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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고통
(삼상 1:1-18)
요약
한나의 고통은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가 당하는 고난의 예표로서 성도가 처한 세상의 영적환경을 잘 예표해 준다.
1. 육신은 두 진영이 공존 대립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1절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1) 하나님 나라
2) 마귀의 나라
2. 육신은 생존하는 동안 귀한 사명이 있다.
1절 하 " ‥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 "
1) 문자적인 의미 - 엘가나는 대제사장 가문이었다.
2) 신령한 의미 - 이처럼 성도도 온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 파할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3. 육신은 영혼을 대적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2절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1) 한나 - 그 의미가 '풍성한 은혜, 사랑스러움'이라는 뜻으로 영의 상징이요
2) 브닌나 - 그 의미가 '홍보석, 진주, 산호'라는 뜻이요 여주인 한나를 대적 한 점에서 육신적인 속성의 상징이다.
4. 죄인에게는 육신적인 열매로 무성하다.
2절에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4절 "모든 자녀에게"
1) 문자적인 의미 -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많았다.
2) 신령한 의미 - 죄의 열매로 풍성한 육신에 속한 신자의 영적 상태이다.
5. 죄인의 의지는 무능력하다.
3절 "‥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1) 문자적인 의미 - 무능한 엘리의 아들들로 악한 제사장들이었다. 2:12의 원 문의 뜻은 '벨리알의 아들들, 전적으로 타락한 자들'이다.
2) 신령한 의미 - 이처럼 죄인은 의에 대해 전적타락 전적무능력한 존재이다.
6. 죄인은 육신적인 일에 더 관심이 많다.
4-5절 "엘가나가 ‥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1) 문자적인 의미 - 남편은 한나를 사랑하지만 브닌나의 식구들에게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어 한나는 남편을 빼앗긴 느낌을 가졌었다.
2) 신령한 의미 - 은혜 받지 못한 심령은 주님의 임재의식을 경험하지 못하 여 괴롭고 슬프고 고독하나 주님을 더 찾도록 하기 위한 큰 사랑이다.
7.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기도의 광장으로 부르심이다.
5하-7절 "‥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 "
1) 문자적인 의미 - 브닌나가 한나를 무시하고 안방 마님이 되어 설친다.
2) 신령한 의미 - 하나님께서 연단하시는 목적은 기도의 광장으로 불러 영의 더 귀한 것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가 낳은 사무엘은 사사와 선지자와 제 사장으로 객관적으로는 그리스도 예표요 주관적으로는 성도의 예표이다.
8. 육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나실인이 되어야 한다.
10-11절 " ‥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 "
1) 문자적인 의미 - 온전히 바치는 나실인에 대한 서원이다.
2) 신령한 의미 - 우리의 기도도 육신적 관점이 아닌 신령한 기도여야 한다.
강해
오늘부터 사무엘상서를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상서를 간단히 서론적으로 말씀해 드리면 본서는 이스라엘이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전환하는 약 1세기의 과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 신정왕국 건설형성사입니다. 그러나 구속사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권세의 예표의 시작이요, 영적으로는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 즉 영권받는 성도가 되는 길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엘가나의 가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엘가나의 본처 한나는 많은 정신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한나가 당한 고통은 결코 의미없는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새시대를 열기 위한 하나님의 헌신적인 간구의 요청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새 역사를 열어가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엘가나의 가정은 세상을 사는 성도들의 영적인 형편을 가르쳐줍니다.
1. 육신은 두 진영이 공존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1절에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라고 했습니다.
이 곳은 엘가나와 한나가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이 곳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라마다임소빔은 '두 개의 고지'라는 뜻으로 지리적으로 보면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윗동네가 어디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럼 아랫동네는 어디입니까? 마귀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나라, 마귀나라, 세상나라 모두 세 나라가 존재하는 셈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점에서 모두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지만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영적인 구체적인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 나라가 공존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진영은 서로 대립합니다. 그래서 두 개의 고지입니다. 예를 들면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지배했던 6.25사변 때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뺏고 빼앗는 영적 전쟁터라는 아주 특수한 장소입니다. 수많은 영적군대들이 출몰하고 시시때때로 상상치 못할 영적전투가 벌어집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고 선행의 지혜로서 마귀의 파괴적인 시험이 다가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 육신은 생존하는 동안 귀한 사명이 있습니다.
다시 1절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했습니다.
이렇게만 기록되어 있으니까 이 가문이 무슨 가문인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역대상 6장을 보면 이 가문은 놀랍게도 대제사장 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손이 없었으니 혈통중심의 세습제인 대제사장의 대는 이어갈 수 없게 됩니다. 더구나 엘리의 가문이 타락했으니 그 사명은 참으로 막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시려는 역사를 하시지 않을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명의 막중함을 일깨워 주는 좋은 예표입니다. 복음적으로 보면 우리는 보통 사명을 가진 가문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 안에 예수를 나타내어 그 주님으로 하여금 만민을 축복하시도록 할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의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와 약간 비슷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예수가 심겨지고 장성하여 나에게서 온전히 나타나 그 예수로 하여금 나를 도구 삼고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귀한 사명을 방치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놔 두시겠습니까? 그래서 한나와 같이 하나님께 부르짖게 만드신 것입니다.
3. 육신은 영혼을 대적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같이 2절을 읽으십니다.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여기 한나는 영의 상징이요, 브닌나는 육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그 의미가 '풍성한 은혜, 사랑스러움'이라는 뜻으로 이름만 봐도 영성으로 풍성합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홍보석, 진주, 산호'라는 뜻으로 세속과 육의 상징입니다. 더구나 브닌나가 한나를 대적한 점에서 더욱 확실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는 영과 육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을 따라 살면 영적인 사람, 육을 따라 살면 육적인 사람이 됩니다. 중생 이 후 이 둘은 서로 치열하게 갈등합니다(갈5:17). 그래서 온전히 영에 속한 사람이 되기까지는 브닌나로 인해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4. 죄인에게는 육신적인 열매로 무성합니다.
2절에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했습니다. 그리고 4절에 "모든 자녀에게" 라는 문구를 보아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가정의 환난은 그래서 생깁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의 불화도 여종 하갈이 자식을 낳고 여주인 사라를 멸시하다가 생겼고, 이스마엘이 이삭까지 업신여기다가 결국은 쫓겨나야 했습니다. 이렇게 브닌나만 자녀들이 있었다는 것은 바로 죄의 열매만 맺는 육신에 속한 신자의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신자가 오래 되었지만 죄의 열매만 맺는다면 심각한 일입니다. 논에 잡초 무성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령의 열매도 맺혀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이런 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5. 인간 의지의 무능력으로 영적인 삶에는 절망적입니다.
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여기 홉니와 비느하스는 엘리의 아들들로 대단히 악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2:12을 원문으로 보면 '벨리알의 아들들, 전적으로 타락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타락으로 죄를 짓는 마귀의 자식이었으며(요일3:10), 영적인 일과 의에 있어서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칼빈의 오대 강요에서 맨 먼저 나오는 인간의 전적타락 전적무능력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인간의 의의 도움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남을 축복하지 못한 것처럼 인간의 의도 역시 그렇습니다. 도리어 두 아들처럼 망쳐만 놓습니다. 그래서 의를 행할수록 더 넘어지고 인간의 의만 쌓다보면 더욱 교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악령의 시험을 스스로 이길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9절을 보면 그들의 아버지인 엘리도 의자에 앉았더라고 했습니다. 성막에는 안팎에 의자가 없으며 따라서 제사장은 앉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그랬던지 그가 죽을 때 의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서 죽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그 나마의 믿음마저도 엘리처럼 행함이 없는 게으른 믿음 상태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태만은 위험스런 믿음입니다. 우리도 앉아 있다가는 엘리처럼 목이 부러집니다. 천로역정에서 기독도가 길에서 자던 자들을 발견하고 경고했지만 듣지 않다가 원수에 의해 목이 잘려지고 말았습니다. 시험이 와서 급기야는 주님을 부인하고야 만 것입니다. 혹시 우리 속에 게으른 엘리가 있다면 속히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6. 죄인은 육신적인 일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4-5절을 읽겠습니다.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구약 제사법을 보면 화목제의 제물은 대부분 드리는 자가 취했습니다. 그리고 화목이 필요한 사람들끼리 나누어 먹었습니다. 엘가나는 한나에게 그것을 더 줌으로 사랑과 아울러 화목을 표시했습니다. 그 이유는 평소에는 미안한 일이 많았음을 암시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식들이 없으면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남편은 브닌나의 식구들에게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나는 그러한 상황을 통해 남편을 빼앗긴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엘가나가 다른 부인에게 매달릴 때 한나의 심령처럼 아직 변화되지 못한 심령도 그런 느낌 즉 주님의 임재의식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심령은 괴롭고 슬프고 고독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심령에 고독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의 영혼을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임재의식을 주셨다 빼앗으셨다 하심으로 성도를 연단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7.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기도의 광장으로 부르십니다.
5절 하반절부터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했습니다.
브닌나는 한나를 무시하고 안방 마님이 되어 설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한나의 오해를 푸는 화목제의 순간에도 그것마저 못보겠다고 더욱 격동시킵니다. 누가 화내야 할 사람인지 거꾸로 되었습니다. 브닌나는 성격이 괴팍하고 뻔뻔스럽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여자였습니다. 그러므로 한나의 마음은 아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연단시키는 방식입니다. 사람은 심리구조가 육신이 편하면 기도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점을 잘 아시며 또한 어떻게 연단해야 할지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한나는 15절에 나는 슬픈 여자라 했고, 16절에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이라고 했습니다. 한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그것을 통해서 한나를 기도의 광장으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사무엘인데 사무엘은 사사와 선지자와 제사장이라는 삼 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먼저 사사 혹은 왕권은 삼상7:6에 나타납니다.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또 선지자권은 삼상3:20에 나타나는데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했습니다. 또 삼상13:8-14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이 오기 전에 번제 드림을 책망한 것을 보아 사무엘이 제사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삼 직을 가진 자는 사무엘 이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다윗과 솔로몬 외에는 없었으며 더욱이 사무엘은 한 점의 티도 없었다는 점에서는 전무후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객관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예표요, 주관적으로는 거듭나고 성장한 우리 성도의 예표입니다. 자녀를 낳을 때도 고통이 있는데 어찌 한 영혼이 거듭나는데 고통이 없겠습니까?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부르짖어 삼 권을 가지신 예수님이 여러분의 인격에 나타나시기를 축원합니다.
8. 주께서 육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나실인이 되길 원하십니다.
10-11절을 보십시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에게서 이러한 기도가 나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나실인이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한다는 헌신의 상징으로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모형입니다. 즉 우리는 나실인이 되기 위하여 부르짖어야 합니다. 즉 나실인처럼 일생을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부정한 죄와 세상의 것을 깨끗이 씻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를 원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기도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신령한 기도입니다. 그러면 나실인처럼 성령이 역동하는 성도가 됩니다. 모두 신앙의 나실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9. 이를 위해서 날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12절에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했습니다.
얼마나 한나가 오래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는지 술취한 사람으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15절에서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의 축복을 받은 한나는 가서 먹고 다시는 수색이 없었습니다. 즉 마음의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가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할 일은 마음을 다하여 신앙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이렇게 하여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질 때 주님은 당신의 의와 권세로 덧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무엘의 의미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한나처럼 영혼을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하겠습니다. 현재 고통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귀한 존재로 만드시기를 원하사 기도의 광장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한나와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서원하며 부르짖으십시오. 그래서 우리 인격에 그리스도가 나타나 영적으로 사무엘 같이 변화되는 귀한 축복이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