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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카라코람 하이웨이) 문화탐방
- 파키스탄에서 중국까지 2001, 7, 26 - 8, 7 ( 13일간)
임 규 상 ( 016 - 233 - 4648 )
중국의 장안(西安)에서 돈황,투르판, 우루무치, 카슈카르를 거쳐 파키스탄으로 이어지는 서역 실크로드를 지난번에 중국쪽의 서안에서 우루무치까지는 답사한바 이번에는 파키스탄 쪽에서 중국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방콕을 거쳐 파키스탄 에서 2번째로 큰 도시 라호르로 향했다.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 발상지가 있는 인구 1억2천만의 파키스탄은 종교상의 이념차이로 인도와 분리되고 지역적인 이해 때문에 방글라데시와 분리된 나라이다.
오랜 영국의 지배로부터 1947년 인도와 같이 독립했을때에 힌두교와 이슬람교로 분리 독립하였으나 인도에는 국교가 따로 없어 무슬림으로 남았으나 파키스탄은 아예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았다.
문명의 발상지 인더스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인도, 서쪽은 아프가니스탄 , 북쪽은 중국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분쟁이 그칠날이 없고 군부 독재와 민주화 갈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의 나라다. 가는곳 마다 이슬람교의 전통과 습관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으며 민족의상을 장려하고 금주국으로 술을 좋아하는 외국 여행자는 상당히 불편함을 느끼고 과다한 노출이나 요란한 옷차림도 꺼리고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우선 첫 출발지인 인구 300여만명의 큰 도시 라흐로는 무굴제국의 악바르 대제가 델리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이래 인도 이슬람양식의 건축물로 시가지가 장식되어 있는데다가 영국지배 당시의 빅토리아 양식의 건축물과 정원등이 거리를 아름답게 해놓았다. 기온이 30도를 조금 넘는다 하는데도 습도와 매연으로 인한 공해가 심해서인지 사우나 박스에 들어간듯한 찜통 날씨속에 처음 들어간 곳이 아름다운 이슬람 건축물로 이름난 라호르의 무굴문화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는 ‘바드샤히 모스크‘ 였다. 1674년 아우랑 제브 황제가 축조한 것으로 이슬라마바드에 파이샬 모스크가 서기전 까진 파키스탄 최대의 모스크(이슬람 교인의 예배당) 였다 한다.
바로 앞 쪽에는 무굴제국 악바르 황제가 1566년에 동서 424m,남북 340m 의 광대한 부지위에 세웠다는 라호르성이 있었는데 자항기르 정원을 비롯하여 겨울궁전, 90만개의 보석으로 수놓은 라울라카의 방, 은으로만든 문 등 사치스럽기 이를데 없는 건축물이었다.
이어서 헤일수 없이 많은 분수가 장관인 샬리마르 공원과 가장 오래되고 큰 라호르 박물관에 들렀다. 1864년에 조성된 8개의 전시실에는 간다라의 불교미술과 인더스 유역의 출토품,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 파키스탄 각지의 민속의상과 무굴제국의 예술품 등이 가득 전시되어 있었고 그중의 압권은 단식하느라 갈비뼈만 앙상하게 남은 불타상이었다. 여기서 가까운 소규모의 바지르칸 모스크를 끝으로 라호르 방문을 마치고 다음날 340km의 사막길을 대우건설이 만든 고속도로에서 대우가 운영하는 고속버스도 보며 6시간 달려 라왈핀디에 도착, 20분을 더 달려 1959년에 새로운 수도로 선정되어 계획도시로 발전하고있는 이슬라마바드를 골고루 둘러보게 됐다. 산 위에 올라보니 녹음이 짙은 상쾌한 고원지대로 일본이 설계한 계획도시인 자연도시의 성공예로 푸른 수목들이 우거진 사이로 대통령궁, 정부기관과 각국 대사관들이 들어서 있다. 한편으로 옛날부터 내륙교통과 상거래의 요지로 발전해온 라왈핀디의 오랜 시가지가 펼쳐진다. 도시의 한쪽 아늑하고 명당인 듯한 산자락에 파이잘 국왕이 거금의 건축비를 대고 터키건축가가 설계했다는 10만m 이상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는 파키스탄 최대의 파이잘 모스크안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대리석과 호화스런 장식으로 어마어마하게 꾸미어진 예배당에서 하루종일 수많은 참배객 들이 맨발로 드나들고 있었다. 지저분하고 불결했던 라호르와 달리 이곳은 깨끗하고 부유층이 많이 산다하며 거리에서 보는 사람들은 순수하게 보이고 미남, 미녀가 많았으며 특히 아이들은 윤곽이 뚜렷하고 검으스레한 인형 같아 예쁜 얼굴이라서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다. 이슬라마바드에서 30km 떨어진 탁실라는 불교미술의 발상지인 간다라의 중심으로 기원전부터 그리스와 로마조형 미술의 영향으로 형성된 간다라 불상과 유품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간다라미술의 보고라고 일컬어지는 탁실라 박물관에는 이 주변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불상, 동전, 항아리, 보석 등이 숱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탁실라 제2의 고대도시 유적지인 시르캅은 높이 9m의 성벽이 5.5킬로미터에 걸쳐 축조되어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 후 2세기에 번영했던 그리스 왕조와 쿠샨 왕조의 도시유적이다. 가장 오래된 도시유적이라는 비르마운드는 네게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표면에 노출된 부분은 기원전 3세기의 마우리아 왕조때의 유적이다.
높이 약100m의 언덕 위에 있는 사원인 졸리안은 정문을 들어서면 안뜰이 있고 가운데에 스투파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그 경내에는 옛 승려들이 사용하던 식당이며, 주방, 강당 등이 있다.
이어서 아프가니스탄에 가깝고 인도와의 중간에서 핵무기를 위시한 각종 무기가 밀거래된다는 여러 의미에서 중요한 도시 페샤와르에 왔다. 러시아 쪽도 가까와서인지 색깔이 다른 여러 인종이 있었으며 비교적 좋은 인상의 낙천적인 주민들이었다. 제일 오래 됐다는 페샤와르 박물관엔 간다라 불상과 선사유물들이 잘 진열돼있었다.
1시간 반정도 떨어진 탁티바이는 불교 승려를 위한 사원으로 카니시아 왕때 조성되어 중국 승려들에 의해 다듬어져서 지금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각양각색의 돌을 정성 들여 쌓아만든 유적지였다.
다시 4시간 정도 달려 사리탑을 중심으로 승방을 꾸몄다는 스투파 유적의 사원이 있는 스왓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점점 산악을 향해서인지 국영motel의 침식이 안좋아진다. 스왓에서 350km떨어진 칠라스까지 12시간에 걸친 엄청난 이동이 시작됐다.
옛날에 낙타에나 의지하고 실크로드를 드나들던 좁고 험한 산악에 겨우 뚫어 놓은 형편없는 길을 중국이 파키스탄과의 우의를 다지는 입장에서 물자를 지원하여 13년간 중국의 카쉬카르에서 이스라마바드까지 장장 1200km에 걸쳐 세계최대의 도로 확장공사를 한 카라코럼 하이웨이 코스중 험난한 길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9월 이후엔 기온의 급강하로 도로가 유실되거나 낙석될 위험이 있어 다음해 봄까지는 통행을 금지시킬 정도로 벼랑 위의 구불구불하고 좁아빠져 교행이 힘든 도로를 허름한 소형버스로 하루종일 탈탈거리고 달려가기엔 너무나도 불안하고 피곤한 시간이었다.
처음엔 울창한 침엽수와 농작물 밭이며 모처럼 숲속을 달려보는 2000m높이의 샹그리라 언덕을 넘기도하고 심산유곡을 구비구비달려 4시간 거리의 베삼 마을을 지나 드디어 인더스문명의 발상지라는 상상외로 시커먼 진 흙탕물이 도도히 흐르는 인더스강을 끼고 끝도 한도 없는 험악한 산의 중간에 간신히 닦아놓아 양쪽의 절벽만을 보고 달리는 곡예의 운전이 피곤한 육신을 잠재우지 않는다. 반대편 경사가 심한 산의 중턱엔 구석구석에 농가가 산재해 있어 과연 어떻게 이동하고 살고 있는지 궁금했고 차량이 고장나거나 도로가 유실될 것을 생각하면 아찔했으며 이곳으로의 통행은 7,8월이 제일 적기라 하여 위안 받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천산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을 이어주며 만나는 카라코람 산맥을 넘어서 중국으로 향하는 우리 여정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험악한 지형과 교통의 불편으로 도시발전이 이루어 질 수 없어 기진맥진해 도착한 소도시 칠라스는 지저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고지대로 오르는 만큼 고도 7000m에서 8000m이상의 명산이 즐비하여 우선은 8125m의 낭가 파르바트와 유명한 K2봉(8611m)이 멀지않아 이곳에서 등산 준비를 한다했다.
다음날 칠라스에서 4시간 걸리는 길기트 까지도 137km의 험한 유곡이 계속 이어지고 오죽하면 이곳을 다니던 불교승려들이 휴식겸 돌산에 풍물을 조각한 암각화유적이 강가에 많이 남아 있었으며 계속 라카포쉬봉(7785m)지란봉(7200m)등 명산들이 이어져 만년설의 장관이 너무나 가까이 보이는것 같은 착시현상도 실감했다. 높아진 고도로 햇볕이 강하고 피로감도 심했으나 그늘 밑은 시원했고 카라코럼,히말라야,힌두코시의 합점을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정원을 갖춘 호텔의 설산이 보이는 전망은 모처럼 좋은것 이었다. 깊은 산속 돌에 불상을 새긴 불교문화가 간간히 남아있는 길기트를 떠나 인구 2만여명이 장수하며 산다는 훈자 마을까지는 4시간 걸렸다. 중간에 카라코럼 하이웨이 공사중 몰살된 34명의 영령을 추도 하기위한 공적비가 있어 과연 험난한 지형의 힘든 공사였으리라 짐작하며 길기트강을 끼고가다 훈자강으로 바뀌며, 인도지형과 이지아 지형이 합쳐졌다는 거대한 절벽의 특이한 형상도 목격했다.
드디어 7300m의 만년설산 바로아래에 2400m의 표고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그림같이 산뜻한 장수의 마을 훈자에 들어갔다. 엽서에서나 볼듯한 우람한 산과 이름모를 키가 큰 나무들이 멋있는 구도를 꾸미는 공기좋은 마을은 살구 , 보리수 열매, 사과의 주산지로 이곳 사람들은 특히 살구를 많이 먹어 장수한다하나 무공해의 자연환경이 꼭 한번 다시와서 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게했다. 옛 군주가 살았다는 언덕위의 발티트성에 오르니 멀리 라카포쉬, 지란, 골든픽등 고산들이 병풍처럼 장관이었다.
드디어 파키스탄의 마지막 도시 훈자마을을 버리고 카라코람산맥을 넘어 중국의 제일 서북쪽에 있는 도시 탁스쿠르칸으로 향한다.
6시에 일찍 훈자를 출발하여 9시에 소스트에서 1시간정도 국경통과절차를 마치고 모처럼 큰 버스를 바꿔타고 합쳐진 일행들과 재담을 나누며 또다시 색다르게 전개되는 고산의 비경에 감탄을 연발한다. 국경을 통과해 가는 4733m의 쿤자탑 고개에서는 다져진 만년설을 밟으며 사진 찍기에 바빴고, 오후 5시경에야 고도 3300m의 타지크족이 많이 사는 탁스크루칸에 도착한 일행은 고산증까지 겹쳐 열악한 시설의 호텔에서 잠을 편안히 이룰 수 없었다. 중국 땅이라 모처럼 맥주와 고량주를 과음한 탓인지 다음날 고도 1300m의 카슈카르로 향하는 버스안에선 아직 고산증이 풀리지 않아 빨리 도착하길 바랄 뿐이었다. 4500m의 고지도 다시 오르며 중간에 높은 지역에 위치한 방대한 호수 카라쿨리와 부릉쿨호수 등에서 휴식을 취하며 신비롭기 만한 온산이 붉은 돌산, 병풍처럼 길게 널려진 산등을 눈에 찍으며 점차 표고가 내려가더니 오후 6시경 카슈카르에 도착하니 나도 모르게 머리가 맑아져 있었다. 지형적으로 중국과 인도 , 러시아, 중동과 인접한 위그르족의 본고장인 카슈카르는 그야말로 세계각국 인종 전시장 같았다. 오전에 둘러본 1500년 전 부터 시작됐다는 선데이 바자르(일요일만 서는 7일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일개도시 같이 엄청난 큰 시장은 양, 염소 등 가축시장에서부터 붕어빵까지 없는게 없는 전쟁터 같은 장날 시장은 인산인해로 몇 시간을 돌아다녀도 길 잃을까봐 걱정이 앞설 정도로 그 규모가 어마어마할 정도였다. 그중에 한국에서 만든 가방, 신발, 옷등을 가끔 볼 수 있었는데 버리는 것을 모아 세탁, 정비하여 머나먼 중국의 오지 끝까지 실어와 팔고 있는듯 했다. 시내에는 1873년 위그르족이 만들었다는 에이티가르모스크가 중앙아시아 영향으로 타일벽으로 되어있었고 16세기 이르람 시절 막강 세력이었던 호자 일가의 58개의 묘지가 보존된 향비묘, 효자묘가 있다. 560년 전 건축된 중국에서 제일 큰 에이티가르 사원이 있어 주일이나 이슬람의 특수한 행사때 사용하거나 자발적인 기도로 참여하고 있었다. 드디어 몇년전 들렀던 우루무치 까지의 대 장정이 끝났다.
중국의 가장 서쪽 신강성의 큰도시 카슈가르에서 우루무치를 거쳐 장안으로 뻗어가는 실크로드의 행열은 그 주위에 숱한 교역과 문화, 종교, 역사를 덩달아 전달하며 섞어놓아 오늘의 눈부신 문명과 발전을 이룩한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싶어 더욱 감동적이었고 미지의 대륙에 대한 호기심만 더해짐을 느꼈다.
*중국 산서성 문화 탐방
(운강석굴, 항산, 오대산, 로아산, 태항산)
2011.5.31-6.9 임규상(016-233-4648)
중국 동북부에 있는 산서성은 동쪽으로 하북성, 남쪽과 남동쪽은 하남성, 서쪽은 섬서성 북쪽으로 내몽고 자치구와 경계를 이룬다. 평균 고도가 900M애 달하는 고원이며 역사가 유구하여 명승지도 많아서 주요 볼거리로는 중국 불교 4대 명산의 하나로 수려한 고산 자연 풍경과 불교문화 예술로 유명산 오대산과 중국 고대 3대석굴 예술의 보고인 운강 석굴, 절벽에 지어진 현통사등 고대 건축물과 역사적 기념을 위한 건축물등 118곳이 국가지정 문화재로 관리되어 있으며 국보 217개로 제일많고 국가지정 명승지역도 5곳이나 된다.
우선 인천공항에서 북경공항 도착하여 버스로 5시간 걸려 인구 300만명의 산서성 제2도시 대동으로 간다.
석탄과 보크사이트 매장량이 많아 부유한 도시의 방이 무려 1000개를 넘는 크고 화려한 호텔에서 첫날을 보낼수 있었다. 먼저 중국 3대 구룡벽중 가장큰 700년전 명태조의 13대손 주계의 저택인 대동구룡벽(길이 45.4m, 높이8m,두께2.02m의 도제벽)을 보았는데 파란색과 녹색을 바탕으로 황색, 흰색, 보라색 5가지 색의 자색 청기와로 만들어져 9필의 용이 부조되어 있었다. 버스로 1시간 정도 달려 세계 문화유산이자 중국 3대 석굴중의 하나인 운강석굴로 들어가 1km에 걸쳐 53개 동굴에 17m에서 수cm크기의 불상 5만 1000여개가 돌에 새겨진 진풍경을 불수 있었다.
AD460년 ~494년 사이 만들어진 254개굴중 53개굴을 볼수 있는데 거대하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채색불상등으로 중국 전통적 조소에 인도,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의 예술이 합쳐서 실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각지에서 몰려든 인파로 혼란스러웠다. 2시간 가량 흔원으로 이동하여 중국 오악의 하나인 항산의 산기슭에 세워진 현공사로 올라갔다. 항산의 협곡인 금용협의 취병봉에 있는데 북위시대 도사인 구겸지의 제자인 랴오린승이 491년 건립(약1500여년전) 한 것으로 지면에서 50m절벽의 음푹하게 들어간 곳에 위치하며 깎아 지른듯한 바위를 등지고 하늘 공중에 매달려 있다고 현공사라 하는데 비바람, 낙석으로 인한 피해를 막을수 있게끔 절묘하게 지은 불가사의 한 건축물이었다. 밑에서부터 비좁은 통로를 통해 올라가 절을 한바퀴 돌고 내려오는데 밑을 보니 금방 절이 무너져 내릴것 같아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중국 5악은 동악-태산 서악-화산 남악-형산 북악-항산 중악-승산이라는데 그중 북악인 항산(최고봉 천 봉령 2016m)으로 올라가 수백리에 걸쳐 108 영봉이 있으며 도교의 성지로 고대 건축물 30여점과 3寺 4사당등 도교관련 시설이 산재하여 있었다.
대동에서 다시 남쪽으로 1시간 이동하여 응현에 도착 북서쪽에 있는 포궁사 석가탑(응현목탑)을 둘러보았다. 천여년전(1056년)조성된 누각식 목탑으로 4m가 넘는 돌 축대위에 순수목재로만 구성된 단일 건축물로 가장 오래되고 높은 건축물로 목탑지왕이라 불린다.
높이는 67.31m 하단부 직경 30.27m 외관은 5층 6처마이나 사실상 9층이라 한다. 내부에 들어가 3층까지 돌아 봤는데 철못을 쓰지 않고 목재를 서로 홈에 끼워 정교하게 만들어 지진에도 탈이 없게 만든 건축물에 대단함을 느꼈다. 다시 버스로 2시간 달려 만리장성의 중요한 관문으로 최고의 관문이라는 안문관을 올라가 성 안팍을 왕래하던 옛 장성과 시설물들을 보았는데 초입부터 한창 관광지 개발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느낄수 있었다.
버스로 산길과 평야를 4시간 달려 2000m가 넘는 고지를 오르내리며 오대산으로 향하는데 창밖으로 건조한 지역에 수년전 비행기로 씨를 뿌려 제법 풍요하게 자란 이깔나무숲과 수많은 양떼, 소등으로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 주고 있어 덜 지루함을 느꼈다. 문화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오대산은 중국 불교굴지의 성지로서 산서성 오대현 북동부에 위치하며 사방 오백리에 걸쳐뻗어진 장대한 산맥으로 망해봉(등대:2795m) 게월봉(서대:2773m) 금수봉(남대:2485m) 협두봉(북대:3061m) 취암봉(중대:2894m)등 다섯봉이 연봉이어서 오대산이라 부른다.
다섯봉우리 정상은 평평하고 수목이 없어 마치 흙으로된 평원같아 오대라 불렸고 중국 4대 불교명산중 사찰건립 시기가 가장 빨라 동한의 명제 (AD 57-75)가 천축에 사신을 파견하여 불경을 구하게 한후 사원 건축을 시작 측천무후때 사찰이 376개로 최전성기를 이루다 지금은 118개가 남았다 한다.
오대산 중심마을 대회진에 47개의 절이있으며 그중 케이블카로 오르는 대리정, 수상사, 현통사, 탑원사 보살정, 조각이 아름다운 용천사등을 돌아보는데 한참이 걸렸고, 작은 샤틀버스로 비포장길인가 하나 남대금수봉 정상의 보제사, 지혜문수, 중대봉 정상 , 취암봉의 연교사 유동문수등 라마교사찰등을 돌아보며 광활한 티벳 산악지대를 보는것처럼 속트이는 풍취에 정기를 잔뜩 받는듯했다. 하여간 거대한 산들의 모임 오대산은 불교중심의 하나로 보현보살을 모신 사천성의 아미산, 지장보살을 모신 안휘의 구화산, 관세음보살을 모신 절강성의 보타산과 함께 중국 불교 4대 명산으로 중국각지로부터 신도들이 참배하려 엄청나게 몰려들어 산골시내가 도시 못지않게 종일 북적이고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것은 점심식사때 고기나 생선없는 음식을 콩으로 만들었다는데 두부는 물론이고 물고기, 소고기, 소시지, 돼지고기, 어묵들이 본래의 모양과맛을 그대로 꾸며놓아 중국인의 가짜 모방솜씨에 탄복할 정도였다. 방대한 오대산을 이틀에 걸쳐 강행군하고 2시간 가량 상당히 긴 터널(5835m)도 지나며 중국4대미녀 초선의 고향이며, 온천지대로 유명한 작고 아담한 소도시인 혼주로 옮겨와 노천온천에서 피로를 풀고 휴식을 취했다.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아침에 혼주를 출발 3시간만에 동채를 거쳐 로아산(2784m)의 영무천지까지 12km를 달려갔는데 중국 3대 고산천지(백두산, 천산, 영무)중 하나라곤 하나 가믐탓인지 물도 별로 차지않고 안내판도 제대로 없는 초라한 천지라 약간 실망도 했다.
동채에서 점심후 25km떨어진 만년얼음 동굴입구에서(표고2200m) 내려 갑자기 쏟아진 비를 맞으며 30분정도 숲길을 걸어들어가 맞이한 만년빙동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밖은 30도c 의 열기인데도 입구에서 내려가면서 바로 정말 기괴한 모습의 얼음을 구경할 수 있었다. 빙동은 신생대 제4기 빙천기에 형성됐으며 약300만년의 역사를 가지는데 중국 최대의 빙동으로 역사지구상 영구 동토지역외에서 발견된 보기드믄 대형빙동이다. 면적은 30분을 돌아다닐정도로 거대하고 수직원기둥 형태로 현재까지 200여미터를 발견했고 상하 여러층, 하부는 여전히 산채같은 곳으로 통하고 있다. 얼음으로된 기둥, 주름, 보살, 폭포, 꽃등 크고작은 경관들이 무수하며 투명하고 기이하여 중화의 절경, 또는 세계의 기적이라고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특히 기이한 점은 현지 기후조건에는 얼음이 얼 환경이 없는데 동굴내 얼음은 4계절 녹지않고 깊이 들어갈수록 얼음층이 두텁고 얼음이 어는 계절은 여름이며 겨울에는 조금씩 녹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의문은 아직 풀지못한 비밀로 남아있지만 보는이들은 벌려진 입과 감탄을 쉬다스릴줄 모르게 된다. 얼음과 감탄으로 굳어진 심신을 녹이며 여지껏 지난것중 가장긴 터널(6545m)도 통과하며 5시간 달려 사천성의 성도인 인구 340만명의 큰도시 태원에 도착했다.
해발 800m의 분지로 시내중심으로 깨끗한 분하강이 흐르고 석탄과 광물자원이 풍부하여 도시가 풍부하게 보이고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수도로 약 2500년의 역사를 가진 비교적 깨끗하고 잘 정돈된 도시였다. 시내는 고층빌딩과 아파트 신축이 즐비하고 너무 크고 화려하게 지은듯한 박물관엔 12만점이 넘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저녁에 들려본 대형쇼핑센타(SPA)는 우리에 못지않게 시설도 크고 물건도 엄청났지만 가격표를 보니 한국상품과 별차없는것 같아 그간의 경제발전과 더불어 물가상승으로 당분간 경제의 어려움을 피할수 없을것같아 안스러웠다.
중국 고대건축, 원림예술, 조각벽화, 비석예술의 집합체인 1500년된 회나무가 있는 민간정원 진사를 둘러 1500년전 건축의 대단함을 보았고 중국고대의 산서성의 개인저택의 하나인 교가대원은 갑자기 쏟아진 폭우를 피해가며 보았는데 교씨네 6대가 근 300년을 이어오면서 대지면적 8724㎡ 건축면적 3870㎡ 6건물에 376개의 방과 19개의 정원을 가진 개인주택으로 청대건륭 연간에 건축되어 민국 초년에 중수되었는데 청대 북방민족이 거주하는 독특한 양식의 건축이란다.
점심때 들른 강장식당은 온실같은 건물안에 각종 정원수를 꾸미고 건물의 길이가 200m를 넘고, 10인용 식탁이 100개를 훨씬넘어 한꺼번에 1000여명 이상을 수용할수 있는 큰시설의 식당규모에 다시한번 중국인의 큰손의 위협을 느끼게 됐다. 교가대원에서 버스로 1시간달려 중국 3대고성(여강, 대리,평요)중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평요고성에 도착, 먼저 북문에 올라가서 현대적으로 발전하는 성밖과 달리 고대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성 안쪽을 바라다보았다.
도시자체가 하나의 문화재군이라고 해서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고 2700여년전부터 역사가 시작되어 지금 불수있는것은 명,청시기의 건물들이다, 둘레 6km높이 12m의 성안쪽은 거리, 민가, 점포 모두가 고대의 모양이고 성밖은 오늘인 타임머신을 탄 느낌을 지닌다.
성위에서 본 평요 옛도시가 거북모양으로 설계되어있어 거북처럼 든든하고 오래도록 가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인듯하며 내부구조도 치밀하다. 큰거리 4갈래, 작은거리8갈래, 골목72갈래가 정연하게 분포되고 거리양쪽으로 3700채의 민가들이 푸른 벽돌 회색기와의 사합원이다. 고성안에 옛날에는 7만명이 살았으나 지금은 4만여명이 산다. 미로같은 고성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고성안의 옛건물 빈관에서 허름한 숙식을 하게되고 밤에는 7대에 걸쳐 기장쌀로 만든다는 이곳 명주 황주공장에 들러 견학과 시음하며 옛정취와 명주에 젖어 보기도 했다.
다음 아침 일찍 차로 4시간 달리니 인구 50만 정도의 가로수가 울창하고 6차선 직선도로가 도시 중간에 끝없이 이어지는 깨끗한 계획도시 장치에 도착했다. 도시도 깨끗했지만 갑자기 들른 식당음식도 일품이어서 살기좋은 환경의 도시라 짐작이 갔다.
중간에 현지 가이드를 태우고 태항산으로 3시간 그랜드캐년 못지않은 협곡을 보며 들어가 마지막 태항산 대협곡 일정에 들어갔다. 중국 아름다운 협곡 베스트10에 드는 거대한 협곡으로 위치는 하북성, 하남성, 산서성, 산동성등 4개성에 걸쳐 남북 길이 600km,동서길이 250km로 남한의 반절정도 크기의 험준한 산맥이며 1억 9천만년전에 형성된 중생대 제2기 주라기때 생긴 것으로 최고봉은 소오대산 (1870m)이다.
우선 흑룡담 풍경구로 들어가 1450m의 산을 오르는데 계단이 1300개 하산시 1500계단, 그리고 계곡을 끼고 내려오느라 2시간 이상이 걸렸다. 협곡이 좋았으나 가믐으로 계곡물이 말라 경치가 덜했고 모두 돌계단이라 다리가 피곤스럽다.
내려오며 홍두협,칠선곡, 유삭, 월노담, 요지, 목단원등 풍경구를 들러보고 산속에 썰렁하게 덜렁지어진 호텔에서 짐을 풀었다. 다음날엔 오전에 1800m의 자단산을 오르는데 일행중 제일 빨리 1800개의 돌계단을 1시간여에 올라 정상에 기이하게 있는 자단동굴에 들어가 30분정도 초라한 동굴을 보고 다시 돌계단을 내려와 계곡과 협곡이 아름다운 흑룡담을 1시간 가량 돌아보고 왔다. 오후에는 왕망협동쪽에 있는 돌아올라가는 산길이 굽이길이 18개라는 18반을 뜨거운 태양아래 1시간 올라갔다. 내려와 이제 시설을 꾸미는 왕망협으로 한참걸어가서 작은 호수갓길로 용왕상과 17m의 관세음보살상을 보고 나왔다. 2년전 갔었던 태항산 동쪽(산동성쪽, 만년산, 구련산등)보다 볼거리가 다양하지 못했고 가이드의 무지로 걷기힘든 산행만 하다보니 갚숙히 숨어있을 계곡의 볼거리를 놓치고 힘든 일정으로 일행들이 지치고 피곤해 했다.
여하튼 다른때보다 유난히도 볼거리가 많았던 이번 산서성 일정에 기대했던 마지막 태항산에 무리가 있었으나 차후의 개발되고 멋진 모습을 다시보길 기대하며 북경행 심야 비행기에 정신없이 올라타야만 했다.
마지막 북경에서의 피곤한 밤에 1986년부터 어언 25년에 걸쳐 노력한 중국 뒤지기가 이번 산서성 탐방을 끝으로 넓은 대륙 중국땅(22개성,5자치구, 9.596.960㎢, 인구 13억5천만)을 거의 한바퀴 돌아봤다는 성취감과 흥분으로 잠을 이룰수 없었다.
이제 끝났다기보다 이제부터 시작이라 생각된다. 그간 숨겨져있던 숱한 자연문화 자산들이 경제발전과 더불어 개발되는 교통수단으로 구석구석 숨겼던 얼굴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중국이 세계 제일의 관광대국이 되리라보며 나역시 긴장을 풀지않고 계속 부지런히 중국땅을 드나들어야 될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