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송보영
짧지만 옹골차다. 시작과 끝이 그에 의해 비롯된다. 그의 속성은 다채롭다. 시퍼렇게 추운 날도 그 안에 있고 때가 되었다며 서둘러 세상으로 얼굴을 내밀고 싶어 몸살을 앓는 생명들도 그의 품 안에 있다. 계절의 중심에 있는 이들은 한껏 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발싸심하면 되지만 그는 그렇지 못하다. 무채색과 유채색을 함께 품고 살아야 하는 운명 탓에 모두를 아우르기 위해 전전긍긍 할 수밖에 없다.
그는 사이에 삶을 살아간다. 그는 늘 고단하다. 떠나기 싫다며 수시로 찾아와 전신을 흔들어 대는 삭풍을 떨쳐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면 모진 겨울을 살아내기 위해 최소한의 수분만 남기고 가벼워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나목들의 갈(渴)한 목을 축여 주어야 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비만해진 것들을 털어내고 한껏 가벼워진 몸을 검푸른 수피로 감싼 채 휴지기에 들었던 저들에게 새순이 돋을 수 있도록 보듬어주는 일도 그의 몫이다. 그가 지닌 속성 안에 존재하는 유채색의 생명들을 때에 맞춰 밀어 올려야 하는 것 또한 그의 운명이다. 때론 아득하고 목마르지만,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려는 그가 있어 한 계절을 보내고 돌아오는 또 다른 눈부신 계절을 맞이할 수 있음이다.
겨울의 끝자락 봄이 오는 길목에선 정원사는 품 안을 파고드는 꽃샘바람을 견뎌내며 서둘러 시비(施肥)도 내고 가지치기도 하고 봄을 맞을 준비로 마음이 바쁘다. 추위도 무릅쓰고 시린 손을 비비며 애쓴 덕분에 누군가는 일찌감치 봄날의 호사를 누리는 것처럼 그의 헌신으로 대지는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리라.
팔삭둥이로 태어난 탓에 태생이 부실해 조바심치면서도 가교역할을 온전히 감당하고야마는 그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생명이 있는 것들에서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주어진 본분이 있을 터. 이를 잘 감당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끝과 시작을 한몸에 지닌 그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지난 시간에 매여있지 말고 마음의 빗장을 열고 나오라 한다. 때로는 매운바람이 휘몰아치기도 하겠지만, 가슴 한켠에서 용트림하는 미완의 것들을 이루기 위해 발걸음을 내디뎌보라고 속삭인다. 우리는 그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가 보내는 눈길에 포커스를 맞추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한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된바람쯤 맞아도 괜찮다. 삶의 건널목에서 머뭇대다 예정된 빛나는 순간들을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며 다그친다.
보내고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보내야 할 것만 있고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맞이할 것이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렇지만 우리네 삶 속에는 새로운 것들을 맞이하기 위해 발돋움할 무엇인가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소년의 때를 지나면 청년의 때가 있고 청년의 때를 지나면 또 다른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거슬러 갈 수 없는 한때의 시간 중 한 부분이 좀 어긋났다 해도 다시 일어서면 될 일이다.
2월의 거리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수런거림으로 늘 시끌벅적하다. 지난 시간을 뒤로하고 다가올 새날들에 대한 설렘으로 충만하다. 새 학년을 맞을 준비로 설렘 가득한 아이들, 졸업과 입학을 앞두고 새로운 꿈을 꾸는 아이들, 세상에 첫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꿈의 터전 앞으로 살아가야 할 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애쓰는 젊은이들, 생의 막바지에 있으면서도 더운 가슴으로 남은 삶을 옹골지게 가꾸어 가겠다는 소망으로 설렘 가득한 이들. 수없이 쓰러지고 엎어지면서도 다시 일어서기 위해 안간힘 하는 이들. 그들로 하여 세상은 늘 시끄럽다. 그들의 소리없는 함성을 사랑한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아직도 설레는 순간이 있느냐고, 눈부신 날들에 대한 기대가 있느냐고, 지금도 여전히 나는 꿈을 꾼다. 젊었던 날에 꿈과는 다르지만 소소한 일상을 통해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기다리는 순간 설렌다. 작지만 소중한 꿈이 이루어졌을 때 눈물 나게 기쁘다. 이것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설렘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기 위한 디딤돌이다. 또 다른 시작을 위해 발돋움하는 모습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이 모두를 응원한다.
송보영 <문학미디어> 등단(2007) 국제펜 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문학미디어작가회, 충북수필 회원
<계간문예>중앙위원, 충북여성문인협회장, 문학미디어작가회장 역임, 문학미디어 이사
청주시 '일인 일 책 내기'지도강사, 동서문학상, 세계문학상, 원종린수필문학상(작품상) 외 다수 수상.
수필집 《향기를 말하라 한다면》 《이음새》 《아름다운 순환》
격월간
그린에세이 (2024년 1·2월호)
특집 겨울의 낭만 & 2월 이미지
첫댓글 짧지만 옹골차다. 시작과 끝이 그에 의해 비롯된다... 그는 사이에 삶을 살아간다. 그는 늘 고단하다..나목들의 갈(渴)한 목을 축여 주어야 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비만해진 것들을 털어내고 한껏 가벼워진 몸을 검푸른 수피로 감싼 채 휴지기에 들었던 저들에게 새순이 돋을 수 있도록 보듬어주는 일도 그의 몫이다. 그가 지닌 속성 안에 존재하는 유채색의 생명들을 때에 맞춰 밀어 올려야 하는 것 또한 그의 운명이다. 때론 아득하고 목마르지만,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려는 그가 있어 한 계절을 보내고 돌아오는 또 다른 눈부신 계절을 맞이할 수 있음이다.. 2월의 거리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수런거림으로 늘 시끌벅적하다. 지난 시간을 뒤로하고 다가올 새날들에 대한 설렘으로 충만하다. .. 설렘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기 위한 디딤돌이다.. <본문 부분 발췌>
짧지만 옹골찬 달... 2월. .. 새삼 2월이 감당하는 무게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