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端의 追憶 #129, 국제시장 에스더 이야기
1960년대 말에 부산의 초량12교회 학생중에 ‘에스더’라고 명명(동방교의 새 이름)을 받은 여고생이 있었다. 여고 3년동안 참으로 부지런히 동방교의 부산 초량12교회에 출입하면서 이래 할아버지(세칭 동방교의 교주 노광공)에의 충성에 열심을 다하고 있었다. 학교를 파하면 꼭 초량12교회에 들러 기도하고 진리말씀(동방교의 교리)을 듣고는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발랄한 여고생이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그녀를 참으로 오랜 세월, 거의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작금에 이르러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제는 서로가 노년이었다. 다행이 그녀는 동방교의 대기처로는 들어가지 않았고 집안의 권유로 맞선을 보고 결혼하여 현재는 지방의 한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자식들의 혼사도 모두 끝내고 남편과 둘이서 행복하고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물론 남편은 그녀의 과거 동방교 행적은 털끝 만큼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고 그녀도 구태여 그것을 밝히 드러내 보일 일도 아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만나면 자연스레 그 시절의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술~술 풀려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녀는 결혼할 때 선도 안보고 데려간다는 딸부자집의 셋째딸이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 유명한 부산 국제시장의 3공구 조그마한 점포에서 잡화상을 벌여놓고 장사를 하시는 분이었다. 점포라고 해봐야 겨우 서너평 될까 말까하는 크기였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복잡하고 아주 길목이 좋은 곳이어서 주방용품이며 청소용품등의 잡화들을 올망졸망 진열해놓고 벌여놓은 가게로써 장사가 꽤 잘되는 편이었다. 그녀가 여고를 졸업할 즈음 그녀의 아버지는 연세도 많으시고 몸도 이곳 저곳 아픈데가 많아서 세째딸인 그녀에게 점포를 맡겨 장사를 시켰다. 동방교에의 충성심이 특출하던 그녀는 아버지의 장사를 맡아 하게 되면 지성(헌금)을 많이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마음을 작정하여 그 점포에서 아버지 대신 잡화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루의 장사를 마치면 그날의 매상을 아버지께 갖다 드리고 전후사정을 보고하게 되는데 그녀는 그 하루의 매상중에서 얼마를 항상 꼬불쳐 두게 되었다. 경상도 방언으로 ‘꼬불쳐 둔다’는 말은 ‘훔쳐서 숨겨 놓는다’는 뜻이다. 그 꼬불쳐 둔 돈은 매주 한번씩 초량12교회의 전도사가 국제시장의 그녀에게 들러 받아와서 지성(헌금)으로 상부에 올리는 것이었다. 장사 때문에 동방교에 출석은 잘 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지성(헌금)을 많이 바치는 성민(동방교의 신도)으로 동방교 내에서 칭찬을 자자하게 받게 되었던 것이다.
수 십년 만에 만났을 때 나누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 다음이었다. 국제시장에서 장사일에 전념하던 그녀는 동방교 초량12교회에 출석하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게 되었고 그에 따라 차츰 신심도 약해져가기 시작했는데 결혼적령기에 들어서게 되니 집안 사람들의 주선으로 맞선을 보게 되었고 결혼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때 그녀의 어머니가 던진 한마디가 걸작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2남6녀나 되는 형제들 뒷바라지에 바빠 집에서 살림만 하고 계셨는데 느닷없이 결혼식 날자를 잡아놓고는 그녀를 부르더니 ‘니 그동안 장사하면서 결혼할 때 쓸라고 돈 쫌 꼬불쳐 놨나?’ 하시더라는 것이다. 그동안 꼬불치기는 많이 꼬불쳤는데 그 꼬불친 돈 전부 동방교에 지성(헌금)으로 다 바쳐버렸고 자신은 무일푼이었으니 너무나 허탈해서 할 말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꼬불쳐서 동방교에 갖다 바친 돈이 그 얼마였던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가 없지만 지나간 세월을 어이하리요. 결혼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동방교와의 관계는 정리가 되어버렸고 그녀의 아버지도 지금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치매증세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로 요양병원에 계시는데 그녀가 장사하던 그 점포는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어서 매월 받아드리는 그 월세로 어머니의 요양병원 병원비를 충당하고 있다고 지난날의 어리석음과 오늘의 현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20대의 꿈많은 청년기에 만났던 청춘남녀들이 이제 모두 70줄의 노년에 접어들어 그 시절을 돌아보며 흉금없이 나누는 이야기들이 참으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지나간 그런 일들도 추억이라면 추억이라 할 수 있을까, 지금의 세칭 동방교가 소유하는 모든 재물에는 그 많은 어린 연단선님들이 학업도 팽개치고 무단가출하여 껌팔이 해서 갖다 바친 돈, 빈집초월을 꼬드겨 무단가출한 대기자들에 의해 오작죽 팔작밥의 무임금 착취노동으로 일구어 낸 부동산들, 부모의 장삿돈을 꼬불치고 빼내어 바친 지성 헌금들, 자기를 따르는 신도(성민)들에게는 3년안에 세상을 불바다로 심판한다고 공갈협박을 일삼으면서 자신은 재물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세상을 곧 청산한다고 하면서 뜯어낸 수많은 은금 패물들, 온갖 종목을 다 갖다붙인 지성(헌금)의 종류들... 지금의 세칭 동방교 신도(신도)들은 상상도 할 수 없으리라. 그런 세칭 동방교가 예수교 장로회라는 이름의 복마전속에 명칭과 속내와 사연을 감추고 남녀불문하고 목사니 전도사니 해가면서 이리가 양의 탈을 쓰고 인간의 영혼을 도적질하는 패악질을 계속하고 있으니... 그 결국을 어이할꼬.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는 안타까운 나의 친구, 동료, 후배들이여... 세칭 동방교의 교주 이래 노광공은 자신도 제어하지 못한 욕망끝에 겨우 54세에 그의 生을 요절로 마감했고 성자 하나님으로 떠받들던 그 아들 아브넬 노영구는 남의 나라 도피의 땅에서 63세의 단명으로 그의 生을 마감하고 말았으니... 이제 임자없이 남겨진 그 재물의 꿀물을 빨아먹으면서 총회장이니 국장이니 목사니 하는 그것도 벼슬이라고 돌려가며 주거니 받거니 우쭐거리고 있는 단견(短見)과 거짓 위장에 찌든 그대들이여... 사이비 이단종교에 멍든 인생의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지 못하고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구차한 연명의 방편인가, 이단 사이비에 함몰된 소집단의 영웅심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확증편향의 인간군상인가, 비밀은 영원히 감출 수가 없고 진실은 언제까지나 숨길 수 없는 법, 아니 이미 만천하에 드러나 있으니 이제 장성한 자신의 지력(智力)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식들에게 우리 부모는 이단 사이비종교 세칭 동방교에 일생을 허비한 대책없는 부모였다는 소리를 듣고 말 작정인가, 입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않을뿐 이미 간파하고 있는 그들에게 진실을 숨긴다고 그것이 숨겨지겠는가...
자식들과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온전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반추의 삶에 인색하지 않기를 오늘 에스더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재삼 재사 부탁 또 부탁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글을 읽게 되는 후대의 세칭 동방교 성민(신도)들이여... 교단과 교회는 진정 거짓과 불의 위에 세워질 수 없는 법, 그것은 과거의 일이라고 덮어버리거나 진실을 간과하지 말고 오직 지나간 역사속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의 면을 살펴 보기를 간곡히 당부드리는 바이다. 현재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 그것의 바탕, 즉 그것의 원인과 결과를 거짓없는 사실을 바탕으로 살펴보는 것이 진정 숨어있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의 특징은 개인의 발전이나 양심을 무시한다는 일입니다. 세상은 모두 하나님 것이니까 아무런 물건이든 돈을 가져다 바치면, 그것이 지성으로 바뀌어서 오히려 서로에게 복이 된다는 황당한 이론이지요. 그래서 어떤 선배들은 학교에 있던 평행봉을 파서 교회 마당에 설치한 일도 있었고, 남의 소유물을 슬쩍 훔쳐도 이걸로 지성을 올린다고 생각하면 별 죄의식이 들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정신을 왜곡되게 만드는 동방교는 회개하고 자진 해체하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단의 추억 # 89, 어느 목재상의 여(女)경리' 가 생각나네요. 아마 그분 지금 부산 문현동 한빛교회에 아직 출석하고 있을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