저리친다
나뭇잎 대신 이명의 햇살이 떨어져내린다
그늘이 있던 자리를 비춘다 배추 속 같이 환하다
나무를 지탱하는 힘은 이제 고요가 아니다
겨울길 / 조태일
길을 잃고 숨 가뻐 찾아보았으나
오솔길은 숨어버렸다
겨울잠에 든 꽃뱀이거나 살무사의
꼬리와 함께
또는 개구리의 뒷발 끝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끝까지
마른기침을 하는 풀열매거나
끝까지
매달려 몸부림치던 무슨무슨 산열매의
모습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하늘의 길까지
눈보라에 휘말려
흩어져버렸다
겨울꽃 봄꽃 /
겨울 벽화 / 박주택
쌓이는 눈에 발이 빠졌다
모든 것이 뉘우쳐 숨을 고르고
희디 흰 살로만 내려 앉는 늦은 시간이었다
그는
점퍼에 몸을 웅크린 채 걸었다
예전에 어떤 형태의 즐거움도
그와 가깝게 지내질 못했다
질이 낮은 삶이 무질서하게 끼어들고
긴 못 같은 것이
거역할 수 없도록 오랫동안 박혀 있었다
눈발이 쌓였다
쌓이는 정적 위에 겨울 나무 한 그루
등을 껴안아 주고
마을 어귀 밥집 유리창에서는
김이
뿌옇게 솟아 올랐다
겨울 담쟁이 / 정찬일
저 수많은 잔뿌리 좀 봐
담쟁이가 꿈속을 오르고 있어
길 한 모퉁이 콜타르 먹인 판자를 차고 하늘 오르는 담쟁이 좀 봐
판잣집도 오래 견디다 보면 잔뿌리 내리며 담쟁이가 오르고 있어
오르는 일만으로도 한생애를 다 보낼 수 있겠군
고향을 떠나온 지 얼마나 되는지 몰라
수맥이 다 마른 담쟁이의 아랫도리
그 아래로 하교길 아이들의 웃음소리
내 어릴 적 울음소리도 가끔씩 들려
내게도 길이 있었지
무심히 자란 계절의 그림자를 다 떨치고
딱딱한 겨울 햇살 속으로
푸른 실핏줄을 다 드러낸 담쟁의 길
불량한 겨울바람이 지나다가 툭 건드리면
줄기 끝으로 치올린 생장점들이 잠에서 막 깨어나
한 계절 파랗게 터뜨려버릴 것 같은 담쟁의 길
겨울 등반 / 강계순
마른 가지들 저들끼리 얼기설기
팔을 엮으며 서 있고
숨죽여 내리는 눈 어둠속에 홀로 환히 밝은
낮고 고요한 겨울 사원
아주 가끔씩 어디선가 조심스런 손님처럼
바람이 왔다 가면
마른 풀들 잠시 흔들리고
가벼운 안개 쓸리기도 하지
용서하는 능력은 내게 없으니 다만
잊게 해주시십시오, 낮은 음정으로 고백하고
X레이처럼 뿌우옇게 골격 드러나는
고산나무의 묵은 상처에 기대어 산다
이 밤 지나면 다시
더 춥고 가난한 어느 사원으로 옮겨 가서
낡은 지도를 펴고.그리움으로 뻗은 길 모두 지울 것이다
더 이상 길 잃지 않을 것임,
빈 집 한 채 짓고 꺾인 관절을 푸는 밤에는
온화한 발성의 순풍금 소리 어디선가
아득히 들리는 이 골짜기
겨울 저녁의 시 / 남진우
저녁마다 우리 집엔
안개와 함께 낯선 손님이 찾아온다
허름한 옷차림의 그는 먼 나라의 이상한 소식을 하나씩 전해준다
철새들이 가로지르는 텅 빈 하늘엔 간혹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알리는 상형문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지평선을 푸르름을 지우며 조금씩 가라앉는다
그가 잔잔한 음성으로 말한 것들이 모두 땅거미 속으로 스며들고 나면
아무도 없는 집은 정적으로 붐빈다
겨울, 대지의 관이 닫힌다
서리 내린 길 위를 허기진 개들이 어슬렁거린고
해시계는 더 이상 마을로 가는 길을 가르키지 않는다
죽은 자의 눈꺼풀을 쓸어내리며 다가오는 빙하기의 어둠
흰 눈송이들이 물려와 내 의식의 빈터에 쌓이는 밤
나는 유리창 옆에 서서
어둠 저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를 지켜본다
겨울산 / 황지우
너는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겨울비 / 송재학
지난밤 뿌린 비는
내 가슴 깊이 박힌 대못 적셔
붉디붉은 녹물을 이루더니
생목 꺾이는 소리
가슴팍에 쇠못 치는 소리 섞이는 속으로
안개 돋고 얼음 얼어
온몸이 젖더니,
어느덧 비울음 끝으로 겨울이 내려왔다
나는 그때 불을 준비하고 있었고
겨울 스케치 / 신중신
산자락에 들러붙은 달동네엔
으레 먼저 등불이 번져나기 시작해
밤 깊도록 불빛 반짝거리는
긴 하루만큼, 사연만큼
달이 오래 머물진 않는다
보름달은 호수 수면에 일렁이고
초승달은 아카시아 가지 끝에 걸려 있기 일쑤다
달동네에 낀 기미는
언제나 먼저 내려선
삼동 내내 꿈지럭거리는 저 잔설이다
달동네 작은 창의
반짝거리는 등불은
한강 너머서도 바라보이나
비쳐드는 달빛은 뻗은 무릎께만 적신다
잔설이 걷히기까진 까마득한 철
오는가 싶게 사라지는
그게 무엇인가, 무엇이던가?
겨울밤 / 황인숙
젖은 눈 얼음 비 길에 내린다
길 아닌 것에도 내린다
오, 제기랄, 하느님!
탄식하며 야간 근무자는 부은 눈을 비벼 뜨고
그의 아내는 혼곤히 그를 배웅한다
젖은 눈 얼음 비 가로 등에 엉기고
담벼락에 엉기고 계단곬에 엉긴다
모든 문들을 흔들어 잠그면서
모든 길들을 따라가 지우면서
젖은 눈 얼음 비 밤길 간다
어느 집에선가 누가 태어난다
아랑곳없이.
겨울 만다라 / 임영조
대한 지낭 입춘날
오던 눈 멎고 바람 추운날
빨간 장화 신은 비둘기 한 마리가
눈 위에 총총총 발자국을 찍는다
세상 온통 한 장의 수의에 덮여
이승이 흡가 저승 같은 날
압정 같은 부리로 키보드를 치듯
언 땅을 쿡쿡 쪼아 햇볕을 파종한다
사방이 일순 다냥하게 부풀어
내 가슴 속 빈 터가 확 넓어지고
먼 마을 풍맹화꽃 벙그는 소리
하얀 운판을 쪼아 또박또박 시 쓰듯
한 끼의 양식을 찾는 비둘기
하루를 헤집다 공친 발만 시리다
아니다 잠시 소요하듯 지상에 내려
요기도 안 될 시 몇 줄만 남기면 되는
오,눈물 겨운 노력의 작은 평화여
저 정경 넘기면 과연 공일까?
혼신을 다해 사바를 노크하는
겨울 만다라
겨울 모과나무 / 장석남
저녁에 아이 데리러 시립 어린이집에 간다
철문 기웃이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서 잠시 창에 이마 바짝 대고
어떻게 놀고 있나 내부를 들여다본다 잘 뵈지 않는다
아직은 밖이 더 훤한 까닭, 그러다
잠시 돌아서서
어린 모과 나무 가지들
만져 보기도 한다
맨질맨질한 살갗이 외출에서 돌아와
양말 벗으며 만지는 찬 발목
복숭아뼈께 같다
데리고 나온 아이 잠시 딴전을 피울 때
내게 오기 기다리며 다시 전지자국 아문
얇은 가지 사이 사이 올려다보면 어느새
어린 별들 돋아
모과나무에 돋은 매화 같다
가난한 집에 세든 세입자들
이런 이쁜 나무는
성욕없이 평생 만날 수 있는 여자 같다
나는 잠시 내 노년을 훔쳐보고
아이 걸리어 모과나무로 걸어 들어간다
아빠 손톱달
그래 손톱달
리키다 소나무 가지가 품고 있는
아빠 반달
그래 반달
며칠 후 이런 말도 하리라
겨울 바다에 갔었다 / 최승자
겨울에 바다에 갔었다.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흰 똥을 갈기고
죽어 삼 일 간을 떠돌던 한 여자의 시체가
해양 경비대 경비정에 걸렸다
여자의 자궁은 바다를 향해 열려 있었다.
(오염된 바다)
열려진 자궁으로부터 병약하고 창백한 아이들이
바다의 햇빛이 눈이 부셔 비틀거리며 쏟아져나왔다.
그들은 파도의 포말을 타고
오대양 육대주로 흩어져갔다
죽은 여자는 흐물흐물한 빈 껍데기로 남아
비닐처럼 떠돌고 있었다.
세계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간 아이들은
남아연방의 피터마릿츠버그나 오덴달루스토에서
질긴 거미집을 치고, 비율빈의 정글에서
땅속에다 알을 까놓고 독일의 베를린이나
파리의 오르샹 가나 오스망 가에서
야밤을 틈타 매독을 퍼뜨리고 사생아를 낳으면서,
간혹 너무도 길고 지루한 밤에는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언제 불발의 혁명을.
겨울에 바다에 갔었다
(오염된 바다)
겨울 나무 / 김혜순
나뭇잎들 떨어진 자리마다
바람 이파리들 매달렸다
사랑해 사랑해
나무들 나무에 가두는
등 굽은 길밖에 없는
나무들이
떨어진 이파리들 아직도
매달려 있는 줄 알고
몸을 흔들어보았다
나는 정말로 슬펐다 내 몸이 다 흩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이 흩어져버리는 몸을 감당 못 해 몸을 볶이고 싶었다 그래서, 내 몸 속의 갈비뼈들이 날마다 둥글게 둥글게 제자리를 맴돌았다 어쨋든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내 몸 전체에 박혔어 그리고 이건 너와 상관없는 일일 거야 아마
나는 편지를 썼다
바람도 안 부는데
굽은 길들이 툭툭
몸 안에서
몸 밖으로
부러져나갔다
겨울 밤 / 김기택
넝마와 깨진 플라스틱, 썩은 음식마다
불꽃들은 튼튼하게 뿌리박고 피어 있네
귀찮았던 무게들이 이렇게 뜨거웠었구나
고약했던 냄새들이 이렇게 환했었구나
남김없이 불을 빼내고도 여전히 차가울 공기 속에서
불을 다 삼키고 나면 더욱 튼튼해질 어둠 속에서
겨울 밤 / 배진성
밤새 콩을 뚫었다 밤이
가로질러 뚫릴 때까지
어둠을 뚫었다 못 대가기를
납작 오그라뜨린 송곳으로
그리움을 뚫었다 죽음을 뚫었다
구멍에 싸이나를 넣고 막았다
어둠을 몰아넣고 죽음을 한 방울
쑤셔박아 막아 버렸다 모든 입을
틀어막아 버려라, 말 많은 놈은
문제가 있으니까 눈이 내렸다
죽음의 뒷모습으로 눈발이 날렸다
아침처럼 막아 버렸다 촛농을
떨어뜨려 있는 대로 구멍을 막았다
시누대가 뒤안에서 흔들렸다
댓잎이 맨살을 비벼대고
바람이 살아나고 있었다
아침으로 가까스로 뻗은 길로
날은 밝았다 빈 발에, 나무
껍질을 엎어놓고 죽음을 놓았다
겨울 밤이 눈을 뜨고 아침으로
눈이 내려도 뀡은 날지 않았다
아버지들은 정부미 포대에 죽음을 담아 오시고
들판에 거꾸로 꽂혀 있는 창 같은 주검이 보였다
겨울 속에서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겨울을 건너뛰지 못한
숱한 사연들이 하얗게 묻히고 있었다
겨울 밤에 시쓰기 / 안도현
연탈불을 갈아 보았는가
겨울 밤 세 시나 네 시 무렵에
일어나기는 죽어도 싫고, 그렇다고 안 일어날 수도 없을 때
때를 놓쳤다가는
라면 하나도 끓여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벌떡 일어나 육십촉 백열전구를 켜고
눈 부비며 드르륵, 부엌으로 난 미닫이문을 열어 보았는가
처마 밑으로 흰 눈이 계층상승욕구처럼 쌓이던 밤
나는 그 밤에 대해 지금부터 쓰려고 한다
연탄을 갈아본 사람이 존재의 밑바닥을 한다,
이렇게 썼다가는 다시 지우고 볼펜을 놓고
세상을 내다본다, 세상은 폭설 속에서
숨을 헐떡이다가 금방 멈춰 선 증기기관차 같다
희망을 노래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를 생각하는 동안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래 공단 마을
다닥다닥 붙은 어느 자취방 들창문에 문득 불이 켜진다
그러면 나는 누군가 자기 자신을 힘겹게도 끙, 일으켜 세워
연탄을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리수출지유지역 귀금속공장에 나가는 그는
근로기준법 한줄 읽지 않은 어린 노동자
밤새 철야작업 하고 왔거나
술 한잔 하고도 좆도 씨발, 비틀거리며 와서
빨간 눈으로 연탄 불구멍을 맞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 타버린 연탄재 같은 몇 장의 삭은 꿈을
버리지 못하고, 부엌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 두고
연탄냄새에게 자기 자신이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될수록 오래 숨을 참을 것이다
아아 그러나, 그것은 연탄 갈아본 사람만이 아는
참을 수 없는 치욕과도 같은 것
불현듯 나는 서러워진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눈발 때문이 아니라
시 몇 줄에 아둥바둥 매달려 지내온 날들이 무엇이었나 싶어서
나는 그동안 세상 바깥에서 세상 속을 몰래 훔쳐보기만 했던 것이다
다시, 볼펜을 잡아야 겠다
낮은 곳으로 자꾸 몸을 들이미는 눈발이
오늘밤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불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나는 써야겠다 이 세상 한복판에서
지금 내가 쓰는 시가 밥이 되고 국물이 되도록
끝없이 쓰다보면 겨울 밤 세 시나 네 시쯤
내 방의 꺼지지 않은 불빛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릴 것이다
살아야겠다고, 흰 종이 위에다 꼭꼭 눌러
살아야겠다고, 흰종이 위에다 꼭꼭 눌러
이 세상을 사랑해야겠다고 쓰고 또 쓸 것이다
겨울 산 / 조정권
입동 지나 잎 다 지자
함박눈이 앞 산을 크게 안는다
밤이 들자
다시 한번 크게 안는다
어둠 속에서
모래알 한 알을 품고 있다
겨울 산 / 김기택
여름 내내 지쳐 있었다
책더미들로 어지럽혀진 방안에서
둥근 배를 드러내고 깊이 잠들곤 했다
책에서 읽은 것들은 꿈 구석구석
벌레처럼 숨어 있다가
찾으려 하면 순식간에 흩어져버리곤 했다
잠자는 사이
겨울산에 눈이 내린다
모든 사람들이 여름으로 가버린 사이
홀로 산은 이 높은 곳에 와서
겨울 새벽에 산은 눈을 맞는다
꿈을 꾸는 내 눈은 온통 은빛이다
꽃도 새도 커다란 짐승도
책에서 나온 무수한 벌레들도
이 겨울엔 다만 씨앗으로 남아
산 구석구석 죽은 듯이 쉼쉬고 있다
아랫목에서 살찌다가 지친 시간들은
그대로 여름에 둔 채
나는 애써 추위에 단련된 뼈를 웅크려 잠을 잔다
아 올 여름은 굉장한 폭설이다
나의 꿈은 대설주의보에 발 묶여
며칠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겨울 산행 / 이경임
굴비 두름처럼 집들이 엮어져 있는 길을 벗어난다
한 개의 잎새도 매달려 있지 않은 나목들이 서 있다
나목들은 하얗게 부풀어오른다 골목이 지워지고 해장국집이 지워지고
야근이 지워지고 아내가 지워지고 신문사가 지워진다 바람이 분다
눈무덤 속에서 꺼칠한 나목의 살갗이 드러난다 가지들은 앙상한 시간의 쇠줄들처럼 허공에 엉킨다 비릿한 기억 속에서 잎새들의 그림자와
두런거림이 비늘처럼 반짝인다 눈이 내린다 나목의 몸들은 다시
부풀어오른다 몸의 반쪽은 겨울을 살고 나머지 반쪽으로 봄을 사는
나무들의 웅웅거림이 들린다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눈 속에 박힌
발자국들 이 길 밖에서 또 다른 길을 만든다 그 길의 어느 모서리에서
마을로 흘러가는 물의 숨소리들이 새어나온다 물의 투명한 실핏줄들이
겨울 햇살에 반짝인다 발 밑을 내려다본다 나무의 뿌리들이 낮은
곳으로만 걷고있다 걸어간 어두운 땅속만큼 고요하다
다시 바람이 분다 곧 폭설이 몰아칠 것 같다 흐린 하늘이 산 아래 집들 쪽으로 몸을 낮게 웅크린다
겨울 산에서 뉘우치다 / 안도현
이 세상을 점점이 묘사하며 내리는 눈송이
이 풍경 한쪽 구석에다 내 이름 석 자 쓰고
붉은 낙관이나 하나 꽝, 찍어 버려?
너, 이 도둑노옴!
무엇을 더 가지겠다는 거냐?
내 이마를 후려치고 가는 눈발의 회초리
내 마음 문득 어둬 산수유 열매 붉어라
겨울 삽화 / 박지영
발톱을 세우는 바람
하늘도 윙윙 새파란 소리를 냈다
놀이터에서 연처럼 오르고 내리던 아이들
하나, 둘.집으로 숨어버렸다 빈터엔
여린 햇살이 그늘을 만들어, 빈 그네만
언 하늘을 툭툭 건드렸다
모래밭에 버려진 장난감 칼이
바람을 잠재우고, 간간히 꽃잎 지듯이
눈이 내렸다 아주 천천히
눈발이 미끄럼을 탔다
별 없는 밤하늘에 놀이터가 둥둥 떠오르고
아이들의 해맑은 마음을 껴안고 잠 속으로
미끄러지기도 하고...잠벌레들이 나와
돌아다니는 겨울 밤
아이의 잠듬 얼굴은 곱게 찌푸려져 있었다
겨울 삽화 / 이경임
며칠째 눈이 내리고
하얀 섬의 입자들이 종일 흩날리고
며칠째 전봇대가 서 있고
한 개의 잎새도 달고 있지 않은
전봇대가 서 있고
베이킹 파우더처럼
부푼 섬의 분말들이
섬은 꽃송이를,섬의 둥근 뭉치들을
섬의 언덕을
섬의 여자를 만들고
버려진 신의 피리처럼
몸 속의 구멍들을 잃어버린 전봇대가
몇 십만 볼트의 소리 없는 소음들을
몇 십만 볼트의 기다림을
몇 십만 볼트의 죽음을 전송하며
산발한 남자처럼 서 있는
겨울 서면에 가서 / 임동윤
이름 모를 잡풀들이 밭은 기침소리를 낸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와
문종이 떨어진 집들을 흔들어놓는다
늦은 겨울 저녁 한때 노래는 싣고
조금은 남아 있던 빛살들이 가라앉는다
바람에 부대끼는 푸성귀와
죽어 나바빠지던 소값, 돼지값들
문득, 이런 것들이 가슴을 찔러서
눈먼 형제들은 목발을 짚고 떠나버렸다
곳간마다 녹슬어가는
삽, 호미, 곡괭이, 쇠스랑들
도시로 떠난 이웃들은 돌아오지 않고
잊혀진 이름들만 눈보라에 젖는다
수런대는 바람을 비집고 눈발은 불을 켜고
텅 빈 집들의 추녀까지 그 속에 묻힌다
미처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밤새 우물길 찾으며 쿨룩쿨룩 천식을 앓는다
쟁기를 걸어다오,고삐를 당겨다오
부사리의 울음은 외양간에 갇히고
마른 콩깍지 옥수구 대궁 삶아 쇠죽 쑤던
무쇠솥 이제 녹슬고 금이 간다
마당귀의 눈소리 강물로 깊어진다
문득, 산과 골짝 휩쓸고 온 바람이
썩어빠진 싸리 울타리 하나 잡고 흔든다
마침내 나는, 물푸레 나무 곱게 다듬어
부러진 삽과 도끼 한 자루 갈아끼운다
그리고, 이젠 떠날 수도 있다
저 도시로 떠나간 구멍난 가슴들을
끌어안을 수도 있다, 이제 나는 평화롭다
불편한 잠도 슬그머니 묻어둔다
겨울 사과나무 / 홍일표
꽝꽝 얼어붙은 하늘을 치받고 서 있는
과수원의 사과나무
무장 해제된 알몸뚱이 하나로 버티고 서서
용트림을 하고 있다 울퉁불퉁 상처투성이의 근육을 꿈틀거리며
떼지어 몰려오는 바람의 멱살을 잡아
내던지고 있다 겁 먹은 바람은 윙윙거리며 달아나고
나무들은 산비탈에 호위병처럼 서서
마음 속 높은 봉우리 하나 지키고 있다 용암의 몸부림으로
엄동을 채찍을 견디고
혹한에 결박되지 않은
얼음 속의 물을 새살거리며 또랑을 흐른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던 햇살들은
줄줄이 가늘고 고운 실을 풀어
허다한 상처를 감싸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건장한 사과나무의 터지고 갈라진 몸뚱이에선
모락모락 김이 피어 오른다
홀연 한하게 밝아오는
사과나무의 어두운 발밑
과수원엔 온통
반란군의 함성의 뜨거운 불길로 일렁이고 있다
겨울에 지일에 갔다 / 이윤학
도랑과 탱자나무 울타리가 갈라서는 곳, 거기
새로 지은 절이 있었다 절 뒤엔 오래 된 대숲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숲 뒤로는 숨겨진 길이
하나 있었다 텃밭과 울창한 잡목 숲으로 가는 길이었다
텃밭에 마지막으로 심어진 곡식은 옥수수였다
낫으로 배어진 옥수수, 파랗게 올라왔던 새순은
시들어 있었다 텃밭에는 재가 날리고 있었다
골짜기엔 눈이 쌓여 있었고,
길을 골짜기를 타고 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그 길은 묘지로 가고 있었다 그 길에는
새 발자국만 무수히 찍혀 있었다
나는, 그 길에서 수없이 멍금나무를 보았다
푸르렀고 붉었던 열매들, 그러나 지금은
회색인 열매들,
푸드드득...
꿩이 날아간 자리에
따듯한 웅덩이가 남아 있었다.
겨울 수첩 / 배진성
갈,팡,질, 팡, 눈은 내리고
회색 바바리 코트를 걸치고
눈은 내리고
걸레쪼가리같이 거덜난 구름
그늘 아래로만 고개 떨구고
날파람둥이처럼 눈은 내리고
부서진 십자가의 겨울 포도밭
눈은 거렁뱅이처럼.예수처럼 내려 쌓이고
잠이 많은 사람들은
잠속에 빠져 죽고
꿈이 많은 사람들은
꿈 속에 묻혀 죽고
생각이
깊은 사람은 생각 속에 깊이 가라앉고
세상의 모든 길들이 하얗게
지워져 버리고 소복 입은
소식은 끊임없이
겨울 깊이 쌓이는데그 속에서 허기진 몸으로
보리밭을 본다 문득
풋보리인 내가 맨발로 눈을 뜨고
겨울 숲에서 / 유강희
손금을 보여주는, 나무들도, 불안한 것이다.
그물을 치듯 하늘에 펼쳐놓은 앙상한 나뭇가지들
새들은 대체 어디로 숨은 것일까
부러진 검은 나뭇가지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낙엽이 눈보다 더 깊게 쌓여 있다.
사악한 뱀들은 미리 땅 속에 집을 지었으리라
날개 있는 새들은, 맨몸인 나무들은
제 몸이 집임을 보여주기 위해
따로 집을 갖지 않은 것일까
눈비를 맞으며 눈비가 집임을
아, 겨울숲은 그래서 무덤보다 깊어지는 골짜기를
저렇듯 칼날처럼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일까
버린다는 것과 비운다는 것의 차이란
겨울숲에선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만다.
죽고 싶도록 사랑한 단 한 사람이
아직도 그리운 이름으로 남아 있다면
내 고달픈 손금도 즐거이 보여주리라
이제 쪼그려 앉아 피우던 마지막 담배
저 겨울숲에 회한처럼 던지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다시 돌아가야 될 시간
어디서 굴러왔는지 발등 위에 떨어진 낯선 솔방울 하나
더는 떨어질 곳이없어 겨울숲을 팔 없이 껴안으려 한다
겨울새 / 김기택
새 한 마리가 똑바로 서서 잠들어 있다
겨울 바람 찬 허리를 찌르며 지나가는 고압선 위
잠 속에서도 깨어 있는 다리의 균형
차고 뻣뻣하게 굳어지기 전까지는
저 다리는 결코 눕는 법이 없지
종일 날개짓에 밀려가던 푸른 공기는
퍼져나가 추위에 한껏 날을 세운 뒤
밤바람이 되어 고압선을 흔든다
새의 잠은 편안하게 흔들린다
나뭇가지 속에 잔잔하게 흐르던 수액의 떨림이
고압선을 잡은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불꽃이 끓는 고압은 날개와 날개 사이
균형을 이룬 중심에서 고요하고 맑은 잠이 된다
바람이 마음껏 드나드는 잠 속에서 내려다보면
어둠과 바람은 울부짖는 한 마리 커다란 짐승일뿐
그 위에서 하늘은 따뜻하고 환하고 넉넉하다
힘센 바람은 밤새도록 새를 흔들어대지만
푸른 공기는 어둠을 밀며 점점 커가고 있다
날개를 펴 듯 끝없이 넓어지고 있다...
겨울까마귀 블루스 / 전윤호
강이 시작되는 곳에서 왔지
뼈무더기 쌓인 벼랑이 둥지야
노을이 피처럼 엉기는 저녁
은사시나무 숲에 물안개가 퍼질 때
살다 지쳐 쓰러진 자를 찾아 날았지
하루에 세워진 이 도시는 1월에도
살찐 비둘기들이 양지에서 졸고 있더군
강바닥까지 마취시키는 추위도 없이
도대체 어떻게 겨울이 죽지
매일 취하고
똑 같은 노래만 따라 부르고
똑 같은 춤만 빙빙 도는
당신은 나 따라 응달로 돌아갈 생각 없어
비 오듯 쏟아지는 돌팔매를 뚫고
검은 기차 밑빠진 다리를 건너는 고향으로 말이야
까악까악 근시들의 눈알이나 쪼다가
더 추운 바람을 베는 강변에서
돌이 꼭 부둥켜안고
오석으로 얼어붙자고
겨울 아침에 / 김기택
저녁에 머리맡에 두었던 냉수가
오늘 아침 그릇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물과 물 사이 추울수록 단단하게 껴안은 힘이
그릇을 쥔 내 손까지 붙들려고 한다
놀란 손이 얼떨결에 뿌리쳐 내던졌으나
그릇에서 떨어지거나 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투명한 강철의 울음 소리를 내고 있다
겨울 저녁이 다시 / 조정권
정신은 점점 위독해진다
창밖의 일몰, 여섯시 이십분의 재
사내가 포구에서 피우고 있는 감옥의 담배
사람들 속에 섞여서 누워서
피우고 있는 감옥의 담배
모든 것을 제압하고 무시하고
뻑뻑 피우는 담배
제떨이에는 여섯시 이십분까지의 재
머리끝의 재
교회당 꼭대기의 재
조금 있으면 곧 떨어질
여섯시 삼십분의 재
발바닥까지 재를 떨구는
암담한 여섯시 삼십분까지의 재
겨울 이야기 / 김상미
천년 전 겨울에도 오늘처럼 문 열고 있었다
문 밖 짧은 해거름에 주저앉아 햇빛
제대로 이겨내지 못하는 북향,
쓸쓸한 그 바람소리 듣고 있었다
어떤 누구와도 정면으로 마주보고 싶지 않을 때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창
나뭇잎 다 떨어진 그 소리 듣고 있었다
세상 모든 추운 것들이 추운 것들끼리 서로 모여
내 핏속 추운 것들에게로 다가와
똑똑똑
생의 뒷면으로 가는 문
두드리는 소리 듣고 있었다
물결치는 겨울 긴 나이테에 휘감긴 울창한
숲 향기와 지저귀는 새소리와
무두무미한 생의 입김들이
다시 돌아올 봄 문턱에다 등불 환히
켜는 소리 듣고 있었다
마침 먼길 혼자 달려온 천년 전 겨울
천천히 가슴으로 녹이는 것처럼
내 몸 안의 겨울 이야기들이
소리없이 내리는 함박눈에 실려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듣고 있었다
천년 전 겨울에도 오늘처럼
겨울 저수지에서 쓰는 편지 / 이정록
그대 머리맡이나 옆구리로
굽이치며 흘러드는 물줄기
싱싱한가, 한풍에 배를 밀고 가는 새떼들
물갈퀴처럼 손발 시려운가
마른 갈대숲에
차마 얼어붙지 않으려
살얼음 깨무는 달빛 차가운 밤
가슴 밑바닥 자갈 이끼,
흔들며 치솟는 샘줄기 입 대고 있는가
새의 발목에 악수를 건네는
솔 그림자처럼, 그대에게 가리라
살얼음에 청침을 벼리는
솔잎처럼
겨울 정거장 / 황인숙
오다가다 버스도
어디선가 얼어붙어버렸나보다
하늘은 물 든 지 오랜
갯밭빛이다.
노을의 끄트러미가
녹슨 닻처럼 던져져 있다.
바람결에 한 고랑에 모인
서로 낯모르는 가랑잎들 바스락거린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몇이
옹송그리고 있다.
길 아래 교회 첨답 위
성탄의 별은 소금빛.
살얼음진 바람을 깨뜨리며 한 남자가
저만치 걸어갔다 돌아오고
다시 걸어갔다 돌아오고
점점 더 멀리 걸아나가고.
발톱이 선 깡마른 가랑잎이
시멘트 바닥을 긁으며 굴러간다
가로등이 찬 빛을 뿜으며 맑아진다
겨울 한라산 / 정호승
맹인들이 한라산을 오른다
흰 지팡이를 짚고 눈 속을 헤쳐
한라산에 사는 백록을 만나러 간다
한란의 꽃줄기 같은 안마사 김도
하모니카를 불며 하루종일 지하철을 떠도는 김씨도
국립서울맹학교 국어교사 박 선생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한라산을 오른다
눈 밟는 소리가 맑다
바람을 타고 눈발이 흰 지팡이를 따라 밝게 사선을 긋는다
나는 잠시 그들의 발 아래 눈처럼 밟힌다
밟힌다는 것이 이렇게 편안할 때는 처음이다
어리목에서 내려온 노루들이 그들의 뒤를 따른다
어느새 성산포가 뒤따라 올라온다
백록이 서둘러 걸어 내려와 손을 잡는다
서귀포 앞바다가 한눈에 다 보인다
겨울 헛간 / 이정록
연탄 칠백칠십 장과
짚누리 두 채 황소만하다
그러나 봄이 되면
뽑아낸 무밭처럼 쥐구멍 숭숭할 짚못자리,
연탄이 등 기댔던 흙벽엔
먹빛으로 굵은 대나무 쳐 있을 것이다
똑같은 간격으로 마디를 그어가다
똑 같은 간격으로 높이에서 멈춘 여남은의 대나무가
학생부군의 삶처럼 중토막 나 있을 것이다
천장엔 녹색을 지우지 않으려는 시래기가
잔바람에도 수런수런 애쓰고 있다
팽개쳐진 자전거가 학생부군의 주량을 가늠해준 헛간
작대기도 쉬고, 써래도 쉬고, 왕겨 가마니도 쉬던 헛간,
쫓겨난 누나도, 누나를 따라나온 강아지도 웅크리고 있던 헛간
방학이란 것도 슬픔의 하나하는 걸 일깨워준
그곳에 앉아 있으면 내가 우리집 헛간이구나
멍석에 말리던 슬픔, 학색부운 대신 외양을 치우고
서란을 져 나르며 눈물 찔금거리던 헛간
연탄 가스에 취한 녹슨 처마끝이
밤하늘에 주름치마를 입혀주는 헛간
서른하나, 설익은 어른이 되어 이제
몸과 정신의 헛간에 대하여 생각한다
쥐새끼 한 마리도, 내 헛간에서
겨울을 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칠백칠십 장의 연탄
떠받칠 수 있는 바람의 벽인가에 대하여
시린 내 등 위에 대나무 몇 그루
굵직하게 그려놓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쪽문 한 없이 한데서 겨울을 나지만
품 크게 열고 있는 헛간, 피마자 잎처럼
녹색으로 부숴질 수 있는가에 대하여
겨울 풍경 5 / 전대호
대개 문자들은
실은 무늬일 뿐이다
수식을 벗은 아내 곁에 누울 때마다
나는 믿음에 대하여 생각한다
벗겨 내고 벗겨 내도
무언가 남아 줄 것인가?
길 건너
불 꺼진 간판 집 입구에는
문자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겨울강 / 오탁번
겨울강 얼음 풀리며 토해내는 울음 가까이
잊혀진 기억 떠오르듯 갈대잎 바람에 쓸리고
얼음 밑에 허리 숨긴 하얀 나룻배 한 척이
꿈꾸는 겨울 홍천강 노을빛 아래 호젓하네
쥐불연기 마주보며 강촌에서 한참 달려와
겨울과 봄 사이 꿈길마냥 자욱져 있는
얼음짱 깨지는 소리 들으며 강을 건너면
겨울나무 지피는 눈망울이 눈에 밟히네
갈대잎 흔드는 바람 사이로 봄기운 일고
오대산 산그리메 산매미 날개빛으로 흘러와
겨우내 얼음 속에 가는 눈썹 숨기고 잠든
아련한 추억의 버들개아지 따라 실눈을 뜨네
슬픔은 슬픔끼리 풀려 반짝이는 여울 이루고
기쁨은 기쁨끼리 만나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이제야 닻 올리며 추운 몸뚱아리 꿈틀대는
겨울강 해빙의 울음소리가 강마을을 흔든다
겨울 잠자리 / 정호승
진눈깨비가 슬슬 내리는 강기슭 마른 갈대 끝에 앉아
엄마! 하고 소리치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도
가는실잠자리는 어쩌지 못했던 것이다
살엄음이 살짝 언 겨울강을 건너다가
아이들 몇 명이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도
가는실잠자리는 오직 갈대 끝에 앉아 파르르 날개만 떨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가을 어느 푸른 날처럼 신나게 저공비행을 하면서
아이들의 손을 힘차게 잡아 끌어올리고 싶었으나
그만 차가운 바람에 떨며 갈댓잎만 몇 번 흔들고 말았던 것이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낚시배를 타고 강 깊숙이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찾던 사람들이
시체를 찾다 말고 하나 둘 강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새우깡을 안주 삼아 몇 차례 소주잔을 돌리는 것을 보고
가는실잠자리는 몇 번이고 실 같은 꼬리만 도르르 말아올렸던 것이다
더러 담배꽁초를 강물에 내던지거나
말없이 소주만 연거푸 들으켜는 남자들 곁에 퍼질고 앉아
여자들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자꾸 울음을 터뜨려
가는실잠자리는 그만 죽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겨우내 온몸에 친친 감았던 햇살을 풀어
잠시 여자들의 목에 목도리인 양 걸어주는 일 외에는
탁탁탁 불똥이 튀는 모닥불 위로
스스로 몸을 던지는 진눈깨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가는 실잠자리는 슬펐던 것이다
겨울, 북한강에서 일박 / 여림
흐르는 강물에도 세월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겨울, 북한강에 와서 나는 깨닫는다
강기슭에서 등을 말리는 오래된 폐선과
담장이 허물어져 내린 민박집들 사이로
하모니카 같은 기차가 젊은 날의 유적들처럼
비음 섞인 기적을 울리며 지나는 새벽
나는 한떼의 눈발을 이끌고 강가로 나가
깊은 강심으로 소주 몇 잔을 떨구었다
조금씩 흔들리는 섬세한 강의 뿌리
이 세상 뿌리 없는 것들은 잠시 머물렀다
어디론가 쉼 없이 흘러가기만 한다는 것을
나는 강물 위를 떠가는 폐비닐 몇 장으로 보았다
따뜻하게 안겨오는 강의 온기 속으로
수척한 물결은 저를 깨우며 또 흐르고
손바닥을 적시고 가는 투명한 강의 수화,
너도....살고 싶은 게로구나
깃털에 쌓인 눈발을 털어내며 물결 위로 초승달
보다 더 얇게 물수제비 뜨며 달려나가는 철새들
어둠 속에서 알처럼 둥근 해를 부화시키고 있었다
겨울 포구 / 배진성
밤새도록 들쑤신다 바다에
고기잡으러 나간 아버지들과
형들은 다음날도 돌아오지 못하고
기다리던 어머니들은 파도처럼 누워
몸 뒤채이며 앓았다 나는
부레 뜬 꿈으로 흔들리고
빈 생선 궤짝들 사이에 부서진 침묵이 쌓여 있고
입덧난 바람이 파도 이랑을 갈아 엎어도
봉해진 소식은 끝내 돌아오지 않고 어둡게
뜨겁다, 가슴 뜨겁다 아무리 불을 피워도
몸은 녹지 않고 얼어붙은 쥐고기들이
콤바인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폐선은 기울대로 기울어져 헤어나지 못하고
형님들, 어머니들 그리고 아버지들이
사정없이 떨고 있었다 이 밤
바람 찬 난장에서 지새워야 하는
비릿하게 물씬 거덜난 바닷가 사람들
겨울에 기댄 채 쌓여 있었다 콤바인으로
온 밤을
바닥까지 끌어올려도 꿈같은 꿈은 끌려
올라오지 않고 겨울 포구의 얼어붙은 꿈들만
하염없이 깊어, 하염없이 깊어지고 있었다
겨울 포구 / 장석남
잎 가지지 못한 삶이 서 있고
사람 없는 집들이 즐비한 길 위로
밭이 있고 포도나무가 있다
포도나무는 밭을 포도밭으로 만들고 있지만
길들이 모두 집에 와 닿는 저녁이 와도
빈집들은 이 마을을
빈 마을 이외로는 만들지 못한다
잎 가진 삶이 다 유배당한
겨울 포구
겨울 배추밭에서 / 조정권
이 겨울 옆구리 무수히 터져 있어
어둠 속으로 새벽 밭길을 끼고 와봐
콘크리트들이 양생되고 있어
입에는 침묵을
눈에는 죽음을 간직하고서
누군가 밭에 나가 콘트리트를 양생하고 있어
그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어
소금기 절은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동해를 지나
춘천에서 돌아와서도
나는 추운 잠속에서 눈을 떴어.
왜, 내 구두 밑창에서 젖은 눈들은 소리쳤을까
세상은 도처마다 버스가 구르고
사고를 낸 입들은 모두 콘크리트를 양생중이고
나를 굴복시키는 완강힌 힘
브록크 같은 팔뚝들이
나를 불러내고
나를 끌고 가서 내 어깨를 누르고
한밤이 하얗게 새기를 기다리는 이유와
날마다 밭에 나가 기다리는 파산자의 일과도
이 겨울에 다시 한 번 혼자 가서 보았어
입에는 죽음들
눈에는 노래를
간직하고서
나를 굴복시키는 저 완강한 손
이 겨울에는 언 살이 무수히 터졌어
가위에게 상상력이란 게 있을 리 없지
그에게는 거미줄보다 세밀한 계획이 있을 뿐
겨울 밤 / 황인숙
처음엔 그가
앉아 있는 줄 알았다
다시 어린애인 줄 알았다
낡은 담요 속의
주름진 얼굴
아저씨 하필
바람이 쌩쌩이는 골목 어귀에
과자 좌판을 내셨을까
푸른 김 발린 부채과자
설탕 범벅의 원통과자
유리 상자 속에 가득하다
냉기가 하얗게 피어오른
머리 위로
남산순환도로의 푸른 신호종 소리가 달려간다
아저씨는 영하 십육 도의
바람이 쌩쌩이는 골목 어귀에
나지막이 카바이드 붉 밝히시고
영원히 서 계실 것 같다
영원히 그 앞엔
아무도 서성이지 않고
겨울 나무에게로 /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십삼도
영하 이십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는 몸으로, 벋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오도 영상 십삼 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을 듣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겨울 비 / 김명인
한밤중 내리는 빗소리에 잠이 깬다, 이상 난동을 적시고
속삭이듯 돋아나는 겨울밤 빗소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씨를 받아들이고
녹아서 눅눅해지는 땅을 생각한다
어떤 틈입도 흡수하지 못하는 저 얼음 위에 세운
낡고 오랜 교회가 비로소 허물린다
영원할 것만 같던 사직들이 흘러간다
빗물은 차고 넘치고 쓸려가서
이 밤 어딘가에 물 웅덩이를 이룰 것이다
급한 여울을 만날 것이다, 돌이켜 보면
몸 속 폭포가 더 쓰라렸다
지고 온 시간과 적들, 친구들. 외로운 한기의 추억들
너를 버리고 걸어왔다 해도
가슴은 더 이상 덥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목숨이 지나가는 자리는 저렇게 곧 식어버리는 것이다
내 안에서 시들 초록은 이미 없다
골목 끝을 쳐드는 차량의 전조등이 이따끔씩
유리창을 훑고 간다, 세상은 경험만큼 확실한 것이다
조용해질수록 더욱 깊이 가라앉는
저 청음의 겨울밤 빗소리,
이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둠 속에서 내리는
저 빗소리에 대해서도
겨울비 / 김용법
겨울비가 내린다
독방에서 홀로 듣는 빗소리
물이 물그릇에 담겨
비로소 물의 힘을 가지듯
비는 세상의 빈터마다
비의 뿌리를 내린다
오랜 침묵의 나뭇단을 적시며
일어서는 비의 나무들
빈터가 스스로 빈터를 지키듯
너의 가슴이
비어 있으므로
오히려 튼튼한 겨울
비는 내리고
비의 나뭇단이
소리없이 쌓여지는 밤.
조용히
접시의 물이 마르고 있다
겨울 비가 / 이성복
검은 바위들을 끼고 흐르는 물 위로 먹칠한
나무 그림자 여럿 겹쳐져 차갑고 거기,
나뭇가지 사이로 기웃거리던 해가 진저리치며
붉은 핏덩이로 퍼지기도 한다 거기, 차갑고
맑은 물에 눈어두운 쏘가리나 메기가 살아서
천렵 나온 사내들이 통발을 들이낸다 거기.
눈어두워 비늘이나 지느러로만 느끼는
물고기들, 그들만이 아는 물 속의 지도,
귀를 도려내는 추위에도 훌훌 웃통을 벗고
풍덩 찬물 속에 뛰어들어야 보이는 지도,
통발을 아랑곳않고 물살을 가르는
물고기 근육에 힘이 붙는다
겨울나무 / 이윤학
잃어버림을 곰곰히 생각하는 중이다
체중 조절을 위해 아침마다
맨손체조를 하는 중,
갈수록 둔탁한 소리가
관절 사이를 옮겨다니며 일상을 괴롭힌다
오늘에야 부끄러움도 제 얼굴로
익숙하다 제 살을 제 몸으로 부딪치며
다시 떠보일 눈을 감고 있다
가늘고 긴 겨울,
뚜렷한 획을 긋고 있는
침묵의 힘이며
겨울 산행 / 임영조
눈 오다 그친 일요일
흰 방석 깔고 좌선하는 산
아무리 불러도 내려오지 않으니
몸소 찾아갈 수밖에 딴 도리 없다
가까이 오를수록 ,산은
그곳에 없다, 다만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로 남아
오랜 침묵으로 품을 세울 뿐
어깨는 좁고 엉덩이만 큰 보살
도량이 워낙 넓고 깊으니
나무들은 제멋대로 뿌리를 박고
별의별 짐승까지 다 받아 주는
이승의 마지막 대자대비여!
쁘드득 쁘드득 잔설을 밟기
숨가쁘게 비탈길을 오르면
귀가 맑게 트이는 법열이여!
잡목들이 받쳐든 푸른 하늘에
간간 수목을 치는 구름
눈짐 진 눈송이 문득
잘 마른 화두 하나 던지듯
옛다!솔방울을 떨군다
덤불 속 맷새들이 화들짝 놀라
재잘재잘 산경을 읽는 소리
은유인지 풍자인지 아니면 해학인지
들어도 모를 난해 시 같다
(좌우간 정상에 있을 때 몸조심하고,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더욱 조심하도록)
귀뺨 때리는 눈보라여!
단지 헝클어진 마음이나 빗으러
겨울 산을 오르는 나는
리얼리스트인가?
리얼리스트인가?
그것이 알고 싶어 산에 오른다
겨울 일기 / 오세영
틀에 끼인
한 장의 사진 속에 평안이 있다
아내의 싱싱한 머리카락 사이에
여름 햇빛들이 수런대고,
철없는 어린 것이 물장난을 하고,
액자 옆에는 시들어버린 꽃, 또는
고개를 숙인 인형,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는 해안엔
어부가 호올로 그물을 깁는다
찢어진 생활의 한 컷을 넘기면서
1971년 1월 4일,
날씨, 흐리다.
온종일 라디오를 들으며
편지를 쓰고 찢었다
얼어붙은 시간의 저쪽에서
철없는 어린것이 물장난을 치고
생애의 슬픔을 건너온 바닷바람이
흰 거품을 밀어올린다
불에 끼인 한 장의 사진,
그 속의 평화,
그 속에 잠든 아내의 얼굴,
흰 파도에 부서지는
여름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