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마 소시집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찔레꽃 외 9편 / 도경회
찔레꽃
-아침이슬 치렁밭에 뻘똥*꺾는 저큰애가
뻘똥이사 꺾지마는 고운홀목 다젖는다**
내 어리던 날
논을 깨우는
노래의 끄는 목과 떨림 목은 모두
눈 끔적끔적 향기 내뿜는 접시꽃
숲실띠 목을 따라갔다
남정네는 고향 온 듯이
아낙들은 친정 온 듯이
가슴 속 쌓인 사연 풀고 엮어
장단 놓고 가락태운 노래의 후렴
몸을 흔들어서
아침볕살 찬란한 모판은 신명이 뻗쳐올랐다
내가 어떻게 들었을까
꿈과 사실이 포개져 달고도 아린 그 음률
쏘물다고 야단하는 모를 찌면서
웃던 얼굴 노래하던 얼굴들 싣고
시간은 지금 어디쯤 헤매고 있을까
구름 숲 드리운 찔레덤불에서
울금불금 비새가 울어
눈부시게 무리지어 고봉밥을 담는 백자꽃 무늬
어린 발을 염려하는가
모춤을 나르며
신비한 숨길을 잇는 마을이여
*찔레순
**農謠
찔레꽃 2
-이논에사 용신님아 천석만석 마련하소
천만석도 많지만은 억만석을 마련하소*
외성받이 마을은
모낼 꿈으로 뒤척이더니
꿀벌들 정신없이 코를 박고 있는 찔레꽃
분향 받으며 줄모를 심는다
외배미 풀어진 안개 속
오장을 안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절을 하는 것 같다
엷은 버들 주렴 안에서 젖 물리는 새참 때
어린 볏모 흔드는
앞산 먼 산 소쩍새 소리
고운목청 견주라고 햇귀 열어주고
큼직한 음표 같은 숲실띠
먼 숲 훑어온 무명베 그윽한 노래 소리
신이 나서 저절로 발이 춤추던
가슴 뜨거운 모꾼들
해 해 햇 웃는 볕살에
살결 까뭇하게 탄 화음의 연골들
어느 날 벼꽃 우수수 피어나
너른 들 빈 섬에 뽀얀 쌀뜨물 들겠다
찔레꽃 3
- 다풀다풀 다박머리 해다진데 어데가오
울어머니 산소등에 젖먹으러 나는가요*
자라 오르는 꽃밭 같이
비상하는 새 같이
가슴속 무지개 뜨는 발원문
논물 잡아 파릇하게 쓰고 있다
연두색 엷은 논으로 물결치던 바람
여인들 입에서 노래를 휘감아 가는가 보다
여겨 듣던 나그네 새 애간장이 땅바닥에 쏟아진다
앞서 가는 부전나비 모시흰나비
땅의 정침을 치느라
등은 적삼에 젖고 얼굴은 볕에 익었다
어깨 덩실거리며 엉덩이 움씰거리며
영원을 짜는 피륙 신화가 되거라
허리 홀친 거름냄새가 발목을 씻는다
섧은 목젖에 젖 삼키는 소리 연거푸 들린다
상형문자로 물 벙벙한 녹유전 가득 깜빡깜빡
푸른 별 뜰 것이다
나무실의 직녀
등잔불 졸음졸음 눈 감아도
삼을 삼는다
잠투정 심한 젖먹이 위로
눈꺼풀에 튕개를 준 별 내려와
홑이불 한 장으로 덮이고 있다
삼을 째는 고운 잇바디
풀물 들어 풋내 짙은 입김이 마냥 어질다
햇볕에 그을지 않은
박속같은 흰 무릎 세워
아리아드네의 실을 잇는다
새벽빛 자늑자늑 감아올리는
산 섶을 한참 돌아
치자꽃향기 날아들면
방아깨비 스르릉 노래 소리
어리광으로 차오르는 청바닥
불빛 가난하고 어둠 풍성해
푸르스름하게 이끼 낀 채로
등황빛 자새에 감겨
천물 같이 청신한 유년의 시간
한정 없이 길게 풀리고 있다
장날
밀밭 가로질러
장다리 밭 샛길 걸어
불어오눈 바람
꽃물 들어 윤기 자르르 흐르다
외할머니 비취 비녀에 머문다
장날이다
함지박 머리에 인 외할머니와 고개 넘어 가는 길
아픈 발 절며가는 먼 산길
자운영 꽃빛 같은 어머니 치맛자락
아슴아슴 고갯길 넘어가는 것 같아
옷자락 움켜잡은 손 후려치며 떠나는
헛것만 보여 숨이 찼다
-니 새끼 곱다 니 새끼 참 곱구나
큰 바위아래 아늑한 양지녘 늑대 한 마리
지그시 눈감고 까무룩 졸며 젖 빨리다가
외할머니 말씀 알아들은 듯 산골색시처럼 웃었다
주문 외듯 거듬
니 새끼 곱다시며
일곱 살 손 잡아끌어도
오금이 저려 발걸음 떨어지지 않았다
저 물레방앗간 돌아가면
밝은 햇살 단비 내리던 포근한 초가들
나직나직 엎드린 뱃구레 유순했지
어머니와 떨어져 나는 외가에 살고
늑대는 꼬리 통통한 새끼들 품에 안아 젖 물리고
지금도 해 설핏해지면
마을로 내려오던 어린 날 늑대 웃음소리
달래주는 사람 하나 없던 내 울음소리
노을에 풀어쓰는 수묵담채로 발 빠르다
샘
바위상처 뚫고 솟는
샘이 있었네
꼬끼오!
수탉이 도도하게 볏을 휘두르며
황매산 위 아침 해 가볍게 끌어올리면
장밋빛 새날이 열렸다
이슬 터는 첫새벽
아낙들 저마다의 샛별 앞세우고
물빛 하염없이 착한 저 샘에서
만월 띄워 소원을 빌고 희망을 담아갔다
사람들이 떠났다
살고 있는 사람보다
무덤이 훨씬 많은 고향
아침 해도 낯을 붉혔다
괭이소리 삽소리 간신이 묻어두고 떠난 벌판에
모닥모닥 피어나던 하얀 찔레꽃
먼 산 소쩍새 아직도 울어
샘은 솟아 흘러넘칠까
목이 마른 내 영혼 먼저 달려가 쉰다
그네
짚단 한 아름씩 집집마다 들고 오면
내일 모레가 추석이었다
어른들 틈틈이 아이들 색동빛 꿈 섞은 굵은 그넷줄
포구나무 듬직한 가지에
뜨거운 핏줄 같은 그네를 맨다
고향으로 돌아 온 대처의 사람들
하나 둘 그넷줄 길들일 때
정애언니 물빛 갑사댕기 보름달로 떠올라
밤 마실 나온 뒷집사내 황홀한 짝사랑도
그네를 탄다
힘차게 구르며 날아올라 하늘에 닿은 치마폭
달빛 넘치도록 쓸어 담아 한웅큼씩 쏟아낼 때마다
고향 길섶에 따슨 꽃 무더기로 피었다
다시 구르면
가슴속 가득 차올라 숨 쉴 때마다
달그락거리는 첫사랑
가늘고 긴 시간의 파도 속 떠돌아 무시로 발 저린다
함께 씨 뿌리고 김매고 쓰러진 볏단
일으켜 세우던 된구비
낮비 밤이슬 맞으며 품앗이로 넘기고
몇 번 큰물져도
새 후치는 허수아비 어깨춤 우쭐우쭐
애기그네를 타던 황금 들녘
밤 깊은 줄 모르고
보름달 속으로 날아가던 그네
이제 추석이 되어도
그네를 매지 않는 포구나무
야윈 가지마다 보름달 무겁게 걸려
서러운 달빛으로
뿌리까지 흠뻑 젖어만 가는 목쉰 기다림
깊어간다
고향 지금은
산수유 붉게 익어가는
동향집
이끼냄새 상긋한 돌담사이로
까들해진 바람 까치가 물어 나른다
푸른 핏줄 꿈틀대던 팔뚝의
몸이 따습고 피가 잘 도는 사람들
떠난 자리마다
넉넉하게 자리 깔고 눕는 돌이끼
사람이 그리워
부지런히 까치들 날고
허전한 가슴의 하늘과 땅 사이
노을을 지고 돌아서면
산수유 열매로 붉게 익어가던
이마 환한 아이들
웃음소리
그립다
널뛰기
끝임이 널 위를 뛰어올라
다홍치마 봉긋 펴졌다
더 높이!
귀때기 푸른 악물들을 쫓는가
너덜겅 차고 솟는 정애언니
주저함 없이
남색치마가 소용돌이 쳤다
잘한다!
바지랑대 끝 까치새
웃음소리와 탄성이 들린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뒤울안 회나무 속귀가 트인다
겨울밤 그리고 별
새까만 발을 보고 삼촌은
할배 할배 반가워 까마귀가 절을 하겠다고
뒤통수에 꿀밤 아프게 주며 씻으라 했다
가마솥 조금 남은 쇠죽사이
발 푹 파묻고 발가락 꼼지락거리며 장난치면
뜨거워지던 솥바닥
자루바가지 위에 발 올려놓고 바라보는 하늘
초롱초롱 빛나던 동지섣달 밤 하는 별
손 내밀면 잡힐 듯 가직이 동무해주던 별
동생 눈도 별이 되어 반짝 반짝거렸다
아궁이에 알이 굵은 고구마 골라 묻어놓고
한웅큼 여물 쥐고 쓱쓱 싹싹 발 문지르면
찬바람 보드라운 볼을 스치고
헛간 모퉁이 닭장에서 구구거리던 닭도 잠이 들었다
휘익
별똥별 지나가고 순간
뒤란에서 족제비가 나와 살찐 암탉 채가도
닭도 우리도 숨죽인 채 목구멍이 소리하나 내 보내지 못했다
발 씻고 달디 단 잠 꿈속에서 새도록 족제비만 쫓다가
까르르 까르르 아시동생 마주보며 웃다가
■ 시작노트 -----------------------
그곳은 골짜기마다 이야기가 들어있고
사람마다 사연을 지녔다.
어떤 추억은 끌려오지 않으려고 고개에 잔뜩 힘을 주고
뒤로 뻗딩긴 채로 끌려온다.
한바탕 자욱한 소나타가 지나가면 능금초 하나라도 깨끗하지 않은 것이 없고
장수풍뎅이도 반짝이는 등껍질 위에 생명의 위엄이 가득했다.
동이 틀 때부터 별이 나올 때까지 일을 하면서
소리에 소리를 덧대어 부르는 노래!
내 귓속 달팽이관을 울리고 혈관을 타고 심장 속으로 들어와서는
생 전체를 따뜻하게 뎁힌다.
밭고랑에 씨를 뿌리는 어머니 청량한 발자국소리
겨릿소가 쟁기질하는 아버지의 밭
어디로 갔을까.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흙을 섬겨온 내력, 가물가물 가고 있다.
따라서 내 기억에서 영원하다.
특별한 파동을 지닌 그 골짜기
세한의 나무들 터질 듯 부풀어 움을 틔우고 있겠다.
ㅡ 『우리詩』 2019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