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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 바다, 그 안 파랑 같은 사랑의 화답
-김지란 시집 《화양바다》 중심
박철영(시인, 문학 평론가)
시는 있어 왔던 삶을 통해 구현되어야 할 장르가 맞다. 시가 그만큼 현실 속 진정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 살아온 동안에 겪었던 우여곡절과 시간의 더께가 층층을 이루듯 감당해 온 일들을 말해줘야 한다. 어떤 고단함과 부침이 난감하도록 밀려왔어도 서로를 사랑했기에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먼바다를 나간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머니는 바닷가 외딴집에서 오매불망한 마음으로 고독처럼 밀려오는 궁핍을 견뎌 낸 것이다. 한 생애를 관통하고 있는 긴 세월이란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다. 때로는 거친 파도가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는 인내와 모진 현실을 극복하며 사는 법을 어머니를 통해 배웠다. 김지란 시인은 화양 바다를 닮은 것처럼 살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어느 때부턴가 그리움처럼 찾아왔다. 입말이 아닌 순정함으로 살아왔던 부모님의 터전이었던 바닷가 발통기미를 요즘 들어 자주 찾게 된다. 이미 갯내나는 바다를 통해 시적인 상상력을 충동하는 기미를 알아챘는지 모른다. 고향 바다는 성장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육화 된 삶이 되어 있었다. 김지란 시인은 2020년 《가막만 여자》를 이어 2023년 《아물지 않는 상처와 한참을 놀았다》를 통해 삶의 살아온 시간을 순정 깊은 담론으로 펼쳐낸 바 있다. 이어 세 번째 시집 《화양 바다》에서는 여수를 돌러 싸고 있는 바다가 던져오는 물음을 절절한 삶으로 화답하며 그 심원한 말들을 풀어놓았다. 거기에서 충만한 서정성을 형상으로 한 긍정은 시의 상징성을 더해 시적 변별력을 돋워 주었다. 삶의 시간은 언제나 무궁한 변화의 세계라고 전제한다면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원체험으로 이뤄진 상상력은 시적 발화로 확연해진다. 진정한 시의 세계처럼 살고자 한 김지란 시인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 근원은 아버지와 엄마의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가끔은
수평선에 가려 바다가 낮아지는 것을 알지 못했다
먼 갯내에 코를 들이댄 아버지
파도를 업고 오는 물때를 읽었다
기억으로만 아는 촉감을 손끝으로 만져
들릴 듯 말 듯한 그 속을 눈치채고
늦은 밤 황망한 뱃머리를 세워 아버지만 알고 있는
화양 바다의 물길을 열어 나갔다
눈앞에서 배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서성이던 바닷가 그 집,
불빛은 쓸쓸해지고 사방은 잠잠해졌다
-<수평선> 부분
사람들은 바닷물이 밀물과 썰물로 들고 나는 줄은 알지만, 달의 운행으로 인한 수심의 변화를 알지 못한다. 그저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는 완전한 풍경일 뿐이었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화자도 “가끔은/ 수평선에 가려 바다가 낮아지는 것을 알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어릴 적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통통배를 타고 인근 섬을 따라갔던 때도 그랬다. 그런 시절을 뒤로하고 취업을 위해 고향 바다를 떠나서는 한 동안을 잊고 살았다. 어느 때부턴가 눈에 어른거리는 “먼 갯내에 코를 들이댄 아버지/ 파도를 업고 오는 물때를 읽었다/ 기억으로만 아는 촉감을 손끝으로 만져/ 들릴 듯 말 듯한 그 속을 눈치채고/ 늦은 밤 황망한 뱃머리를 세워 아버지만 알고 있는/ 화양 바다의 물길을 열어 나갔다”며 그 바닷가 외딴집이 꿈속처럼 마음으로 번져오곤 했다. 나이가 지긋해지면 지난 과거의 시간들이 아련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을 알기에 안타까움이 슬픔처럼 요동치며 밀려오는 것을 어이하리. 추억 속에 오롯한 풍경들이 사라지고 있는 “바닷가 마지막 집 뼈대에 붙은/ 한 생의 비린내를 툭툭 털어내고 있다”라며 화자는 빈터만 덜렁 남은 옛집 주변을 거닐다가 그 안에 몽글거린 추억들을 가슴으로 소환하고 있다.
비추고 싶은 길 있어도 망설인 적 많았지
내 맘 가리키고 있는 길
되돌아가는 그대 바라보다
쓸쓸함을 알았지
망망한 돛 하나 달고 시작했던 속삭임
그게 사랑 같아서
쫓아가다 길을 잃어 난감했지만
어차피
풍랑이 거칠어도 넘어서야 할 해협이었다
마음에 켠 불빛 하나
물때 맞춘다 해도 무슨 파랑이 잠들겠는가
맨 처음 바다를 비추며 환하게 웃었던
발통기미 방파제 등대 불빛
다정히도 붉네
-<등대> 전문
바다는 수많은 변화를 풍상처럼 겪었지만, 언제나 말이 없다. 오직 나아가고 돌아오는 길은 등대가 암호 같은 불빛을 어부에게 발신하여 기능을 유지했다. 아버지는 ‘발통기미’ 작은 등대를 이정표 삼아 많은 날들을 고뇌하며 먼바다를 오갔다. 바다의 거친 파도도 그걸 알아챘을까? 어떻게 하면 살아 돌아올 수 있는가를 알려주던 등대와 수많은 교감을 나누었을 것이다. 망망한 바다를 드나들며 간절한 삶의 의지를 불태웠을 바다의 밤은 만선의 희망으로 요동치곤 했다. 바다의 물때에 맞춰 물길을 드나들었지만, 아버지의 삶에서 어느 한때라도 고요처럼 잦아져 평온한 적이 있었던가? “마음에 켠 불빛 하나/ 물때 맞춘다 해도 무슨 파랑이 잠들겠는가” 아버지를 바다에 내보낸 뒤 등대 불빛을 바라보며 혹시나 들어올 배를 먼발치에서 지켜봤을 어머니였다. 화자는 “맨 처음 바다를 비추며 환하게 웃었던/ 발통기미 방파제 등대 불빛/ 다정히도 붉네”라고 말한다. 그 등대가 단순하게 불빛을 밝힌 조형물이 아니다. 거친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어부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가를 나이 들어 깨달았다.
<등대의 용도>에서 “발통기미의 등대는/ 오른쪽 어딘가를 향해/ 붉은 불 하나를 켜 경고를 보냈다// 오른쪽은 위험하다고// 어떤 실패들은 가까이 가지 말라고/ 몸을 태워 신호를 보”내 풍랑과 암초를 피하게 하는 비밀을 공공연하게 발설하여 바다에서의 안전한 항해를 도왔다. 밤에 깜빡이는 등대 불빛이 죄다 빨간 줄 알았다. 붉은색과 녹색 불빛의 의미가 달랐던 것이다. 그 불빛의 신호에 따라 어부들은 암초와 풍랑을 피해 항구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내 안에도 언제나 깜박이던/ 두 개의 불빛이 있어 멈출 곳과/ 돌아갈 곳을 잃지 않고/ 용케도 항구를 찾아왔다”며 화자도 바다에 나간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껏 두 개의 불빛을 쫓아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그 불빛들은 사랑이 넘친 발통기미 바닷가의 작은 집에서 시작되어 아버지의 삶을 간절하게 넘나들었다.
멀리 나갔다 들어온 해안선이
새끼 섬 두엇을 데리고 왔다
예전 흐르던 민물이 바다 초입에 이르러
망연해진 마음을 다독였던 섬달천
떠내려온 지류가 곳곳을 스쳐
돌고 돌아가다 겨우 찾아든
어느 멋진 날*
향기가 담긴 메뉴판에서
노을빛으로 번져오는 자몽 몇 조각
조상의 내력을 밝히듯
마지막 입맛으로 말해주는
잊을 수 없는 쌉싸래한 맛
혀끝에 남은 그 느낌만으로
이전(애당초) 하나로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탱자 맛을 기억하는 화양 굴구지 해안
몇 번을 망설였던 그 맛이
다시 기억에서 살아나고 있다
수평선 너머 뿌옇던 섬달천
그 바다 깊숙한 놀빛이 향기처럼 스며들 때
*여수 섬달천에 있는 카페
-<자몽 바다> 전문
바다의 출항은 언제나 빈곤 때문이었다. 어부에게 바다란 숙명일 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육지에서의 논밭으론 토끼 새끼 같은 아이들을 키워낼 수 없으니 궁리 끝에 찾아낸 탈출구였다. 썰물과 밀물로 교차하는 바다는 하루도 빠짐없이 멀리 나갔다 느릿느릿 가장자리로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토끼 새끼 같은 자식들은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다 성장한 자식들은 거친 바닷가의 나아지지 않는 고통과 궁핍을 피해 달아나듯 서울로 서울로 떠나갔다. 타지로 떠난다 해도 죄다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을 든든하게 받쳐주지 못한 태생적 궁핍 때문이었을까? 객지에서 터를 이루지 못한 아이들이 눈치 보듯 고향 근처를 맴돌고 있다. 먼발치에서 뻘쭘하게 서 있는 아이들을 남들 눈을 피해 데려오는 어미의 심정을 꿰뚫기라도 한 듯 “멀리 나갔다 들어온 해안선이/ 새끼 섬 두엇을 데리고 왔다”라는 시적 상상력은 시의 전경을 애타는 모성성의 서사로 일거에 확장해 버렸다. 화자는 여수 섬달천변의‘어느 멋진 날’의 카페에서 자몽 주스를 마시며 뿌옇게 펼쳐진 뻘 밭 너머 바다를 바라본다. 군데군데 흩어져 뭍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섬들을 바라보며 지나온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펼쳐졌을 것이다. 바다의 고된 추억들이 통증을 자극한 탓인가? “마지막 입맛으로 말해주는/ 잊을 수 없는 쌉싸래한 맛/ 혀끝에 남은 그 느낌만으로/ 이전 하나로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탱자 맛을 기억하는 화양 굴구지 해안/ 몇 번을 망설였던 그 맛이/ 다시 기억에서 살아나”지난 일들이 눈가에 아롱져 번져온다.
빈바다증후군인가
심장에 기억된 물때와
뼈마디로 느끼던 날씨는 잊은 지 오래
팔딱거리던 기억도 한 템포 타이밍을 늦추고
식욕은 부력을 따돌리며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마른침을 삼키는 불면의 시간에
닮은 듯 다른 길을 살아온 모녀
서늘했던 입맛의 온기를 기다리며
옛 생각에 주파수를 맞춘다
짭조름한 눈물 닮은 갯것으로
미역국 한 솥 끓인다
첫아이 낳았을 때 엄마가 끓여준 그때처럼
진하게 우러나오는 파도의 시간
밀어버린 수평선이 슬그머니 찾아오면
밀물에 갯것들도 돌아와
수척해진 바다가 몸을 푼다
-<팔순의 바다> 전문
“빈바다증후군인가/ 심장에 기억된 물때와/ 뼈마디로 느끼던 날씨는 잊은 지 오래/ 팔딱거리던 기억도 한 템포 타이밍을 늦추고/ 식욕은 부력을 따돌리며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듯 엄마의 눈빛이 자꾸 흐려진다. 시간의 부침을 이길 수 없었을 터지만, 아버지와 살아온 긴 세월 이후 홀로 된 시간들이 버거웠을 것이다. 그 빈자리가 허전했던가? 큰 딸내미 쪽으로 자꾸만 마음의 무게 추가 기울고 있다. 부쩍 힘들어하는 엄마와 함께 한 날들이 늘면서 “마른침을 삼키는 불면의 시간에/ 닮은 듯 다른 길을 살아온 모녀” 번번이 일상에서 맞서는 일들이 잦아졌다. 모든 것에서 홀로 생각하며 결정해 온 엄마의 시간이 흔들리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화자가 엄마의 마음이 되어 “밀어버린 수평선이 슬그머니 찾아오면/ 밀물에 갯것들도 돌아와/ 수척해진 바다가 몸을 푼다”며 엄마의 바다였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창고 옆 귀퉁이에 놓인 경운기
쉴 새 없이 엉덩이 덜컹거리던 고샅을
한없이 바라만 본다
고구마 콩대 참깨 들깨 토란대 싣고
들판을 누비던 힘이 빠져나가고
앙상한 뼈대만 남았다
아버지 바깥 나서는 일이 뜸해지더니
손때 묻은 것들 눈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식구들 챙기던 풍성하던 밥상의 내력만
가슴에 품었다
초점 잃은 아버지를 위로하듯
광대나물꽃 봄까치꽃 까마중열매
철을 잊은 개망초
풀꽃들 날아와 한 상 가득 잔칫상을 차렸다
개망초꽃 꺾어
쪽진머리에 꽂아주면 환하게 웃던
엄마의 그립도록 아름답던 시절이 생각났을까
개망초 꽃 한아름 안아 들었다
망백望百을 바라보는 당신 슬하에는
젊은 아내와 모내기 전 무논 개구리 울음소리
경운기에 묶여 어슬렁어슬렁
따라오던 황소 한 마리 함께 살고 있다
-<풀꽃밥상> 전문
한 편의 시를 통해 화자의 성장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적 발현의 매개체로 포착한 산 밭가에 녹이 슬어 가는 경운기를 절묘한 시간의 상관물로 환기하고 있다. 아버지(황소)와의 추억들이 사랑으로 번져와 마음 언저리를 맴돈 것이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가 돌이킬 수 없는 행복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바닷가 비탈진 산 밭가에 녹슬어가는 ‘경운기’한 대, 그 경운기에 “고구마 콩대 참깨 들깨 토란대 싣고/ 들판을 누비던 힘이 빠져나가고/ 앙상한 뼈대만 남”은 아버지의 시간을 회상하고 있다. 모든 것이 멈춰 버린 그곳처럼 “초점 잃은 아버지를 위로하듯/ 광대나물꽃 봄까치꽃 까마중열매/ 철을 잊은 개망초/ 풀꽃들 날아와 한 상 가득 잔칫상”에 아버지를 위한 ‘풀꽃 밥상’을 올린다. 개망초 하얀 꽃 한 아름을 꺾어 엄마의 아름다웠던 그 시절처럼 머리에 꽂아드렸다. 화양 바다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정겨운 고향 집은 오랜 풍경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집 마당에서 빤히 보이는 손바닥만 섬 안을 훤히 꿰뚫고 있다.
어릴 때 자주 걷던 시골길 혼자 걷는다
조개동 할머니 집터만 남아
거친 억새를 키우고
깨벗고 바다에서 헤엄치다 헹구러 가던 우물
매끈하던 물의 살결
손끝에 닿던 촉촉한 초록 이끼
우물이 있던 자리는 이제 흔적도 없다
굴구지 갱번에는 어촌감성카페가 들어서
차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내가 알던 어르신들 몇 분만 남고
집들도 사라져
겨울 거친 바닷바람에 터만 휑하다
세상이 버린 번지수를 안고
집 한 채 대나무를 품고 서 있다
남겨진 마루 밑 고무신은 그대로인데
이 집 할머니는 어떤 신발로 다음 생을 향해 갔을까
골목길이 뱉어내는 서늘한 안부
젊은 아빠 술주정 홀로 사그러질 때까지
어둠 속에 숨어있었던 자리
눈물 마를 새 없었던 그곳에서
어린 내 발자국은 지워지고
그래도 그 따뜻함을 잊을 수 없어
식어가는 골목길에 오래 서 있다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무리져 핀 개망초 꽃도
좁쌀만 한 꽃향기를 하얗게 쏟아놓던 사스레피
가슴 안에 담아둔 이야기를 도란도란 들려주는데)
지금 그 주인공들 다 어디로 갔을까
-<굴구지길> 부분
세월은 과거의 추억 속에 존재한 흔적을 지워간다. 그곳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화자의 가슴속에 간직한 추억에서만 가능하다. “세상이 버린 번지수를 안고/ 집 한 채 대나무를 품고 서 있”는 굴구지길 안 마을도 세월의 변화를 비껴갈 수 없다. 유순한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목 좋은 곳은 고즈넉한 풍경을 지우고 낯설기만 한 감성 카페가 문을 열어 성업 중이다. “어릴 때 자주 걷던 시골길 혼자 걷는다/ 조개동 할머니 집터만 남”은 풍경들이 할머니의 자상했던 모습으로 어른거린다. 유년기 손때 묻은 바닷가 ‘굴구지’ 집터와 개망초 꽃 희게 무리 지어 피던 비탈밭도 엄마의 고단한 생처럼 화양 바다를 향해 기울어진 것을 알았다. 누구 하나 눈길 한번 주지 않던 굴구지 길가에 좁쌀만 한 꽃들을 하얗게 쏟아놓던 사스레피 꽃향기마저 애틋해졌다. 그토록 정겨웠던 사람들이 예쁘기만 했던 풍경들이 눈앞에서 사라져 간다. 수년 전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에도 깨닫지 못했던 온기 품은 풍경들이 말을 걸어왔다. 오롯한 추억이 깃든 바닷가를 거닐다 보면 사라져 없는 것들이 몹시 그리워진다.
사람을 품지 않고
소문만 무성한 섬이 있었다
물때를 기다렸다가
아버지는 우리들을 사자 앞발에 풀어놓았다
포말처럼 포효하는 어린 사자가
한눈파는 사이 비린 속살을
낮은 포복으로 헤집고 다녔다
사람들 손길이 쉬 닿지 않았기에
바구니에는 싱싱한 갯것들이 금방 차올랐다
밀물이 사자 발목까지 찰랑거리면
잃어버린 고요가 찾아드는 시간뒤로
한 시절 건너오니
허물어진 바다 풍경 뒤로
시간의 물살을 고스란히 견딘 사자의 갈기는
거친 파도에 헝클어진 아버지 머리칼이었다
이제 앳된 사자는 그 섬에 없다
*장재도로 여수시 화양면에 있는 무인도
-<사자섬*> 전문
‘사자섬’은 무인도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그곳을 수시로 드나들던 곳이기에 사람이 사느냐 살지 않느냐는 그리 중요치 않다. 작은 배를 손질하면서 “물때를 기다렸다가/ 아버지는 우리들을 사자 앞발에 풀어놓”으면 그 섬에서 맘껏 뛰어놀 수 있었다. 앞마당 같은 그 섬을 잊은 지 오래인데 우연한 기회에 그곳이 ‘사자섬’이란 것을 알았다. “한 시절 건너오니/ 허물어진 바다 풍경 뒤로/ 시간의 물살을 고스란히 견딘 사자의 갈기는/ 거친 파도에 헝클어진 아버지 머리칼”처럼 닮아 보였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정글을 쏘다니는 사자처럼 바다를 움켜쥔 모습이 아버지의 얼굴 같아 보였다. 어리기만 한 철딱서니 없던 시절 화자는 사자 새끼였던 셈이다. 지금도 한없이 바닷가를 따라 걷다 보면 어디선가 손을 끌어줄 것 같은 그리움이 욱신거리는 소호동 바닷가를 걷는다. 그곳의 시작도 아버지가 이른 새벽을 털어내고 출항하던 선착장인 것처럼 그 안에 언제나처럼 다다라 있었다.
어디쯤 오는가
잔파도에 들썩이는 동동 다리
흔들릴 때마다
저 어둠 어딘가에서
바빠진 마음으로 좌표를 찍어 대는 데
무심하게도 엉성한 그물에서 빠져나간 그리움들
흘수선을 넘어온 만조에
긴 하루를
지워진 물금 위에 새겨 놓고 왔다
*여수시 소호동 해변에 설치된 산책로
-<동동 다리*> 부분
잔잔한 파도가 4차선 도로를 건너려는 듯 멈칫대는 곳, 불빛 현란한 여수 도심을 따라 5km 남짓한 소호동 바닷가 산책로는 황홀보다 소란하고 싶은 충동이 몰려온다. 파도가 달려왔다 멀어져 가는 잔물결도 거친 파랑이 아니라서 좋다. 먼바다를 타고 온 갯내가 바람에 묻어와 “눈 맞추지 못해 애태우던 속내를/ 내색하기 좋은 곳”을 무던히도 찾아봤지만, 이만한 곳이 없다. 세상 사는 것이 전생前生의 업보라도 되는 양 모질지 못한 마음을 다잡아 주는‘동동 다리’가 섶길처럼 유영하는 별들을 현생現生으로 끌어안고 있다.‘사람’이나 ‘동동 다리’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매한가지다. 가끔은 막연한 세월의 그리움이 밀려와 쓸쓸해졌지만, 이내 사뭇해 지곤 했다. “물때를 가늠하며/ 행여 행여 다가오나 싶어/ 수없이 귀 기울인 것들”처럼 텅 빈 산책로에서 한참 동안 먼바다를 바라보며 귀를 기울여 본다. 바닷가의 밤은 홀로 더 쓸쓸해져 깊어지다 멀어져 가는 법이다. 자꾸만 빠져드는 풍경에 좌표를 찍지만, “무심하게도 엉성한 그물에서 빠져나간 그리움들// 흘수선을 넘어온 만조에/ 긴 하루를/ 지워진 물금 위에 새겨 놓고 왔”는 데도 바다의 파랑은 노도 같은 말들을 쏟아낸다. 어차피 사랑은 만났거나 아직도 만나지 못했거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랑이 운명이라면 어떻게든 필연처럼 만나게 된다.
살아온 내력을 다시 땅에 묻는다는 것
어쩌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을
온전하게 되돌리는 것일지 몰라
엄마의 허리께에 물든 푸른 멍울 닮은
마지막
계절을 땅에 묻는다
-<푸른 멍울을 묻다> 부분
한 생을 추스리는 것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한다. 그러다 알 수 없는 마음의 멍들이 흔적을 새기곤 했다. 해마다 겨울이 오기 전 엄마는 무를 땅에 묻었을 것이다. 다급한 그 계절에 엄마는 허리를 다쳐 밭일을 마무리할 수 없게 되자 매번 걱정이다. 채근하는 엄마를 위해 “부랴부랴 엄마의 텃밭으로 달려가/ 뽑은 무를 하나씩 땅에 묻는다/ 내 손으로 수십 개의 무를 구덩이에 묻으며/ 엄마의 시간을 묻”어 놓았다. 무를 묻으면서 문득 엄마의 일상이 계절의 고비에서 멈춘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수년 전 아버지 먼 곳으로 떠나보내고 그리움이 깊어져 심신이 쇠잔해진 탓이다. 세상과 맞서며 사는 것이 더 위중한 일인데 자꾸만 사는 일에 무심해진 엄마를 본다. 엄마의 텃밭에 “살아온 내력을 다시 땅에 묻는다는 것/ 어쩌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을/ 온전하게 되돌리는 것일지 몰라”라고 묻지만, 그런 것을 알고도 고단함에 지쳐 마음의 멍울을 만들곤 한다. 언젠가는 가슴을 콕콕 찌른 아픔으로 되살아 날 것이다.
바다절기는 이장님 마을방송에서 시작된다
한여름의 뻘밭에서의 채취
바다를 더듬는 바쁜 숨소리
지척에서 팔닥팔닥 뛰는 숭어가 반짝
짠물이 눈동자를 순간 덥친다
순간 쏟아지는 어둠에
한바탕 떠다니는 빗소리
무심히 툭툭 꽂히는 빗방울이
바다 수면에 무한의 동심원을 만든다
동심원 그 안에 갇힌
헤엄쳐 건너가지 못한 문장들은
어떤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을까
바다숲에서
막 뜯어온 청각을 데친다
물속에서 풀어지는 시퍼런 바다의 비밀
문양의 암호를 풀자 바다의 계절은 바뀌고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화양바다 한사발에
짭조름한 오랜 어둠들이 어슬렁거린다
-<화양바다> 전문
이 시의 발화 지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요즘 흔치 않은 이장님의 마을 방송이 산자락을 돌아 용케도 들렸다. 물때에 맞춰 사는 바닷일에도 절기가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았다. 농사일은 계절 변화에 따라 바삐 움직여야 하기에 24 절기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바닷일에도 계절에 민감한 ‘갯것’하는 날이 따로 있나 보다. ‘갯것’하기 좋은 날을 미리 알리는 이장님의 스피커 방송이 유년의 추억을 자극했다. 엄마 따라 “한여름의 뻘밭에서의 채취/ 바다를 더듬는 바쁜 숨소리/ 지척에서 팔닥팔닥 뛰는 숭어가 반짝/ 짠물이 눈동자를 순간 덥”쳤던 어릴 쩍 추억을 까맣게 잊고 지냈던 것이다. 그 아련한 삶의 추억들이 바다의 노을처럼 사위를 파고든다. 그러다 이내 밤을 맞듯이 간만의 평안을 찾았다. 바다는 나를 키워낸 아버지와 엄마의 품처럼 아늑하였다. 그 바다에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다시 배운다.
<병상일기>는 가장 가까이서 엄마의 상태를 지켜본 결과다. 그 긴 수고와 누적된 피로를 그나마 반감시킬 기회가 된 ‘이장님 마을 방송’은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이방인 같은 자식한테도 낯선 풍경이다. 때마침 그날은 바다의 “일곱물 때/ 봄비 촉촉이 내리는 날”이었고 ‘이장님’의 말이 웅웅 거린 스피커에서 퍼져 나왔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부터 바다 영을 틉니다/ 한집서 꼭 두 사람까지만 나와서/ 바지락도 캐고 해삼도 잡고/ 개불도 캐십시오”라는 말투가 우스꽝스러웠고 재미를 더해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병상에 계신 엄마도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픈 허리를 들썩였다. 오랫동안 그 일들을 온몸으로 해왔기에 벌로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시 <텃밭의 비밀>은 엄마의 비망록이다. “엄마가 아프기 전까지/ 텃밭은 흐트러짐이 없었”기에 간혹 집에 들를 때면 신기한 듯 텃밭을 둘러보았다. 신기하게 “쪽파 대파 시금치 상추 김장용 갓/ 추위를 나는 것들만/ 푸르게 자라”고 있어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다. 매번 푸성귀를 키우기 위해 거친 풀들을 호미로 매면서도 엄마는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고 믿었다. 어쩌다 힘에 부쳐 자음과 모음이 어긋나는 때에도 엄마의 고단함을 알지 못했다. 언제나 정갈하던 텃밭이 엉망이 된 것은 엄마의 ‘허리’가 문제였다. 그렇게 꽁꽁 숨겨진 고통스러운 말들이라서 알아듣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텃밭은/ 어머니만의 화양 바다였다// 그 안에 몰래 키워 낸 치어들이/ 가득 차 있었다// 호미를 쥐고 몇 번씩 파도를 뒤집다가/ 그만 두었다”는 화자는 텃밭 매는 일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엄마의 시간은 온통 상형문자여서 서툰 추측만이 앞섰고 간혹은 엉뚱한 문장으로 읽어내곤 했다. 늦었지만, 모든 것이 사라지기 전 텃밭에다 엄마가 그려놓았던 바다에 선명하게 물길을 내주었다. 엄마의 가슴에서 행운의 네잎클로버가 돋아났다.
나를 일으켰던 네 잎의 초록
그 초록은 끝내 면회를 오지 않았다
딸내미 첫 월급으로 샀다며
아끼던 아버지 반지
장롱 깊숙이 고이 놓고 간 시간의 무게
나이 들어서야 그 무게가
나를 키웠다는 걸 알았다
그 반지는
겨울에도 더 푸른 네잎클로버가 되어
지금 내 약지에 조용히 살아 있다
-<네 잎 반려伴侶> 부분
사람도 새도 몸집이 커지면 제 살 곳을 찾아 어디론가 떠난다. “새봄의 달력을 찢고서야/ 열매를 맺고 있던 것들이/ 떠난 줄 알았다”라는 말의 깊이 속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본다. 화자의 아들 셋도 훌쩍 성장해 부모의 품 안을 떠났기 때문이다. <네 잎 반려伴侶>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는 기회가 된다. “딸내미 첫 월급으로 샀다며/ 아끼던 아버지 반지/ 장롱 깊숙이 고이 놓고 간 시간의 무게/
나이 들어서야 그 무게가/ 나를 키웠다는 걸 알았다”며 아버지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다 화자가 사드렸던 반지를 발견한다. 이 즈음 유품을 통해 시적 상상력을 사랑의 상징성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다. 김지란 시인은 지나칠 수 있는 일상을 확연한 실체로 환기하여 시의 변용으로 변주를 거듭해 낸다. 시의 난해와 모호성을 활용하여 체험적 서사가 빈약한 시들을 영혼 없는 유사 조형물처럼 찍어낸 시들과는 확연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속성으로 학습한 체계에서 배운 기교에 따른 산물임을 부인할 수 없다. 시는 실재한 삶의 전체이고 진솔한 마음을 서정으로 풀어낸 것이어야 한다고 필자는 누누이 말해왔다. 이런 면에서 변별성을 갖춘 전형으로 요즘 들어 흔치 않은 체험적 가치에 충실한 서정성을 올곧게 구현하는 시인임이 분명하다. 시 내용처럼 엄마는 화자에게 반지를 건네주며 동생과 오빠 셋이 나눠 갖길 소망했다. 그로 인해 손가락에 끼고 있는 “그 반지는/ 겨울에도 더 푸른 네잎클로버가 되어/ 지금 내 약지에 조용히 살아 있다”며 말을 아낀다. 아버지의 시간을 들출 때마다 아릿한 통증이 가슴으로 번져왔다. 우연처럼 맺어진 인연을 끊어낼 수 없는 모진 생을 보았다.
<물때>의 시에서 조우한 노파의 모습이 생생한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고흥 어느 섬이었던가/ 어디선가 날아온 노파가/ 산꿩 울음처럼 울컥 가슴에 박힐 때// 한 노파가 무덤 앞에 쪼그려 앉아/ 누군가의 비석을/ 손바닥으로 더듬듯 닦”는 모습이 눈에 아려왔다. 노파는 생에서 끊어낼 수 없는 인연의 고리를 가슴으로 쓸어안고 절망에 찬 울음을 쏟고 있었다. 순정처럼 지극한 마음이란 것이 쇠약해진 노파의 가슴에서 더 강한 욕망이 되곤 했다. 다들 산 사람은 독해야 사는 것이라지만, 그렇지 않은 것의 저 질긴 인연을 어이 하리. 그 모습을 “우리는 잠시 스쳤을 뿐인데/ 어느 생의 끝에서는 이렇게/ 낯선 울음에 심장이 젖는가?”라며 되물어 온다. 화자의 마음도 노파만큼이나 여린 것은 매한가지다. 그 마음이란 것이 천년만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는 바다 물때처럼 “드러난 썰물의 등뼈가 다시 잠기는 것처럼/ 가슴에 박혀/ 일곱 물의 바다가 내 안에 들어왔다 밀려갈 때”마다 그 흐름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본다.
화양 바다 파도 내음 담아 다소곳이 피어난
언덕배기 아카시꽃 향기라 해도
무엇을 더 보태어도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고
그 향기 걷잡을 수 없이
내게 덤벼들던 그날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생의 봄날인 것을
-<아카시꽃 핀 언덕에서> 부분
5월이면 온통 꽃들 천지다. 지천으로 피던 봄꽃들이 시들어 낙화로 흩어질 때 하얗게 뭉텅이처럼 피어나는 아카시꽃이 있다. 계절 변화에 따라 피는 꽃들이 무슨 맹세가 있겠는가? “돌아서면 외길 같았으나/ 환히 가슴을 열어젖히던 바다/ 나는 아직도 그 바다를 냄새로 기억하지/ 사랑한다며 달려들던/ 거친 파도 같은 옆모습// 이제 소금기 가신 산등성이에 서서/ 행여 올 것만 같아 하염없이 기다리지”라며 꽃처럼 아름답던 시간들이 존재했던 것을 기억해 낸다. 그 아카시꽃을 보며 엷게 바랜 언약을 다시 상기하고 있다. “화양 바다 파도 내음 담아 다소곳이 피어난/ 언덕배기 아카시꽃 향기라 해도/ 무엇을 더 보태어도/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고/ 그 향기 걷잡을 수 없이/ 내게 덤벼들던 그날/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생의 봄날인 것을”알게 되었다. 환희에 찬 추억의 시간을 한 시절 꿈처럼 소진해 버릴 수 없다. 그 절정의 만개가 남긴 순간의 의미를 영원성으로 환기시킨다. 꽃은 절정을 지나 소멸로 치닫는 것이 아니다. 꽃은 사라져도 꽃의 형상으로 색인된 말들은 잊지 말아야 할 만남의 의미로 재 정립된다. 삶은 실존적 구실을 실천하는 반복이기에 지난 시간과 단절되지 않고 결연하도록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다.
바다는 물결을 넘겨
표정을 바꾸고
그물은 바다를 한 조각씩 건져 올린다
조류가 빠른 곳에 안강망을 펼쳐 두고
기다림은 물속에서 먼저 늙어간다
투명하고 촘촘한 덫에
스치기만 해도
밤새 흔들리던 때가 있었다
별 하나 조개 하나
사소한 말 한마디 눈빛 하나
지워지지 않는 장면들이
그물코마다 걸리고
저녁이 되면 어선의 불빛들이
엔딩 크레딧처럼 흔들렸다
접혀 가는 그물 아래로
오늘의 장면들이 젖은 채 쌓여갔다
잡힌 것들보다
빠져나간 것들이
더 오래 반짝이는 밤
아직 던지지 않은 이름과
아직 닿지 않는 파도가
먼 어둠에서 밀려오고
바다는 끝내
멈추지 않고 오래토록 상영했던
화면을 다시 보여준다
-<안강망*> 전문
어부에게 바다는 매 순간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바다는 수시로 물색을 바꾸고 수심을 가쁘게 몰아쳐 물굽이를 열어 닫거나 하여 물고기들을 그물 속으로 들여보낸다. 바다의 신호를 알아챈 어부들은 그물로 물고기가 드나든 길목을 틀어막았다. “조류가 빠른 곳에 안강망을 펼쳐 두고/ 기다림은 물속에서 먼저 늙어간다”라며 안강망은 먼바다까지 진출하여 수십 일을 물고기와 사투를 벌인다. 바다에서 안강망을 펼친 시간 동안 어부들은 적막으로 치닫는 하늘을 보며 “별 하나 조개 하나/ 사소한 말 한마디 눈빛 하나/ 지워지지 않는 장면들이/ 그물코마다 걸”려든 물고기의 숫자만큼 몸부림치는 바다의 떨림을 신호음처럼 감지한다. 물길을 따라온 물고기들이 그물에 갇히고 바다를 그만큼씩 어창에서 덜어냈다. 그럴 때마다 밤하늘의 별들이 무수히 바다로 떨어졌고 피로에 지친 어부들이 나동그라질 때 먼동이 환하게 트기 시작했다. “아직 던지지 않은 이름과/ 아직 닿지 않는 파도가/ 먼 어둠에서 밀려오고// 바다는 끝내/ 멈추지 않고 오래토록 상영했던/ 화면을 다시 보여준다”며 깊숙한 곳에 펼쳐진 안강망 그물 안에 갇힌 물고기의 파닥임이 요동처럼 들려왔다. 그들이 뭍으로 올라와 경매에 붙여지면 한동안은 어부의 등이 편안해졌다.
김지란 시인의 시 세계는 살아있는 체험에서 체현된 언어의 실체로 완성된다. 시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하는 바다는 성장기를 거쳐 현재까지 관통하고 있다. 고향을 떠난 10여 년의 공백을 빼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 삶의 터전이다. 자연스럽게 원체험 공간으로 삶의 전부가 바다를 통해 진화한 것이다. 더욱 주목할 지점은 시의 서사가 농밀하여 단조로움으로 내연內燃되지 않고 진전된 서정성으로 확장 변주하는 기제로 활용한다는 데 있다. 시가 현실의 결과물이라면 수시로 부닥치는 고통을 극복해야만 상상력으로 확장된 고도에 도달할 수 있다. 바다를 사랑하는 이유를 그래서 쉬이 발설할 수 없다. 바다 곳곳에 파랑처럼 출렁이는 아버지와 엄마의 시간이 혼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세월을 통해 체화된 사유가 오랫동안 몸집으로 부풀려졌다. 마냥 부풀어 오를 것 같은 우려도 나이가 차면서 절제된 배열로 모습을 드러냈다. 논리보다 따뜻한 감성으로 바라보았던 화양 바다를 온몸으로 부닥치며 살아온 때문이다. 바다는 매번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 또한 삶이 그러하였기에 갯내 물씬 나는 감동을 소진하지 않고 격하게 소용돌이를 일궈 시의 언어들을 찾아간 것이다. 그것의 진면은 헛됨 없이 살아온 삶의 모범에서 비롯될 수 있었다. 지금껏 많은 시인들이 바다에 관한 시들을 썼다. 김지란 시인은 그런 유형의 시와는 다른 시적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원체험 공간인 화양 바다의 파랑을 윤슬처럼 피워 올린 사유가 곧 헌신적인 사랑이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김지란 시인은 시 <타이어>에서 “남편은 25톤의 하루를 싣고/ 열네 개의 타이어로 세상을 굴러”다녔다며 “한 바퀴는 한 계절이었을까/ 한 바퀴는 등록금이었을까/ 또 한 바퀴는 밤늦은 귀가와/ 기다리다 식은 밥상이었을까/ 열여섯 개의 원이 겹겹이 돌아/ 아들 셋의 키를 밀어 올리고/ 비어 있던 칸들을 채우고/ 꺼질 듯한 불 심지를 간신히 이어왔다”며 고단한 일상을 감당해 온 남편의 노고를 잊지 않았다. 지금껏 ‘화양 바다’ 같은 삶의 진정이 무엇인가를 고뇌했을 김지란 시인은 소중한 사랑을 실체로 보여주었다. 그 실천은 바다를 향한 마음처럼 지속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