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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리 글 과 공 동 체 이 야 기
2011-04
남 도 여 행
박병민 목사(새터공동체)
일간 신문인 충청투데이의 2010년 1월 11일자에, 우리들의 사는 모임인 새터공동체가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에 “사랑하고 베풀 수 있으니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라는 내용으로 펼쳐져서 보여 졌다. 끝부분에서 새해 우리들의 소원은 함께 계신 가족들이 비행기 타고 제주도 한번 가자는 이야기를 그 신문에서 하소연하듯 말을 했다. 그 후 여러 달이 지나쳐가서 막상 제주도에 가자는 이야기를 만지작만지작하다가, 시원해질 가을을 앞에 두고 끄집어내자, 어른들은 마음만 앞서는 엄두였든지? 올해에는 접어들이고 내년에 기지개를 펴듯 찾아올 따뜻한 봄에 진해에 벚꽃 구경을 함께 가자고 하면서, 선반위에서 내려져서 들추었던 물건을 다시 묶어 그 자리에 도로 놓는꼴이 되고 말았다. 너나나나 매서운 겨울나기를 하고, 선배 목사님의 말씀대로 제아무리 겨울이 춥다한들 볕드는 봄은 오고야 말 것이라는 말과 같이 봄은 되찾아서 오고야 말았다. 얼었던 수돗물은 입춘이 가고 한 달이 되는 개구리가 나오기 시작한다는 경칩 날에 이르러서야 풀려져서 흘러나오게 되었다.
2006년 3월에 다음과 같은 소식을 나누어 보았다. “그 예전에 보았던 섬진강변의 피어나는 하얀 매화꽃을, 함께 계신 식구들과 이른 봄나들이를 하면서 다시금 되돌아보고 싶다. 매화를 비롯하여 사군자(四君子)를 옛 선인들은 아래와 같이 말하여왔다. 설중군자(雪中君子)라 하여 눈 속에 피는 군자와 같은 매화, 세한고절(歲寒孤節)은 추운 계절에도 혼자 푸르른 대나무, 추영고한(秋影孤寒)은 가을 그늘에 홀로 추위를 이겨낸 국화, 유곡가인(幽谷佳人)은 그윽한 골자기의 아름다운 난초라고 각각 불러왔다. 눈 속에서 피어나는 흰 매화는 그 삶의 강인함을 엿볼 수 있다. 집 곁의 산기슭에는 대나무가 사철 푸르다.” 그런 후, 어느 한날에는 동문수학을 하였던 전라도 구례에 계시는 신 전도사님께서 전화를 해오셨다. 구례의 섬진강변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매화꽃과 이어 피게 될 산수유꽃을 보러오라는 얘기셨다.
경상도의 진해의 군항제가 4월 초순에 열흘간에 걸쳐서 열린다는 말을 들었으나, 몹시 추운 겨울을 겪었기에 그것을 이기고 움츠림을 펴기에는 늦어질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오륙년 전의 구례의 신 전도사님의 이야기가 생각이 살아나서, 섬진강변의 구례에 마음이 먼저 앞서 다다랐다. 그것도 그럴 것이 신 전도사님과 마음을 나누는, 나의 친구 윤이 그 구례의 산동면, 쌍계사의 벚꽃 길,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남해의 상주해수욕장을 이야기하여 왔다.
봄은 보옴에서 연유된 말이다. 봄을 말하는 스프링(spring)은 뛰다. 튀기다. 싹이 트다라는 의미다. 봄기운으로 인해 만물이 움트고, 솟아오르고 있다. 젊은이들을 말하는 청춘(靑春)은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을 의미한다. 우리 공동체 가족은 열 한명, 휠췌어가 다섯 대 그리고 짐까지 올려놓게 되자면 십오인 용 이 사탄아 가(?)필요해보였다. 그런데 렌터카회사에 여쭈어보았으나, 그 이스타나 차가 단종 된 상태였다. 그래서 궁리 끝에 십이인 승합차 두 대를 대여하기로 하였으나, 장애인들의 편의와 경제성을 고려하여 이십오 인승 중형버스 한 대를 빌려 4월 11일과 12일 양 이틀에 걸쳐 사용하기로 관광회사에서 산정까지 해주었다. 우리가 십이 년을 사는 동안 집을 벗어나는 것은 적십자사 모임, 희망의 언덕 모임, 혹은 장애인 모임 등에서 운반차량에 더불어 당일 다녀오는 모임이 고작이었으나, 밤을 다른 곳에서 보내가며, 이틀을 지낸다는 것은 다른 분의 보살핌이 여실하게 요청이 되었는데, 버스에서 안아 내려 휠췌어로 옮겨 앉히는 무거운 일을 운전기사님과 저의 아버지께서 도맡아 일을 삼아 주셨다. 참 고마운 노릇이었다.
우리는 4월 11일 아침 여덟시 반경에 공동체의 집을 떠나, 마을 초등학교 앞에서 늘상 함께해주시는 두 분을 차에 모시고, 부모님을 면소재지에서 모시고, 그리고는 주문 해둔 먹을 떡을 찾아 싣고, 기사님과 열다섯 명의 이내들이 고속도로 길로 금산을 지나, 나 선생님의 고향 땅인 무주의 적상산(赤裳山.해발1034m)을 창밖으로 지나치는 바람결처럼 멀찍이 바라다보며 가게 되었다. 기사님의 덧붙여지는 말씀으로는 무주는 사과와 와인이 입에 오르내리는 식품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눈앞에 다다른 장수는 친구가 번암면에서 십수년전에 몇 년간 은거하다 시피 보냈었을 것이, 지나간 추운 겨울의 맹렬한 기세가, 그렇게 춥다는 장수의 날씨로 사람들을 속으로 더 몰아넣게 했었을 것이구나 하면서 지나쳤다. 오전에 남원의 광한루에 이르러 넓게 드리워진 정원을 거닐 수 있는 만끽함의 노님 속에서였는지, 그만 함께 사시는 할머니를 잃고, 찾아다니는 처지로 몰리게 되었다. 고무줄마냥 늘어진 시간이 당겨지는 시간으로 바뀌어 지며, 거닐던 것이 발 빠른 행보로 변하며, 너나 나나 입에서들 한두 마디 씩 표출의 말들이 일기 시작하고, 시간이 흐른 뒤, 기다리고 계시던 기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할머니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그 할머니 차에 계시다는 담겨진 말로 우리에게 되돌아왔다. 우리들은 안도와 함께 여기저기의 사람들이 모여 지자 루(樓)를 함께 빠져나오듯 뒤로하고 앞을 보며 걸어 나왔다. 우리들에게 광한루(廣寒樓)라는 그 말과 같이, 드넓어서 사람을 못 보았고, 세한고절(歲寒孤節)의 작은 대나무들 같이 그 많은 세월의 삶 속에서도 무게를 잃지 않은 매우 작은 할머니를, 그 홀로사시며 잃어버렸던 세월만큼이나 멀리 계셨던, 그 할머니 집사님을 볼 수 있었다. 시간을 막지 못하여 우리는 구례에서 전도사님과 함께 하기로 한 점심식사를 남원의 이름이 얹어진 추어탕을 맛있게 나누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례군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섬진강은 그렇게 크지 않은 아담한 강이란다. 그래서 그 강은 댐이 없는 강이라고 하였다. 오른쪽을 섬진강으로 하고 길의 양옆과 저 멀리 강 넘어 산과 맞닿은 언덕에 봄꽃의 향연이 펼쳐져 있다. 산동면을 지나 화개장터에서 신 전도사님과 만나 뵙기로 기사님께서 연락을 취해주셨다. 설중군자(雪中君子)라 하여 눈 속에 피는 군자와 같은 매화는 4월 중순의 시작이라 볼 수는 없었고, 산수유 꽃도 때가 지난 듯 군락을 이루는 나무들 사이에서 노란색의 빛깔을 간간히 대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을 우리 식구들은 눈에 가득하게 담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다른 생각이 마음에 불연 듯 찾아들었다. 그 옛날 한 사오십년 전에 불렀음직한 “꽃 중에 꽃 무궁화 꽃 삼천만의 가슴에 피었네, 피었네. 영원히 피었네. 백두산 상상봉에, 한라산 언덕 위에 민족에 얼이 되어 아름답게 피어네.” 꽃이 피고 지는 것이 끝이 없어 무궁화(無窮花)라 부르게 되었다는데, 그래서 한여름에 피는 꽃은 백일 이상피고 진다고 한다. 추위에 강하면서 햇빛을 더욱 좋아하지만, 벌레들의 시달림을 많이 겪어내야 되는 강인해질 수밖에는 없는 꽃, 우리네의 어른들이 그 옛날 치러냈었어야 할 시련의 단면들이 꽃잎 한장 한장에 무치어져 있는듯하다.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일장기, 벚꽃 보급에 혈안이 되어있을 때, 이에 항거하여 남궁억(南宮檍) 선생님은 1918년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내려와 모곡감리교회를 세우고, 전도사로 목회하면서 민족정신 고양을 위해 무궁화 묘목을 전국에 보급하였다. 그러면서 교회 내에 4년제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신형원은“터”라는 노래에서“모두 함께 부르자 무궁화 꽃내음 삼천리에 퍼져라. 그날은 오리라. 그날은 꼭 오리라.” 그렇게 말하였다. 두 세주 전에 길을 나서는데, 집으로 들어서는 노중에서 대전에 계신 목사님 두 분이 날을 찾아오시다 맞닥트렸다. 그 예전에 무궁화교회라는 특이한 이름을 간직하셨던 목사님이셨다. 지금도 언행일치의 몸으로 노동을 해가면서 사시는 빈민목회의 사려를 베어내는 진수의 삶을 사시는 듯하였다. 나는 그날 저녁에 다음과 같은 문자를 그 분의 글판에 올렸다. “목사님과 남 목사님을 뵙고 삶을 배웠습니다. 말씀 속에 삶이 뵈어 나는 듯합니다. 질펀한 삶의 절박함을 보는 듯합니다. 나도 더욱 비움과 심령의 애달픔으로 채워가는 자락의 걸음이 되어야겠습니다. 목사님 몸 아끼시면서 건승하세요”. 하얗게 날려며 떨어져 가는 꽃길사이로 구례를 넘어 조영남이 선사하다시피 한 하동의 화개장터에서 신 전도사님을 뵐 수 있었다. 전도사님의 말마따나 십오륙년만의 뵘이었다. 전주에서 나셔서 음악을 좋아하시며 사시는 분, 바담풍이 아니라 온전한 바람풍(風)자를 아시면서 사라가시는 분, 심상봉 목사님께서 전해다 준 치즈로 유명해진 임실에서 교회 일을 돌보시다가, 20년 전에 구례로 옮겨와서 사오십 청춘을 지금껏 다 쏟아가며 풍토 좋은 구례 땅을 여지삼아 밟고 계신 분, 고요하신 두 부부 어른의 얼굴을 뵐 수 있음이 좋다. 섬진강 물속에는 재첩을 담았고, 하동은 박경리의 토지의 땅이고, 하동은 꽃이 만발하여 화개(花開)라는 마을을 안고 있고, 조영남이 가져다준, 그 화개장터는 유명세에 밀려 물질은 가져다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도사님의 말씀처럼 옛 삼대장터의 그윽함은 놓친 듯 했다. 그래서 몸 불편한 우리들은 그 장터를 차 창밖으로만 뻔히 쳐다보는 데에만 그쳤다. 전도사님이 가져다준 이야기는, 길 옆 군데군데 짙은 색을 띠는 사람의 잔손길이 드려있는 차(茶) 밭이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녹차(綠茶)라는 말은 일본 사람들이 가져다준 말이고, 우리는 보통 통틀어 얘기하다시피 하는 ‘차(茶)’라는 말이 정답의 말이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에게 가볍게 취급당하다시피하는 ‘다방(茶房)’이라는 곳도 그 예전에는 공회당처럼 진중한 공간이었다고 말씀하신다. 손길이 많이 닿아야 이루어지는 손무늬가 베어든 차. 삶의 몸은 가볍게, 그러면서 반면에 속마음은 누르는 무거움으로 그 묵묵함을 지녀야겠다.그리고 내가 입을 먼저 열어, 그 전도사님에게 학교 다닐 때에 뵈었던, 말씀을 잘하시는 구약성서 선생님이셨던 장주선 목사님 이야기를 같이 나눌 수 있었다. 그 목사님은 말씀이 너무 바르셔서 그러한지? 입 모양이 돌아가 있으신 어르신이셨다. 그런데 그 분의 입에서 울려 나오시는 말씀은 너무 지당하신 말씀이었던 것이 이십삼사 년이 흐른 지금도 담겨져 있다. “교회를 떠나올 때에는 자루가득 책봇따리만 꿰차고 내빼듯 달려 나오라”는 그 말씀. 몇 해 전에 신 전도사님께서도 그 장주선 목사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가지셨다고 하신다. 이제는 그 어른도 연세가 많으셔서 익산에 은거하신다는 얘기도 들려주셨다. 우리는 하동의 솔밭에서 내려 그 곳의 솔내금새를 맡으며 노닐다가 전도사님 부부와 저녁밥도 나누지 못한 채 작별하고, 곧이어 차에 올라 버스를 달려 광양을 지나, 그 옛날 초라하게들 살아갈 적에 초등학교 책에서 보았던 남해군의 남해대교 밑에서 내려, 그곳의 숙소에 짐을 풀고, 두 다리를 뻗고 “웃어라 동해야”를 처다 보면서 주문한 횟고기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비위가 좋지 못한 여자 분들은 그것을 못 드시는 아쉬움이 있었다.
다음 날에는 남해대교 밑에서 하얀 벚꽃나무들 주변에서 노닐다가 차에 올라 옆의 동네인 삼천포로 빠졌다가, 그곳에서 비행기가 나래비를 지어 널려져있는 사천비행전시장과 튜울맆 밭에서 머물다가, 고속도로를 따라 내어달려 휴게소에서 점심을 하고, 우리 동네 인근 고속도로 길에서 빠져나와 조금 더 와서, 동네로부터 가까이에 있는 그 마을 이름으로 장살미 저수지를 배경으로 잘 꾸며 놓은 “하늘물빛정원”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 할머니와 그 옆집에 사는 마을교회 집사님, 그리고 나의 아버지 어머니도 가까운데 있으면서도, 처음 보는 잘 꾸며진 물가라면서 무척 좋아들 하셨다.
며칠을 보내며 거의 상체만을 움직이시는 박 선생님은 전동 휠췌어에 몸을 싣고 가볼 하늘물빛정원을 그리워하고, 나는 테레비 아침의 마당에서《노년에 인생의 길을 묻다》라고 정진홍 선생님이 쓰신 글을 보면서, 돌아온 이틀 동안의 나들이를 정리할 수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 그것도 일흔이 넘으면, 나는 내가 신선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온갖 욕심도 없어지고 이런 저런 가슴앓이도 사라지고, 남모르게 품곤 했던 미움도 다 가실 줄 알았습니다. <중략> 욕심이 조금도 가시지 않았습니다. 가슴앓이도 삭지 않았습니다. 미움도 여전합니다. 고집은 신념으로 더 질겨졌습니다. 저리게 외롭습니다. 서글퍼집니다. 버림받았다는 느낌은 비단 내 마음에서 인 잔물결이거나 소용돌이가 아닙니다. <중략> 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바람처럼 물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흔을 살고 싶습니다.”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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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 공동체 가족
조창봉 이은주 김복순 지명수
권희숙 채경일 주송례 진영택
김정화 박소웅 박정임 라홍채
최성재 최영애 정무래 박종만
박병민 진선미 박한솔 박진솔
* 여러 가지의 육신과 정신적 아픔 중에 있는 새터공동체 식구들의 건강한 몸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세요.
* 2011년 4월 11-12일에 새터공동체에서 남도여행을 금산. 무주. 남원(광한루). 구레(산동면.쌍계사 벚꽃길). 하동(화개장터.하동솔밭). 광양. 남해. 사천(삼천포). 추부(하늘물빛정원) 등을 다녀왔습니다. 도움을 주신 제일관광 장수환 선생님과 구례온당충신교회 신일태 전도사님께 감사드립니다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금성교회.충전교회.신평교회.최선희.정무래.최영애.라홍채.박종만.이은주.최성재.대덕교회.김기홍.양오석.임정순.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3인).채윤기(박현실).김복순.신건태.수영교회.대한적십자사금산군추부봉사회(쎄븐미용실.강정숙.성삼순.손연화외1인.3회).유성반석교회.진명구.이원교회.중부대학교노인복지학과(수영교회.박정훈외8인).사랑의쌀나눔공동체(장진성.조성옥).하재호(남상기).전해견.김용환(최정숙).윤진규(윤수운).김경주(박현이).살림교회(박상용외11인).주식회사EG(이광형).영도교회8.9여전도회(김영권.이성우.김인숙외8인).오정교회(최세영).대전덕명로뎀교회(이관호외1인),최정규(서문종선.6회).한자녀더갖기운동연합(유근숙외1인).금산군모란회(5인).김지영(4회).금산군청사회복지과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