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마음으로 외 4편
김화연
쌓였던 눈이 녹고
흥건하게 물이 고이면서
가라앉을 것과 떠오른 것을 구별한다.
하늘에서 내린 눈이 녹은 땅
눈 녹은 물에 파란 하늘 고인다.
가장 낮은 곳과
가장 높은 곳이 만나
고이고 말라가는 중이다
눈 녹은 물
녹아 사라진 집 한 채가
어른어른 고여 있다
비닐봉지가 떠 있는 저기, 저쯤이
안방이 있던 곳이었을까
구름의 끝자락이 걸린 모퉁이가
아버지의 건넌방이었을까
잔물결이 연신 기침을 뱉어내는데
낯선 얼굴들끼리 서로 알겠다는 듯
오래 들여다보고 있다
물 고였던 자리
나를 잠깐 머무르게 하는 자리이다
구름이 흐르고 먼지가 부옇게 끼어가는
이 잠깐의 물 고인 자리는
알고 보면 다복하게
하늘 한 자락 고였던 귀한 곳이다
夏至
늦잠 없는 하늘이
먼저 하는 일은 창문을 열게 하는 일
일찍 일어난 해가 여물어가는 감자를 더듬는 일
봄을 지난 씨앗들이 껍질을 생각할 때이고
밭고랑들은 폭신한 분을 챙기거나
맵싸한 햇살을 쟁인다.
내 몸의 뒤축을 끌고 가는 슬리퍼에선
개의 할딱거리는 혓바닥소리가 난다
지금은 그늘의 챙으로 얼굴을 가리는 계절
비어 있는 그림자마다 사람이 모여들고
여물지 않은 열매들의 끝에
햇 잠자리들이 앉는다.
온종일 서 있는 마을의 나무들은
그림자로 방향을 바꾸곤 한다.
한해의 가장 긴 그림자를 만들기 위해
둥치에서부터 나뭇가지 끝까지 햇살 물어 나른다.
바람도 부지런한 지금은
고양이가 배부른 계절
곧 내가 알고 있는 가을이
이 마을에 찾아올 것이다
저녁의 지명들이 밤으로 달려가고
모퉁이 저쪽에선 내가 아는 꽃 한 무더기가 진다
하지 무렵,
뒤축을 헐어 늦은 여름을 맞이한다.
분꽃
어둑한 저녁, 별들을 점등하려
성냥불처럼 분꽃이 핀다.
딸 부잣집 딸들이 옹기종기 모여 놀던,
열평 남짓 마당
채송화 꽃에 마실 온 여름
붉은 맨드라미꽃에게 마당의 난기류를 전한다.
누가 들어올까
허름한 문을 열쇠로 잠근 날엔
번뜩이던 머릿속이 농한기에 접어든 듯
반나절동안이나 열쇠를 찾은 적 있다
혼잣말을 지껄이던 노인은
고욤나무에게 물어보고
탱자가시를 덮고 있는 나팔꽃에게
문 옆의 주변들에게 물어보았지만
푸른 잎들은 못들은 척 손사래를 쳤다
시집간 막내딸이 깨진 독에 심어놓은 분꽃
검게 탄 머릿속에
불의 씨앗이 톡톡 떨어진다.
도둑들은 씨앗은 뒤지지만
꽃을 의심하지 않는다.
해가 지면 노을에게 불씨를 얻어 불 켜는 분꽃
밤눈 어두운 노인의 귀가를
화륵 화륵 밝히고 있는 분꽃
저 화분 밑에
빈집의 문이 숨어 있다
젓가락
수저통에서 외벌일색으로
절그럭거리는 젓가락들이지만
한 그릇 훈훈한 김나는
국수그릇 앞에서는
당연히 한 벌로 의기투합하는
혈혈단신의 처지들
머리카락 쓸어 올리는 처녀아이의 입도 들큰한 땀 냄새 풍기는 날 일노동자의 입도 도시락을 훔쳐 먹는 학생의 입도 발우 공양하는 스님의 입도 내외 없이 섭렵하는 젓가락, 천지에 홀로 나고 각개로 절그럭거린다.
한 벌로 소용되는 젓가락들
검지와 중지에 서있는 반찬들
외벌로 절뚝거리는 젓가락은 손바닥을 쥐면 가볍고 날카롭다 송곳대신 종이를 점으로 찍고 행운의 날짜는 던져서 찍고 감자도 쿡쿡 찍어서 먹는 짝을 잃은 젓가락은 외나무다리다 외길 십년을 걸어가면 길이 보인다고 대나무 마디에서 짝을 찾은 젓가락.
손가락 요가의 기술을 알리는
젓가락들이 여기저기 뛰어노는 저녁시간
표정이 다양한 음식의 말들과
모양 닮은 젓가락이 살다보면 다된다고
입안에서 수다를 조율하고 있다
물이 추위를 대하는 방식
어머니가 떠놓은 한 그릇 물에
밤 추위가 들어가 있던 것을 기억한다.
낮 동안 햇볕에 따뜻해진 물은 맨발로 돌아다니다
해가 진 뒤 집을 찾아 들어오듯
한 그릇 물이 문을 열어 주었다
봄이 온다 해도 좀처럼 녹지 않을 것 같은 집
연통 끝으로 고약한 연소(燃燒)만 빠져나간다.
형체에 머물지 않는 한 그릇 물이 가끔은
자기의 모양과 성질을 바꾸어 한 번쯤 뒤집어지고 싶을 때가 있다.
한낮이 되면 물은 녹는다.
얼고 녹고 반복되는 동안 그릇은 텅 비어갈 것이다.
꽝꽝 얼어있던 물의 집
편애 없이 한 그릇 물은 또 햇볕에도 문을 열어주고 있다.
누구에게나 보이지 않는 증발이 있겠지만
그건 빙점과 해동의 시간을 무수히 반복해 뒤척인다.
따뜻한 날씨도 추운 날씨도 뒤집어 보면
햇볕의 뒷면에는 추위가 숨어 있고
추위의 뒷면에는 따뜻함이 웅크리고 있다
결국엔 추위도 햇살도 들어갈 수 없는
한 그릇 문 없는 집이 내게는 있다
만약이라는 말
만약이라는 말은
또 다른 지구
주머니에 넣기도 편하고
어느 곳에서나 먹을 수 있는 상비약 같은
만약이라는 말
자꾸 만지작거리면 영영 사라지기도 한다.
수만 개의 날개를 펴고 날아가기도 하고
검은 운석이 되어 떨어지기도 한다.
만약이라는 말 속에서는
집이 스스로 움직이고
꽃밭이 살아서 뒤란과 마당 끝을 옮겨 다닌다
움직임이 부산한 만약이라는 말
그 한마디에는 온통 변수들이 가득하다
그 만약을 누구나 갖고 산다
돌파구처럼 막다른 골목처럼
한 숨 끝에 곁들이는 그 만약이라는 말
이웃사촌인 듯 살뜰하다가도
꼬리 자르고 떠나는 도마뱀 같은 말
만지면 집게발을 떼어버리고 떠나는 꽃게 같은 말
빈부의 격차도 없고 성차별도 없는
과거와 미래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두 글자
만약이라는 말 한마디로 늦은 밤까지 뒤척인다.
너무 멀리까지 가도 괜찮은
돌아오지 않으면 더 좋은 만약이라는 말
이 나무 저 나무 날아다니며
만약을 전하기 바쁜 새들과
뒤꼍 설익은 바람사이로 창문이 달리는 밤
머릿속에는 하루 동안 썼던
만약이라는 말이
우수수 머리맡에 떨어진다.
나는 베개를 만약이라는 말밑에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