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사성제경佛說四聖諦經
후한안식국 삼장안세고역後漢安息國 三藏安世高譯
해동사문 지오 편역海東沙門 至晤 編譯
사제四諦 해설解說2-2
불교에서 십이 연기설은 인간에게 왜 생사의 괴로움(苦蘊)이 발생(集)하며, 또 멸할 수 있는가를 밝혀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완비된 이론이다. 이러한 고온의 집과 멸에 입각해서 베풀어진 본격적인 실천적 교설을 학계에서는 사성제 또는 사제(四諦)의 교설이라고 보고 있다. 사트야(satya)라는 말은 ‘제(諦)’로 읽는데, 사실(fact)ㆍ진실ㆍ진리(truth) 등을 나타낸다. 그러한 제로서 고ㆍ집ㆍ멸ㆍ도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 데에서 사성제(catur-āryasatya)라고 부르는 것이다. “네 가지 성제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괴로움(苦), 괴로움의 집(苦集), 괴로움의 멸(苦滅),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도(苦滅道)의 네 가지 성제가 곧 그것이다.(《잡아함》 권15). “뭇 교설은 사성제로 집약된다”(《중아함》 권7, 《상적유경(象跡喩經)》)라고 일컸는다.
① 고성제에 대해서 경전은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미운 것과 만나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중아함》 권7, 《분별성제경(分別聖諦經)》). 십이연기설에서도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괴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명에서 시작한 연기는 생ㆍ로ㆍ사에 귀결되고 있으며, 그것을 ‘커다란 하나의 고온(純大苦蘊)’이라고 다시 요약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성제는 바로 이 명백한 사실을 바로 가리키고 있다.
② 집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었는가의 원인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경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베풀어져 있는데 주로 오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곧 오온에 대한 ‘애탐(愛貪, chanda-āga)’(《잡아함》 권2)이라든가 또는 ‘재생(再生)을 초래하고(punar-bhāvika) 희탐(喜貪, nandiāga)을 수반하고 이곳저곳에 낙착(樂着, abhinandin)하는 애(愛, tṛṣṇā)’(《잡아함》 권3)라고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 중의 색은 애희(愛喜)가 그 집이고, 수ㆍ상ㆍ행은 촉이, 식은 명색이 그 집이라고 따로따로 설해져 있는 경우도 있다(《잡아함》 권2). 괴로움의 집에 대해 이렇게 오온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음은 앞서 고성제에서 여덟 가지 괴로움을 오취온으로 요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집이라는 개념의 최승(最勝)한 뜻은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찾아야 한다. 집(集, samudaya)이라는 술어는 원래는 ‘결합하여(sam-) 상승하다(udaya)’는 뜻으로서 ‘모으다(collect)’는 뜻이 아니다. ‘집기(集起)’라고 번역함이 좋은 말이다. 따라서 연기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기에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일어난 것임을 설한 다음 ‘그렇게 해서 오온의 집이 있다’고 맺고 있는 것이다. 또, 그것은 고성제와 함께 십이연기설의 유전문(流轉門)에 입각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③ 멸성제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입장이다. 경전에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되고 있다. 오온의 집이 애탐(愛貪) 등으로 설명되면, 멸제는 그것을 멸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멸은 무명의 멸과 함께 사라진다고 설한 다음 ‘그렇게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滅)이 있다’고 맺어져 있다. ‘멸(滅, nirodha)’의 원어 또한 ‘멸하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 분명하다면, 무명의 멸진(滅盡)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④ 도성제는 경전에 팔정도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견ㆍ정사유ㆍ정어ㆍ정업ㆍ정명ㆍ정정진ㆍ정념ㆍ정정의 여덟 가지 실천 사항을 가리킨다. 정견(正見, samyag-ḍṛṣṭi)은 바르게 본다는 뜻으로서, 경전에는 사제를 닦을 때 ‘법을 잘 결택(決擇)하여 관찰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중아함》 권7, 《분별성제경》). 정사유(samyag-saṃkalpa)는 바르게 사유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으로서, ‘생각할 바(可念)와 생각 안할 바(不可念)를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어(samyag-vāc)와 정업(samyag-karmānta)은 각각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일하는 것인데, 전자는 ‘네 가지 선한 구업(口業)’이요, 후자는 ‘세 가지 선한 신업(身業)’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중아함》 권7, 《분별성제경》).
정어와 정업이 이렇게 각각 구업과 신업에 해당된다면 위의 정사유는 의업(意業)에 통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정명(samyag-ājīva)은 바르게 생활하는 것으로서,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정정진(samyag-vyāyāma)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정념(samyag-smṛti)은 바르게 기억하는 것인데,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정정(samyag-samādhi)은 바르게 집중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인데, 삼매(三昧)라는 음역어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 이상이 대개 경전에서 볼 수 있는 팔정도의 설명인데, 괴로움의 멸에 이르려면 이러한 팔정도가 행해져야만 할 이유는 괴로움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사의 괴로움도 실체가 없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무명 망념에서 일어난 괴로움은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集諦). 괴로움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있으므로 그것을 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滅諦).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를 똑바로 응시하고(정견) 그에 입각해서 새로운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면서(정사유-정념) 마음을 진리에 계합(契合)하도록 집중(정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경전에도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해 뜨기 전에 밝음이 비치듯이 괴로움의 사라짐에는 먼저 정견이 나고, 이 정견이 정사유 내지 정정을 일으키며, 정정이 일어남으로써 마음의 해탈이 있게 된다”(《잡아함》 권28).
따라서 팔정도에서 수행상으로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은 정견과 정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수행법의 주축이 되는 (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a)의 병수(竝修)라든지 정(定, samādhi)과 혜(慧, prajñā)의 쌍수(雙修)와 같은 것도 이 정견, 정정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불교의 업설은 선악을 결택하여 현실의 괴로움을 타개하려는 강력한 실천윤리임을 알 수 있다. 이 업설은 아직도 생사윤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라도 즐거운 과보를 초래코자 하는 것으로서, 사후 하늘(天)에 생(生)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있다. 이에 반해 사제팔정도는 선악의 근저에 있는 ‘정사(正邪)’를 문제로 대두시켜, 정사의 결택을 통해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해탈에의 길이다. 따라서 범속한 세간(世間, 生死)을 벗어나는 ‘신성한’ 진리라고 해서 사제를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성제가 설해짐으로써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론과 실천의 완비를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종교는 ‘신성한 것과의 만남’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성스러운 것을 특질의 하나로 삼고 있는데,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러한 신성성(神聖性)을 띠게 되었다. 석가불이 녹야원에서 사성제를 설한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함은 사성제가 이렇게 교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성제는 불교의 핵심 교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