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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노인문제의 지평과 바람직한 인간상
- <문학 속에 나타난 노인의 삶과 나이먹기>에 대하여 -
권대근
대신대학원대학교 문학언어치료학 전공 주임교수
내 손에 잡은 것이 많아서 손이 아픕니다.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온몸을 아프게 하고/ 매일 해결해야 하는 일 땜에 내 시간도 없이 살다가/ 평생 바쁘게 걸어 왔으니 다리도 아풉니다. /내가 힘들고 외로워질 때 내 얘길 조금만 들어 준다면/ 어느 날 갑자기 세월에 한복판에 덩그러니 혼자 있진 않겠죠/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한마디, 지친 나를 안아 주면서/ 사 랑 한 다 정말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해준다면/ 나는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 할 겁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저 높은 곳에 함께 가야 할 사람 그대뿐입니다.
- 노사연의 "바램" 가사 중에서 -
◈ 로그인-열며
문학은 인간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무심코 흥얼거리는 평범한 노래의 가사를 비롯하여 시인이나 작가가 쓴 명작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우리의 친근한 반려요 정신문화의 정화이다. 일찍이 영국 사람들이 세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문학은 인간의 가치 있는 체험을 형상화한 언어예술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치 있는 체험’에는 진실하고 아름다운 삶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 서리어 있다. 문학이 가치있는 삶을 형상화한다고 하는 그 ‘가치’란 어떤 것인가. 문학은 ‘가치 있는 삶’ 곧 참되고 선하고 성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삶과 무관한 것이다. 정보 혁명기인 이 시대 사람들은 실용적 도구적인 것만을 가치로 여기는 데서 바람직한 삶의 본질을 훼손하기 쉽다.이러한 현실에서 정영자 교수님이 노인의 삶과 나이먹기에 대한 성찰을 담은 논고를 발표하는 것은 크나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모든 문학은 그 시대 사람들을 향하여, 그 시대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위대한 작품은 그 시대 너머를 향하여 무엇인가를 말한다. 그러나 문학은 말한다기보다 보여준다. 발제자는 여러 작가가 노인에 대하여 품은 생각이나 사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우리 자신의 노인에 대한 감정을 우리 스스로 확인해 보게 한다. 여기에 제시되고 인용된 것은 다른 사람이 경험한 내용이요, 이야기이면서 앞으로 우리 자신이 겪을 경험이요 이야기이기에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다. 가령, 노인의 삶에 대하여 읽고 체험한다고 하여 우리가 곧 선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체험이 우리들 삶의 행로에 작은 빛을 던져 주는 것만은 사실이다.교훈성과 치유성을 겨냥하는 문학의 목적성이 이를 증명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문학 속의 인간상은 다양한 계층,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되고 다루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며, 주변부이며, 타자이기도 한 노인 화자에 대한 연구는 그 타당성을 갖는다.
정영자 교수님의 발표문은 8장으로 구성되어 문학 속에 나타난 노인의 삶과 나이먹기에 대한 중요 개념과 이론을 소개하면서도 이를 동서양으로 구분하여 주제와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여 폭넓게 정리하고 있어 문학 속에 나타난 노인의 삶과 바람직한 인간상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서론부에 나이 든다는 것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피기 위해 10여 명의 인물을 끌어들이는 등 교수님은 나이듦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정리해 주셨는데, 이를 통해 본론부의 전체 흐름을 수월하게 유추하여 살펴볼 수 있었다. 폭넓고 치밀한 조사와 연구(각주17개, 참고문헌 15권)를 통하여 논제를 정확히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영자 교수님의 발제는 매우 훌륭한 결과물이라 생각하며, 경의를 표한다. 발표문에 대한 논평과 궁금한 것을 질문하는 것으로 토론을 대신하겠다.
◈ 발제문에 대한 논평
1.
문학작품 속에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인간상을 만날 수 있다. 그 수많은 인물 가운데에는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과 매우 유사하거나, 우리가 늘 만나기를 염원하여 마지않는 그런 인간상이 있다. 신화문학론자 노스롭 프라이의 말대로, 문학이란 사람이 살고싶어하는 그런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견해와, 인간의 환경과 운명과 유산에 대한 견해와, 나아가 인간이 건설하려고 앴는 그 같은 세게에 대한 인간의 견해를 담은 ‘관심의 언어’다. 그렇다면 문학에 그려진 인간상은 현실과 꿈의 변증법적 긴장의 지양 내지는 초월의 좌표에 자리하여 있지 않은가?토론자는 정영자 교수의 발제문을 읽고 나서 토론자는, 모두에 옮겨놓은 노사연의 ‘바램’이란 노래가사 중에서도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는 대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발제자의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이 논고에서 발제자는 노인이란 인간의 노화과정에서 나타나는 생리적, 심리적, 환경적 행동의 변화가 상호작용하는 복합형태의 과정 중에 있는 사람, 즉 생리적, 신체적 기능의 감퇴 및 심리적인 변화가 일어나 자기유지 기능과 사회적 기능이 약화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노년기는 성숙한 일생의 정리단계, 그리고 인생발달의 통합단계에 해당된다고 한다. 발제자는 노년기를 ‘지난 시간들이 축적되어 형성한, 한 인생의 총체성이 완성되는 아름답고 의미 깊은 대단원’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제자는 노인과 노년기에 대한 개념을 규정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노년의 저 깊고 견고한 주름, 지난 시간에 의하여 그 부드러움을 박탈당한 저 메마른 얼굴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표정은 무엇인가. 그들의 저 무력하고 완강한 침묵, 이 세상에 대하여 일체의 발언권을 박탈당한 듯한, 저 ‘벙어리 됨’ 속에는 어떤 호소가 숨어 있는가.‘ 이어 발제자는 1970년에 보부아르가 쓴 <노년>이란 책을 소개하면서, 이 책이 노년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을 통열하게 비판했다고 적고 있다. 보부아르는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이란 부제를 통하여, 노인도 하나의 인간존재로 가치를 인정받고 개인적, 사회적인 해결책이 모색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발제자는 서론부 첫 단락을 논문의 정석대로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논리 진행 방법에 있어서 매우 체계적이란 말이다. 발제문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내용으로부터 시작해서 특수하고 자세한 것으로 발전해나가는 설명형 방식과 논지나 중요한 부속 주제들을 증명하기 위하여 증거들을 논리적으로 펼쳐나가는 논증형으로 전개되고 있어서 접근성이 있다. 전제나 주장에서 시작, 증거를 나열하고 결론을 내림으로 앞의 주장이나 가설을 확실하게 했다는 점에서 이 논고의 구성은 매우 효과적이다. 두 방법을 교차 적용시키면서 논지를 잘 증명해 나간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라 하겠다.
발제자는 발제문의 서두를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하는데, 세월이 가면 늙기 마련이고, 누구도 나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전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늙는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고, 육체적인 노화 외에 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동반한다. 경쟁력의 저하 내지는 상실이라는 치명적인 의미를 내포한다.’고 하면서, ‘우리 사회가 온통 젊음만을 찾고 나이 듦은 곧 낡은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나이 든다는 건 선배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주연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것과 동의어가 되곤 한다.’고 우리 사회의 노인에 대한 부정적 경향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노인이란 단어가 인생의 ‘루저’와 동의어가 되어가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다음 단락에서는 실제로 작가들이 느끼는 노년의 삶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여기서도 발제자는 노년기적 삶에 대한 서양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인용하면서도 통시적인 접근방법을 놓치지 않는다. 시간의 순서대로 인용을 한다는 점이다. 제일 먼저 인용되는 작가는 기원전 그리스의 희극작가 메난드로스다. 여기서 노인기를 특징하는 단어로 ‘괴로운’, ‘허다한 고뇌와 비애’ 등을 뽑아내고, 톨스토이는 기력을 잃기 시작할 무렵에 역설로 스스로를 위안했다고 전하고 있다. "인류의 정신적인 진보는 노인들 덕분에 이루어졌다. 노인들은 보다 선량하고 보다 지혜롭다“고 한 말을 소개했다. 이어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으로 세상을 풍미한 여성해방운동가이자 작가인 시몬 드 보부아르의 <노인>을 소개하면서, 이제 노년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어가는 문학이 창작되어져야 하는 시기에 이르렀음을 자연스럽게 끌어내고 있다.
발제자는 메나드로스나 보부아르 외에도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 로저 로젠블라트의 <나의 듦의 법칙> 그리고 일본의 소노 아야꼬의 <계로록>, 싯다르타, 우리나의 <경로헌장>, <노인복지법>, 소크라테스, 플라톤, 프루스트의 노인에 대해 언급한 말을 소개하고 있다. 서론부 마지막 부분에서 발제자는 “여하튼 미덕에 의해서건 또는 타락에 의해서건, 노인들은 인간이라는 범주 밖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노인들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해나가기 위하여 필요 불가결하다고 판단되는 최소한의 것조차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거절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노인 추방을 너무 멀리까지 밀고 나가, 결국에는 그것이 우리들 자신을 거역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프루스트는 “모든 현실 중에서 순수하게 추상적인 개념을 가장 오랫동안 간직하는 현실은 아마 노년기일 것이다”라고 정확하게 평가한 바 있다고 밝히고, 발제자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생각한다. 사람들 중 대다수는 노인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큰 변화를 앞당겨 사전에 직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늙는다는 것보다 더 자명하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없다.는 보부아르의 진술을 끝으로 전개예고로서 ‘노인은 외양이 왜소하고 빈곤해져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변함없이 인격체를 가진 하나의 인간이다.’는 입장을 취한다. 발제자는 서론부의 기능과 역할을 1.에 충실하게 담아내어 앞으로 전개될 2,와 1,의 연결 관계가 더 명확하게 드러날 것 같다.
2.
우리가 사랑하며 흠모하여 마지않는 이상적인 인간상, 특히 노인상은 어떠해야 하는가. 노인기란 어떤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삶과 역사에 어떤 의미를 띠고 우리 앞에 다가 오는가. 노인에 대한 앎과 믿음과 삶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에 대한 치열한 물음과 탐구의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빛나는 삶과 역사의 지표에 다가갈 수 있게 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자유 사회의 독자들은 문학 작품을 통하여 수많은 인간형, 인간상과 대면하는 것은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 인간상, 특히 부정적인 노인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기에 발제자가 2,에서 ‘인간적인 노인 만들기의 사회적 책무와 노인의 자각’에 대해 설명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하겠다.
지금은 21세기다. 이 시대의 문화는 많은 변혁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 같은 새 문화에 대하여 미래학자들은 낙관적 혹은 비관적 전망을 내어 놓고 있다. 21세기 슈퍼하이웨이 시대는 농경 사회적 빈곤, 무지, 미신, 불신, 신분, 차별, 무력에 의한 영토 분쟁, 사업사회의 인구, 자원, 핵 전쟁, 노인문제 등이 극복되리라는 것은 낙관론자들의 예견이다. 그러나 비관론자들의 견해는 다르다. 기계적인 선택, 자기 결단력의 약화와 자기 정체성의 상실 등 정보화 사회의 역기능 현상들은 우려치 않을 수 없는 재앙이 되리라는 것이다. 21세기형 이간에게는 정의적 대상에 대한 애착이나 증오, 존경, 무한, 영원, 신비, 초월에 대한 관심이 크게 약화될 것이라 한다. 밀레니엄 전환기인 지금 이런 현상은 이미 나타나고 잇으며, 따라서 인간에게 진실로 소중한 우정, 의리, 정의, 양심, 사랑과 같은 본질적 가치는 소실되고, 기술적 전략적 기교가 인간 관계를 지배하는 역천적 문명사가 펼쳐지고 있다.
이 시대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원색적 이기주의자가 되어, 인간의 도덕성에 호소하던 공동선에 대한 기대는 무참하게 무너져간다. 그래서 사회정의는 인간의 도덕성이 아닌 제도의 개혁을 통해 서만 이루어질 수 잇다는 통념이 지배하게 되었다. 사회 철학자 라인 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이 점을 우려했다. 그래서 현대의 사회학적 지성은 이 시대 사람들의 도덕성을 ‘주고받기식’ 계발적 이기주의의 수준에서 인식한다. 자기에게 주어질 반대급부에 걸맞게만 베푸는 것이 현대인의 도덕적 수준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속성 중 더할 나이 없이 소중한 영성지수에 대하여 무심한 것이 이 시대 문명사의 병폐를 낳는 요인이다. 발제문은 이러한 여러 속성을 드러내는 노인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2.는 세익스피어의 <리어왕>, 릴케의 <말테의 수기>, 보부아르의 <제2의 성> 등 예시를 통하여, 발제자는 인간적인 노년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인 노력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단계로 성인 각자의 인간 조건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문학 작품 인용에 이어서 발제자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4 노인 실태 조사’를 통해 우리나라 노인복지의 수준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음을 밝힌다. 발제자는 예전에는 노인 수명이 짧아 자녀들의 부모 부양 기간이 길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무리 자녀들이 효자 효녀라 해도 부모의 은퇴 후 30년, 40년을 봉양하길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다. 더 심각한 것은 OECD 국가 가운데 한국이 ‘노인 자살률 1위’, ‘노인 빈곤율 1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발제자는 우리 사회를 이만한 수준으로 성장시킨 공로자들이 지금의 노인 세대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발제자는 우리 사회가 그들이 여생을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결론으로 놓고 있다. 발제문 2.에서는 이상적인 노인상 등에 대하여 다양한 작품과 자료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발제문이 인간적인 노인 만들기 부분을 이해하는 데 더욱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3.4.5.6.은 우리나라 소설에 나타난 노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노인은 문학의 작가, 작중 인물, 독자 구실을 한다. 또 노인은 작가로서 문학작품을 창작하고, 작품 속의 인물로 등장하여 말을 하고 일정한 행동 특성을 보여주며, 다른 사람이 쓴 독자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문학작품에 관한 한 모든 논의에는 노인에 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설화나 아동문학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신이나 동식물이라 해도, 거기에 표현되는 것은 인간의 감정, 모습, 이야기다. 인간의 감정, 모습, 이야기를 닮았다는 점에서, 문학은 역사와 매우 닮았다. 그러나 문학 작품 속의 인물은 작가의 창조적 상상력이 빚은 허구 속의 인간이므로, 실재하는 역사 속의 인물과 다르다. 문학 작품의 인물은 전통과 관습, 민족적 집단 무의식의 잔영과 시대 사회 인간의 전형성이 통합된 상상력의 소산이다. 이 같은 인물이 독특한 개성과 함께 인류적 보편성, 시대를 뛰어넘는 항구성을 뛸 때 독자인 우리 세계인 대다수에게 오래도록 공감을 얻는다.
발제자는 3.4.5.6.에서 문학사의 긴 흐름 위에서, 명멸해간 주요 인물들의 인간상, 특히 노인들의 삶을 중심으로 하여 문학과 노인의 문제를 펼치고 있다. 3.은 이청준 소설에 나타난 노인의 갈등과 화해에 대한 글이다. 발제자는 이청준의 <눈길>에 나타난 노인은 한국 모성의 아픔과 희생, 이청준의 특성인 손스레치는 어머니의 존재적 공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노모의 사랑을 애써 외면하던 주인공 '나'가 그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리는, 즉 고향에 대해 그리움과 함께 증오감을 갖고 있는 주인공이 고향을 방문하게 되고, 고향에서의 특수한 체험을 통해 인간적 화해에 도달하게 되는 귀향형 소설의 구조로 되어 있다. 어머니와 나의 갈등의 상징이자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배려의 매개체로 옷궤가 등장한다. '옷궤'는 남의 집이 되어버린 고향집에서, 아들에게 여전히 그 집을 지키고 있는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어머니'의 최소한의 배려이자, 자존심이라는 것이 발제자의 분석이다. 한편 소설 속에서 아내는 나와 어머니의 갈등을 해결하여 화해로 이끄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 '아내'와 '나'의 갈등은 사실, 소설 속에서 문제적 갈등이라기보다는 '나'를 어머니와의 화해로 이끌기 위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와 발생하는 갈등이다. 다시 말하면 발제자는 이 소설 속에서 어머니와 나의 갈등이 주 갈등이며 이 갈등의 사이에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는 중개자로서 아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발제자는 이청준 소설의 특징은 외형적으로 눈에 보이는 현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감추어진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이 작품 역시 끊임없는 어머니의 사랑과 그것을 애써 외면하려는 아들 사이의 갈등과 그 갈등의 해소 과정, 즉 인간적 화해에 도달하게 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추어진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글은 이청준이 등단한 지 40년이 되는 해에 발표된 소설집 <꽃지고 강물 흘러>에 대한 평가다. 수록된 소설 6편중에서 이제 받아들이고 싶고 용서하고 싶다는 그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표제작 <꽃지고 강물 흘러>는 어머니의 죽음을 다룬 소설 <축제>(1996년)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기억을 그린 단편 소설 <눈길>(1977년)의 후속편이자 마무리편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홀로 남은 형수에 대한 원망과 미움의 씻김 이야기이다. “1인칭 시점으로 쓰여진 소설에서 주인공 나는 말년에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타박했던 형수에 대한 미움과 풀리지 않는 응어리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고향산밭에서 형수로부터 어머니와 함께 콩밭걷이를 하고 있었다는 어머니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의 말을 듣는다. 주인공은 형수에게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형상을 찾아내고, 형수에게 품고 있던 원망을 풀어낸다. 발제자는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는 이 작품의 주인공에게서 바로 소설을 통해 이제 모든 것을 씻어내고 싶다는 작가의 모습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발제자고 말한다.
발제자는 수록된 소설 6편의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법한 낮고 누추한 사람이며, 소설이 이들을 따뜻하게 품어내고 있다는 점도 이 용서와 씻김의 연장선에 서있다고 지적하였다. “어머니의 집을 형수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섬세하지만 끈질긴 갈등이 이어진 끝에 화자는 ‘형수의 뒷모습에 옛날 노인(=어머니)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안쓰럽고 측은해 왔다’고 토로한다.” 형수가 어머니의 자리에 올라서고, 마침내 화해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발제자는 화해를 강조하고 있다. 인간에게 모성이란 개인의 경험을 통해 습득된 것이기도 하지만 이에 앞서 본능적으로 내재한 것이라는, 오래된 믿음의 뿌리는 실로 거대하다. 더구나 식민지, 전쟁, 분단 등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 모성은 사회구성원을 하나로 결집시켜주는 상징적 공간으로 작동한다. 모성은 상실한 국가를 대신하는 민족의 메타포였으며, 훼손된 국가와 개인을 감싸 안는 대모신이기도 하다. 이런 모성의 의미 확장은 근대 민국 국가 기획에서 여성이 적극적으로 생산, 향유되는 방식에 의해서만 여성은 근대 민족 국가로 통합되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여성은 주변화되거나 배제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식민지 근대화라는 특수한 경험을 거치며 현대 국가를 연 시기에 당대 모성이 발현되는 지점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마찬가지로 모성이 민족의 메타포였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문학이라는 특수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개인의 경험, 여성적 정체성과 갈등하며 교합하는 모성적 공간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4.는 최인호의 소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에 나타난 모성의 절대성을 다룬 글이다. 발제자는 이 작품의 한 부분을 인용하고, 이렇게 적고 있다. “어머니도 사람이다. 때문에 끝없는 희생을 강요하는 억압을 어머니란 대명사에 굴레 씌우지 말아야 된다. 그 동안 보수 전통사회에서 강요된 어머니란 이름이 여성을 죽이고 그들의 재능을 죽인 것이라고 여성학에서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혼돈의 시대에 그러한 이름이 하나의 종교로 설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나마 세상을 위해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작가의 적나라한 증언과 같은 고백을 통하여 한 어머니의 억척같은 삶이, 주책이 그래도 한 가정을 이루어 왔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어머니의 존재를 인식하고 변화된 의식으로 어머니를 이해해야 될 것이다.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해서이다.”
발제자는 소설에 등장하는 어머니가 일흔이 가까이 돼 부쩍 멋을 냈다고 한다. “작가는 그것이 외로움에서 비롯됐음을 눈치챈다. 그러나 어머니가 화장을 하고 노인학교에 나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의 어머니는 열여덟살에 한 살 위였던 아버지와 결혼해 9남매를 낳아 그 중 셋을 잃고 3남3녀를 길렀다. 변호사였던 아버지가 마흔여덟살에 세상을 뜬 뒤 어머니는 하숙을 쳐가며 아이들을 키웠다. 여든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수년 동안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심하게 처진 눈꺼풀 때문에 앞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런 어머니의 다섯째였던 저자는 "자녀들이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불평을 노인성 히스테리로만 여겼다. 작가는 나는 비겁하게도 어머니를 볼 수 없고, 들리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감옥에 가둬두고, 좋은 옷 입히고 매 끼 고기반찬에 맛있는 식사를 드리고 있는데 무슨 불평이 많은가, 하고 산 채로 고려장시키는 고문으로 어머니를 서서히 죽이고 있었던 형리(刑吏)였던 것이다라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라고 적었다.
아무리 늙고 병들고 주책스럽다 해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은 작가뿐이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마찬가지라는 게 발제자의 생각이다. 작가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 싶은 핵심은 어머니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역할을 맡은 여자는 죽지만 어머니는 창세기 이래로 한 번도 죽지 않은 영원의 모상(母像)으로 신격화하고 있다. 작가는 글을 읽고 교정하면서 많이도 울었다고 한다. 새삼스러운 그리움때문이 아니라 살아생전 어머니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슬픔이 솟구쳐 올라왔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발제자는 “이 시대 <비정한 자식들의 죄>를 거침없이 증언하고 있는 그의 글은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며 가족이 제자리를 잃어가는 이 시대에 들려주는 외침이며 깨달음으로 가는 참회록이다.”라고 단언한다. 발제자는 작가의 여성적 삶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에 다시 한번 더 소개함으로써 노인문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이 작품은 노인문제를 제기하고 일깨우는 데 매우 적절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한승원의 소설집『잠수거미』( 문이당, 2004)에 실려 있는 <버들댁>은 자식을 위하여 희생하는 전형적인 이 땅의 여성노인이라는 것이 발제자의 판단이다. 아들에 이어 손자대까지의 고난의 여성을 대변하고 있는 소설이다. 발제자는 이 지점에서 “여성노인의 삶에도 자신은 없고 자손을 위한 헌신적인 노인만 있고 한승원의 소설에도 자신을 죽이며 손자를 감싸는 이타적 여성노인만 있지만 최인호의 소설에 이르면 조금씩 노인의 자기중심이 확연히 묘사되고 있다. 그 것은 시대의 변화일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한다. 『절반의 실패』, 『혼자 눈뜨는 아침』의 작가인 이경자는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남성중심, 가부장적 제도에 대한 문제를 주제로 한 페미니즘 소설을 발표하였다. 발제자는 이경자와 박완서를 비교한다. 이경자가 시어머니와 갈등하는 며느리의 입장에서 본 여성해방의 관점이라고 말한다면, 박완서는 여성노인의 삶의 부분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는 관점이다.
발제자는 ‘박완서 소설의 노인’편에서, 노년문학에서 박완서의 주인공 세대는 억척어멈의 딸들임을 밝힌다 “이들은 <억척어멈>의 이중성과 가족의 냉혹한 실체를 꿰뚫어 보는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은 <억척어멈>세대와 달리 매력적인 남성과 우연한 만남을 현실화하기도 하고 (<마른 꽃>), 거리낌없이 재혼함으로써 노후에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음을 당당하게 보여준다.(<그리움을 위하여>)” 그리고 발제자는 박완서의 연륜은 늙음에 대한 막연하고도 그릇된 공식을 깨뜨린다고 주장한다. 박완서 소설은 인간은 어느 날 갑자기 늙는 것이 아니라 “늙어가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발제자는 “그의 소설은 인간의 감정이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지거나 변질될 수 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박완서는 젊은이와 똑같이 온갖 감정이 고스란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나이와 체면이라는 허위적 의식에 의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감추어야 하는 인생에 대한 재발견을 시도하면서 인생의 황혼기에 맛보는 삶의 숨겨진 진실을 다룬다.”고 적고 있다.
발제자는 박완서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통해 노인문제에 남달리 민감했고, 곧 그것은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진저리치기’와 ‘연민’이라는 상호 모순된 심리상태는 노인에 대한 작가적 시각의 이중성으로 드러난다고 했고, 박완서의 소설에는 여성 자아가 보다 관계적이고 순환적인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는 ‘어머니와 딸’이라는 구체적인 관계를 형상화하는데서 알 수 있다고 썼다. 그녀에게 있어 ‘어머니와 딸’이라는 관계 모티프는 끊임없는 공생적 융합의 과정으로 드러나고, 이것은 흔히 자전적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친․시어머니를 통해 체험한 여성노인의 실체를 작품에 투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발제자는 결과를 종합해 볼 때 박완서 소설에는 먼저 현대 산업사회를 사는 노인의 총체적 위기의식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자식들과의 불화나 괴리감으로 인한 노인의 소외현상이 나타나며, 또한 그러한 위기의식을 절감하고 노년을 수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표출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여성노인이 좀 더 애착을 갖는 것은 가족이다. 또한 병든 노인은 가족 해체의 원인 또는 장치로 드러난다. 특히 여성노인의 치매증은 가족 해체의 극한적 단서를 제공한다.” 지점에서 노인문제를 극명하게 부각시킨 점이 논리 전개상, 구성상 매우 돋보인다.
7.
‘열정적인 삶과 장수’ 에서는 김동리 소설의 에를 들면서, 발제자는 노인들의 삶이 시간의 거부로부터 시간의 수용으로 나아간다는 특장을 지닌다고 밝히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시간과의 투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시간과의 화해에 이르는 긴 여정임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조회경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였다. 발제자는 노년기가 되면 신체적 능력이 쇠퇴되어 일상생활에 있어서 배우자․자녀 등 타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사회적으로 역할이 상실되는 퇴직 혹은 배우자의 사별 등으로 사회적 지위 및 역할이 축소되고 심리적으로도 소외, 고독 등을 느끼기 쉽다. 따라서 노년기는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으로 위축되어 어느 시기보다도 가족관계가 중요한 때이라고 말한다. 더하여 현대사회는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퇴직 후 가정 내에서 노인이 지내야 되는 시간은 많아지게 되므로 노년기의 원만한 가족관계는 노인의 삶의 질, 행복한 노후생활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이후 이런 관점에서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봉사적인 삶의 모습, 톨스토이의 열정적인 삶의 양태를 바람직한 노년의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 발제자는 또 르누아르에 대해 언급한다. “르누아르는 60세 때부터 반신 불수였다. 걸을 수 없었고 손이 마비되었다. 그러나 그는 78세에 죽을 때까지 그림을 계속 그렸다. 사람들은 그를 위해 팔레트에 물감을 짜주었고 손목에 붓을 붙잡아 매주었다. 그러면 그는 그 붓을 골무로 지탱하고 팔로 붓을 움직여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데 손만 필요한 것은 아니오”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들로 산책을 했고, 경사가 너무 급할 때는 사람들의 팔을 빌려 더 좋은 장소로 옮겼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작업을 했으며 왕성한 창작력을 변함없이 유지했다. 그는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고 그것이 커다란 기쁨이었다.“다는 것이다.
괴테의 이야기도 소개한다. “72세에 마리엔바트에서 17세였던 매혹적인 울리케에게 반한 괴테의 행동은 그리 신중하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 만난 1821년에 그는 그녀와 이야기하고 꽃을 선물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 다음 해부터는 거의 모든 시간을 그녀와 함께 지냈고 자신의 모든 욕망을 알릴 방법을 이리저리 궁리하기 시작했다. “나의 귀여운 소녀야, 너는 만족스럽니?”하고 걱정스럽게 묻곤 했다. 그 사이에 그는 폴란드 피아니스트인 쥐마노브스카 부인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유명하고 우아하고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곧바로 울리케에게로 돌아왔다. “그녀는 내게 백가지 다양한 모습으로입니다. 매번 새로운 기쁨을 줍니다”라고 소녀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열정은 커져서 그녀와의 결혼을 원했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그리고 발제자는 말미가 가서 앙드레 모루아의 『나이 드는 기술』(나무생각)을 소개하면서, "나이 드는 기술이란 희망을 유지하는 기술"이라는 단순 명료한 조언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 외에도 열정적인 삶을 산 사람들을 소개한다. “공자는 73세에 죽는 날까지 제자를 가르치고 루빈슈타인은 88세까지 피아노 연주, 98세에 죽은 버트란느 러셀은 80세가 넘어서도 저술 활동을 했다. 미케란젤로는 72~89세까지 성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고 벤자민 프랭클린은 65세에 자서전을 시작하여 82세에 완성하고 81세에 벤자민 프랭클린은 헌법회의에서 서로 견해가 다른 각 주 대표들을 능숙한 솜씨로 중재하여 미국 헌법을 탄생시킨다. 65세의 윈스턴 처칠은 고령으로 영국 수상이 되어 히틀러와 대결하였고 84세에 자신이 그린 62점의 그림을 전시한다. 윤선도(尹善道)는 85세까지 시조를 짓는다. 68세에 올랐던 영의정 자리에서 86세의 조선조의 명재상인 황 희(黃喜)는 은퇴한다. 첼리스트인 파블로 카잘스는 96세에 사망하기 8년 전에도 여전히 연주활동을 한다.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이자 결혼하는 일곱 번째의 여성이된 자클린 로크는 1953년, 72세의 피카소의 연인이 된다. 커다랗고 짙은 눈망울을 지닌 지중해 풍의 여인이다. 자클린은 1961년 피카소와 비밀 결혼식을 올린다. 후에 서른 살의 젊은 여인이 어떻게 곧 여든이 되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냐는 말에 그녀는 말한다.”
언제나 창의력이 번뜩이는 불멸의 천재 달리는 미술활동에서뿐만이 아니라 여러 대중들 앞에서 벌이는 다양하고 극적인 해프닝으로도 더욱 유명한 화가이며 친구의 아내를 훔친 사랑으로 유명한 살바도르 달리, 색체의 마술사로 환상적인 그림, 현실세계를 해방하는 공중에 뜬 연인과 꽃다발을 즐겨 그렸던 마르코 샤갈, 재즈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유비블레이크, 신같은 왕에서 봉사하는 왕으로 변신한 엘리자베스 2세(89) 영국 여왕 등의 역동적인 삶이 전개된다. 그러면서 발제자는 “고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세대간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세대가 변하기를 바라기보다는 노인세대들이 이해를 통해서 그들을 인정하고 먼저 자신부터 변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마지막에는 ‘치열한 작가정신으로써의 노년의 청년문학을 제창하고 있는, 김명인의 말을 놓았다. 소주제를 뒷받침하기 많은 인물과 사례를 끌어들인 점을 높게 평가한다.
8.
‘나이 드는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청춘기는 꽤 여러 해 동안 지속된다. 인생은 바로 이런 청년들을 노인들로 만든다라고 말한 프루스트는 지적으로 시작한다. 발제자는 ‘나이 들어간다는 의미를 밝히기 위해, 늙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노년은 “위기가 아니라 성숙의 기회''라는 베티 프리던의 말은 일리가 있다.”고 언급한다. 노쇠하면 떠오르는 퇴보와 쇠퇴의 개념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라는 배경 안에서 만들어진 총체적 개념이기 때문에 노인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로 심도깊게 접근해야 한다고 하면서, 작가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외면할 수 없다고 하면서. 공자는 나이 70에 마음가는 대로 행동해도 도덕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하는 노인 예찬을 펼쳤다고 적었다.
발제자는 많은 학자와 예술가, 정치가들이 80고개를 넘겨서 인류역사상 기념비적인 대업(大業)을 이룩한 기록은 허다하다고 말한다. 흔히 창의력의 정점은 20대 후반에서 50대라고 하고 추상화 능력과 구성개념의 능력은 그 절정기가 50대에서 80대라고 한다면서, 발제자는 ‘한 사회의 균형 발전은 박력과 원숙함으로 조화된다. 국가․사회 발전은 40~50대의 박력과 50대 후반의 원숙한 힘의 조화에 의한 결정체에 의해 좌우되는 것 같다.’고 한다. 스스로 택한 길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인생의 선배로서 자신의 삶을 바람직한 길로 이끌어야 하고, 더 먼 노후 대책도 세우면서 여가 선용이나 봉사 활동을 통해 진정한 가정의 주체, 심장의 주인이 되는 새로운 노인상을 제시하고 있어 안도감이 든다.
결론적으로 발제자는 시몬 느 보부아르의 <노년>에 대한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작가들의 노년관도 이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발제자는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열정을 식히지 않고 사는 문제인데 “밥”의 문제와 직결되는 빈곤 노인의 나이먹기는 치욕이다. 가족과 사회가 책임지는 복지 건설이 중요한 시점이고 이것은 결국 사회문제로 귀결되며 이 전개는 작가의 몫으로 남는다.“며, 작가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한 작가에 거는 독자나 발제자의 기대는 현실을 얼마나 리얼하게 그려내느냐 하는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노년의 삶에 대해 얼마나 깊은 의식을 갖고 노인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고뇌하며, 나름의 해석을 도출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발제자는 끝으로 “노년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결론이 아니다. 하루살이처럼 많은 동물들은 쇠퇴기를 거치지 않고 번식 후에 죽는다. 그러나 인간은 서서히 쇠퇴한다. 과연 노년이란 어떤 것인가. 노년은 성인 시절 가혹한 삶의 조건에 대한 피난처가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노년을 슬프게 혹은 반항적으로 맞아들인다. 노년이란 죽음 자체보다 더 큰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폐품이나 쓰레기로서의 존재. 그러나 인간은 인간으로 대우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바람직한 방향의 노인사회의 목표 지점을 잊지 않는다. 발제자는 이 글을 통해 노년문학을 왜 쓰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한다. ‘노년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보다 인간다운 삶, 보다 행복한 노인들의 삶 또는 그 삶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에 쓴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 로그아웃 -질문
1.
교수님의 노인문제에 관한 발제문, 잘 읽었습니다. 여성소설가 박완서의 글 중에는 사회의 억압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이 강하게 노출되어 있는 작품이 적지 않습니다. 여기서의 ‘비판’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작가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인간성의 회복이지 정치적 참여가 아닙니다. 또 문학은 과거의 모습을 회상시켜 아련한 기억 속으로 몰아가는 낭만적 발상에 의해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정서적이라는 것은 현실을 무시한 상태에서 공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박완서는 <남자를 위해 만들어지는 여성>이란 수필에서 낮 시간대에 방송되는 여성을 위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은 글을 썼습니다.
이 수필에서 박완서는 여성을 위한다는 여성지에서조차 남성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여성들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초적인 기교, 인내의 미덕을 가르치기에만 급급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여성소설가 박완서는 생활 속에서 주체가 되어야 할 여성들이 전부 객체로 대상화되는 현실을 ‘매스컴’과 ‘여성지’의 예를 들어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여성작가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여성들을 발언하게 하면서 대화의 광장을 만들어 주는 건 좋은데, 여기 출연하는 대다수의 여성들이 쏟아놓은 이야기가 우물가에서 해도 눈총을 맞을 소리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여성들이 ‘매스컴’에 나갔으면, 크고 거창한 소리를 못하더라도 집의 울타리를 넘어야 할 타당성이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나누고 싶은 생활의 지혜라든지 듣는 사람이 같이 기뻐하거나 속상해 해 줄 공동의 문제, 사회성 같은 것이 있는 이야기를 널어놓으라는 것입니다. 여성작가는 오늘날 여성들이 여성으로서의 올바른 정체성도 없이 그저 온종일 밥만 먹고 생각하는 것이 미혼이면 적당한 남자를 잡는 것만 생각하고, 기혼이면 남편의 사랑을 놓치지 않도록 기교와 전략을 짜는 일이 전부인 양 나팔을 불어내는 꼴을 도저히 봐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녀는 이런 여성의 행동들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매스컴에 동의함이 적지 않음을 생각할 때, 여성 시간이 여성 모두를 애완동물로 퇴행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특히 박완서는 여성들의 잘못된 어법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습니다. 기혼 여성들이 텔레비전이나 신문 같은 데서 남편에 대해 최고급의 존대말을 쓴다는 것입니다. 남존여비가 철저했을 때에도 하지 않던 행동을 요즘 여성들이 한다는 것입니다. 존대말이 나쁠 건 없지만 동격의 관계에서 일방적인 존대말이 보편화된다는 건 자칫 동격의 관계를 귀천의 차이가 있는 관계로 자타에 인정시키는 일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이 수필은 여성들의 올바른 정체성을 촉구합니다. 자신을 주체로서 당당히 세워야 함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서 정체성은 보다 유동적, 다원적, 개인적, 자기 성찰적인 것이 되며, 변화와 혁신이 이루어지기 쉽게 됩니다. 물론 현대에도 정체성은 사회적이며, 타자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헤겔에서 미드에 이르는 정체성에 대한 이론가들은 개인의 정체성을 상호 인정의 맥락에서 설명하곤 했는데, 이것은 정체성이 마치 타자의 인정과 이 인정에 대한 자기 확증의 결합에 따라 형성되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대적인 정체성의 형태 또한 어느 정도 실재적이며 공정적인 것이며, 정체성은 여전히 개인을 구속하는 일련의 역할과 규범에 따라 좌우된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가능한 정체성과 새로운 정체성의 경계가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기는 하지만, 정체성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고정되어 있으며 제한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발제문을 읽고 우리 여성노인을 포함한 여성들이 올바른 정체성을 갖기를 희망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여성작가와 일반여성의 정체성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일부에서는 세상은 포스트모던 시대인데, 의식은 아직도 조선에 머무르고 있다는 등, 미성숙한 국민의 의식을 질타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여성 정체성 바로 세우기는 실제로 현실 속에서 갈등과 충돌을 가져와 삶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세기말이 지나고 새 세기가 지나고 있지만 여성의 삶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실감하게 됩니다. 20세기를 시작할 때, 선각적 남성과 여성들이 여성해방을 하나의 신념처럼 외쳤던 것을 상기해 본다면 한 세기가 지나도록 변화하지 않고 있는 것은 여성에 관한 여성의 삶의 양태에 대한 뿌리 깊은 가부장적 가치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왜곡된 사회적 관습도 80년대 들어서면서 이전과 달라진 양상을 띱니다. 한국도 칠거지악과 남존여비의 시대에서 여남평등이 운위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봅니다. 사회가 점차 민주화되고 경제적으로 안전화됨에 따라 여권이 신장되고 여성의 시간적 여유가 점고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듯이 여성들이 남녀동등권을 넘어서서 여성 우위권을 확보하고 성차별이나 남성들의 성폭력에 과감히 도전하고 있습니다. 국제아파트라는 TV 프로그램에서 터키 남자는 터키에서는 남자가 왕 노릇을 하는데, 한국에 와서 한국여자한테 꼼짝도 못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스게 소리이지만, 기존의 ‘남존여비’를 재해석하여, 남자의 존재이유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 데 있다. 남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여자가 쓸 비자금을 마련하는 데 있다. 남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여자의 비명을 지르게 하는 데 있다 등으로 해석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웃자고 하는 유머의 일단이지만, 이렇게 우리나라의 여성적 삶의 현실이 이렇게 좋아졌는지요? 오랫동안 여성지도자로서 여성문학과 여성운동에 매진해 오셨는데, 바람직한 여성의 정체성, 올바른 여성 정체성은 어느 지점에 두는 게 바람직한지 묻고 싶습니다.
2.
교수님께서는 <현대문학의 모성적 탐색>에서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로 대표되는 문학을 역사학과 비교하면서, 역사는 사실을 기록하지만 문학은 사실일 수 있는 것을 기록하며, 또한 문학은 보편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역사학보다 더욱 철학적이라고 선언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는 문학의 시대적 사회적 기능을 중시하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박완서는 수필에서는 현실적인 상황문제, 특히 소외당하고 억울해 하는 다수의 젊은 여성문제에 관심을 많이 두고 있습니다. 민족개조라는 입장에서 보면, 사회 현실의 고발을 통한 참다운 정의만이 문학의 정신이라는 이론이 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학평론가 강석호는 작가라면 그 시대 그 민족과 국가가 처해있는 상황을 누구보다도 선견지명으로 파악하고 정치적 제도나 인위적인 속박 속에서 상실된 인간성을 되찾으며 불행과 고통을 함께 앓고 그 실상을 정확히 표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여성해방의 의미>에서 근대가 여성을 배제하는 데서 빚어지는 충돌을 절실하게 경험한 사례를 보여주셨습니다. 굴곡 많은 삶과 문학 속을 배회하던 개인 주체를 갈망한 신여성과 현실에서 경험한 모성의 갈등을 여성문학 연구를 통해 드러내어 왔습니다. 페미니스트 작가들이 모성에 대한 회의를 나타내는데 반해 교수님은 여성적 특성을 인정하는 모성적 원리를 고스란히 보여주십니다. <여성해방의 의미>는 모성원리와 여권의 인식에 대한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이 글에서, 최근에 오면서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은 여성의 인간적 평등과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여성지도층의 각성과 함께 젊은 여성들의 용구가 강렬해졌기 때문이라 진단하면서, 차별과 억압, 눈물과 체념, 인내와 순종 그리고 무보수의 노동에 대한 여성의 역사를 비판하는 ‘여성해방’이란 용어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다듬고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문학정신은 진정한 의미의 남녀평등을 추구합니다. 여성해방은 근본적으로 인간 평등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 페미니스트 그룹에서 야기하고 있는 남성 대 여성 편짜기식이 여성운동이 아니라, 현실적인 바탕과 문화전통을 고려해서 부분적인 성역활을 인정하자는 주장을 펴셨습니다. 여성의 힘이 사회 전반에 필요하고 변화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 지혜를 깨닫는 여성이 되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입니다. 현실적인 바탕과 문화전통을 고려하는 부분적인 성역할로 나타나는 예가 어떤 것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3.
발제문 6. ‘박완서 소설의 노인’에서,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작고 큰 개인적 삶의 가족과 혈연의 끈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 중심축으로 삶이 전개되었다는 한계점을 가지면서도 박완서는 80년대의 여성문제와 여성의 비판적 성찰을 꾸준히 확대해왔고, 90년대에 오면서 모성적 인간주의와 생명성에 그 중심축이 놓이고 있어 결국 그의 만년의 문학적 완성은 모성적 회귀라는 위대성으로 나가면서 그 동안의 일상성의 작고 보잘 것 없던 것에 보낸 냉정한 리얼리즘이나 자잘한 이야기 담론이 모성적 생명주의와 거침없는 야성과 인간본능의 순수한 성본능을 바탕으로, 인간의 생명을 사랑하고 당당하고 떳떳한 삶을 위한 지금, 이곳의 일탈을 감행하며 싱그러운 인간내면의 노년이 가지는 진실을 지향하고 있다.”
박완서의 『너무도 쓸쓸한 당신』은 슬프고 쓸쓸한 노년을 관통하는 이야기들은 가슴가득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작가 나이 60이 넘어가면서 자신의 노년을 반추해내는 글들은 노년을 여생으로 만들지 않는다. 노년은 남은 생이 아니라 당당히 아동기, 청년기처럼 인생의 한때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노년기는 점점 길어지고 있다. 창작집인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 오면 박완서의 소설은 내밀한 향기와 밖으로 나타나는 웃음과 폭넓은 일상성에 대한 여유로움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에 대한 적절한 거리, 노년문학에 대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박완서는 한걸음 나가 칠순에도 첫사랑은 추억된다는 노년의 오롯한 사랑의 맛에도 달금질하고 있다. 자유, 그리고 무한한 삶의 바탕에 그 누구도 항변하지 못하는 노년의 사랑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아름답다’는 한마디가 강한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누구에게나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노년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대상이 남편이나 아내만을 지칭하는지요? 노인문제를 다루면서 수필은 다루지 않고 이렇게 박완서 소설을 유독 많이 다룰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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