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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거대지진'으로 무너진 '에도성'을 본 네덜란드인들이 받은 '큰 충격' / 8/1(화) / 현대 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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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리쿠 대화재, 겐로쿠 지진, 운젠·후겐다케 분화, 교토 텐메이 대화재…헤이세이, 레이와 시대와 마찬가지로 재해가 많았던 에도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재해를 살아냈는가?
18세기 네덜란드 상관장으로 나가사키에 부임한 탄토는 당시 발생한 겐로쿠 지진 피해를 목격한다. 여기서는, 지난 번의 <<에도는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다>…네덜란드인이 본 「거대지진」의 비극>에 이어, 그때 탄토가 남긴 기록을 쫓는다.
※ 본 기사는 프레데릭 클레인스(저), 이소다 미치후미(해설) 『네덜란드 상관장이 qhs 에도의 재해」(고단샤 현대 신서)의 내용을 발췌·재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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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진의 힘에 놀란 네덜란드인
탄토는 31일에 알현 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또 4월 2일을 앞둔 알현 허가를 공식적으로 전하러 온 나가사키 부교소 관리들을 나가사키 가게에서 대접하고 나가사키 부교와 막부 고위 관리들에게 감사를 전해 달라고 부탁한 뒤 화기애애하게 헤어졌다. 에도에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고, 네덜란드인은 쾌활한 기분이 되어 있던 것이 탄토의 일기의 기술로부터 전해져 온다.
그날 밤중까지 각 막부 고관들에게 헌상품을 정리한 뒤 탄토는 흡족해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잠은 오래가지 못했다. 탄토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어젯밤 혹은 새벽 4시경에 유난히 무겁고 강한 지진이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모두 동시에 즉시 깨어났다. 지진은 우리 여관의 긴 면을 따라 심하게 흔들렸고, 게다가 그것과 교차하는 무거운 흔들림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무너질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신 덕분에 오래가지 못했다."
탄토가 기록하고 있는 이 지진의 날짜(4월 1일)의 사항을 일본측 사료인 『우에 연표』에서 확인하면 겐로쿠 17년 「2월 27일, 지진, 4월까지 자주 떨린다」라는 기록이 있다. 일력으로 2월 27일은 서기 4월 1일에 해당하므로 탄토가 겪은 지진 기록과 날짜가 딱 맞는다.
탄토가 지진의 세기에 유난히 놀라고 불안해졌음은 그의 기술에서 드러난다. 네덜란드인이 여관에서 묵을 때마다 엄중히 문단속을 한다. 말하자면 네덜란드인은 여관에 갇힌다. 가옥이 무너지면 도망갈 길도 없이 지붕 밑에 깔려 버릴 것이라는 걱정을 탄토는 일기장에 적고 있다.
아침이 되자 마타에몬이 네덜란드인들이 묵고 있던 2층으로 올라가 조금 전 지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강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탄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관이 무너지면 그 안에 갇혀 있는 네덜란드인들은 대피할 수 없다는 걱정도 털어놨다. 탄토는 이러한 지진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지진으로 [에도에서] 어떠한 피해가 일어나지 않았느냐"고 마타에몬에게 물었다.「현재로서는, 그런 것에 대해 들은 바 없다」라고 마타에몬은 대답했다.
◎ 곤혹스러운 츠나요시
그런데 마타지에몬이 탄토에게 온 진정한 목적은 전날 방문한 사쿠지부교 오바타 시게아츠의 이야기를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시게아츠가 마타지에몬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쓰나요시가 네덜란드인의 알현을 중지하려고 했다고 한다. 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에도성의 모습을 네덜란드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부끄럽다고 쓰나요시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쓰나요시는 알현 대신 교토소사대가 진상품을 받는 조치를 취하도록 중후하게 지시했다. 쓰나요시의 결정은 외교상 중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시게아츠는 너그럽게 봐준 마쓰마에 요시히로, 당시 에도 재부의 나가사키 부교·사쿠마 노부유키, 그리고 전년까지 나가사키 부교를 맡고 있던 에도마치 부교인 하야시 타다카즈와 협의를 했다.
이 네 사람의 협의에서는 상관장이 에도참부를 면제받는 전례를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장래적으로 그 전례가 에도참부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한 구실로서 네덜란드인에 의해 이용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옛날부터 네덜란드인들이 장군에 대해 지불해 온 경의가 희석될까봐 그들은 두려워했다.
상관장인 에도참부를 속행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네 사람은 쓰나요시의 측근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에게 상담하러 가서 쓰나요시를 설득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들의 의견에 찬동한 요시야스는 곧바로 쓰나요시에게로 달려갔다. 요시야스의 설명을 들은 쓰나요시는 생각을 고쳐 평소대로 에도참부가 행해지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상의 이야기는 마타지에몬이 탄토에게 전한 내용이다. 이를 듣고 막부 관리들에게 대단히 감사하다고 탄토는 대답했다. 에도참부의 지출을 싫어하는 탄토로서는 의외의 반응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덜란드인들에게 장군 알현이 특권으로 인식됐음은 역대 상관장 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오후에 너그럽게 봐준 마쓰마에 요시히로의 가신이 나가사키야를 방문했다 다음날 알현이 공식 허가됐음을 다시 알리기 위해서였다. 준비는 만전이라고 탄토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 후 나가사키 부교·나가이 나오치카로부터도 가신이 파견되어 알현 절차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이에 따르면 예년 네덜란드인들이 알현 전 대기하던 대기실이 무너졌기 때문에 이번에 한해 시마바라 번주의 저택에서 대기하게 됐다.
벌써 저녁이 되어 있었다. 탄토가 마지막 준비를 마칠 무렵 부교소 관리들이 내방하여 다음날 알현에 대한 기쁨을 서로 나누었다. 와인과 구운 과자를 먹으며 화목하게 담화한 뒤 관리들은 돌아갔다. 하인들이 저녁 식사를 준비한 바로 그때 다시 지진이 일어났다. 아침만큼 강하지는 않았지만 탄토는 냉엄한 현실로 돌아와 식욕을 잃었다.
◎ 붕괴된 에도성
4월 2일 수요일 이른 아침에 탄토는 미리 진상품을 에도성으로 운반하게 했다. 아침 8시에 나가사키 부교 관리가 나가사키 가게로 탄토 일행을 데리러 왔다. 탄토는 가마로, 다른 네덜란드인들은 말을 타고 에도성을 향해 출발했다.
네덜란드인들이 알현할 때 통상 에도성에 등성할 때 지나가는 다리와 문이 무너져 있었기 때문에 탄토 일행은 우회하여 다른 길을 따라 에도성으로 나아갔다. 외해자를 따라 나아가게 된 탄토는 "대단히 크고 견고하며 중후한 돌담이 여러 곳에서 붕괴되어 잔해로 변해 대부분 해자 속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적고 있다.
잠시 외해자를 따라 가다가 탄토 일행은 마침내 가설 다리에 다다랐다. 그 다리를 건너고 나서 탄토는 반파된 문을 통과했다. 탄토는 그 문에 대해 "원래 크고 깨끗한 건물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어느 문을 가리키는지는 미상이다.
에도성으로 들어간 탄토의 눈에 비친 것은 많은 건물과 다이묘 저택이 무너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또 곳곳에서 돌담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수천 명의 노동자가 부지런히 부흥 작업에 임하고 있었다. 탄토는 성안의 피해 상황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고 있다. 「이 정도의 피해를 가져오는 지진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라고 적고 있다.
겐로쿠 시대 쇼군 알현의 상례로서 네덜란드인들은 에도성에 들어간 후 막상 알현하러 불리기 전까지 오테마루와 혼마루 사이에 위치해 있던 에도성 최대의 검문소 '백인번소'라는 건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건물은 겐로쿠 지진으로 붕괴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체 조치로 이때는 시마바라 번주의 저택으로 안내되었다.
당시 시마바라 번주는 마쓰다이라 다다오{였다. 통칭은 '아와노카미(阿波守)'이다. 겐로쿠 2년에 만들어진 「에도도감강목」에서 조사해 보면, 「마쓰다이라 아하」의 저택이 보인다. 히토츠바시몬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네덜란드인은 시마바라 번사의 영접을 받아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잠시 기다리자 시마바라 번주가 응접 실로 들어와 통사를 통해 네덜란드인들에게 인사하고 곧 그 자리를 떠났다. 응접실은 대문으로 통하는 광장에 면해 있었던 듯하다. 나온 차를 마시며 네덜란드인들은 가마로 이동하는 다이묘들이 줄줄이 지나가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들 다이묘들도 네덜란드인과 마찬가지로 쓰나요시를 알현하기 위해 와 있었다.
잠시 후 너그러운 마쓰마에 요시히로와 사쿠지부교 오바타 시게아츠가 두 나가사키 부교와 함께 네덜란드인들이 기다리고 있던 응접실로 들어왔다. 인사 후에 나가사키 부교인 나가이 나오노스케가 그 후의 순서에 대해 탄토에게 설명했다. 우선 나가사키 부교들이 먼저 혼마루에 들어가고, 모든 로주(老中)가 혼마루에 도착하는 대로 시마바라 번저로 심부름꾼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또 나오치카는 낮쯤 알현이 허용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기다리는 동안 네덜란드인을 한 눈에 보기 위해 여러 다이묘들이 시마바라 번저로 찾아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러 이미 낮이 지나고 있었다. 그제서야 혼마루에 들어가라는 소식이 왔다.
네덜란드인은 관리의 안내를 받고 가설 다리로 우치보리를 건넜다. 이 가설교는 평저선 위에 만든 선교였다. 이곳에서도 탄토는 돌담이 무너지는 것을 여기저기서 관찰했다. 이 다리를 건너다 큰 건물과 마주쳤다. 탄토의 기술 맥락에서 추측하면, 이것은 아마 「오오테마치 산노몬」일 것이다. 탄토에 따르면 이 문은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었지만 문호 대신 울타리가 설치돼 있었다.
오테마치 산노몬을 지나자 관리들은 무너진 건물을 가리키며 그곳이 '백인번소(검문소)'였다고 탄토에게 전했다. 당시 '백인번소'는 '오테마치 산노몬'을 빠져나간 곳 왼쪽에 위치해 있었다. 탄토는 거기서 본 광경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 무너진 건물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그 건물 및 그 근처에 있던 건물의 목재나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돌을 다시 모으는 데 종사하고 있었다. 무너지지 않은 다른 여러 건물에는 곳곳에 균열과 균열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또 그것들은 도처에서 대기 기둥을 이용해 지탱되고 있었다"
탄토 일행은 피해 상황을 관찰하며 큰 광장을 지나 다시 임시 울타리가 설치된 문을 통과했다. 이는 아마도 중노문일 것이다. 곧 또 하나의 문이 네덜란드인 앞에 나타났다. 츄자쿠 문이다. "그래서 통상 통과하는 큰 문이 우리에게 지목됐지만 지금은 폐쇄돼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균열이 있고 구부러진 상태로 처져 있고, 버팀목이 설치되어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탄토는 기술하고 있다.
이상, 이때 탄토 일행이 지나간 경로는 네덜란드인들이 장군을 알현할 때 지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경로였다. 먼저 상관장이 가마나 말을 타고 에도성 정문인 오테마치를 지나간다. 거기서 정사각형 광장을 건너 오테마치 산노몬을 빠져나간다. 그곳에 다시 큰 광장이 있고 왼쪽에 경호대가 메우고 있는 백인번소가 있다. 보통 네덜란드인들은 이 백인번소에 몇 시간을 기다린 뒤 호출을 받고 그곳에서 걸어서 혼마루 쪽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거대한 돌담이 눈앞에 우뚝 솟아 있다. 그 돌담 중간에 주야구라가 달린 중노문이 있다. 이것은 네덜란드인들에게 인상 깊은 광경이었음에 틀림없다. 나카노몬을 지나면 오른쪽에 대번소가 보인다. 또 왼쪽으로 가면 주야구라가 달린 츄자쿠몬이 있다. 나카자쿠몬을 지나면 드디어 혼마루 어전에 다다른다.
이처럼 네덜란드 상관장 일기에는 등성시 지나는 여러 문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 종종 보이나 각 문의 명칭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따라서 당시의 에도 성도와 상관장 일기의 기술을 단서로 그 경로를 밟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돌담은 남아 있기 때문에 네덜란드 상관장이 체험한 것처럼 에도 성 등성을 추가 체험할 수 있다.
또한 연재 기사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장'이 본 '거대지진'의 충격>에서는 탄토의 경력부터 그가 겪은 재해 모습까지 자세히 해설하고 있습니다.
프레데릭 클레인스
https://news.yahoo.co.jp/articles/c3a3678dcba8b48e322ebec374aac49f558fa2f2?page=1
「超巨大地震」で倒壊した「江戸城」を見たオランダ人が受けた「大きな衝撃」
8/1(火) 7:04配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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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ビジネ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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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暦の大火、元禄地震、雲仙・普賢岳の噴火、京都天明の大火……平成、令和の時代と同じように災害の多かった江戸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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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びとはいかに災害を生き抜いたのか?
18世紀にオランダ商館長として長崎に赴任したタントは、当時発生した「元禄地震」の被害を目の当たりにする。ここでは、前回の<「江戸は見るに堪えないくらい悲惨な状況だった」…オランダ人が見た「巨大地震」の悲劇>に引き続き、そのときタントが残した記録を追う。
※本記事は、フレデリック・クレインス (著), 磯田 道史 (解説)『オランダ商館長が見た 江戸の災害』(講談社現代新書)の内容を抜粋・再編集した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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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震の力に驚くオランダ人
タントは三十一日に謁見の準備を着々と進めた。また、四月二日に控えた謁見の許可を正式に伝えに来た長崎奉行所の役人を長崎屋でもてなし、長崎奉行や幕府高官に感謝を伝えてくれるようにと頼んだ後、和やかな雰囲気で別れた。江戸でものごとが順調に運んでいるのを受けて、オランダ人は陽気な気分になっていたことがタントの日記の記述から伝わってくる。
その日の夜中まで各幕府高官への献上品を整理した後、タントは満足して、布団に入った。しかし、睡眠は長く続かなかった。タントは次のように記述している。
「昨日の夜あるいは早朝四時頃にひじょうに重くて強い地震があった。オランダ人は皆同時に即座に目が覚めた。地震は、我々の宿屋の長い面に沿って激しく強く揺れ、さらにそれと交差する重い揺れがあったため、すべてが倒壊するかのように感じた。しかし、神のおかげでそれは長続きしなかった」。
タントが記録しているこの地震の日付(四月一日)の事項を日本側史料の『武江年表』で確かめると、元禄十七年「二月二十七日、地震、四月まで度々震ふ」という記録がある。和暦の二月二十七日は西暦四月一日に当たるので、タントが体験した地震の記録と日付がぴったり合う。
タントが地震の強さにひじょうに驚き、不安になったことは彼の記述からうかがえる。オランダ人が宿屋で泊まる時、つねに厳重に戸締りがされる。いわば、オランダ人は宿屋に閉じ込められる。家屋が倒壊すれば、逃げ道もなく、屋根の下敷きになってしまうという心配をタントは日記に書き留めている。
朝になり、又次右衛門が、オランダ人の泊まっていた二階に上がって、「先ほどの地震についてはどう思うか。強くなかったか」と聞いた。タントは頷いて、宿屋が倒壊すれば、そのなかに閉じ込められているオランダ人は避難できないとの心配も打ち明けた。タントはこのような地震が「二度と起こらないことを祈っていた」。そして「この地震で〔江戸で〕何らかの被害が起こらなかったのか」と又次右衛門に尋ねた。「今のところ、そのようなことについて聞いていない」と又次右衛門は答えた。
困惑する綱吉
ところで、又次右衛門がタントのところに来た真の目的は、前日に訪問した作事奉行の小幡重厚の話を報告するためだった。重厚が又次右衛門に語ったところによると、綱吉がオランダ人の謁見を中止しようとしたという。というのも、地震によって多大な損傷を受けた江戸城の姿をオランダ人に見せるのが恥ずかしいと綱吉は考えていたからであった。
綱吉は謁見の代わりに京都所司代が献上品を受け取る措置を取るように重厚に指示した。綱吉の決定は外交上重大なものだったため、重厚は大目付の松前嘉広、当時の江戸在府の長崎奉行・佐久間信就、そして前年まで長崎奉行を務めていた江戸町奉行の林忠和と協議をした。
この四人の協議では、商館長が江戸参府を免除されるという前例を作らない方が良いという結論に至った。なぜなら、将来的にその前例が江戸参府の負担を軽減するための口実としてオランダ人によって利用されるかもしれないからである。そうなると、昔からオランダ人が将軍に対して払ってきた敬意が薄れるのではないかと彼らは恐れていた。
商館長の江戸参府を続行すべきであるとの結論に至った四人は、綱吉の側近・柳沢吉保に相談に赴き、綱吉を説得してくれるよう頼んだ。彼らの意見に賛同した吉保は、早速、綱吉のところに駆けつけた。吉保の説明を受けた綱吉は考えを改め、通常通りに江戸参府がおこなわれるように命令を出した。
以上の話は又次右衛門がタントに伝えた内容である。これを聞いて、「幕府高官たちにたいへん感謝している」とタントは答えた。江戸参府の出費を嫌がっているタントにしては意外な反応だと思われるかもしれない。しかし、オランダ人にとって将軍への謁見が特権として認識されていたことは、歴代の商館長日記から読み取れる。
午後に大目付・松前嘉広の家臣が長崎屋を訪問した。翌日の謁見が公式に許可されたことを再度伝えるためだった。準備は万全だとタントは誇らしく答えた。その後、長崎奉行・永井直允からも家臣が派遣され、謁見の段取りについて説明があった。それによると、例年オランダ人が謁見の前に待機していた控えの間が倒壊したため、今回にかぎり、島原藩主の屋敷で待機することになった。
すでに夕方になっていた。タントが最後の準備を終えたころ、奉行所の役人が来訪し、翌日の謁見に対する喜びを互いに分かち合った。ワインと焼き菓子を飲食しながら和やかに談話した後、役人は帰った。使用人たちが夕食を用意したちょうどその時に、ふたたび地震が起こった。朝のものほど強くなかったとはいえ、タントは冷厳な現実に戻され、食欲を失った。
崩壊した江戸城
写真:現代ビジネス
四月二日水曜日の早朝にタントは前もって献上品を江戸城へ運ばせた。朝八時に長崎奉行の役人が長崎屋にタント一行を迎えに来た。タントは乗物に、ほかのオランダ人は馬に乗り、江戸城に向けて出発した。
オランダ人が謁見に際して通常江戸城に登城する時に通る橋と門が潰れていたので、タントたちは迂回して、別の道筋で江戸城に進んだ。外堀に沿って進むことになったタントは、「ひじょうに大きく、堅固で重厚な石垣が多くの箇所で倒壊により瓦礫と化し、大部分が堀のなかに崩れ落ちている」と記している。
しばらく外堀に沿って進んだところ、タント一行はとうとう仮設の橋に辿り着いた。その橋を渡ってから、タントは半壊した門を通った。タントはその門について「もともと大きくて、綺麗な建物だったことは想像できる」と記述しているが、どの門を指しているのかは未詳である。
江戸城に入ったタントの眼に映ったのは、多くの建物や大名屋敷の倒壊している様子であった。また、至るところで石垣が崩れていた。何千人もの労働者がせっせと復興作業に取り組んでいた。タントは城内の被害状況を見て、大きな衝撃を受けている。「これだけの被害をもたらす地震は凄まじい力を持っていたにちがいない」と綴っている。
元禄時代における将軍謁見の常として、オランダ人は江戸城に入ってからいざ謁見に呼ばれるまで、大手門と本丸とのあいだに位置していた江戸城最大の検問所「百人番所」という建物で控えていることになっていた。しかし、この建物は元禄の地震で倒壊していたので、代替措置としてこの時は島原藩主の屋敷に案内された。
当時の島原藩主は松平忠雄{であった。通称は「阿波守」である。元禄二年に作られた「江戸図鑑綱目」で調べてみると、「松平アハ」の屋敷がみえる。一ツ橋門の近くに位置していた。
オランダ人は島原藩士に迎えられ、広間に案内された。しばらく待つと、島原藩主が広間に入り、通詞を介してオランダ人に挨拶し、その後すぐにその場を去った。広間は大手門に通じる広場に面していたようである。出されたお茶を飲みながらオランダ人は、乗物で運ばれている大名たちがつぎつぎと通っていく様子を観察していた。これらの大名たちもオランダ人と同様に綱吉に謁見するために来ていた。
しばらくすると、大目付の松前嘉広と作事奉行の小幡重厚が両長崎奉行とともにオランダ人の控えていた広間に入って来た。挨拶の後に長崎奉行の永井直允がその後の段取りについてタントに説明した。まず、長崎奉行たちが先に本丸に入り、すべての老中が本丸に到着次第、島原藩邸に使いを送るとのことであった。また、直允は昼ごろに謁見が許されるだろうと付け加えた。
こうして待っているあいだに、オランダ人を一目見ようと複数の大名たちが島原藩邸にやって来た。あっというまに時間が経って、すでに昼過ぎになっていた。その時、ようやく本丸に入るようにとの知らせが届いた。
オランダ人は役人に案内されて、仮設の橋で内堀を渡った。この仮設橋は平底船のうえにこしらえた船橋であった。ここでもタントは石垣の崩れをあちらこちらで観察した。この橋を渡ったところで、大きな建造物に出くわした。タントの記述の文脈から推測すると、これはおそらく「大手三ノ門」である。タントによると、この門は倒壊せずに残っていたが、門戸の代わりに柵が設置されていた。
「大手三ノ門」を通ったところで、役人たちは倒壊した建物を指差し、そこが「百人番所」だったとタントに伝えた。当時、「百人番所」は「大手三ノ門」を抜けたところの左側に位置していた。タントはそこで見た光景を次のように記述している。
「その倒壊した建物のところで、多くの労働者たちが、その建物およびその近くにあった建物の木材や動かせそうもない巨大な石をふたたび集めるのに従事していた。倒壊しなかったほかのさまざまな建物にはあちらこちらに亀裂や裂け目が入っているのが見えた。また、それらは各所で控え柱を用いて支えられていた」。
タント一行は被害状況を観察しながら大きな広場を通って、ふたたび仮の柵が設置された門を通った。これはおそらく「中ノ門」である。すぐにもう一つの門がオランダ人の前に現れた。中雀じや門である。「そこで、通常通過する大きな門が我々に指差されたが、今は閉鎖されていた。というのも、数多くの裂け目があり、曲がった状態で垂れ下がっていて、控え柱が設置されたため利用できなかったからである」とタントは記述している。
以上、この時にタントが通った経路は、オランダ人が将軍に謁見する時に通る通常と変わらない経路であった。まず、商館長が乗物や馬に乗って、江戸城の正門であった大手門をくぐる。そこから、正方形の広場を渡り、大手三ノ門を抜ける。そこにふたたび大きな広場があり、左手に警護隊が詰めている百人番所がある。通常、オランダ人は、この百人番所に数時間控えた後、呼び出しを受けて、そこから歩いて本丸の方へ向かう。そこには巨大な石垣が目の前に聳えている。その石垣の途中に、重箱櫓の付いている中ノ門がある。これはオランダ人にとって印象深い光景であったにちがいない。中ノ門をくぐると、右手に大番所が見える。また、左の方へ進むと、重箱櫓の付いている中雀門がある。中雀門をくぐると、ようやく本丸御殿に辿り着く。
このように、オランダ商館長日記には登城の際に通るさまざまな門についての詳細な記述がたびたび見られるが、各門の名称への言及はほとんどない。したがって、当時の江戸城図と商館長日記の記述を手掛かりにその経路を辿るしかない。今現在でも石垣は残っているので、オランダ商館長が体験したように、江戸城登城を追体験することは可能である。
さらに連載記事<長崎の「オランダ商館長」が見た「巨大地震」の衝撃>では、タントの経歴から、彼が体験した災害の様子まで詳しく解説しています。
フレデリック・クレイン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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