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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억하사 / 창 8:1-12
현대인들은 풍요한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 행복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풍요만큼 불안과 고독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고민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불안과 외로움의 본질은 자신을 알아주는 존재가 없다는데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가진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바를 인정해주고 그것으로 존경받고 싶은데 세상은 내 생각처럼 나를 알아주지 않는데서 고독을 느낍니다. 이것이 피부로 느껴지는 고독과 불안이라면 잘 깨닫지도 못하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영적 불안과 고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데에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게 된 데서, 본능적으로 소외감을 느끼고, 불안하고 불만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독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나를 돌봐주지 않을지라도 나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우리가 외롭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홍수의 심판 때 생사의 갈림길은 간단했습니다. 방주 안에 있느냐, 방주 밖에 있느냐였습니다. 방주 안에 있으면 구원이고, 방주 밖에 있으면 심판입니다. 우리의 구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구원, 예수 밖에 있으면 심판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구원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전체적인 면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방주에 탔던 사람들이 바로 천국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단순히 목숨을 건졌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홍수 나기 전과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방주는 구원의 서정에서 중생과 유사점이 있습니다. 중생 곧 거듭남이란 관계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우리에게 떨어진 순간, 세상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사는, 새로운 관계가 시작됩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말은, 세상과 하직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전히 문제 많고 탈도 많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생업에 종사해야 하고, 결혼해서 자식 낳고 키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산다는 말은, 우리가 당장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관, 우리 주요 관심사가 바뀐 것입니다. 돈을 벌어도, 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어디까지나 수단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가 중생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고, 하나님의 뜻에 즐겨 순종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홍수가 끝나고 땅에 발을 디뎠을 때, 노아는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방주에서 나와 보니, 막막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중생한 사람들도, 이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중생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소중함을 알았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변했습니다. 전에는 돈 버는 거 자체에 목적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보니, 더 중요한 것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직업을 선택할 때 선택의 폭이 좁고, 직장을 구할 때도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중생을 하고, 성화의 단계에 있는 우리는, 이런 과정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화의 과정은, 노아가 홍수 후에 황폐한 땅을 일구는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노아 자신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건강으로, 자신이 땀흘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자신이 연구해야 했습니다. 성화의 삶은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습니다. 거룩하여 가는 과정은, 성령의 도움을 받되 성령이 전적으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로부터 도움을 받되, 목회자가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찬 420장에서 롱스태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 성결키 위해 늘 기도하며 너 주안에 있어 늘 성경보고
온 형제들 함께 늘 사귀면서 일 하기 전마다 너 기도하라.’
성화의 삶을 위해서라면, 내가 기도해야 합니다. 성결한 삶을 위해서라면, 내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가 우리를 거룩으로 인도합니다. 딤전 4:5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기도 안 해도 당장은 살 수 있을지 모릅니다. 말씀 안 봐도 얼마간은 살 수 있을지 모릅니다. 말 그대로 당장입니다. 얼마간 살아 있는 것입니다. ‘기도줄을 놓고 살고 있다? 말씀을 덮어놓고 살고 있다?’ 그러면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겨우 숨만 깔딱깔딱 쉬고 있는 것입니다. 40일을 밤낮으로 쏟아지던 비가 그쳤습니다. 방주 속에 타고 있는 노아 일행은, 이제 머지않아 곧 방주 안에서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로도 거의 4개월 동안, 방주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살아있음에 감사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불편했을 것입니다. 만약 동물들이 그때쯤 잠에서 깨어났다면, 동물들도 갑갑하여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제한된 공간에서 5개월 동안이나, 여러 종류의 생명체가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은, 사실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이것을 본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가족들과 동물들이 방주 안에서 잘 살 수 있었던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들과 동물들을 기억하고 돌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방주 속에 있는 노아와 그 가족을 잊으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십니다. 건망증이 있는 하나님이라면, 더 이상 기댈 것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 편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계속되는데,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혹시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건가?’ 고통의 현장에서, 그렇게 눈물의 기도를 올려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혹시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건가?’ 상황과 환경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이 아닐까하는, 신앙의 갈등 때문에 힘듭니다.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고, 그분이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될 때, 찾아오는 절대고독과 불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그분의 음성은 우리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믿음만 확실하다면, 우리는 어떠한 어려운 환경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스페인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지체하실지 몰라도 결코 잊으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한번 택한 자기 백성을, 절대로 잊으시는 법이 없습니다. 사 49: 15-16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손바닥에 새겨놓고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가장 어렵고 힘들 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머릿속으로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께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언제 일하십니까? 대개는 우리의 인내가 바닥이 나고, 조금 더 지났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내가 바닥난 후부터,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 사이가 위기입니다. ‘나는 참을 만큼 참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만히 계신다.’ 이때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도, 나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홍수가 끝나고, 하나님의 물 빼기 작업이 시작됩니다. 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물을 줄어들게 하는 도구가 무엇입니까? 바람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을 기억하사, 바람을 땅위에 불게 하셔서, 물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바람을 불게 하심으로, 물을 원위치로 가게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온 것은 하늘로 가게 하셨습니다. 땅에서 온 것은 땅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바다에서 온 것은 바다로 가게 하셨습니다. 바람을 이용하여, 본래의 질서를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실 때도, 동풍 곧 바람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홍해를 항해 지팡이를 내밀자, 곧바로 홍해가 쫘악~ 갈라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출 14:21절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큰 동풍이 밤새도록 불었다고 했습니다. 그럼 바람이 밤새도록 불면, 오늘날도 바다가 갈라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때의 바람은 그냥 바람이 아닙니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바람은 말씀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모세가 순종했을 때, 하나님이 바람을 사용하셔서 홍해를 가르신 것입니다.
2-3절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말씀의 바람이 불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라는 말은, 원 위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심판을 끝내실 무렵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원위치로 돌리셨습니다. 창조질서를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무질서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혼돈과 무질서에 말씀의 바람을 보내셔서, 질서를 세우십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무질서한 삶을 살고 있는 분이 없습니까? 말씀에 귀를 닫고, 정리하지 않은 채 오래 두면, 영혼에 문제가 생깁니다. 커다란 불행이 닥치기 전에, 빨리 정리하는 게 지혜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자기 위치에서 벗어나 무질서의 상태에 있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정에서 제자리에 서길 바라십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위치에, 어머니는 어머니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남편은 남편의 위치에, 아내는 아내의 위치에서 탈선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식은 자식의 위치에, 며느리는 며느리의 위치에, 사위는 사위의 위치에서 분명히 서 있어야 합니다. 궤도를 이탈한 기차가 사고를 불러오듯, 자기 위치를 벗어나 있으면서, 가정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미신입니다. 홍수 후 물이 빠질 때, 시간을 두고 서서히 빠진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쏟는 것은 순간이지만, 쏟은 은혜를 다시 받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의 불을 꺼뜨리는 것은 금방이지만, 꺼진 기도의 불을 다시 붙이는 것은 여간 힘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는 데는 순간이지만, 말씀을 다시 가까이 하는 것은 오래 걸립니다. 우리 몸을 죄짓는데 내어주는 것은 순간이지만, 죄로 인해 망가진 몸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에 빠져드는 것은 순간이지만, 거기서 빠져나오는 데는 긴 시일이 걸립니다. 우리가 명예를 추락시키는 것은 순간이지만, 추락한 명예를 다시 회복하는 것은 ‘진짜’ 어렵습니다. 우리가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은 순간이지만, 잃은 신용을 다시 회복하는 것은 ‘겁나게’ 어렵습니다. 우리가 물이 엎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지, 물을 엎어놓고 다시 담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4-5절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방주가 한 곳에 머물렀습니다. 2월 17일 홍수가 시작되어, 7월 17일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고, 그때부터 물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물이 땅에 차 있던 기간은 얼마인가요? 150일간입니다. 다섯 달 동안 방주가 표류하다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습니다. ‘아라랏 산’은 원어로는 ‘아라랏의 산들’입니다. 이란, 터어키, 러시아 국경에 있는 큰 산 줄기인 것입니다. 그 산들 중 한 곳에 방주가 머무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방주 안에 있던 노아 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방주생활을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환하게 웃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일행을 원위치로 복귀시키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습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일을 진행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아라랏 산에 방주가 닿고도, 그들을 바로 나오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떠다닐 때는 덜 했는데, 머물러 있으니까 다들 방주에서 나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머물러 있는 방주에서,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할 때까지, 얼마나 걸렸습니까? 약 73-4일쯤 됩니다. 이제 겨우 봉우리가 보일 정도이면 아직 멀었습니다. 그들은 방주 안에서 아직은 많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노아가 이 세상에 복귀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마냥 기다렸습니다. 성질 급한 아들이, “아버지, 이제 나가도 되지 않을까요” 하고 물어도, 노아는 하나님보다 결코 앞서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으면,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믿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6-7절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또 40일을 기다려도, 방주에서 나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열고 뛰쳐나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노아는 창문을 열고, 까마귀 한 마리를 내보냈습니다. 노아가 왜 하필 까마귀를 내보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는 방주에서 나가 물이 아직 많이 있었는데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시체 뜯어먹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답답한 방주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 싫었을지 모릅니다. 아무튼 까마귀는 연락병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건망증이 심한 사람을 가리켜, “야, 너는 까마귀 고기 삶아 먹었냐?” 하는 말이 나왔는지 모릅니다.
8-9절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이번에는 연락병을 바꿔, 까마귀 대신 비둘기를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앉을 곳이 없어서였습니다. 이 말은 물이 아직 덜 빠졌다는 말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때가 아직 멀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더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10-11절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그리고 또 칠일이 지나, 다시 비둘기를 내어 보냈습니다. 이번에 내보낸 비둘기가 돌아왔는데,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왔습니다. 물이 거의 빠졌다는 사인(증표)입니다. 노아는 이때도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참 어지간히 무던한 사람입니다.
12절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일주일을 더 기다린 후에, 다시 비둘기를 내어 보냈습니다. 방주에 들어가는 일은, 전적으로 누가 주관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동물들과 노아가족이 방주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그러나 나올 때에 대해서는, 특별히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수시로 물이 어느 정도 빠졌는지, 말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방주가 아라랏산에 당도했을 때도, 앞으로 며칠만 더 기다리면 방주에서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지도 않았습니다. 노아로 하여금 알아서 판단하게 했고, 분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과정은, 노아 방주에서 볼 수 있듯이, 철저히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결코 사람의 방법으로, 어찌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자기 속으로 난 자식도, 구원에 관한 한 어쩔 수 없습니다. 한 몸이라고 하는 부부도, 구원 문제만큼은 어찌해 볼 수 없습니다. 구원 문제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고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거저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릴 때는 안고 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안고 가지 않고 걸어가게 합니다. 아무리 자식이 사랑스러워도, 돌이 지나면 걷게 해야 합니다. 자식이 넘어지는 것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제힘으로 걷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스스로 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인내심을 테스트하기 위함보다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하고 아침 조깅을 하고 있었습니다. 막 뛰기를 시작했는데,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행인들이, 이 부자(父子)를 보고는 막 웃었습니다. 뭔가 잘못된 게 있나 해서, 자기를 살피는데, 잘못된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속으로 “별 이상한 놈들도 다 있다. 아침부터 웃긴 왜 웃어” 하고서는,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한 무리가 또 웃었습니다. 이번에는 자기 아들을 쳐다보았습니다. ‘이 자식이 뭐 이상한 게 있나’ 하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들놈도 멀쩡하자, “참 별꼴 다보겠네”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또 한참을 뛰는데, 또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는 것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래를 보니, 볼록한 배 밑으로 보이는 신발이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신발을 짝짝이로 신었던 것입니다. 부끄러웠던 아버지가 나무숲으로 숨으면서, 아들 보고 말했습니다. “아들아, 집에 가서 얼른 신발 좀 챙겨 와라.” 한참 있다 헐레벌떡 뛰어온 아들이, 아버지 보고 하는 말이, “아빠 소용없어요.” 놀랜 아버지가 “야, 무슨 소리야?”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평소 생각하기를 싫어했던 아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하는 말이, “아빠, 집에 있는 것도 짝짝이에요.”
스코트 팩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원죄란 교만이나 불순종이 아니다. 그것은 원죄의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원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생각의 게으름이다.” 하와가 사탄의 유혹 앞에, 조금만 더 생각을 깊이 했더라면, 또 아담이 하와의 권유에,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더라면, 결코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입니다.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판단하고, 말씀으로 분별할 수 있기 위해서, 말씀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배워야 하고, 스스로도 연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표준으로 삼아, 스스로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어느 정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다해줄 수는 없을뿐더러, 대신해 줄 수도 없습니다. 어릴 때는 목회자가 떠먹여주지만 계속해서 그럴 수는 없는 법입니다. 목회자는 팀에서 코치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코치는 선수들이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자입니다. 선수들 하는 것이 아무리 답답해도, 코치가 대신 경기장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가 없어도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어야 좋은 신앙입니다. 목회자를 잘 만나는 것은 복입니다. 여행에서 가이드만큼이나, 신앙생활에서 목회자가 중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목회자 때문에 신앙생활 잘하고, 목회자 때문에 신앙생활 못한다면, 그건 바람직한 신앙이 아닙니다.
급한 일이 있을 때 기도하고 있으면, 답답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신앙입니다. 내가 서두른다고 빨리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짧은 시간 안에도 얼마든지 많은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뭘 얼마나 빨리 하느냐에는, 별 관심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느냐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말씀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말씀을 더욱 사랑하여 가까이 하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길을 묻고 말씀의 안내를 받기를 바랍니다. 말씀하시는 주님을 묵묵히 따라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따르는 자들을 기억해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돌아보시는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세상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을 기억하는 일에 동참하라고 하십니다. 노아와 같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긍휼 베푸심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복음의 증인이 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나를 돌봐주지 않을지라도, 그러나 나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은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가족만 기억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들의 우고도 알고 살피시며 돌아보시는 분이기에,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예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어려울 때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인생살이에 어려움이 있을 때, 언제나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따라 나를 기억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올림으로, 날마다 하나님이 기억해주시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노아가 말씀따라 방주에서 나왔더라 / 창 8:13-22
사람들은 모두 하루의 24시간이라고 하는, 똑 같은 시간을 소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그 시간 안에서 무언가를 이루며 살고, 어떤 사람들은 늘 바쁘지만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이 살아갑니까? 왜 어떤 사람은 같은 시간이지만, 비교적 여유를 가지고 살고, 어떤 사람들은 항상 쫓기는 그러한 생활을 합니까? 이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서 올까요? 이 질문은 20세기 후반 시테크의 주제가 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스티븐 코비’ 박사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중요한 것과 긴급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중요한 일은 무엇인고 하니 한마다로 말해서, ‘내게 가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중요한 일입니다. 내 인생을 변화시키고, 진정한 의미의 만족과 보람과 그리고 성숙을 주는 그러한 일, 내게 있어 중요한 일입니다. 반면에 긴급한 일이란 무엇인가 하면, 당장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말합니다. 그 일들은 나의 관심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내가 열심히 합니다만은, 열심히 해봐야 별로 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많은 일, 그것을 가리켜서 긴급한 일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목표를 위하여 무언가를 노력해서, 시간을 내서 할애하고, 공부를 한다거나, 또는 운동을 한다거나, 이런 건 다 소중한 것들입니다. 하루에 1-20분 씩만 내어 일년만 해도, 뭔가 체계 잡힌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삶의 보람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일들이 많단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내 삶의 중요한 그러한 문제들은, 긴급을 요구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뭐 하루이틀 안 한다고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그렇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놓고 나면, 아무 것도 한 일 없이 바쁘게만 살았다는 것입니다. 쫓기는 삶을 살았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긴급한 일이 나쁜 일이냐 하면 나쁜 일이 아닙니다. 해야 할 입니다만은, 긴급한 일에만 쫓기다 보면 중요한 일을 할 수가 없다는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괴테’는 ‘중요한 일이 하찮은 일에 의하여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 삶이 정말로 변화되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 삶의 패턴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내게 있어서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내 시간 계획 속에 반드시 넣고 실천해야만, 후회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시간 전문가들은 우리에게 충고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일에도 마찬가집니다. 오늘 우리는 함께 본문을 읽었는데, 오늘 본문에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며, 또한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장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가가, 정확하게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깊은 샘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이 열려 쏟아져, 물이 온 땅을 덮었습니다. 그렇게 물이 땅에 150일 동안이나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엄청난 물이 빠지는데, 당연히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제 어느 덧 해가 바뀌었습니다. 13-14절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정월 초하루가 되었습니다. 노아는 방주 뚜껑을 제치고 확인하니 물이 지면에서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방주에서 바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얼마 동안 그대로 더 있었습니까? 2달 정도입니다. 노아가 왜 그랬을까요? 나오면 죽게 될까봐 그랬을 것 같은가요? 아니면 방주 생활에 익숙해, 그곳이 더 좋게 느껴졌기 때문인가요? 둘 다 아닙니다. 방주의 문을 닫으신 하나님이, 아직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까지, 노아가 기다린 것입니다. 노아는 객관적인 정황을 통하여, 홍수가 끝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비둘기를 통해서 이제 방주에서 나가도,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심지어 13절 말씀대로, 방주의 뚜껑을 제치고, 밖의 상황을 두 눈으로 목격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전에는, 결코 방주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건 노아가 자신의 판단이나 계획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아 살았음을 말해줍니다. 이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당신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잠 3:6절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우리가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우리가 가는 길을 지도해주십니다. 우리 길을 지도하신다는 말은, 당신의 뜻을 보여주신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모호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닥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말씀을 가까이 하면, 갑자기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이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옵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방주 안에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나타내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노아가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그로부터 약 2달이 지난 2월 27일, 홍수가 난지 1년 10일 되던 날에, 하나님의 음성이 노아에게 들려왔습니다. 15-17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방주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너 스스로 문을 열고 방주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노아는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방주가 왜 지어져야 하는지 모르고, 일단 순종부터 하고 봤습니다. 방주가 다 지어진 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가족과 동물들을 방주 안으로 들여보낼 때도, 노아는 순종부터 하고 봤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친히 방주의 문이 닫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문을 하나님이 지키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그렇습니다. 구원의 1단계인 칭의에서는, 우리의 노력이 전무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우리의 공로가 개입할 자리가 없습니다. 복음을 어린 아이 같이 믿기만 하면 됩니다. 나를 그분께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구원의 2단계인 성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신분의 변화가 있을 때는, 놀라운 감격이 따르지만, 성화를 이루어 가는 삶은, 감격보다는 치열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지만, 아직도 우리 안에 옛사람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옛사람의 사고방식, 가치관, 세계관,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를 변화시키려는 하나님과, 변화되길 거부하는 나 사이에, 힘겨루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치열한 자기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칭의의 구원은 받아들이면 되었습니다. 내가 의롭게된 것은, 그분의 일방적인 사역입니다.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여기에 머무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방주 안의 삶은 구원의 과정일 뿐, 완성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방주 안에서 영원히 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문을 열고, 방주 밖으로 나오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것입니다. 빌 2: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성화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그렇다고 성령님의 일방적인 사역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항상 복종하여, 성령님과 함께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너희 구원을 받으라 하지 않고,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신앙이 자라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칭의의 구원을 받은 것이, 구원의 전부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게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왕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은 열정이, 당연히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을 부지런히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같아질 수는 없으나, 주님을 닮아가려는 노력은, 얼마든지 기울일 수 있습니다. 물론 수많은 좌절과 희생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분이 관심을 가지셨던 것에 나도 관심을 갖고, 그분이 무관심해 하셨던 것에 나도 무관심해 하는 것이,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분이 열정을 가지셨던 일에 나도 열정을 갖고, 그분이 미련없이 포기하셨던 일에 나도 미련없이 포기하는 것이,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동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기를 소원하면서도, 주님을 닮아 가는 일에는, 다소 소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하면, 특별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기도를 하루에 몇 시간씩 하는 사람, 기도할 때 특별한 은사가 나타나는 사람을 떠올립니다. 아니면 금식기도를 자주하고, 40일금식기도도 해본 사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사람을 한 번도 거룩한 사람이라 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주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계속하여 주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이, 이루어 가는 구원입니다. 성화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미 칭의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 우리가 계속하여, 이루어 가야할 구원이 성화입니다. 끝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노아와 그 가족과 짐승들에게 방주에서 나오라고 하셨습니까? 17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이 말씀도 낯선 말씀이 아닙니다. 어디에 나옵니까?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복의 메시지입니다. 창 1: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복을, 홍수가 끝난 후 다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하셨지만, 심판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심판하시지만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전에,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고난을 주셨습니다. 도자기를 만들 때 과정을 생각해 봅시다. 고르게 빻아야 하고, 반죽을 해야 하고, 물레에 돌려 빚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끝납니까? 고통은 지금부터입니다. 불에 구워야 합니다. 한 번만 굽습니까? 몇 차례 불 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다. 이 과정을 잘 견디어야, 좋은 도자기가 됩니다. 우리가 현재 당하는 시련은, 복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빚어 가는, 필수 과정임을 믿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있기 전까지 노아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있자 노아는 즉각 순종했습니다. 18-19절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하여, 골방에서 기도로 오랜 시간을 지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까지, 말씀을 붙들고 씨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에는,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방주 밖으로 나왔을 때, 이들이 본 세상은 어떠했을 거 같습니까? 1년간 물에 잠겼던 세상이, 물이 다 빠진 후에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아마도 폐허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차라리 방주 안에 있는 게 나을 뻔하였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노아와 식구들은 방주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비록 세상이 폐허 같을지라도, 방주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어쩌면 세상이 폐허 같으니까, 더욱 나와야 했을지 모릅니다. 우리 역시 교회 안에서만, 은혜 받았다고 큰소리 치지 말고, 세상에 나가 받은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타락하고 죄가 가득해 있을수록, 세상에 나가서 받은 은혜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영적 전쟁을 치르다가, 부상을 입고 응급실에 실려 와서 치료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세상에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세상에 파송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20절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20절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노아가 방주에서 내려 맨 처음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폐허가 된 세상에 발을 내딛었으니, 얼마나 할 일이 많겠습니까? 당장 먹고 살 것이 필요하고, 거처할 집도 있어야 하고, 가축의 축사도 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생존을 위한 것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보다, 맨 먼저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이게 하나님 우선적인 신앙입니다. 무엇이 남아서 드린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풍족해서 선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넉넉해서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단을 쌓아야 했습니다. 단을 쌓는 작업도, 그리 수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돌을 주어오는 것도 그렇고, 주어온 돌을 깨끗이 씻는 작업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아무리 짐승이라지만, 일 년 동안 방주에서 정든 짐승을 잡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이 모든 것을 두 번째로 여겼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첫 번째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1순위를 두고 나면, 나머지 모든 것은 2순위로 밀려납니다. 예배를 2순위에 두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자투리 시간을 하나님께 가져오지 않아야 합니다. 시간이 남아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24시간 중 가장 소중한 시간을 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바쁘다는 것은 마음이 없다는 핑계입니다.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는, 결코 바쁘다는 변명을 하지 않습니다. 연애하는 사람은,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돈 버는 일을 바쁘다며 마다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바쁘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마음이 없다는 것이요, 하나님께 삶의 1순위를 두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께 1순위를 두며 살고 싶은데,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순수한 신앙으로 살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청교도들이라 불립니다. 이 청교도들이 조국을 떠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죽을 고생을 하여 가까스로 신대륙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있는 힘을 다해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게 무슨 건물이었는지 압니까? 자신들의 집이었습니까? 아니면 농작물을 저장할 창고였습니까? 자녀를 교육시킬 학교였습니까? 병든 사람을 치료할 병원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자식들을 위한 학교보다도, 환자들을 위한 병원보다도, 심지어 자기들이 거처할 집보다도, 교회를 먼저 지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예배를 신앙의 1순위가 아닌, 삶의 1순위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삶의 최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지금 우리 삶의 최우선순위가 무엇입니까? 지금껏 무엇을 삶의 최우선순위에 두고 살아왔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예배를 삶의 1순위로 삼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저 천국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 자기 관리를 잘 하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어 예배는 생명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주간을 예배의 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예배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노아는 예배의 비밀을 알았습니다.예배를 자기 삶의 1순위로 두고 살았습니다. 당연히 자녀들도 그렇게 살기를 바랐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신앙밖에 없습니다. 신앙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주일이면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에 가고, 주일이면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걸 부모의 사명으로, 이걸 집안 어른의 사명으로 알아야 합니다. 자녀가 예배 생활을 잘할 때, 비로소 자녀교육에 성공한 것입니다. 노아가 예배를 잘 드렸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1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노아 일행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않으시겠다고 다짐을 하십니다. 홍수는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만 더욱 쓰라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홍수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노아가 드린 제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받으시고, 인간의 죄에 대한 생각을 바꾸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신 제사가 있습니다. 히 7:27절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예수님이 친히 대제사장이 되어,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린 제사였습니다. 예수님이 단번에 드린 제사가, 온 인류를 진노에서 용서로, 심판에서 구원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현대 교인들은 진노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저 사랑의 하나님일 뿐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완전히 실수입니다. 하나님이 순간적으로 착각을 하셨거나, 예수님이 정신나간 행동을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는, 죄인들의 불쌍한 모습을 보셨기에,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죄인들의 머리에 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시고,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의 하나님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21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악한 일을 행할 때마다 심판을 하셨다면, 인간은 이미 멸절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악하게 태어났습니다. 죄성을 몸에 지닌 채 태어났습니다. 죄에 오염된 상태로 출생했습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인간관입니다. 범죄하기 전의 인간은, 하나님 다음으로 존귀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이후의 인간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어야 했고, 결국은 죽어야 하는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죄성은 물로 씻을 수가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죄의 문제를 스스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21절 끝부분의 말씀과 같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홍수 후에 지구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22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첫째 기후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홍수 전에는 인간이 살기에 완벽한 조건이었습니다. 궁창 위의 물로 인해, 온실 기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추위에 떨 필요도 없었고, 더위에 시달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홍수로 인해 지각 변동이 일어남으로, 기후의 변화가 왔습니다. 극단적인 사계절이 생겼습니다. 남극과 북극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자연 재앙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환경 파괴로 인해, 폭설과 폭우와 폭염으로 해마다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습니다. 둘째 수명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노아 홍수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약 900살이었습니다. 그런데 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은 급격하게 감소했습니다. 갑자기 400대로 200대로 떨어졌습니다. 창세기 5장과 11:10절 이하를 한 번 비교해 보면, 수명의 차이가 얼마나 많이 나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식성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건 9장에 가서 살펴보겠지만, 홍수 이전의 인간의 식물은 채소였습니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는 동물을 채소와 같이,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아마도 추위와 더위를 이기기 위해서, 동물성을 섭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일 거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까지, 기다린 시간은 결코 아깝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체하실 수는 있어도, 반드시 당신의 뜻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 이제 순종해야 합니다. 비록 폐허같은 세상으로 나가라는 명령일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폐허같은 세상에 나와도, 그 세상을 바라보면 절망합니다. 그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예배를 삶의 1순위에 놓기만 하면, 다른 모든 것은 2순위로 밀려납니다. 그렇게 하면 신앙생활 하면서, 쓸데없는 것으로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알고 보면 위대한 일입니다. 혁명가가 바꾸지 못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또 한번 예배자로 서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하나님의 마음에 전달되고 있는 거 같습니까? 아니면 우리만의 종교집회로 끝나는 거 같습니까? 우리가 매주 드리는 이 예배가 삶의 현장으로 연결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예배와 단절됩니까? 때로 주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순간에 ‘내가 지금 뭐하나? 이 바쁜 시간에 내가 뭐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그 때 여러분은 분명하게 자기 자신에게 말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은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내 인생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가장 생산적인 시간이요, 축복받는 시간이라고 하는 생각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배가 새로워 질 것입니다.
시 한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주님, 밖으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그들은 걷거나 뛰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서두릅니다. 자동차도 거리도 도시 전체가 서두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따라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시간을 벌려고 말입니다.
죄송합니다만은 안녕히 계십시오. 저는 시간이 없습니다.
편지를 끝마치겠습니다. 시간이 없거든요.
도와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시간이 없군요.
생각할 수도 없고 책을 읽을 수도 없네요. 시간이 없거든요.
기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학생은 숙제를 시간없다고 미루고 젊은이는 운동을 시간없다고 미루고
할아버지는 손자와 놀기를 시간없다고 미루고
아파서 죽게 된 사람도 시간이 없답니다.
주님, 모든 사람이 시간을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인생을 뛰면서 살아갑니다.
너무 급하게 서로 밀치면서, 너무 많은 짐을 지고 그들은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거기에 가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없었거든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뭔가 어디엔가 큰 잘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은 너무 짧고 인생도 너무 짧아요.
하나님, 당신이 시간 계산을 잘못한 것입니까? 우리가 잘못한 것입니까?
‘미셜 콰이스트’의 ‘인생을 위한 기도’라는 시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짧습니다. 너무 짧지요. 그 짧은 시간 속에,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시간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나머지 짧은 시간이, 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예배하는 가정이 되고, 여러분이 예배하는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 생활 속에 일그러지고 깨어지고, 잘못된 부분들을 보면서 탄식하고, 가슴치고 때로는 분노도 했습니다만은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인 우리의 영적 예배의 제단이 무너지고, 수축된 것에 대해서는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는 슬퍼하지도 않았고 분노하지도 않았습니다. 주여, 저희들의 눈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의 제단이 얼마나 황폐하고, 무너져 있으며, 파편들이 뒹굴고 있는가를 보고 놀라게 하옵소서. 그리고 다시 수습하여,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게 하시되, 노아의 예배 정신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해야 할 일이 많은 진흙뻘 위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노아의 그 예배의 정신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가끔 예배드리고 적당히 예배드리면서, 성도의 명맥을 겨우 겨우 유지해 오는데서부터 그치게 하시고, 이제는 자주 바른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예배의 회복이 모든 것의 진정한 회복임을 알고, 예배의 승리자가 되고, 삶의 승리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