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입안에서 겉도는 말이다. 평소에도 자주 부르지 않는 이름이니 쉬 나올 것 같지 않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애절한데, 아버지에 대해서는 무덤덤하기만 하다. 가부장 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대다수 자식들 일반의 심정이다.
아버지는 부산에 터전을 마련하고 살았지만, 고향은 언양 작천정 바로 위의 마을이다. 고향으로 가려면 언양행 시외 버스를 타고 작천정 입구에서 내려야 한다. 그기서부터 300여 그루의 벚나무가 약 1Km에 걸쳐 양옆으로 죽 늘어선 곳을 지나면 하천(酌掛川)을 낀 도로변에 정자(酌川亭)가 나타난다. 작괘천은 상앗빛을 띤 반석이 푸른 물, 깊은 계곡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어 시인 묵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작천정은 이 하천의 가장 아름다운 곳에 3칸 규모로 고려 시대부터 위치해 있다. 정자 앞의 너럭바위는 긴 세월에 깎여 나가, 넓은 마당이 되었고, 한곳이 움푹 파여 큰 술잔처럼 보인다. 간월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그 술잔을 사시사철 철철 넘치도록 채운다.
이런 선경(仙境) 같은 곳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지독히도 궁색한 집안의 육 남매 중 장남이었다. 제사를 모셔오기 전, 기일이 되면 버스를 타고 시골로 떠났다. 그럴 때면 어린 나도 함께였다. 천지도 모르는 나를 왜 데려갔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알토란같은 내 새끼’를 자랑하려고 그랬으리라.
늦은 밤, 부자(父子)는 혼잡한 버스에서 작천정 입구 대로변에 내동댕이치듯 부려졌다. 양복을 잘 차려입은 아버지는 아들을 들쳐업고 양쪽으로 늘어선 벚나무 터널과 작천정 계곡 길을 터덜터덜 걸어서 올라갔다. 작천정 계곡에는 지천으로 널린 옥석들이 달빛에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어린 눈에도 정말 신비롭게 느껴졌다. 지금은 바위가 불그스레하게 세월의 때가 묻어 그런 풍광(風光)이 결코 나올 수 없다. 아버지와 함께한 가장 오래된 순백의 추억이다.
그 외는 다 읽은 신문지를 펼치고 먹을 갈아 글씨 공부를 하던 모습, 나를 수시로 불러 놓고 남의 것을 탐하지 말고 항상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던 훈계의 말씀이 떠오른다. 옆집에 사는 이모부가 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 분이라는 말을 자주 하던 기억도 있다. 이런 아버지 덕분에 ‘공부를 왜 하지?’ 하는 고민도 없이 그냥 열심히 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살았던 것 같다.
내가 결혼해서 2층에 전세를 얻어 살던 때의 일이다. 인근의 막냇동생 집에서 지내시던 아버지는 거의 매일 새벽, 뒷산 약수터에 들려 반말들이 물통을 현관문 앞에 살며시 놓고 갔었다. 간혹 아내가 아버지를 기다렸다가 마실 것을 드렸다거나, 손아래 동서들과 근처 맛집에서 냉면을 대접했다는 말을 듣곤 했다. 아내가 자식인 나보다 낫다는 생각에 부끄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자식의 건강을 위한다는 생각에 칠순의 노구(老軀)를 마다하고 무거운 물통을 져 나른 마음은 무척이나 행복하셨으리라. 그게 아버지 나름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는 사실을 나이 든 이제야 깨닫는다.
부모님은 말년에 자식들 집을 전전하며 고단하게 사셨다. 어머니가 우리 집에서 운명하시고 난 뒤에는 홀로된 아버지를 작은형이 모셨다. 동생들 둘과 나는 격주로 아버지를 찾아뵙곤 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오지 않는 주말에도 2층 마당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하염없이 기다렸다고 한다. 치매끼가 있음에도 외로워서 못 살겠다며 1년 후에는 어머니 곁으로 가야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기도 했다. 우연찮게 정말 1년 만에 바라던 대로 어머니 곁으로 떠나셨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랬을까. 자주 찾아뵙지 못한 일이 한(恨)으로 남는다.
아버지를 어머니 옆에 모실 때였다. 봄이었다. 장의차가 아버지의 고향 집을 앞두고 벚꽃이 흐드러진 길과 커다란 바위가 여기저기 널린 작천정 계곡 길을 달려갈 때는 아버지 등에 업혀 가던 밤 풍경이 생각나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상여가 나갈 때에는 형편이 나아지면 잘 모시겠다는 생각의 어리석음에 얼마나 애절하게 통곡을 했던지. 초등학생이었던 아들과 딸이 장성한 지금도 그 장면을 이야기하곤 한다.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내 딸 서영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다. 서영이의 아버지(천호진 분)가 극 중에서 했던 이런 대사가 기억난다. “자식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를 얹어 놓고, 커서도 치울 줄을 모른다.” 아버지에게는 내가 그런 존재였는지 모른다. 얼마 전에 글공부를 위해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를 읽었다. 딸을 가진 아버지가 암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자기 몸은 돌보지 않고 딸의 앞날만 걱정하는 마음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손수건이 흠뻑 젖도록 울었다. 조창인 의 소설《가시고기》처럼 자식을 위해서는 자기 몸도 기꺼이 희생하는 우리들의 아버지는 원래 그렇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속내를 드러내는 데 익숙지 않다. 자식이 불의의 사고로 생사의 기로에 섰다면, 꼭 본인의 잘못인 양 자책하면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쓸 것이다. 자식이 예기치 못한 일에 휩쓸려 큰 어려움에 처한다면, 절대자를 믿지 않던 신념을 꺾고 무사히 극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할 것이다. 하나뿐인 아들이 굳이 혼자 살겠다면, 대가 끊기는 아쉬움은 뒤로 한 채 인생을 즐기면서 살기를 진정으로 바랄 것이다. 자식을 위하는 마음이 세상 어머니와 어찌 다를 바 있겠는가.
이런 속정도 모르고 자식들이 부모를 대하는 형태를 보면, 엄마는 항상 보호받아야 할 사람으로, 아버지는 만사를 혼자 힘으로 해결하고 해결해야 하는 슈퍼맨쯤으로 여긴다. 아버지도 나이가 들면 힘이 빠지고 위로받고 싶은데, 젊을 때의 강한 인상만을 기억해서 등한시한다. 그런 형태는 나처럼 후회할 행동임이 분명하다.
갓 돌이 지난 손자 녀석은 특이하게도 엄마보다 아빠 소리가 더 야무지다. 엄마가 아무리 밥을 떠먹여 줘도 한 번씩 안아 주는 아빠를 더 좋아한다. 자식들이 손자의 반만큼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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