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칼
제11회 작품상
양민주
번뇌를 버리기 위해 밀양 삼랑진 만어산 만어사萬魚寺로 간다. 초여름 더위와 서투른 발씨에 비트적거린다. 목이 마르고 입에선 단내가 나는 고행길이다. 더는 걷기가 힘들어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털썩 주저앉는다. 아예 다리가 아파 드러눕는다. 온몸이 나라지고 스르르 눈이 감기며 졸음이 쏟아진다. 간질이는 햇살에 실눈을 뜨면 파란 하늘이 모가 닳아빠진 세모 네모꼴로 조각나 있다.
나뭇잎 칼이 하늘을 조각내고 있다. 나뭇잎 칼의 그림자가 우수수 떨어져 내 몸을 덮는다. 그림자를 덮고 벤치에 누워보라 드러눕기까지의 맹문은 육체의 피로 때문이다. 함부로 드러눕기는 남이 보기에 꼴불견일 수 있어 조심할 일이다. 조용히 혼자일 때에 신성한 의식과 다름없이 지친 몸을 벤치에 누이면 마음이 겸허해지고 맑은 정신과 새로운 생명이 일어난다.
나뭇잎 칼을 향해 도마에 드러눕듯 벤치에 드러눕는다고 하여 한 마리의 고등어나 털을 뽑힌 닭, 소나 돼지의 고기처럼 잘려나가지는 않는다. 심신의 피로가 나뭇잎 칼에 잘려나간다. 잘려나간 피로의 조각은 주위의 들꽃과 나무를 키우는 거름이 된다. 무한한 공간에 아름다운 꽃이 피고 지천으로 푸름을 더해 가는 신록을 보면 알 수 있음이다. 관계없는척하면서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모든 일이 덧없이 흘러가는 섭리가 진정한 무상無常이 아닐까 한다.
나뭇잎 칼 속에 들었다가 길 떠나는 한 마리의 나비는 갓난아기의 자태로 잠을 자 자유롭고 가볍다. 내가 벤치에서 일어나 떠나는 그 시각은 나비같이 가볍게 새로 태어나는 시점이다. 나뭇잎 칼은 처음부터 권력과 명예와는 무관한 치유와 생명의 칼이다. 탁란하고 떠나가는 뻐꾸기가 미워도 새 생명을 보듬는다. 새로 태어나는 목숨은 신성하다. 나도 한시름 덜어가며 서서히 새로 태어나고 있다.
혹자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한다. 이에 반기를 들어보는 날이다. 요즈음의 펜은 늘 논란의 중심에 있다. 권력에 아부하고 돈을 좇으며 심지어 살인에 일조하기도 한다. 펜이 펜일 때 칼보다 강할 수 있다. 그러나 펜은 환상을 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나뭇잎 칼은 우듬지로 지은 소박한 집에 성긴 지붕이 되어 태양이 뜨면 태양을 따르고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흔들린다. 늘 보이는 대로 정직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으로 함초롬히 칼끝이 선다. 나뭇가지 칼자루에 박힌 칼날은 겨끔내기로 내 몸에 들러붙는 더위를 잘라내고 있다. 은빛 물결처럼 더위가 잘려나간다. 오래 묵은 두통이 치유되고 잡념이 사라진다. 나는 치유라는 나뭇잎 칼이 주는 의미를 시나브로 밝히고 있다. 칼의 자체는 흔들리며 실재하나 나는 이 칼의 흔들림이 주는 의미가 치유라고 주장한다. 나뭇잎 칼이 나이고 내가 나뭇잎 칼이 되고픈 오롯한 가슴 때문이리라.
거연히 하늘을 보면 삼라만상도 나뭇잎 칼에 잘리고 있다. 흰 구름은 깃털 같은 껍질을 남기며 잘리고 이글거리는 태양은 모자이크 모양으로 잘린다. 곤줄박이도 줄곧 날다가 나뭇잎 칼에 날개를 잘려도 바람칼로 날아간다. 이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그리움의 소리마저 잘려 귓가로 떨어진다. 잘려나감은 가뜬해진다는 뜻이다. 불필요한 것을 버리지 못할 바에야 잘려나가는 실체가 응연하다.
배낭에서 물병을 꺼내어 목을 축이고 나뭇잎 칼 아래 놓는다. 투명한 한 줄기 빛의 껍질이 어른거린다. 나뭇잎 칼은 사물을 베고 찌르지만, 피를 내는 법이 없다. 비스름한 모양의 음영을 빚을 뿐이다. 어쩌다 부등깃을 가진 열쭝이를 숨겨주는 모습은 숭고하다. 일생 밤낮으로 쉼 없이 빛을 잘라 그림자를 만든다. 낮의 햇빛을 잘라 만든 그림자는 물 찬 제비같이 산드러지고 밤의 달빛과 별빛을 잘라 만든 그림자는 어둠과 닮아있어 부드러워 정겹다.
이 느티나무도 우주를 지배하는 하늘의 명을 알아 나뭇잎 칼을 소졸疏拙하게 매달았다. 이 광경을 보니 나와 더불어 지천명을 지나 이순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 주위가 한가로워 광음여류光陰如流를 실감치 못하는 선경에 머무니 친구인 양 친근하다. 말과 동작이 느럭느럭한 타고난 성품 탓으로 바삐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면 쉬어 가라고 하고 싶다. 수많은 사람이 산꼭대기에 오르는 등정登頂을 목표로 하는 성급함이 그늘에서 쉬어가는 여유를 잃게 하는 까닭이 아닌가 한다.
어젯밤에는 다 큰 딸아이가 늦게 귀가를 하여 성급한 기질에 호통부터 치고 보았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의 성격에 대해 차분하다는 말은 종종 듣고 있으나 가족의 일 앞에서는 성급해지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오로지 늦었다는 결과가 눈에 보이며 늦은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강다짐이 일었나 보다. 노래를 부르다가 쉼표가 나오면 몇 박자 쉬어가듯이 왜 늦었는가에 대한 내력을 묻고 꾸중을 해도 해야겠다. 자기 방으로 들어가던 딸아이의 힘없는 뒷모습이 눈에 밟힌다.
봄이 오면 나뭇잎 칼은 싹을 틔워 자라고 여름이 오면 춤추고 가을이 오면 수채화가 된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지상으로 내려와 맡은 바 직분을 다한다. 늘 그 자리에 있는 칼이다. 녹음이 짙어가는 계절에 삭신이 느른하여 느티나무 아래에 놓인 벤치에 눕지 않았다면 나뭇잎 칼을 보지 못하였으리라. 새로운 사물의 현상을 보기란 더없이 어려운 일이다. 꽃에 관심을 둔 나에겐 나뭇잎 칼의 발견은 정말로 큰 행운이다.
내가 나뭇잎 칼을 그리워하는 횟수는 아마도 내 나이에 비례할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버리기와 변화하는 일이 어렵다. 나무의 뿌리와 둥치는 사계절을 지나면서 나뭇잎 칼에 생성하고 소멸하는 변화를 준다. 그 변화의 과정 속에는 여러 사람의 인생 노정을 지켜보고 한순간 역사의 증인이 되기도 하며 갈 길을 찾아주는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일편 나에게도 일상의 기우杞憂를 내려놓게 하고 고루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변화를 주기도 한다.
그 한 생각으로 ‘바늘로 그늘 깁기’라는 성어를 짓고 속뜻은 무엇으로 할까 곰곰이 머리를 쓰다가 ‘칼로 물 베기’를 헤아리고 피식 웃는다. 기워도 떨어지고 베어도 다시 붙는 진실을 알면서 사람들은 실행하는데 이게 삶이 아닌가 한다.
햇발과 더위가 나뭇잎 칼을 넘어 나뭇결을 키우기 위해 옥신각신한다. 하지만 함부로 넘을 수는 없다. 불어오는 바람이 새색시 치마 들치듯 살짝 들어 올리면 햇발과 더위는 나이테로 스며들어 나무로 자란다. 나뭇잎 칼 너머에 있는 태양을 바라본다. 눈이 부신 태양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따사로운 햇볕을 비추고 있다. 그러나 나뭇잎 칼은 나그네의 옷과 달라서 성긴 채로 푸르러 간다.
저 멀리 산등성이 밑으로 너덜겅이 보인다.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자신의 수명이 다했음을 깨닫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김해 무척산 신승神僧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신승은 용왕의 아들에게 떠나가다가 멈추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말해주었다. 용왕의 아들이 길을 나서자 동해의 수많은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고 그가 멈춘 곳이 만어사이다. 만어사에 이르자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돌로 변했고 그를 따르던 수많은 고기 또한 크고 작은 돌로 변했다는 전설이 서린 너덜겅이다.
내가 누운 이곳 나뭇잎 칼이 베어낸 하늘의 껍질인 그림자 또한 물고기 떼 같다. 이 껍질들이 갑자기 돌로 변한다면 나는 돌의 무덤 속에 들게 된다. 그러면 나도 미륵돌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되고 싶은 마음은 삶에서 오는 실존적 각박함을 떨쳐내기 위함과 다르지 않다. 내 마음이 지금 그러한가 보다. 언감생심 내어본 욕심이 크다는 것을 알았을 땐 이미 필부匹夫가 되어있었다.
나뭇잎 칼은 내 마음의 상처를 푼푼하게 치유해 주었다. 잔풍에 흔들리며 아픈 다리도 주무르고 이마에 맺힌 땀도 말려주었다. 나뭇잎 칼이 한 장의 책갈피가 되고 강물에 떠내려가는 개미를 구하는 배가 되는 것만 생각한다면 좁은 소견이다. 우리에게 지긴지요至緊至要한 안식을 주기도 한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나뭇잎 칼의 그림자를 슬며시 빠져나온다. 해동갑에 번뇌를 버리기 위해 큰 걸음으로 삼랑진 만어산 만어사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