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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궐 정전(正殿)의 배치형식에 투영된 풍수구조.pdf
조선시대 궁궐 정전(正殿)의 배치형식에 투영된 풍수구조
정우진*․고제희**
*상명대학교 환경조경학과․**고려대학교 대학원 환경생태공학과
게 재 확 정 일: 2016년 3월 14일
국문초록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궐에 나타난 핵심전각의 배치형식을 주산과의 관계로 검토하여 궁궐 축선에 투영된 풍수개념과 그에 따른
계획원리를 고찰하는 것이다.
조선 건국 직후 창건된 경복궁은 거대한 분지의 중앙에 입지한 자금성과는 달리 도성 서북쪽에 치우친 곳이면서 백악산의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입지하였다. 태종 때 창건된 창덕궁도 마찬가지로서 삼각산의 또 다른 지맥인 응봉 아래에 궁궐터가 마련되었는데,
모두 산의 정기를 궁궐에 담으려 했던 의도를 담고 있다. 이러한 관념은 구체적으로, 궁궐 내부의 정전, 편전, 침전 등 임금과 관련된
주요 건물의 배치가 주산의 내맥에 따라 배치되는 것으로 이행되었다. 특히 대내에 들어와 있는 아미사는 궁궐터가 정해졌던 근거지형이기도 했지만 전각배치가 이루어진 기준점으로 작용하였다. 아미사를 기점으로 하는 축선은 풍수적 의미의 좌향이 건축적 형식으로구현되는 형식이었으며, 주례에 근거한 전조후침과 삼문삼조를 실현하는 형식으로 통합되어 나타났다.
한편 양궐 모두 아미사가 혈진처(穴盡處)를 이루고 있는 곳 가까이에는 임금의 정침이 우선적으로 입지되었다. 침전의 남쪽에는
보통 편전이 배치되었는데, 이는 임금이 아미사 혈의 순수한 지기를 가장 먼저 점유하고 누리고자 하는 실리를 따른 결과로 판단된다.
중축선 배치가 뚜렷한 경복궁의 경우, 하나의 주맥 하에 침전, 편전, 정전이 일원적으로 배치되었고, 내맥이 분산된 창덕궁은 정전과
침전의 축이 형편에 따라 나뉘어 졌다. 정전의 입지형식은 최소한의 풍수적 이점을 취하되 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공간의 질서와
형식이 보다 중시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주제어: 경복궁, 창덕궁, 경희궁, 풍수
Ⅰ. 서론
한국의 도시와 주택은 산줄기가 끝나 평지와 만나는 지점
곧, 산에 기대고 들을 안고 있는 곳에 자리 잡는다[1]. 이는 산
줄기를 땅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힘을 전달하는 통로로 보고
그 힘을 받아 누리려 했기 때문이며, 땅을 경외하고 땅에 의지
하는 자세와도 관련된다. 한양이 조선의 수도가 되었던 데는
풍수설에 큰 영향을 받았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개 한 왕
조가 도읍지를 선택할 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리적인 조
건을 가장 우선시 한다. 조선의 개창 후 새 수도의 결정에서 고
려되었던 중요한 방침도 풍수도참설로 대변되는 전통적 지리
관에 부합되는 터를 선정하는 것이었다. 즉, 명산명수를 끼고
입지한 수도의 풍수적 이점을 통해 왕조가 길이 이어지고 국가
를 번창시키는 토대로 삼고자 했던 관념이 한양 건설에도 제 1
의 요건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한양은 국토 최고의 길지이자, 전국의 으뜸이요 중
앙으로 인식되었다. 그런 한양에서 가장 중요한 터는 바로 궁궐
이 들어선 자리였다. 조선 최초로 조영된 궁궐이자 법궁인 경복
궁은 주산인 백악산 남쪽 기슭에 그 터가 정해졌다. 위치는 중국
자금성이 산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의 중앙에 위치한 것과는
달리, 도성 서북쪽에 치우친 곳이면서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이었
다. 조선 3대 왕인 태종 때 창건된 창덕궁도 마찬가지로서, 삼각
산의 또 다른 지맥인 응봉 아래에 궁궐터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점은 한양도성의 선정과정 및 입지개념이 곧 궁궐의 택지과정과
궤를 같이하는 사안이며, 나아가 경복궁과 창덕궁 모두 각각의
주산과 밀착된 곳에 정해졌다는 적극적 함의를 내포한다.
궁궐 내부의 배치를 들여다보면 보다 긴밀하게 읽혀지는 풍
수논리가 나타난다. 가장 뚜렷이 포착되는 것은 임금의 침전으
로 사용되는 건물이 모두 주산의 산줄기에 닿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전통공간의 많은 사례에서 볼 수 있는 택지의 과정은, 먼
저 혈처를 찾고 그 앞에 가옥을 배치시키는 것을 기본으로 한
다. 그런데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나타나는 핵심전각의 입지와
공간구성을 살펴보면, 우리 전례의 택지방식과 상통한 풍수적
태도가 강하게 노출되어 있어 주목된다. 앞으로 여러 사례를
들어 서술하겠지만 조선의 궁궐, 특히 국초에 창건된 궁궐에서
침전․편전은 주산의 내맥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지점과 맞닿
은 곳에 입지되었다. 이러한 위치가 주세(主勢)의 흐름이 직접
적으로 미치는 곳임을 고려해볼 때, 조선 궁궐의 배치형식에
일국의 통치자이자 지배권자인 국왕이 도성 주산으로부터 가
장 강하고 순수한 지기(地氣)를 받고자 하는 실리적 목적이 내
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나아가 국왕이 도성의
주산을 차지하는 주인임을 표방하는 의도 또한 담고 있는 것으
로 보이는바, 새로운 관점에서 조선 궁궐의 내적 구조에 대한
검토와 재음미가 필요하다.
그동안 조선시대 궁궐 전각의 입지선정과 공간구성에 관한
주제는 주로 조선 초 궁궐의 창건개념을 추적하는 연구, 주례
(周禮) 등 고제(古制)의 영향, 조선 독자적 형식을 변별하는
연구, 그리고 궁궐운영의 제도적 장치로서의 배치개념 등을 살
피는 연구 등이 이루어졌다. 풍수이론과 결부시켜 설명한 연구
들도 이루어졌는데, 대부분 한양 천도과정이나 도성의 지세와
관련된 건축행위를 다루는 국도풍수에 집중되어 왔다. 다만
Cho(2005), Park(2013), Park(2014)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대
상으로 전각의 입지선정의 배경에 풍수원리가 개입되어 있음
을 여러 가지 실례를 들어 설명하였으며[2][3][4], Jang(2006)
도 풍수전문가로써의 식견을 동원하여 양 궁궐에 아미사가 핵
심전각 배치의 중요한 근거가 됨을 피력하는 등 궁궐의 조영
방식을 가늠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참조점을 남겼다[5].
본 연구는 이러한 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궁궐 내부의
정전, 편전, 침전이 주산에서 흘러온 산줄기의 맥세에 따라 입
지된 경복궁․창덕궁의 배치개념을 보다 명확히 규정해보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 궁궐과의 내밀한 연관성이 주목되는
개경 본궐도 언급될 것이다. 물론 양자의 공간구성 방식에는
개창을 주도한 집단의 이념성향이 반영되어 적지 않은 차이점
이 나타난다. 그러나 경복궁과 창덕궁은 고려 본궐이 여전히
운용되고 있던 동시대에 만들어졌고, 많은 부분에서 고려 본궐
의 궁실 조영개념을 답습한 장치들을 찾아볼 수 있다. 본고는
이들 간의 연관성 그리고 양 시대의 종법적 배치모델들이 공유
하는 내적 본질을 바로 풍수에서 찾으려 한다. 이는 국도풍수
의 이론체계가 외적으로는 도성을 통한 국가의 위상정립과 번
영을 실현한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표출하고 있지만, 실제로
는 국왕 중심의 공간을 구축하는 토대로 작용하였음을 증명하
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에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궐에서 풍수
논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개입되었고, 위계적 공간을 만드는 수
단으로써 창출된 축의 개념이 풍수상의 좌향과 전략적으로 통
합된 축선 즉, 혈이 맺힌 곳에서부터 주요 건물들을 차례로 배
치하는 중층적인 축의 기능과 의미를 논구하고자 한다.
Ⅱ. 연구의 방법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궐에 나타난 핵심전각의 배치형식을 주
산과의 관계로 조명하여 정전축1)의 내적구조에 투영된 풍수개
념과 그에 따른 조영방법을 고찰하는 것이다. 고종 때 시급히 창
건된 경운궁[덕수궁]을 제외한 조선의 궁궐은 모두 풍수적으로
중요시되는 산을 배후에 두고 입지되었다. 특히 각 궁궐의 주산
에서 내전방향으로 뻗은 하나 이상의 내맥에 대응한 전각의 입
지는 (1)침전-편전-정전의 연속, (2)침전-별전[소편전]의 연속,
(3)편전-정전의 연속, (4)대비전, (5)원묘(原廟) 등의 유형이 나
타나는데, 이는 기존의 해석관점인 삼문삼조, 전조후침 등 주례
식 궁실조영의 규범적 틀과는 상이한 조영동기인 이른바 풍수개
념이 내포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런 내적 구조는 동아시아
궁궐이 공유하는 보편적 공간 형식보다는 한국 전통공간에서 흔
히 발견되는 공간구성원리 또는 조영상의 특성과 유사점이 두드
러지는바, 다음과 같은 내용과 방법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첫째, 대내에 하나 이상의 내맥이 들어와 있지만 출중한 한
개의 대혈에 정전축을 배치한 경복궁(1395년 창건)과 정전축
및 침전-편전축의 다원적 배치를 보인 창덕궁(1405년 창건)의
공간구성방식을 분석하여 내재된 풍수논리를 고찰한다. 이 두
궁궐로서 조선 궁궐을 개괄하고자 하는 이유는 창건시기가 비
슷하며, 조선의 전 시대에 걸쳐 각각 상징적․기능적 법궁의
역할을 하였기에 조선 궁궐의 양대 전형으로 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양궐은 전각의 배치․확장 방식에 있어 뚜렷
한 차이점을 갖고 있고 궁궐이 기대고 있는 주산도 다르다. 따
라서 경복궁과 창덕궁 각각의 전각배치의 기점과 진행양상은
조선 궁궐 전체를 통괄하는 대표성과 보편성이 확보되는 유형
으로 가늠할 수 있다고 보며, 이를 통해 궁궐 내부에 적용된 풍
수개념을 추출해낼 것이다. 한편 대표성을 갖는 두 궁궐 외에
광해군조에 창건된 경덕궁[경희궁]도 연구의 범위에 포함시켜
분석하였다. 외견상 경덕궁은 경복궁과 창덕궁만큼 건물입지와
풍수원리 간의 긴밀한 상관성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경
덕궁은 인조 이후 많은 임금이 창덕궁과 더불어 애용한 이궁이
었고 주요 궁역이 현재도 남아 있어 경복궁, 창덕궁과 동렬선
상에서 비교가 가능하다. 또한 개국한지 200여년이 경과한 시
점에 새롭게 창건되었다는 점에서 이전 궁궐의 입지방식과 풍
수논리가 다름없이 지속되고 있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는 중요
한 지점으로 판단되어 이의 논의를 부가하였다.
둘째, 경복궁과 창덕궁에 나타나는 독특한 정전배치는 곧 우
리 궁궐에서만 확인되는 공간특성을 구명하는 논점이 될 수 있
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조선 초 유신들이 주례에 근거한 제도
를 적극 끌어와 궁궐을 건설했을 지라도, 이들 궁궐의 형식이
한국의 전통적인 조영태도와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
였고, 특히 고려의 건축관습에 주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해
석되었다2). 실제, 조선의 개국 직후 한양 도성에서 풍수적 요점
지가 활용된 방식은 개경의 사례와 매우 유사해 보인다. 개경
의 궁궐터는 당대 인식에서 명분과 국량이 충분히 갖춰진 주산
바로 앞에 그 위치가 정해졌고, 주산의 생기를 보조하는 역할
을 하는 청룡과 백호가 응결된 지점에 종묘․사직이 조성되었
다. 한양 역시 내청룡격인 응봉 줄기의 종점에 종묘가 세워졌
고, 백호로 여겨지는 인왕산 끝자락에 사직단이 축조되는 등의
순차적인 과정을 거쳤다. 이는 주산과 용호(龍虎)를 맡은 산에
궁궐, 종묘, 사직을 배치하는 고려시대 이래의 도성정비의 원칙
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 궁궐의 복합적 배치개념은 고려시대 궁궐과 비
교해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실체가 온전히 파악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과정은 풍수 용맥을 중시한 조선 궁궐의 입지성향
을 한국 전통의 맥락에서 찾아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고려시대
궁궐 조영의 관습과의 연관성을 통해 중국의 형식과는 다른 고
유의 궁제를 변별해보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개성 궁터에 관해
남아 있는 고문헌이 매우 제한적이며 답사가 불가능하다는 한
계가 있다. 그렇지만 개성 궁터의 발굴보고서 및 선행 연구에서
제시된 도면자료는 개성 본궐의 입지상황과 조영방식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초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고려대에
형성된 전통적 궁궐 건설방식이 조선 초에 어떻게 반영되었는
지는 충분히 규명해 볼 수 있다. 이에 본고는 개경과 한양 궁궐
의 입지를 풍수․상지(相地)로 대변되는 전통적 지리관의 맥락
에서 양자의 공통점을 고찰하고, 풍수적 관념에 따라 궁궐을 조
영한 방법이 조선시대에까지 미쳐있음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셋째, 상기 연구 주제들은 사료[고문헌], 지도, 연구 보고서
및 논저를 통해 분석되었으며, 답사가 어려운 개성 만월대와
백악산 자락의 청와대를 제외하고 현지조사가 이루어졌다. 경
복궁은 대부분의 내맥이 훼손되고 아미사 언덕만 남은 실정이
므로 현 아미산 내부와 그 주변에 한해 조사되었으나, 창덕궁
의 경우 선행 연구의 견해를 참조하되, 현지조사와 지도 분석
을 통해 용맥도를 작성하고 다수의 용맥에 대응한 전각들의 입
지관계에 주목하여 고찰하였다.
Ⅲ. 결과 및 고찰
1. 고려시대 개경 본궐 핵심전각의 배치
918년 궁예를 축출하고 철원에서 왕위에 오른 태조 왕건은
국호를 고려로 바꾸고 이듬해인 919년 자신의 세력기반인 송악
[개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궁궐을 창건하였다. 송악산 아래
에 세워진 궁궐3)은 고려 왕조가 끝날 때까지 약 470년간 고려
의 정궁으로 활용되었다. 그 사이에 크게 다섯 차례 정도 소실
과 재건을 거듭했고4) 그때마다 부분적인 건물의 변화도 적지
않았지만, 왕조 초기에 자리 잡은 궁궐의 기본적인 건물배치는
대부분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6].
송악산을 뒤로한 개경의 정궁은 마치 웅장한 병풍을 편 것
같은 곳에 입지하였다(Figure 1). 이러한 위치는 도성 북서쪽
에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경복궁의 입지상황과 유사
하지만(Figure 2), 한양에 비해 산세가 훨씬 웅장하고 수려한
곳에 터를 정했고 평지가 아닌 송악산 구릉에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이 나타난다. 궁궐이 산지에 입지한 것
은 일단 방어적인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유리한 목적으로 설명
된다. 그러나 풍수설을 지배이념으로 도입하고 그에 걸맞는 풍
수를 신봉했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고려해 본다면[7], 풍
수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추리해 볼 수 있다.
우선 본궐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개경의 지세와 유사하
게,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소분지 지형에 들어섰다. 궁성
은 약 4.8km 둘레의 바깥쪽 성벽인 황성과 안쪽 성벽인 궁성의
이중 성벽으로 둘러싸였는데, 산악의 지형조건에 따라 불규칙한
형태로 건설되었다. 황성의 정문인 광화문이 궁궐의 동남쪽에
놓이게 된 이유는 이 지점이 비교적 완만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궁궐이 굴곡이 많은 산지에 조성되었기 때문에 대내의 건물배치
와 향은 지형과 물길에 따라 독특한 위계방식을 보이게 되었다.
핵심건물의 입지에서도 많은 면에서 풍수를 중요시했음을
엿볼 수 있으나 세밀한 풍수논리는 확인해볼 수는 없고, 다만
궁궐터에 주어진 지형조건을 가급적 훼손하지 않고 건물을 조
성하려는 사고방식에 기인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6]. 이는
지형의 변조가 심하여 인위성이 농후한 것으로 해석되는 인국
(隣國) 궁궐의 면모와 대별되는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의 영향
으로 강조될 수 있는데, 특별히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개경 본궐의 배치에서 두드러진 점은 중국의 전통적
궁궐조영의 방식과 달리, 중심 축선을 살려 좌우대칭으로 놓이
지 않고 매우 불규칙하게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규칙
하고 불균일한 배치는 산지에 궁궐을 입지시키는 구상 단계부
터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즉, 풍수적 가치를 우선시 하여 송악
산 기슭의 경사진 곳에 입지된 만큼 평탄한 곳에 궁궐을 지었던
중국 궁성과 같은 방정한 평면상은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주목되는 점은, 개경 본궐에서 지형을 평탄화하여 애써 중앙축
과 좌우대칭을 지니는 기하학적 구성에 맞추려는 의도가 보이
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지세를 최대한 살려서 핵심전각들
의 성격에 따라 규모와 위계를 갖도록 구성되었는데, 1997년
개경 궁터의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리창언이 추정한 건물배치
를 보아도[9], 기하학적인 축선이나 대칭되는 건물은 발견되지
않는다(Figure 3). 이처럼 지나칠 정도로 지형의 훼손을 기피
하고 자연지형에 순응하고자 하는 태도는 중국의 궁실제도와
비교해 본다면 고려의 궁궐 특성을 변별해 주는 하나의 지점으
로 부각될 수 있다. 그런데 각 건물지 영역의 향이 제각각이고,
다수의 축선이 존재하도록 한 단서는 풍수설로 설명된다5).
둘째, 개경 본궐에 나타난 배치방식이 어디에서 연유했고 후
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창덕궁이다. 현재도 확
인해 볼 수 있는 창덕궁은 크고 작은 건축물들이 자연지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확장된 즉, 자연지세의 보존을 우선시한 개발
방식이 두드러진다. 창덕궁이 지닌 자연친화적인 구성방식과
원지형을 훼손하지 않고 건물을 세우는 배치상의 독특함은 기
실 개경 본궐에서 보여주었던 강한 풍수적 태도와 많은 점에서
닮아 있다. 그밖에 창덕궁의 진입방식을 살펴보면, 남쪽 중앙에
서 북쪽으로 직선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고 동남쪽 모서리
에 있는 돈화문에서 서북 방향으로 몇 차례 굴곡을 이루면서
진행하도록 설계되었다. 이것 역시 개경 본궐의 진입방식을 참
고한 부분으로 추정된다.
셋째, 이상의 논의는 Woo and Lee(2006)에서 제시된 주요 건
물의 배치도에서 대략적으로 확인되는 부분이다(Figure 4)[10].
발굴도면과 지형도 등을 바탕으로 작성된 대내 주요 건물의 배
치도는 정전인 건덕전[대관전], 편전인 선정전[선인전]의 향이
동일했지만 정침이었던 중광전의 향이 달랐음을 알려주고 있
다. 또한 내전 터의 전각들을 보아도 향이 배후의 지형에 따라
제각각인데, 등고선으로 확인되는 산줄기의 진행 방향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송나라 사신의 접대나 불교의례가
이루어졌던 회경전[선경전]부터 비상시 군사회의 용도로 사용
되었던 원덕전까지의 건물군의 향도 다른데, 이 역시 균제성과
정형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고유의 지형을 고수
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넷째, 한양 창덕궁에서 침전과 편전이 풍수지맥선이 끝나는
용진처를 가려 입지했던 것이 개경 본궐 배치방식과 동일한 구
상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는, 강한 심증을 주고 있는 부분이지만,
현 자료만으로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양자의 건축은 상당
부분 풍수와 연관된 맥락에서 살필 수 있는 요소들이 산재되어
있고 구성 방식에서도 많은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본궐의 배치방식이 구릉이 발달한 개경 시내 이궁들에 똑같이
이어지고 그것이 고려 말을 거쳐 창덕궁의 건축방식에 영향을
주었을 개연성은 충분히 확보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창덕궁을 건설한 주역인 태종과 박자청(朴子靑:
1357∼1423년)이 모두 개경 출신들이었고, 개경의 이궁에서 생활
하며 본궐에 구축된 궁궐 체계에 매우 익숙해 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도 간과될 수 없는 사실이다. 두 인물이 경험한 개경 생활의
선험이 한양의 도시기반뿐만 아니라 창덕궁의 건설에 투영되었을
가능성을 한층 더해주는 것이다. 김동욱은 다수의 논고에서, 한양
건설에 영향을 끼친 개경의 영향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지점으로
장랑(長廊)을 예시하였다[12][13]. 고려도경에서 시가(市街)에
장랑을 만들어 백성들의 주거를 가렸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와
같은 개념으로 만들어 졌던 것이 한양의 장랑이었다는 것이다. 태
종은 장랑이 이루어지자, “비로소 국가의 모양이 이루어져 볼만하
다(國家有模樣而可觀矣)”고 평하였다. 태종 때 건설한 장랑은 시
전(市廛)의 활성화를 위한 것이었지만[14][15] 기본적으로 백성
들의 살림집을 가리는 역할을 하는 등 도시의 미관을 위한 기반시
설로 건설되었다(Figure 5)6). 이는 도시 중심부에 긴 행랑을 세워
도로와 백성들의 주거지를 분리시켰던 개경의 전례를 답습한 한
가지 사례이므로, 여말선초를 살았던 태종과 고려 말 궁궐 내관
출신인 박자청이 매개자가 되어 창덕궁에도 개경의 궁궐조영 방
식을 끌어왔을 여지를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왕성에는 본래 방시(坊市)가 없고, 광화문에서 관부(官府) 및 객
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긴 행랑[長廊]을 만들어 백성들의 주거를
가렸다(고려도경 성읍, 방시).
행랑(行廊)을 조성하는 일을 처음에는 모두 어렵다고 생각하였는
데, 지어 놓고 보니 국가에 모양이 있어 볼 만하다. 만일 남은 힘
이 있으면 종루(鍾樓) 동서쪽에도 지었으면 좋겠다(태종실록
12년(壬辰, 1412년) 4월 3일(丁巳))7).
다섯째, 개경 본궐은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어졌고
표면적으로 창덕궁도 고려시대 궁궐 건설의 원칙을 이어받아
정형적인 틀에 얽매임 없이 산자락의 생긴 모양에 맞추어 적절
하게 배치되었다. 일단 이러한 점은 창덕궁에 나타난 계획원리
가 풍수를 중시한 개경 본궐의 건축구성 방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산물이라는 구조적 상동(相同)을 보여준다. 즉, 조선시대
궁궐이 왕조의 교체에 따라 새롭게 고안된 체제를 담게 되었
지만, 궁궐과 주산을 하나로 묶는 본질적인 구조는 변용되지
않았다는 해석의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제
를 가장 잘 확인해 볼 수 있는 곳이 유교적 종법질서를 가장 잘
구현했다고 여겨지는 경복궁이라는 점은 역설이다.
고려와 조선 궁궐의 조영방식은 결코 날카롭게 대립되는 이
질적인 것이 아니며, 불연속적인 각기의 공간형태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이들 간의 밀접한 상관관계는, 전통적인 중국의
궁실제도와 한국 전래의 풍수적 요처를 활용하는 방법을 하나
의 축선 아래 통합시켜 건설된 경복궁의 창의적 면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2. 아미사를 기준으로 한 경복궁의 일원적 정전배치8)
동아시아 궁궐의 내부공간은 기하학적인 중심을 추구하는 축
선배치법을 통해 국왕의 위엄과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이 선호
되었다. 시대에 따라 궁궐을 도성의 중심에 두기도 하였고 도
성 북쪽에 치우치는 북궐제(北闕制)를 따르기도 하였지만, 전
각의 배치는 대체로 권위적인 중앙 축과 좌우 대칭을 지니는
정형적 구성을 취했다. 정도전이 주도하여 건설된 경복궁도
주례를 근간으로 하여 제도가 만들어짐에 따라 관념적인 상
징체계를 구축하는 축선개념이 사용되었다. 중국 고래의 ‘왕은
남쪽을 바라보게 자리한다’는 남면위왕(南面爲王)을 실현하는
공간구성이나, 삼문삼조를 중축선상에 배치하는 강한 남북축의
체계를 구축하는 등 경복궁은 주제(周制) 즉, 「고공기(考工記)」
의 종법적 예제사상을 구현하는 조선 개창자들의 이상공간으로
서 창건되었다.
그러나 경복궁 내부 전각의 구성에는 중국의 역대 궁성이 보
여주었던 궁실 조영의 전통적인 개념뿐만 아니라 앞서 살펴본
고려시대 개경 본궐과 유사한, 핵심전각을 주산의 지형에 순응
해서 배치하는 방식이 혼재되어 있는 점에 주목된다. 궁궐이
도성의 주산을 차지하면서 주산에서 내려온 산줄기에 맞닿은
곳에 주요한 전각의 위치를 정하는 방법이 사용된 것이다. 무
엇보다 경복궁에 나타나는 축의 시작점이 주산에서 내려온 지
맥이 응결되어 있는 아미사[현 아미산 화계부분과 북쪽 언
덕]9)(Figure 6)인 점은 이 축선이 단순한 시지각적 정형성을
위한 기준선이 아님을 역설해준다.
경복궁 교태전 북쪽의 언덕은 고종 때까지 특정한 명칭이 없
었고 다만 풍수용어인 아미사로 지칭되었다10). 그러나 1907년
(순종 즉위년)경에 제작된 「북궐도형」에 ‘아미산(峨嵋山)’으로
기입되어 근래에 까지 혼동을 주기도 했지만, 국초부터 고종 때
까지 이해되었던 이 언덕의 정체성은 중국 선산을 은유하는 경물
이나 경관 향상을 위한 화계가 아니라, 주산에서 내맥을 관류하
는 지기(地氣)가 전진을 멈추고 아미사를 맺은 대혈이었다. 현재
도 확인되는 아미사의 위치는 교태전 북쪽 즉, 경복궁의 중앙이
다. 그런데 교태전 남쪽으로 강녕전, 사정전, 근정전을 비롯하여
금천교와 다수의 문이 남북으로 배치된 구성[壬坐丙向]에는 애
써 아미사 남쪽에 정전축을 구축하려는 강한 인위성이 감지된다.
이러한 배치가 주례의 이상주의를 담고자 했던 유신(儒臣)
들의 사고방식에 전적으로 기인하여 단지 돌출된 기존 지형에
맞춰 시각적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창출된 결과일까? 아니면
풍수상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모색된 배치형
식일까? 경복궁이 평지에 건설되었다면 전자에 무게가 실리겠
으나, 핵심전각의 배치가 아미사와 긴밀히 통합되어 있는 점은
이러한 전각구성이 경복궁 건설의 구상단계부터 고려되었던 것
임을 시사한다. 이에 다음과 같은 단서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첫째, 승정원일기 고종 12년 3월 29일 기사11)는 경복궁 정전
축의 기준이 아미사였음을 단언하고 있다. 여기서 경복궁 내부
의 지형은 창건 시 핵심전각의 입지에 고려된 중요한 요인이자
명분으로 규정되고 있다. 특히 이 사료에서는 아미사에서 근정
전까지 뻗어있던 내맥의 진행상태 즉, ‘척맥(脊脈)’이 경복궁의
택지 및 핵심전각 배치의 준거가 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태조 당시 발견된 아미사를 기준삼아 경복궁의 위치를 정
했고, 나아가 연침, 보평청(報平廳), 정전의 축을 아미사 아래에
의도적으로 배치했다는 말과 상통한 의미로 읽혀진다.
민치상이 아뢰기를, “교태전 뒤의 아미사는 바로 하늘이 만든 것
으로, 그 아래에 전각을 세운 데는 깊은 뜻이 있는 듯합니다. 지
금 만약 헐고 옮겨 짓는다면 이미 천연적인 지형을 잃게 되고 또
사각(砂角)에 응하여 전각을 세우는 뜻도 아닐 것입니다.”하고,
김병학이 아뢰기를, “다른 전각의 터에서도 은미한 뜻을 볼 수 있
습니다.” …(중략)… 상이 이르기를, 아미사에서 근정전까지는 본
래 척맥(脊脈)이 있었다.12)
둘째, Figure 7은 현재 아미산이라 명명된 언덕 곧 아미사가
경복궁의 주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멈춰 응기 되어 있는 용진
처(龍盡處)로서 당대인들에게 인식된 풍수적 요혈이자 경복궁
의 기능적․상징적 지형요소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현재 교
태전 북쪽에는 낮은 언덕만 남아 있고 백악산과 연결된 산줄기
는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경복궁전도(景福宮全圖)」에 나타난
상황은 현 상태와는 달리 백악산의 산줄기가 궁궐 안으로 들어
와 있고, 주맥 끝에 맺힌 아미사 밑으로 교태전, 강녕전, 사정
전, 근정전이 일직선상에 배치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주산의 출중한 지기가 아미사를 통해 대내의 정전에 공급되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서, 경복궁과 정전의 터에 존재했던 국소적
인 산줄기가 경복궁의 창건 시 핵심전각의 좌향과 배치의 준거
가 되었다는 것을 확신케 한다.
셋째, 세종 22년(1440년) 건립되었을 당시 교태전의 본래 용
도는 왕의 침전으로 사용된 별전이었지 결코 왕비가 사용하는
정침전(正寢殿)이 아니었다. 그동안 지천태(地天泰)괘에서 유
래한 전각명 때문에 왕자를 생산하는 용도로 회자되어 왔으나,
교태전이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된 것은 경복궁 중건 후의 한시
적인 사건이었으며, 조선 전기 교태전의 본래 용도는 단지 왕
의 별실에 불과하였다. 전각명인 ‘크게 교합한다[交泰]’는 뜻은
‘주합(宙合)’ 또는 ‘어수(魚水)’의 의미와 상통하며, 모두 군신
이 하나 되어 밝은 정사를 펼치는 것을 가리킨다. 실제 세조는
신하를 인견을 하고 곡연을 베푸는 등의 용도로 교태전을 빈번
히 이용하였고, 예종은 침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아미사에서 흘러나오는 지기의 흐름은, 국초에 정침전이었던
강녕전이라는 확고한 지향점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세종 22
년 왕의 별전인 교태전이 새롭게 조영된 후로는, 지기가 가장
먼저 닿는 건물이 좀 더 북쪽으로 이동하게 되었으나, 모두 왕
의 개인적 건물이라는 공통적 입지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세 가지 단서는 아미사를 기점으로 한 교태
전, 강녕전, 사정전, 근정전으로 이어진 정전류 전각들의 연속
이 경복궁 창건에 있어 의도적으로 고려되었던 배치개념이었
음을 증명해 준다. 또한 이러한 배치는 다분히 산의 활력을 적
극 이용하고자 하는 풍수상의 목적으로 읽혀지며 특히, 정전축
의 진행방향은 생기의 흐르는 방향을 결정짓는 좌향의 개념으
로 파악된다. 경복궁에서 뚜렷한 좌향을 갖은 정전류 전각은
예제건축의 규범이 충실히 반영되었고, 행랑․문․소실․소침․
소편전 등이 정전축을 기준으로 정연하게 배치되는 외적 형식
을 따랐다13). 따라서 아미사부터 차례로 건립된 전각들의 입지
와 배치구성은 외형상 전조후침(前朝後寢)과 삼문삼조 등의
예제규범을 준용하는 공간틀로 구성되었으나, 왕실의 생활공간
에서 공적인 공간으로의 점진되는 순차적인 구성을 통해 임금
이 아미사 혈의 순수한 지기를 가장 먼저 점유하고자 했던 이
면의 의도가 담아져 있다고 볼 수 있다.
3. 두 개의 내맥에 대응한 창덕궁의 이원적 정전배치
1) 창덕궁의 지세
경복궁 아미산과 같이 주산에서 내려온 산줄기에 맞닿은 곳에
주요한 전각의 위치를 정하는 방법은 창덕궁에서도 동일하게 적
용되었다. 이를 살펴보기에 앞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경복궁
과 창덕궁 간의 서로 다른 배치방식이다. 경복궁의 배치는 남북
으로 긴 대지에 정문인 광화문을 비롯한 주요 대문과 근정전, 사
정전, 강녕전, 교태전, 아미산으로 이어지는 강한 중축선이 형성
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배치법은 애초부터 아미사를 중앙에
위치하도록 터잡기를 한 후에 주례에 연원한 궁궐조영의 법식을
살린 결과로서 풍수와 유교사상이 절충된 형식으로 풀이된다.
이와는 달리 창덕궁은 중국 자금성이나 경복궁과 같은 중축선을
갖고 있지 않았고, 진입하는 방법도 달라서, 돈화문에서 정전인
인정전으로 진입하려면 동쪽과 북쪽으로 90도 방향을 꺾어 들어
가기를 반복해야 한다. 정전, 편전, 침전도 자연지형에 순응하여
동쪽으로 가면서 순차적으로 배치되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경복
궁과는 다른 방식임을 알 수 있다14).
그렇다면 자연지형의 변형을 최소화한 배치가 주요한 특징
으로 지적되는 창덕궁에서 임금과 관련된 정전 즉, 정전, 편전
그리고 침전은 어떠한 장소에 배치되었을까? 그리고 창덕궁의
지맥 중에서도 가장 으뜸 되는 산줄기, 이른바 주맥(主脈) 아래
의 혈처에는 어떤 건물이 세워졌을까? 경복궁의 입지에서 확인
되었던 터잡기의 방법은 주산에서 흘러온 지기가 직접적으로 연
결된 지점을 선별하여 택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응봉을 주산
으로 삼았던 창덕궁에서 임금과 관련된 건물도 응봉의 풍수지맥
선과 연결된 지점에 입지되었을 것이며, 또한 군주남면(君主南
面)하는 조건도 충족되었을 것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우선 단일한 종축선배치로 이루어진 경복궁의 사례를 환기해
보면, 경복궁의 주맥 바로 앞에는 전조후침의 방식이 적용되어
침전 남쪽에 편전과 정전이 일렬로 배치되었으며, 대내에 들어
와 있는 내맥 중 역량이 다음 가는 측맥에는 문소전과 같은 원
묘(原廟)가 건립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경복궁과 달리 정전
의 건물군이 병렬식으로 배치된 창덕궁에서, 제일의 혈처에 입
지되는 건물 종류가 왕권을 형상화하는 권위건물인 정전이었는
지 아니면 침전을 배치하여 임금 개인이 지기를 소유하는 곳이
었는지를 가리는 문제는 궁궐 정전배치의 우선순위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밝혀져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15). 기존의
연구에서 응봉에서 가장 출중하게 뻗어온 주맥의 용진처에 대한
의견은 대략 두 가지로 나뉜다.
그 첫째는 지금의 인정전 뒤편의 언덕이 창덕궁 지맥 중에서
도 가장 으뜸이 되는 혈처라는 주장이다. 지형도를 살펴보아도
응봉의 내맥이 시원하게 뻗어 내려간 자리에 인정전이 위치해
있는 것이 확인되어 국가의 중대사를 처결하는 존엄한 자리에서
강한 지기의 도움을 받고자 했을 것이라는 해석은 일견 타당성
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Jang(2006)은 응봉의 주맥이 북쪽
에서 남쪽으로 곧장 뻗어 내렸으며, 인정전 후면 화계로 돋운 언
덕을 주맥이 만든 풍수 잉(孕)으로 규정하고 그 증거를 「동궐도」
에 나타난 주맥선 보호 담장에서 찾았다[5]. Cho(2005)도 응봉
의 가운데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산줄기 곧, 인정전으로 내려온
산줄기를 주맥으로 이해하였으나, 응봉의 주룡이 행룡과정에서
수차례 분맥되어 기력이 약한 용맥이 되었으므로 보국을 만들만
큼의 대혈이 되지 못함을 동시에 주장하였다(Figure 8)[2].
Figure 8. The Yongmaekdo (龍脈圖) of Changdeokgung Palace
Source: illustration by author
반면 다른 의견은 창덕궁이 종묘에 생기를 전달하기 위해 행
룡하는 주맥에 입지된 것을 근거로, 그 용맥이 거치는 곳에 입
지한 대조전을 창덕궁에서 가장 핵심적인 공간으로 파악한다.
대조전 주위의 지형은 장풍(藏風)이 가장 잘 이루어지는 안락
한 공간으로서, 그 맥세가 주룡에서 횡룡입수(橫龍入首)한 용
의 지기를 전달받는 곳에 입지하는 것으로 해석된다[4]. 또한
이러한 설은 대조전과 혈장의 관계를 부각하여 대조전을 중궁
의 연침으로 규정하고, 그에 따라 땅의 기운이 가장 강한 혈처
에서 왕조의 대를 잇는 생산성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헌종 연간 궁궐지에서 대조전은 ‘대내(大內) 곤전
(坤殿)의 정당(政堂)’으로 명시되어 있고, ‘대조(大造)’라는 건물
명조차도 음양교배 또는 생명의 잉태와 관련된 인상을 던져주고
있다. 그런 점들 때문에 대조전과 중궁전을 연관시키는 논리는
그동안 의심 없이 받아들여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많은 논저와
궁궐 관련 개설서에서 대조전을 중궁의 연침으로 기술하고 있다
는 것도 현재까지의 대조전에 관한 인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16).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 대조전의 용도를 보면 순종 이전
창덕궁에 임어해 있던 많은 임금들이 대조전을 정침(正寢)으
로 사용하였음을 알게 된다. 정침은 왕이나 왕비가 일상적으로
거쳐하는 건물을 말하며, 침전(寢殿)이나 연침(燕寢)으로 불리
기도 하였다. 특히 왕이 거처할 때 정침을 사용하는 것 뿐 아니
라, 정침에서 왕이 죽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보았는데,
이러한 상황을 바르게 마친다 하여 ‘정종(正終)’이라 하였다
[16].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침이었으므로 성종을 비롯한 인조,
효종, 현종, 철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그밖에 현종, 숙종,
경종이 대조전에서 거처했던 기록이 나타나지만, 일시적으로
대비 또는 중궁의 처소로 사용된 때는 정조․순조 이후의 일이
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정조 11년(1787년) 대조전에 산실청(産
室廳)을 설치했고17), 순조 9년(1809년) 효명세자가 이곳에서
탄생했다는 기록18)에서 확인되는데, 궁궐지에 기술된 ‘대내
곤전의 정당’이라는 대조전의 성격은 정조에서 헌종까지의 용
도가 반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으로 대비나 중궁이 대조전에 머물렀던 때라 하더라도 대
조전이 임금의 침전이라는 인식은 그대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순조 2년(1802년)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는
“대조전은 바로 대전(大殿)의 침전(寢殿)이다”19)라고 함으로써
왕의 정침으로서 대조전을 인식하고 있었고, 순조 33년(1833년)
10월 17일 창덕궁 화재로 대조전, 희정당, 징광루 등이 타버리자
순조는 불탄 대내의 전각에 대해 “열성조(列聖朝)께서 임어하시
던 곳”20)이라 하여 대조전 일곽에 대한 용도를 분명히 해주었
다. 그렇다면 이상의 사료적 근거에 따라 대조전의 본래 용도를
창덕궁에서 임금이 기거하였던 정침이었다고 규정하고 그것의
풍수적 위계를 판별해 보면, 다음과 같이 대내 공간의 풍수적 서
열 하에 핵심전각이 배치되는 방식을 확인해볼 수 있다.
먼저, 응봉에서 분지된 종묘지맥을 주룡으로 본다면, 창덕궁
을 지나는 가장 출중한 내맥 앞에 임금의 침전이 배치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대조전을 중심전각으로 하는 영역 즉, 임금 개
인이 차지하는 공간이 풍수상으로 중심적인 위계를 점유했다
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주맥에 관한 두 가지 견해는 모두 창
덕궁의 입지를 풍수이론과 결부시켜 길지여부를 판별하고 대
내의 핵심적인 전각터에 선재된 풍수적 논리를 도출하는 시도
를 한 것이다. 또한 창덕궁의 주맥 또는 국세(局勢)에 대한 논
의에서 인정전 지맥과 대조전 지맥의 중요성에 대해 공통된 의
견을 나누고 있다. 어차피 창덕궁은 응봉에서 출맥되는 과정에
서 창덕궁 인정전으로 향하는 분맥, 종묘 분맥 및 낙산까지 가
는 산줄기의 세 가지로 그 세력이 나누어짐에 따라 경복궁과
같은 역량을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지기의
도움을 받고자 했던 창덕궁 핵심전각의 의도적 입지는 경복궁
정전축의 형식 및 개경 본궐의 사례와 본질적으로 상통한 풍수
논리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풍수적 목적을 달성하
기 위한 계획원리가 조선 궁궐에서 종법적 위계를 구축하는 합
리적인 틀과 혼재되어 있음을 시사해 준다.
2) 창덕궁 정전영역의 입지 판단
대조전은 임진왜란, 인조반정 때를 비롯한 4번의 화재로 재건
된 내력이 있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경복궁 교태전을 뜯어다 옮겨놓은 것이다. 위치도 달
라져, 본래의 위치에서 훨씬 북쪽으로 물러난 자리에 세워졌다.
그래서 현 건물로써 대조전에 관한 논의를 이끌어 내는 것은 한
계가 있는바 「동궐도」와 문헌사료를 참조해 볼 수밖에 없다.
「동궐도」를 살펴보면, 대조전 북쪽에 소침전에 해당되는 집
상전(集祥殿)과 경훈각(景薰閣)이 나타난다. 실록에서 대조전
에 관한 기록은 세조 13년(1467년)부터 나타나지만, 그에 앞서
세조 7년(1461년)부터 13년 5월까지의 기사에는 침전의 공식
명칭으로 양의전(兩儀殿)이라는 전각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
조 7년 12월 19일 기사는 정침 영역의 구성에 대해 다음과 같
은 내용을 전한다.
예조에 전지하기를, “창덕궁의 조계청(朝啓廳)을 선정청(宣政廳)
이라 칭하고, 후동별실(後東別室)을 소덕당(昭德堂)이라 칭하고,
후서별실(後西別室)을 보경당(寶慶堂)이라 칭하고, 정전(正殿)
을 양의전(兩儀殿)이라 칭하고, 동침실(東寢室)을 여일전(麗日
殿)이라 칭하고, 서침실(西寢室)을 정월전(淨月殿)이라 칭하고,
누(樓)를 징광루(澄光樓)라고 칭하고, 동별실(東別室)을 응복정
(凝福亭)이라 칭하고, 서별실(西別室)을 옥화당(玉華堂)이라 칭
하고, 누하(樓下)는 광세전(光世殿)·광연전(廣延殿)이라 칭하고,
별실(別室)을 구현전(求賢殿)이라 칭하도록 하라”하였다(세조실
록 7년(1461년, 辛巳) 12월 19일(乙酉)).21)
위 사료에는 조계청이 선정청 즉 지금의 선정전으로 개명된
것을 비롯한 당시 침전 일대의 구조를 말해준다. 선정청 북쪽
에는 두 개의 별당이 있어, 동별실이 소덕당(昭德堂)이고 서별
실이 보경당(寶慶堂)이라 했다. 「동궐도」에서 보경당은 선정전
의 서북쪽에 나타나는데 소덕당의 자리에는 태화당과 대덕당이
나란히 서있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침전의 경우도 「동궐도」와
비교가 가능하다(Figure 9). 정전(正殿) 즉, 정침인 양의전은
양 옆에 소침실을 두도 있는데, 동침실인 여일전(麗日殿)과 서
침실(西寢室)인 정월전(淨月殿)이 그것이다. 이는 「동궐도」상
의 대조전에서 보듯, 지붕 중앙이 양옆보다 높은 솟을지붕으로
되어 있는 이른바 고루삼문(高樓三門)의 형식인 것과 연관 지
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세조 때의 양의전도 가운데 청
(廳)이 있는 부분의 편액이 양의전이었고 양 옆에 각각 여일전,
정월전이란 편액이 있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징광루(澄光樓)․광세전(光世殿)․광연전(廣延殿)
이란 세 개의 명칭을 갖았던 누각은 「동궐도」에 나타난 청기와
건물인 경훈각․징광루와 비견되며, 서별실인 옥화당의 명칭도
「동궐도」에 남아 있어 참조된다(Figure 10).
한편 「동궐도」에서 대조전과 건물 형태가 같은 집상전의 경
우 궁궐지에서 인조 35년(1647년)에 집경당이란 당호로 신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세조 연간에 창덕궁 집상전이란 건
물에서 왕이 신하를 소대했던 기록이 다수 나타나기도 하므로
동일한 장소의 건물인지는 의문이다. 「동궐도」에 나타난 집상
전은 현종 8년(1667년)에 새로 지은 건물로서22) 모후인 인선
왕후(仁宣王后)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경덕궁 집희전(集禧殿)
을 헐어다 옮겨 지은 것이다. 그러나 이건 후에 현종은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집상전을 편전처럼 사용하며 의관의 입진을 받
거나 신하들을 인견하는 행위를 하였고, 실제 대비는 이곳에서
기거하지는 않았다. 숙종 대에 와서 대조전 일곽은 임금과 중
궁의 시어소로 사용되고, 집상전이 왕대비 명성왕후(明聖王后)
의 거처가 되는데 그 외에는 왕실의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하며 비워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대조전은 왕의 정침이라는 용도가 비교적 오랜 기
간 잘 지켜졌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북쪽에 세운 부속 건
물인 경훈각․징광루나 집경당과 같은 별전 역시 한시적으로
대비 또는 중궁이 사용했을 뿐 대부분 임금의 독서당 겸 소편
전과 같은 용도로 사용된 전각이었다. 따라서 대조전과 그 주
변은 대체로 임금 및 중궁의 침전과 다수의 편전 기능을 하는
전각들로 구성된 국왕 전용의 공간이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
것은 본고의 논지대로 대조전의 영역이 주산에서 뻗은 내맥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중요한 혈처인 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창덕궁에는 다른 궁궐에 비해 편전 기능을 하는 전각이 유독
많다. 먼저 국초에는 보평청, 조계청, 편전 등 편전기능을 하는
공식건물 다수가 건립되었다. 후대에 공식적인 편전으로 사용
된 선정전[전 조계청]이 인정전과 대조전 사이에 마련되었고,
희정당[전 수문당(修文堂)], 중희당[동궁 권역]을 비롯하여 경
훈각, 양심합, 성정각 등 복합적 용도의 건물들이 시대에 따라
임금의 독서처 내지는 편전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23). 또한
앞서 설명했듯, 대조전 권역에 있는 주요 건물들은 대부분 소편
전의 기능을 겸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정침전 가까이에 왕
의 전용 침전이면서 편전기능을 수행했던 별전을 배치하여 궁
중의례의 구속에서 자유로우면서 편하게 정무활동을 수행하려
는 편의상의 목적도 있지만24), 땅의 정기가 가장 잘 맺혀 있는
영역을 임금의 주된 생활공간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의도 역시
크게 작용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이해는 중궁전이 이 일곽 안
에 마련되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많은 연구자들이 애써 대
조전에 왕자생산의 기능을 연관시켰던 논리대로, 대조전 일곽
은 응봉에서 내려온 땅의 원기를 받아 뛰어난 왕재를 생산하고
자 했던 효과도 동시에 충족될 수 있는 영역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정전의 경우 뚜렷한 내맥의 힘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Park(2014)은 선정전이 지기가 전달될 수 있는
지형조건을 가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공간구성의 합리성조차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4]. 그의 말처럼 선정전이 공식적
인 편전으로서 평소에 왕이 신하를 인견하여 정사를 논하는 곳
이기 때문에 지기를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
되지만, 현 상태에서 나타난 불리한 풍수적 형국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본래 선정전의 자리가 조계청(朝啓廳)이 있던 곳이었
음을 상기해 보면 하나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조계청은
신료들 특히 의정부와 육조의 당상들이 왕에게 문안하고 정사
를 보는 용도의 건물이었다지만 편전류 전각이라기보다는 외
조(外朝)적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 건물은 정전
과 침전 중간에 위치하여 “대신이 도리를 의논하는 곳”25)이라는
분명한 용도가 있던 전각이었고 세종 23년(1441년)에 종묘의
주산 내맥이 흐르는 장소에 있었다 해서26) 현 선정전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선정전이 세종 이후
용도가 변경되어 임금이 정무를 보는 공식적인 편전이 되었을
뿐, 창건당시 편전의 배치구상과는 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오히려 창덕궁 창건 당시의 편전기능은 침전의 바로 남
쪽에 있던 ‘편전’이라는 전각과 ‘보평청(報平聽)’의 두 건물로
분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후대에 침전 남쪽의 편전 영역이 희
정당(사료에 1496년부터 등장)으로 통합 운영되면서 선정전과
더불어 초기 편전의 2원적 기능이 이어졌던 것이 아닐까 한다.
3) 주맥영역의 보호조치
창덕궁에서 주맥이 중요시되고, 혈장[명당]을 가려 핵심 건
물이 세워졌음은 앞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Jang(2006)은 인정
전 산줄기처럼 길게 밀고 들어오는 지맥이 양(陽)에 속하는 맥
이며, 정신공간에 유리한 지형으로 설명하였다[5]. 그에 따라
응봉의 분맥이 시원하게 뻗은 직선적 양맥(陽脈) 아래에 인정
전이 세워졌고, 반대로 혈장을 감싸고 있는 음맥(陰脈)의 경우
침전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정의한 ‘정신공간’은 궁궐의
정전이나 사찰의 법전처럼 휴식보다는 정신적으로 각성된 행
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을 말한다. 또한 음에 해당되는 곳은 반
달모양의 지맥을 형성한다고 했는데 이는 육체의 안정에 유리
한 기운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주거용도로 사용된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동궐도」에서 반달모양으로 두른 담장의 역할에
주목하여, 이것이 대조전과 같은 주거공간에 필요한 혈의 모양
인 아미사임을 강조하였다(Figure 11a). 실제로 「동궐도」에는
대조전 뒤편의 반달모양의 지형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고, 정조
가 혜경궁 홍씨를 위해 건립한 자경전 뒤편에도 반원형의 담장
윤곽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데, 당시 침전류의 전각 입지에
아미사형의 사격이 매우 중요하게 고려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Figure 11b). 자경전이 맞닿아 있는 산줄기는 응봉의 지맥이
능허정을 거쳐 남진하다가 주합루 서쪽 부근에서 분지된 내맥
이다. 이 용맥이 종묘로 향하는 과정에서 각각 대조전과 자경
전 배후로 입수하여 취기(聚氣)되는데, 결국 이 두 전각은 같
은 용맥의 힘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인정전
뒤편에도 입수룡을 보호할 목적으로 설치된 담장과 그것으로
둘러싸인 보호영역이 있다. 이 경우 반원형의 담장은 아니고
지형의 요철에 따라 여러 번 꺾이게 되는 담장이 길게 조성되
었는데, 담장으로 보호되는 영역은 곧 인정전에 직접적인 영향
이 미치는 혈의 생기와 관련된 범위로 판단된다.
이렇듯 창덕궁에는 풍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대
내의 입수맥 영역에 담장을 설치하여 통행을 금지하는 등 혈
을 보호하는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내맥을 보호하는 일련의
조치는 비근한 예로 경복궁 아미사를 두른 담장에서도 확인되
며, 넓게는 조선 왕릉의 금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왕릉의
금역으로 지정된 사표지역에서 제일 바깥부분에 위치한 완충
지역인 화소(火巢)를 제외한 금역은 모두 풍수와 관련된 지역
이다. 특히 왕릉의 주맥영역은 금역의 핵심지역으로 설정되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구역으로 보호되었는데, 인적에 의해
지맥선이 닳거나 혈의 생기가 훼손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
다. 주산의 형상과 주맥은 어느 경우에서나 중요한 의미를 가
진다. 그러한 주맥영역의 보호는 태조산, 중조산을 지나 주산
을 거쳐 혈 자리에 이르는 정간룡(正幹龍)의 용맥을 감별해
터잡기가 이루어지는 궁궐, 왕릉 그리고 도성에 모두 해당되
는 논리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도성이나 궁궐의 주맥지
역에서 폭우로 토사가 유실되었을 때 흙을 돋우는 보토(補土)
ㆍ보축(補築)의 기사27)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또한 땅의 기운
을 보호하는 소나무 식재의 많은 사례를 보여주고 있어 참조
해 볼 수 있다28).
4. 왕기(王氣)의 공간적 점유를 위해 계획된 경덕궁
[경희궁]의 정전배치
1) 경덕궁의 지세
광해군 대의 궁궐 영건은 전후복구의 명목으로 추진되었으
나 경복궁보다 이궁이었던 창덕궁(광해군 원년, 1609년)과 창
경궁(광해군 8년, 1616년)이 먼저 재건되는 한편, 이전에 없던
새로운 궁궐들을 동시에 짓는 등 독특한 양상으로 전개되었
다. 새롭게 건설된 이궁은 사직단 동북쪽의 인경궁(仁慶宮)이
었다. 그리고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 남쪽 새문동에
경덕궁(慶德宮)이 별궁으로 조성되었고, 인왕동 청심당터에
자수궁(慈壽宮)까지 동시에 건설되는 등 당시의 공사는 전례
에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제위 기간 내내 추진한 광범위한 궁궐
의 건축행위는 대체로 취약한 정통성을 극복하고자 했던 왕권
강화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인경궁과
경덕궁의 건설과정에서 광해군이 보여주었던 크고 화려한 건
축에 대한 욕망이나 술자들이 주장한 신비주의적인 이설에 매
료되어 있는 태도는 다분히 풍수설을 과신했던 개인적인 동기
를 짐작하게 한다. 실제 광해군은 단종과 연산군이 폐위되었
던 창덕궁을 기피하였고 경복궁 등 기존의 궁궐 역시 거주하
기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는 인왕산 아래 인경궁
터가 길지라는 풍수설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에 앞
서 한양의 지기가 쇠하였다는 술자의 말을 듣고 교하로 천도
하려는 구상을 갖기도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하
자 곧바로, 인왕산 아래에 궁궐을 지으면 길하다는 풍수가의
말을 내세워 인경궁 공사를 감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같은
궁궐의 역사는 신권(臣權)과의 극심한 갈등을 초래했고 이것
이 하나의 빌미가 되어 광해군은 폐위되기에 이른다. 결국 그
가 가장 역점을 두고 공사하였던 방대한 인경궁은 인조반정으
로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사라지게 되
었고(1647년), 인경궁에 비해 규모가 작아 이미 완성을 보았
던 경덕궁(광해군 12년, 1620년 완공)은 폐주의 상징이긴 하
였으나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집터였다는 이유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이처럼 궁궐 건설에 지나치게 집착했던 광해군의 인경궁, 경
덕궁 건설은 국초부터 인왕산 아래를 명당으로 보는 견해와 무
관하지 않다. 특히 경덕궁은 광해군일기, 궁궐지, 한경지
략 등의 사료에 새문동 궁궐에 왕기가 있다는 소위 ‘새문동왕
기설[인왕산왕기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기록될 정도로 풍
수와 연관 지어 설명되곤 하였다. 새문동왕기설은 반정에 성공
한 정치집단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여 꾸준히 의
문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실제 두 궁궐의 토목공사가 광해군
의 신임을 얻었던 이의신, 김일룡, 성지, 시문용 등의 술관(術
官)이 주관하여 진행되었던 만큼 많은 부분 풍수상의 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경희궁에는 인왕산 왕기를 누르기 위해 건설
했다는 사료의 기록을 뒷받침해줄 풍수논리는 찾아보기 어렵
다. 우선 전반적인 지형상황을 살펴보면, 궁궐은 인왕산의 지맥
의 끝자락에 태음 금성체의 산형을 맺은 새문동(塞門洞) 일대
에 터를 잡았다. 주산은 인왕산이며 경복궁, 창덕궁과 같이 조
산을 삼각산[북한산]으로 하고 있다. 궁의 좌측으로는 안산, 우
측에는 백악산이 높이 솟아 있어 좌우에 수려한 봉우리가 소조
산을 옹위하고 있는 천을태을봉(天乙太乙峰) 귀격이 엿보인다.
서쪽으로는 한양도성의 성곽이 있는 월암(月岩)의 능선을 경
계로 하고, 주봉에서 흐른 지맥이 경희궁의 북쪽을 감아 돌아
점차 낮아지는 언덕을 동쪽 경계로 삼았다. 전체적으로 궁역의
북쪽과 동쪽이 높고 동남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지는 지형조건
을 갖고 있는데, 가장 높은 곳에는 숭전전과 자정전이 있고, 주
맥에서 분지한 지맥에는 침전이 자리하고 있다. 가장 낮은 지
대인 동남쪽의 경우, 동궁[경현당], 궐내각사, 금천 및 정문인
흥화문이 위치하였다. 이러한 궁의 영역은 인왕산의 주맥 영역
에 포함되는 것으로 판단되나, 터가 워낙 비좁고 혈의 역량이
부족하여 절대적인 길지로 보긴 어렵다. 게다가 핵심 건물들의
입지와 좌향도 우수하지 못하여 지기의 결실이 크지 못할 것으
로 생각되므로 인왕산왕기설로 대변되는 명당을 확인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 이에 경희궁의 지형이 훼손되기 전의 상황
을 보여주는 「조선지형도(1921년)」에 용맥도를 그려보고, 궁역
의 용(龍:지맥), 혈(穴:입지), 향(向: 방위)을 대략적으로 판
별해 보도록 한다.
먼저 Figure 12의 지점①은 숭정전인데29), 이 위치는 경복궁
이나 창덕궁에 나타난 법전의 길지적 요소에 미치지 못하는 것
으로 판단된다. 경복궁 근정전과 창덕궁 인정전은 모두 궁궐
주산에서 입수한 주맥을 차지하여 양기명당을 형성했다. 하지
만 숭정전의 입지는 현무봉에서 분기된 지맥이 다시 청룡과 백
호로 잘라진 곳인 무맥지에 터를 정하였다. 단, 건물은 남향을
고집하지 않고 지형방위에 순응하여 좌향에 맞게 놓여 있으나
정사를 펼치는 공간으로는 여전히 불리한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숭정전의 남동쪽에 위치한 경성중학교의 건물군이 힘
있는 용맥 하에 입지되었고, 좌향에도 부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대조된다. 즉 숭정전보다는 경성중학교의 위치가 주맥의
기세가 잘 전달되는 양기명당으로 판정되는 것이다30).
다음으로 지점②는 당시 경성중학교에 부설된 임시소학교
교원양성소 교실로 사용되던 회상전(會祥殿)이다. 회상전은 본
래 융복전(隆福殿)과 더불어 침전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침전
은 한옥에서 안채에 해당하는 건물이고, 부부가 정배(定配)하
여 후세를 낳고 양육하는 곳이므로 예로부터 집에서 가장 중요
한 공간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궁궐의 안채인 침전은 혈 앞에
위치하는 광정(廣庭)에 위치해야 하고 그 좌향도 반드시 풍수
적으로 길한 방위를 택해야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회상
전은 숭정전과 마찬가지로, 주산에서 뻗어온 한 지맥이 좌우측
의 청룡과 백호로 갈라진 무맥지의 골짜기에 터를 정하였다.
이런 터는 보통 지기의 힘도 약하고 생기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 지형조건을 가지지 못하다. 게다가 회상전은 건물의 향을
무작정 남향으로 놓아서 길한 좌향을 쫓지 않는 등 여러모로
불리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물론 과거의 지형도만으로 길흉여
부를 판단하는 것은 자칫 부회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겠으나,
방공호가 위치한 회상전터의 현 상태를 살펴보아도 침전이 가
져야할 공간구성의 합리성이 경복궁과 창덕궁의 사례에 크게
미치지 못함이 확인된다.
2) 경덕궁 정전영역의 입지 판단
경덕궁의 건설은 새문동왕기설 등의 동기를 갖고 있었고 술
관이 적극 주도하여 이행되었다고 전해지나 법전, 침전 영역뿐
만 아니라 전체 궁역에서 특기할만한 풍수상의 견해는 발견되
지 않는다(Figure 13). 다만 주목되는 점은 경덕궁에 나타난 핵
심전각의 배치방식이 기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제도와 상
동(相同)인 점이다. 앞서 살펴본 조선 초에 창건된 궁궐은 풍
수개념과 유교사상이 혼재된 하나 또는 복수의 축선을 따라 핵
심전각이 건립된 특징이 있었다. 여기에는 내맥이 끝나는 산줄
기 앞뜰에 건물을 세움으로써 지기의 감응을 받고자 하는 의도
를 담고 있었다. 경덕궁의 핵심 전각도 결혈된 자리였는지 단
언할 수 없지만, 외견상 산줄기와 닿은 곳에 입지되어 있고 그
곳으로부터 일련의 축선배치가 가동된 점은 기왕의 궁궐에서
추출된 공간적인 개념에 의거하여 건설되었음을 말해준다. 그
렇다면 구체적으로, 경복궁 및 창덕궁의 전각구성과 개념적으로
상동인 경덕궁 중심전각의 배치형태는 어떠했고 그것이 갖는
의의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경덕궁에서는 정전인 숭전전과 편전 자정전이 가장
높은 지대에 남북으로 배치되어 치조영역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러한 배치는 경복궁에 나타난 규범적 형식인 근정전, 사정
전의 남북배치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특히 공식적인 의례
가 이루어지는 외전의 중심건물을 기능적으로 한데 묶어 독립
된 영역을 구성한 점이 특이한데, 이는 경복궁과 창덕궁의 전
형에서 변조한 새로운 공간구성이라기보다는 지형의 제약으
로 인한 어쩔 수 없는 배치였다고 생각된다. 앞서 지적했듯,
경덕궁에서 가장 출중한 명당터는 훗날 경성중학교가 들어선
자리였다. 하지만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선례를 본받아 주맥
아래인 이 위치에 숭전전을 건립하고자 했다면, 앞에 가로막
고 있는 언덕 때문에 넓은 조정(朝廷)이 들어서기에는 공간이
매우 협소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게다가 삼면이 산줄기에 고
립되어 있는 모양새라서, 의례동선에 따른 편전의 위치를 정
하기도 부담되는 위치였을 것이다. 결국 정전이 점유할 공간
을 동쪽으로 한참 물려서, 가능한 넓게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자리가 모색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무맥지에 정전과 편전이 입
지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둘째, 숭정전의 동측 언덕 아래에는 침전이 마련되었는데,
현무봉의 측맥이 동쪽으로 수차례 분지되어 도달한 곳이므로
지기의 힘은 크기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는 별전인 회
상전과 정침인 융복전이 건립되었다. 이같이 치조공간의 우측
에 내전을 위치시키는 병렬식 배치방식은 창덕궁의 사례가 참
조된 것으로 보이며, ‘대조전-징광루[경훈각]’에 대응되는 융복
전과 회상전의 구성도 두 궁궐사이의 연관성을 잘 드러내고 있
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광해군 때 신건된 인경궁과 마
찬가지로 경덕궁이 왕의 침전과 본침전을 나란히 두는 양침전
(兩寢殿; 二寢殿) 제도31)로 조성되었다는 것이다32). 이중에서
융복전은 왕과 왕비가 함께 사용하는 본침전이고 우측의 회상
전은 왕의 전용침전 겸 별전이었다33). 궁궐지에서 융복전은
‘대내의 정침[大內之正寢]’으로 기술되고, 회상전은 ‘임금이 머
무는 내전[時御之內殿]’ 또는 ‘대내의 정전[大內正殿]’ 즉, 소침
과 시사전의 기능 등을 겸한 별전으로 규정되고 있다.
이들 침전의 입지방식은 외견상 산줄기가 감싸고 있는 뜰에
자리 잡아 창덕궁 대조전의 터잡기 방식과 다름없어 보이지만
(Figure 14), 주맥과 관련된 아미사터를 감별해 입지시키던 종
래의 방식과는 뚜렷이 차별된다. 대조전은 응봉에서 종묘로
향하는 주룡 사이에 입수한 혈장을 취하였고, 지기를 잘 갈무
리 할 수 있는 안락한 공간에 입지되었다. 그에 비해 융복전․
회상전 터는 아미사의 사격도 아니고 생기가 모이는 혈처를
배후에 두고 있지 않다. 다만 건물에 바람을 막아주는 병풍산
을 배후에 두르는 이른바 장풍법(藏風法) 위주로 택지되었는
데, 이를 감안한다 해도 불합리한 입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국
초에 창건된 궁궐에서 침전은 후침의 제도를 수용하여 산지와
맞닿은 내전의 가장 북쪽 위치함으로써 지기의 전달에서 1순
위를 점유하거나, 정전과 다른 내맥의 혈처를 찾아 입지하는
등 겉으로 드러난 예제규범 속에 풍수상의 계획원리를 내함
(內含)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덕궁 침전의 입지는 지형에 순
응하는 태도만 나타날 뿐, 처음부터 풍수상의 이점을 취하지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더군다나 경덕
궁이 술자들의 주도로 계획․시공이 이루어진 터라 융복전과
회상전의 터잡기는 여러모로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을 내포하
고 있다.
한 가지 단서로 짚어볼 수 있는 것은 당시 별궁의 존재가 그
다지 필요하지 않았고 인왕산 아래 인경궁터가 길지로 인식되
었던 상황에서, 이복동생인 정원군의 집터를 빼앗아 경덕궁을
지었다는 점이다. 이에 앞서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綾昌
君)이 왕의 기질이 있다하여 숙청되는 사건이 있을 정도로 광
해군은 정원군의 집안을 매우 경계하였다. 결국 새문동에 서려
있는 왕기를 진압하기 위해 경덕궁이 창건되었고, 정원군의 집
터 자리에는 의도적으로 회상전이 세워졌다34). 이러한 점들은
경덕궁의 공사가 애초부터 정원군 집터를 허물고 그 자리에 광
해군 자신이 사용할 건물을 앉히는 것을 목표로 계획되었고,
그에 따라 왕기가 서려있는 기존 지형에 침전일곽을 조성했던
당초의 상황을 시사해 준다. 하지만 침전이 들어설 지역을 먼
저 정해놓고 다른 전각들의 입지를 살피다보니 정전과 편전도
그리 좋지 않은 터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다른 전각들 역시
궁궐건축의 형식에 맞도록 적절히 변통하여 자리가 정해졌던
것 같은데, 이런 계획과정의 변칙은 사대부가 수준의 터에 입
지된 경덕궁의 태생적 한계를 잘 대변해 준다. 그동안 경덕궁
은 특수한 창건동기로 인해 모종의 풍수논리가 내포된 공간구
성을 갖추었을 것이라 회자되어 왔다. 그러나 새문동왕기설이
오히려 합리적 수준의 풍수구성을 방해하는 원초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이처럼 경덕궁은 침전일곽의
배치가 궁궐의 전체 구성에 영향을 주었던 이례적인 방식으로
조성되었기에, 유사한 공간구성을 갖았더라도 길지적 요소를
만드는 구성논리에 있어서는 국초의 궁궐들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셋째, 「서궐도안」 등의 시각자료에서 침전 일곽 배후의 산
지를 정비했던 방식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Figure 15,
Figure 16). 융복전과 회상전 뒤편에는 창덕궁 대조전 일곽과
마찬가지로 사면(斜面)을 정돈하기 위한 구조물인 석계가 나
타난다. 또한 주맥영역을 보호하는 용도인지 알 수 없으나 그
러한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담장이 설치되어 있는데, 창
덕궁의 형식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대조전 뒤편의 담장 안에
건물이 없는 반면, 회상전 뒤쪽 언덕에는 두 채의 건물이 나타
나는 점이 다르다. 하나는 덕유당(德游堂)․사물헌(四物軒)이
라는 편액을 걸은 ㄴ자형 건물이고, 다른 하나는 회상전 북쪽
언덕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봉황정(鳳凰亭)이다. 전술하
였듯, 궁궐에서 내맥의 영역 안에는 통행뿐만 아니라 건물을
세우는 것이 금기시 되었다. 그런데 담장을 쳐서 각별히 보호
해야 하는 지점에 건물을 세운다는 것은 일반적인 궁궐의 정
비원칙에서 벗어난 이례적인 것이다. 이중에서 덕유당은 후대
에 건립된 전각이므로 창건 당시의 구상은 아니었다. 봉황정
의 경우 초창시기에 지어진 건물은 맞으나 북편으로 치우친
자리에 세워졌고 초정의 형식으로 간소하게 지어졌기에 지기
를 누르는 부정적 영향이 미미했을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후
대의 기록에서 두 건물이 내맥을 손상시키므로 옮겨야 한다는
소견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점이 의문인데, 아마도 경덕궁의
내전지역이 당초부터 내맥의 혈과 관계없는 자리에 입지되었
기 때문에 굳이 두 건물의 존재를 문제 삼을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시 말해, 회상전 뒤편의 담장은 창덕궁 대
조전 주변의 공간형식을 답습한 장치였을 뿐, 일곽의 구획물
이나 장식물 이상의 기능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덕유당․봉황정 역시 생기를 해치는 위치상의 결함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넷째, 흥정당의 위치도 창덕궁 희정당의 입지상황과 동형으로
볼 수 있다. 두 전각은 모두 본편전이 의례공간으로 자주 사용되
면서 조선 후기에 공식적인 편전으로 자리 잡게 된 이력이 있다.
또한 내전과 외전의 경계부에 위치하여 임금의 편의를 추구하는
다용도 전각으로 자주 활용되다보니, 본편전의 기능과 교차 가
능한 제2의 편전으로 발전하게 된 것 역시 공통의 특징으로 지
적된다. 물론 양자 간의 공통점은 흥정당이 희정당[수문당]을
모델로 삼아 위치와 기능이 의도되었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다.
배치형식에 있어서도 ‘산줄기-침전-편전’으로 이어지는 전래의
개념이 충실히 반영되었는데, 앞서 설명한대로 이러한 구성은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먼저 시도된 것이었다. 경복궁과 창덕궁이
갖는 축선구조는 산줄기에서 흐르는 지기를 핵심전각에 차례로
전달하여 길지의 영역을 구성하려는 풍수적 컨텍스트를 내포하
는 것이었다. 그러나 흥정당의 경우 외견상 경복궁․창덕궁과
유사한 방식으로 풍수적 위계를 실현하는 배치를 가졌지만, 침
전에서부터 시작된 불합리한 입지에 의해 지기의 전달은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흥정당은 이전의 궁궐 운영경
험으로 정착된 전각배치의 한 가지 상황유형으로 만들어진 것이
지, 풍수적 효과를 노린 건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상 광해군 대에 이룩된 경덕궁은 임진왜란 전에 창건된 궁
궐의 전각구성방식과 지형조건에 따른 상황유형을 참조하여,
17세기 초의 궁궐운영방식이 녹아든 정전, 편전, 침전의 배치를
창출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북쪽 언덕으로부터 ‘본편전-정전’의
순서로 놓은 점이나, 장풍국의 언덕이 감싸고 있는 지대에 침
전과 편전[시사전]을 연속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은 기성 궁궐
의 배치형식을 참조하면서 당대의 필요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
러나 경덕궁에는 경복궁과 창덕궁의 경우처럼 유교사상이 지
배하는 기하학적 건물축과 풍수논리를 담은 실리적인 건물축이
결합된 전각구조가 부재되어 있다. 워낙 터가 비좁기도 했지만
왕기를 머금었다는 정원군의 집터를 변용하는 방식으로 계획
되었기 때문에, 혈처와는 무관한 곳에 핵심전각들이 배치되는
등 양기풍수의 기본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중요
한 것은 규범적 형식을 지키면서도 지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
는 계획된 배치였는가의 문제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경
덕궁은 분명 이전의 궁궐과는 분명히 다른 목표를 갖고 조성되
었고 조성된 결과도 달랐다. 표면적으로 이전 궁궐과 유사한
방식으로 산에 밀착하여 전저후고(前底後高)식의 전통적인 정
전배치가 실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풍수적 관점에서 볼
때 혈장과 대응되지 않는 힘없는 삼전(三殿)이 건립되어버렸
던 것이다. 따라서 광해군이 역점을 두고 건설한 인경궁이면
모를까 새문동왕기설에 의해 터를 점유하는 의미가 컸던 경덕
궁은 조선 궁궐 정전의 배치형식에 내재된 실리적 풍수구조가
탑재된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5. 경복궁과 창덕궁의 정전배치에 나타난 풍수논리와
함의
이상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조선 초에 창건된 궁궐은 전통적
인 궁실규범과 풍수적 명분이 혼재된 형식으로 이룩되었다. 그
것은 도성 차원에서의 궁궐 입지뿐만 아니라, 궁궐 내부 전각의
배치에서도 조산(祖山)인 삼각산으로부터 주산 밑의 혈장에 이
르는 용맥을 중요시하고, 뛰어난 땅기운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
있는 곳에 주요 건물이 입지했던 사실에서 확인되었다. 이러한
분석결과를 바탕으로 조선 궁궐이 갖는 독특한 공간형식과 그
성격을 변별해 보면 다음과 같은 조영문법을 추출해낼 수 있다.
첫째, 정전의 중축선 배치가 주요한 경복궁과 병렬적으로 벌
어진 구성을 보이는 창덕궁은 전각의 배치에 있어 완전히 다른
방식을 갖는 것으로 평가되지만 풍수지맥과 핵심전각을 대응
시키는 방법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양궐의 핵심전각은
지형의 형편에 따라 주산의 용맥으로부터 힘을 받는 위치에 입
지되었다. 앞에서 검토한 바 있듯, 이런 공간형식의 기원은 개
경 본궐의 공간형식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면 개경 본궐과
조선 궁궐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입지방식은 공통된 계획원리
의 결과로 볼 수 있을까? 우선 한국 궁궐사에서 공간의 개념이
발전해 온 과정과 변천사를 추적해 보면, 사료가 절대적으로
빈약한 이전시대에 비해 고려ㆍ조선 간의 전환양상은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난다. 분명한 것은 조선시대 궁궐이 개창자의 이
념적 성향에 따라 고려와는 다른 외적 형식요소를 갖고 왕권을
형상화하는 장치를 적극 도입했다 할지라도 당대인에게 지극
히 현실적이었던 복지법(卜地法)의 방식은 그대로 두고 외형
적 틀의 전환만이 이루어졌다 것이다. 이러한 점은 조선의 궁
궐이 고려시대 궁궐양식을 유교적 교의로 번안시킨 결과물이
며, 국가이념의 교체에 따른 이념적 교환양식이었다는 개연성
을 엿보게 한다. 물론 고려와 조선 궁궐에서 표상되었던 각기
의 공간형식에는 동률적인 잣대로 구분해낼 수 없는 시대적 간
극과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양자가 공유하는 건축물
과 자연을 접합시키는 공통된 방식은 대체로 고려와 조선 궁궐
양식 간의 통섭관계 즉, 양 시대 궁궐양식 간의 연속성과 동질
성을 확인시켜주는 연결고리로 간주된다.
둘째, 경복궁․창덕궁 모두 표면적으로 전조후침과 삼문삼
조의 예제를 따랐지만 전각배치의 기준점이 내맥의 응결처인
아미사였던 점은(Figure 17) 조선 궁궐의 공간개념을 재음미하
게 하는 새로운 중층구조를 가늠케 한다. 여기서 말하는 중층
구조란 표상되는 조형 디자인 안에 암묵적으로 전제하지만 지
형과의 관련성에 의해 실체가 드러나는 실리적인 공간틀을 말
한다. 조선 궁궐에서 주맥 밑에 경사가 완만해지기 시작하는
지점에는 보통 침전이 입지한다. 침전일곽과 그 일대는 임금의
생활공간이 마련되어 다수의 건물 즉, 일상생활과 집무를 위한
별전이 들어서게 되고, 그 남쪽으로는 외전적 성격이 부여된
편전이 자리하게 된다. 편전 아래로는 관청들과 왕실의 다양한
생활공간이 여건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배치된다. 그런데 전통
공간의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예상되듯이, 연속되는 전각군의
배열은 아미사 아래에 위치한 침전의 좌향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고, 그 이하는 전저후고의 지형과 위계에 따른 건물들의 접합
관계로 나타난다. 실제로 전각영역의 총체적 진행방향은 내맥
의 혈이 추동하여 흐르는 지기의 방향과 일치한다. 주지하다시
피, 기왕의 연구는 주로 복잡다단한 구중궁궐의 배치를 유형학
적 틀 또는 의례의 영향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본 연구의 결과
는 주례의 형식주의로 구체적인 형상을 취득한 ‘제도 지향적
구조’가 주산의 지기가 유도되는 전각 간의 접합구조와 유기적
으로 통합되도록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침
천축을 아우르는 포괄적 의미의 정전축의 구조 안에 풍수적 효
과를 유발시키는 형식이 포개져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
선 궁궐은 표면적으로 이상적 공간이론을 구현하여 국왕 중심
의 지배질서를 내세우고 있지만, 안으로는 주산에서 내려온 지
기의 흐름에 따라 전각이 배치되는 두 가지 작동원리가 복합되
어 있는 이른바 중층구조를 갖았다고 볼 수 있다.
셋째, 굳이 양 구조 사이의 선후관계를 따지자면, 궁궐터를
정한 택지의 근거가 주산의 산줄기였고 풍수상의 개념에 의거
한 공간의 구조화 작업이 궁궐 건설의 마스터플랜 단계부터 구
상되었다는 사실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구조화 작
업은 궁궐터의 모색과 궁역을 결정짓는 과정을 거친 후에 세부
적으로 정전과 침전[또는 침전과 편전]의 위치를 결정한 것으
로 마무리 되었겠지만, 창건 뒤에 내전 또는 후원에 별전이나
원묘를 지을 때도 비슷한 논리에 의해 그 입지가 결정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풍수구조가 시간적 서열에서 다소 앞서며, 다
른 어떠한 유형학적 개념구상이 침범할 수 없는 불가역적 성격
이 있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물론 이러한 계획개념은 유교적
규범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궁궐건축의 형식과 주산의 내맥에
대응하여 건물을 입지시키는 전래의 관념을 절충시킨, 당대 지
배엘리트의 조영의식이 반영된 결과였을 것이다.
넷째, 현 상태로 놓고 봤을 때, 경복궁과 창덕궁의 ‘침전-편
전’ 축은 상기 개념에 명확히 부합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전
의 창덕궁 대조전, 희정당은 지금처럼 단일한 선상에 놓여있지
않았다. 현 상태의 희정당이 대조전의 축선과 일치하게 되었던
것은, 1917년 화재 후 복구되면서 본래의 희정당에 비해 몸집
이 두 배에 이르는 경복궁 강녕전을 옮겨온 이후의 일이었다.
대조전과 희정당 일곽의 건물들은 화재로 전소되고 재건되기
를 수차례 반복되는 과정에서 위치, 건물구조와 규모가 국초의
상태에서 조금씩 달라져 왔다35). 그러나 1917년 발생한 화재로
불타버린 뒤에 복구된 대조전은 본래 위치에서 10m 가량 북쪽
에 건립되었고, 동시에 희정당도 위치를 옮겨갔으므로 현 상태
로 창건시의 개념을 읽어볼 수는 없다. 이에 재건 이전의 공간
구성을 보여주는 도면(Figure 18a와 18b)과 사진자료(Figure
19)로써 ‘침전-편전’축의 구조를 가늠해보면, 「동궐도」에 나타
난 묘사와는 달리 ‘대조전-희정당’의 축이 성립되어있지 않음
을 볼 수 있다. 물론 대조전 배후에 내맥이 길게 포진됨에 따라
혈장(穴場) 역시 넓게 형성되었으므로, 굳이 희정당이 대조전
축을 따르지 않더라도 지기의 감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나,
엄밀히 말해 대조전과 희정당은 경복궁의 사례처럼 단일 축선
에 놓였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듯 침전 이하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규칙적인 패턴에
서 벗어난 희정당의 입지는 인정전의 향을 따르는 선정전 일곽
과 대조전의 향을 따르는 전각군이 희정당 부근에서 충돌하는
데 기인한다(Figure 18a).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진하는 두 전
각군이 만나는 지점에서 어느 한 쪽이 사멸되어 힘을 잃게 되
었는지, 아니면 두 향이 모두 변화되었는지는 공간의 우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선정전 일곽이 압도하여
그 구획이 방정하게 관철되었지만 희정당 영역은 어쩔 수 없이
찌그러진 형상을 취하게 되었다. 이는 권위와 중심성을 강조하
는 궁궐 건축의 특성상, 정전을 중심으로 한 전각질서가 왕실
의 생활공간 보다 우월하게 표현되어야 할 필요성이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희정당이 역대 임금이 애용했던 전각이었
고 침전과 가까운 편리함이 있었다 할지라도, 왕의 존엄함을
나타내는 정전의 평행축과 그것의 강고한 역장을 침범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간의 체모가 결손된 희정당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의 방안이 모색되었다. 두 영역의 완충공간
으로 십장생실(十長生室)이 두텁게 지어졌고, 공간의 균형을
맞추고자 희정당이 대조전 축선에서 벗어나 일곽의 중앙부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근본적으로 정전과 침전이 기
대고 있는 내맥이 서로 같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였다.
만일 선정전과 희정당 사이에 더 넓은 공간이 있었다면 희정당
은 분명 대조전 축선상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다섯째, 아미사혈에서 침전과 편전이 연이어 건립되었다는
이론적 모형은 창건 경복궁에서 ‘연침[강녕전으로 개명]-보평
청[사정전으로 개명]’의 직선적 배열에서 명확히 확인된다. 그
러나 창덕궁의 사례로 예시된 ‘대조전-희정당’의 관계는 희정당
전신인 수문당(修文堂)의 본래 용도가 왕이 학문을 연마하는
독서당이었다는 점에서 제고를 요한다. 숙종 연간 궁궐지에
는 희정당을 편전36)으로 명시하고 있으나, 사실 그러한 용도가
확인되는 시기는 조선 후기부터이다37). 즉, 병자호란 후 인조와
효종은 주로 청국 사신들을 인견하는 장소로 희정당을 사용했
고 현종․숙종은 궁궐지의 기록과 같이 일상적인 소대와 경연
이 이루어지는 정치공간으로 희정당을 사용했던 것이다. 따라
서 조선 초의 희정당 즉 수문당의 용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
다. 먼저 수문당에 관한 가장 앞서는 기록은 연산군 2년(1496
년) 6월 14일 수문당에 가벼운 화재가 났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
나, 전각의 용도는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그로부터 얼마 지
나지 않아 연산군은 수문당을 고쳐짓고 온전한 대조전도 같이
중수할 것을 명하게 되는데38), 이때 승정원은 반대하는 상언을
올리면서 수문당의 본래 용도를 부각시켰다. 당시 기록은 대조
전과 수문당이 성종이 26년 동안 거처했던 ‘상어지소(常御之
所)’이며, 그 전에도 태종, 세종도 ‘평상시 임어했던[常御] 곳’이
었다고 하여 수문당의 실제 용도가 대조전 일곽의 전각들처럼
별당으로 존재했다는 하나의 단서를 남기고 있다39).
대조전의 전랑(前廊)을 고치라고 명령하셨는데, 신들의 생각에는
대조전․수문당은 성종께서 26년 동안 거처하시던 곳[常御之所]
이며, 태종․세종께서 또한 거처 하셨습니다[亦常御之]. 옛사람
이 이르기를, ‘부모를 추모(追慕)할 제 그 거처하던 것을 생각한
다.’하였으니, 만약 기울어져 위태로울 지경이 아니라면 어찌 꼭
고쳐야만 합니까?40) (연산군일기 2년(1496년, 丙辰) 8월
22일(丙申), 한국고전종합DB, 밑줄 필자 강조)
그런가 하면, 그해 12월 수문당[숭문당]이 중수되어 당호가
희정당으로 고쳐졌을 때에도, 신하들은 명칭 변경의 불가함을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은 단서를 남겼다.
이 당(堂)은 성종께서 26년 동안 평상시 거처하시던 곳[燕居之
所]입니다. 이미 인정전과 선정전이 있는데 또 숭문(崇文)41)으
로 이름 한 것은, 여기서 정사를 들을[聽政] 뿐만 아니라 글을 닦
는 의미[修文之意]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희정으로 이름 하는 것
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조종께서 거처하던 당의 이름을 지금 와서
고치는 것이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42). (연산군일기 2년
(1496년, 丙辰) 12월 8일(辛巳), 한국고전종합DB, 밑줄 필자
강조)
위 사료에서 말하는 수문당[숭문당]의 용도는 세 가지이다.
요컨대 임금이 평상시 머물며 생활하는 연거지소(燕居之所)
곧 침전류의 전각이었으며, 정치 현안을 토론하고 처리하는 편
전이자, 경전을 연구하는 경연(經筵)의 장소였다는 것이다. 그
렇다면 수문당은 소침, 소편전, 독서당의 기능이 복합된 임금의
생활공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위치도 거둥하기 편한 대조전의
바로 아래에 있어, 많은 임금은 이곳에서 근신을 불러 정사를
논하거나 평상시에는 학문을 연마하고 때로 침수에 들기도 하
였을 것이다43). 따라서 수문당은 침전의 종류로 볼 수 있는 동
시에 편전류의 전각으로도 가늠해 볼 수 있겠다. 창덕궁 대조
전과 희정당 배치의 원형질도 ‘침전-편전’ 또는 ‘침전-별당[학
문소]’의 성격을 갖는 내전과 외전의 접점 공간으로 볼 수 있는
바, 본고에서 상정한 이론적 모형과 다르지 않다.
여섯째, 이상의 결과는 공식적으로 표방되는 전각의 위계가
곧 순수한 지기를 취하는 풍수적 서열이라는 의미를 재차 확인
시켜 준다. 태조 이성계가 도성과 궁궐터를 정했던 과정에 있
어 선행되는 작업이 바로 주산을 정하는 것이었고, 그에 따라
궁궐의 위치가 확정되었다. 주산이 정해진 뒤에는 주맥과 혈자
리를 감정한 후에 침전과 정전을 입지시키게 되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지켜졌다. 양궐 모두 아미사형의 혈이 혈진처
(穴盡處)를 이루고 있는 곳 가까이에 정침을 우선적으로 배치
하였으며, 명당수가 가까운 곳에 정전을 위치시켰다는 것이다.
침전의 남쪽에는 편전을 배치하게 되는데, 중축선 배치가 뚜렷
한 경복궁의 경우, 한 가지 주맥 하에 정전까지 일원적으로 배
치되었으나, 내맥이 분산된 창덕궁의 경우 정전과 침전의 축이
사격(沙格)에 따라 나누어 졌다. 정전축이 결정되면 궐내각사
및 군소 전각들은 규칙적인 패턴 또는 편의에 따라 위치가 조
정되고, 이어서 궁장과 궁문이 설치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궁궐의 내부공간이 미리 결정된 풍수적 서열에 따라 핵심전각
을 건립하고 차례로 부속건물과 구획시설 등을 설치하는 방식
으로 구조화되었음을 말해준다.
일곱째, 한국․중국․일본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삼국은
예로부터 인접한 지리적 여건을 바탕으로, 동아시아만의 고유
가치를 공유하는 문화권을 이루어 왔다. 삼국의 문화에서 공유
되는 특질은 유교사상에 근거한 위계적 공간질서의 구축에 있
다. 또한 길지명당(吉地明堂)을 택지함으로서 국가나 가문의
부귀와 번창을 추구하려는 풍수설도 한중일 삼국이 공유했던
중요한 가치임 분명하다[24]44). 하지만 풍수이론에 따른 정원
의 조성양식과 배치방법은 삼국의 정원에서 뚜렷한 차이를 갖
고 전개되었다45). 특히 한국의 경우, 나말여초(羅末麗初)부터
풍수설에 따라 택지하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보통 산줄기 바로
아래에 건물지를 정했는데, 이러한 지형상의 제약은 건물의 후
면부에 크고 작은 후원을 발달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즉,
산줄기와 주거공간이 교차하는 곳에 조성되는 화계와 후원은
한국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독특한 공간문화로 규정되는 것이
다[25].
이러한 예는, 작게는 경복궁 아미산 화계나 대조전 뒤편 화
계처럼 건물 뒤에 자리 잡은 언덕을 계단식으로 다듬고 그곳에
아름다운 꽃나무를 심거나 괴석을 놓고 굴뚝을 세워 아름다운
경관을 창출한 데에서 찾을 수 있고(Figure 20), 비교적 큰 규
모로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공유하는 거대한 후원이 산에 안겨
조성되었던 것을 들 수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풍수적 관념에
따라 산과 가까운 곳에 건물을 입지시켰던 양상은 민가주택에
서 뒷마당을 가꾼 작은 후원으로 그리고 궁궐에서는 거대한 산
지후원의 양식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점은 한국 전통조경
의 주요한 특질로 규정된다.
Ⅳ. 결론
본 연구는 이념적 공간질서의 표상, 종법적 배치모델이나 의
례의 집행을 위한 제도적 장치에 초점이 맞춰진 조선시대 궁궐
전각의 배치방식에 대한 기왕의 논의와 발상을 달리하여, 풍수
로 대변되는 전통적 복지의 맥락으로 조선 궁궐의 입지와 축개
념을 재탐색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하였다. 이에 조선시대 궁궐
에 나타난 핵심전각의 배치형식을 주산과의 관계로 검토하여
궁궐의 축선에 투영된 풍수개념과 그에 따른 궁궐의 계획원리
를 고찰하였으며, 다음의 결과를 도출하였다.
1. 조선 건국 직후 창건된 경복궁은 거대한 분지의 중앙에
입지한 자금성과는 달리 도성 서북쪽에 치우친 곳이면서 백악
산의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입지하였다. 태종 때 창건된 창
덕궁도 마찬가지로서 삼각산의 또 다른 지맥인 응봉 아래에 궁
궐터가 마련되었는데, 모두 산의 정기를 궁궐에 담으려 했던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관념은 세부적으로, 궁궐 내부의
정전․편전․침전 등 임금과 관련된 주요 건물의 배치가 주산
의 내맥에 대응하는 위치에 배치되는 것으로 이행되었다. 경복
궁의 경우 내전과 외전의 중심건물이 모두 백악산에서 내려온
아미사 아래에 일렬로 배치되었고, 창덕궁도 응봉에서 직선적
으로 뻗은 양맥 아래에 인정전이 세워지고 가장 출중한 내맥
하에 침전과 편전의 영역이 연달아 건립되는 등 풍수적 효과가
직접적으로 미치는 산줄기 아래에 의도적으로 배치되었다. 이
러한 점은 임금이 사용하는 대내의 주요 건물들이 외견상 의례
의 수행이나 시지각적 정형성을 확보하기 위한 배치방식을 취
했지만, 입지에 있어서는 애초부터 풍수상의 계획개념에 의해
용맥의 혈 자리를 감별하여 그 효력이 미치는 명당에 집터를
정하는 이른바 명당정혈법(明堂定穴法)으로 택지되었음을 알
려준다.
2.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풍수지맥선이 응결된 낮은 언덕을
담장을 쳐서 보호했던 노력이나, 혈처 앞에 침전과 편전을 차
례로 배치하는 방법이 동일하게 나타났으며, 개경 본궐에서 유
래한 공간형식도 일부 엿볼 수 있었다. 개경 본궐은 송악산 중
턱에 자리 잡았고 전각의 배치도 지형의 생긴 모양에 따라 불
규칙하게 입지되었다. 고려 궁궐 도처에서 발견되는 비정형성
은 다분히 풍수적 전략에 의한 것으로 해석되며, 특히 지형파
괴가 최소화되어 건물축이 통일되지 않은 창덕궁의 배치방식
은 그러한 풍수상의 계획개념의 연속으로 이해된다. 이같은 양
시대의 궁궐에 나타난 구조적․개념적 상동(相同)은 서로 다
른 맥락의 공간체제를 담고 있었지만 궁궐과 주산을 하나로 묶
는 풍수적 계획개념만큼은 변화되지 않았다는 통섭양상을 확
인해 볼 수 있는 지점으로 간주된다.
3. 조선 궁궐의 정전축은 제도 차원으로 정비된 형식과 풍수
적 효과를 유발시키는 형식이 포개져 있는 이중의 축구조로 이
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축선구조를 추동하는 기점은 바로 아미
사였다. 아미사는 궁궐터가 정해졌던 택지의 근거지형이기도
했지만, 궁궐의 전각배치의 기준점이 됨으로써 주산의 생기가
입수룡을 타고 내려와 대내에 전해지는 매개체로 작용하였다.
실제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정전[법전], 편전, 연침을 아우르는
정전(正殿)은 모두 아미사로 여겨지는 혈 앞에 건립되었고, 그
밖의 다양한 전각들과 관청들은 정전의 건물축을 기준으로 그
주변에 정연하게 배치되었다. 아미사를 기점으로 하는 축선은
주례에 근거한 전조후침과 삼문삼조 등의 예제형식과 대립되
지 않으며, 정전 건물군이 방정하게 남북축을 형성함에 따라
종법적 질서 또한 구현되는 효과가 있었다. 따라서 침전, 편전
등이 하향하며 뻗어가는 전각의 진행방향은 겉으로는 이념적
형식주의를 표상하고 있지만 이면에는 풍수적 의미의 좌향이
건축형식으로 표현된 것으로 풀이된다.
4. 광해군 대에 창건된 경덕궁은 관찬사료를 비롯한 많은 서
적에서 새문동의 왕기를 진압하기 위해 건설되었고 공사의 전
과정을 술관이 주관한 것으로 서술되었던 만큼 풍수상의 계획
원리가 상당부분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리되어 왔다. 그러나 현
경희궁과 1921년 지형도에서 특기할만한 풍수상의 견해는 발
견되지 않고 오히려 궁궐에서 가장 중요한 전각인 정전과 침전
이 무맥지에 입지되는 등 매우 불합리한 조건을 갖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애초부터 왕기가 서려있는 새문동의 정원군
집터를 허물고 그 자리에 광해군이 사용할 궁전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결혈된 지점과 관계없이 정
전류의 전각이 배치되었던 변칙적 계획과정 때문이었다. 정원
군 집터에는 침전일곽이 우선적으로 세워졌고, 그 서측의 언덕
에 정전과 편전이 자리 잡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경덕궁은
궁궐의 전체의 전각들이 지기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구조를 갖
게 되었다.
5. 궁궐의 주요 전각들은 풍수적 의미를 갖는 지형조건에 종
속된 배치를 보였다. 이는 공식적으로 표방되는 정전류 전각의
위계가 곧 순수한 지기를 갈무리하는 풍수적 서열과 동일한 효
과를 발휘하고 있는 점에서 확인된다. 경복궁과 창덕궁 모두
아미사가 혈진처를 이루고 있는 곳 남측에 1차 건물종인 임금
의 정침이 우선적으로 배치되었는데, 궁궐에서 가장 좋은 기운
이 갈무리되어 있는 곳을 임금이 점유하기 위함이었다. 침전의
남쪽에는 혈처로 부터 건립되는 2차의 건물종인 편전이 배치되
었다. 중축선 배치가 뚜렷한 경복궁의 경우, 한 가지 주맥 하에
정전까지 일원적으로 배치되었고 내맥이 분산된 창덕궁에는
정전과 침전의 축이 형편에 따라 나뉘어 졌다. 그러나 정전 입
지의 경우 풍수적 이점을 취하되 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공간의
형식적 질서가 보다 중요시되었다. 따라서 침전과 법전이 동일
축선에 위치하지 않는다면, 법전을 중심으로 하는 축은 지기가
흐르는 방향에 따라 건물들을 배치해 가는 실리적 배치방식 즉,
경사형 접합구조가 아닌 왕권을 형상화하는 권위건축 역장으
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상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궐의 배치형식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난 원리적 축선상에 주산의 생기가 전달되는 내적구조가
암묵적으로 탑재되어 있음을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궁궐터를
선정하는 방법이 중심전각을 배치하는 방법과 동일한 것이었
으며, 그러한 방법이 국왕이 명당을 점유하는 효과적인 수단으
로 사용되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 다만 본고에서는 정전․편
전․침전의 주요 전각들을 중심으로 고찰되다 보니 대비전, 원
묘 등이 내맥과 접해있는 경우를 아우르지 못했다. 또한 개경
본궐에 대해서 최근의 발굴결과가 참조되어, 개별전각의 입지
에 어떠한 양상으로 풍수논리가 전개되었는지도 세밀한 탐구
가 필요한데, 이러한 문제들은 후속 연구에서 다루기로 한다.
주 1) 본 연구는 Yoon(2000)에서 정리된 정전 개념에 따라 개별 전각으로
의 정전 외에 궁궐의 핵심전각인 정전, 편전, 침전을 포괄적 의미의
정전으로 규정하여 서술하되, 세밀한 구분이 필요한 경우 각각을
나누어 지시하였다. 마찬가지로 ‘정전구조’, ‘정전배치’ 등의 용어도
같은 맥락에서 사용하였으나, ‘정전축’의 경우 한 가지 개념만으로
는 다양한 사례를 포괄하지 못하는 문제가 예상되었다. 본 연구에
서 의도한 정전축의 기본개념은 내맥의 혈처 하에 위치한 ‘침전-편
전-정전’의 축 또는 ‘침전-편전’의 축을 말하지만, 건물의 진행방향
이 여러 개로 분산되어 있는 창덕궁의 경우 이러한 용어만으로는
혼동을 줄 수 있었다. 따라서 창덕궁에 나타나는 상이한 축선을 정
전축의 범주어로 기술하되, 설명하는 대상이 다를 경우 ‘인정전 축’
과 ‘대조전 축’, 또는 ‘정전축’, ‘침전축’으로 구분하여 지시하였다.
Yoon(2000)에 정의된 정전의 포괄적 정의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정전(正殿)은 1차적으로 의식을 행하는 단일건물을 뜻하지만, 동
시에 편전과 침전 역시 그 범주에 포함되는 포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궁궐 내에서 정전으로 인식되는 중심공간이라는 것은
상당히 집합적인 영역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기본적으로
왕을 중심으로 왕의 침전, 편전, 정전이 포괄적으로 정전의 범주에
속한 다고 할 수 있다.[16]”
주 2) 조선과 고려 궁궐 간의 상관성을 조명한 기왕의 연구는 조선 궁궐에
주례식의 예제가 적용되었으나 본질적으로 풍수를 중요시한 고려시
대 조영관습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에 관
한 대표적인 연구를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Kim, D. U.(1997).
주 3) 고려시대 여러 이궁에 특정한 명칭이 정해졌던 반면, 개경의 정궁은 고려사에서 본궐(本闕), 대궐(大闕), 궁궐, 대내(大內) 등으로 나
타난다. 이러한 별칭들은 무신난 이후 왕들이 연이어 창건된 이궁이
나 별궁을 거처로 삼기 시작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들인데, 고종 이
후에는 정궁을 다른 이궁들과 구분하기 위해 주로 본궐이란 명칭이
사용되었다. 본고는 개경 본궁만을 다루었으므로 편의상 ‘개경 본궐’
로 통일하여 기술하였다.
주 4) 개경 본궐은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다. 우선,
광종 12년(961년)부터 2년간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는데, 당시 보수
를 넘어서 신축된 건물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본궐의 수
난은 현종 2년(1011년) 정월에 거란의 침략으로 소실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소된 본궐은 현종 11년(1020년)부터 3년의 공역기간
끝에 재건되었으나 인종 4년(1126년) 이자겸의 난 때 다시 불탔고
그 뒤로 6년간의 복구공사가 시작되었다. 전각과 궁문의 명칭이 대
대적으로 바뀐 것은 바로 이 시기이다. 그 뒤로 명종 때와 고종 때
화재로 불타 각각 재건되었고 몽골군에게 불탄 뒤에는 일부만이
재건되었다. 마지막으로 고려 말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되고는
더 이상의 중수는 없었다. 이러한 본궐의 소실과 재건의 과정에서
초기 공간구조가 수차례 변형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개경 본궁
에서 발견되는 복수의 축은 풍수에 의한 결과뿐만 아니라 수차례
에 걸친 증축의 흔적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주 5) 개경 본궐의 궁제를 연구한 김동욱, 김창현, 우성훈, 이강근, 장지연
등의 논고에서는 풍수설 외에도 개경 본궐이 여러 차례에 걸쳐 소실
되고 증축되기를 반복하였었기 때문에 일원화된 중심축에서 이탈된
기형적인 공간이 추가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주 6) Kim and Kim(1987)은 한양에 건설된 가로변 행랑의 용도에 대해
(1)시전점포, (2)공해(公廨), (3)조운을 위한 창고, (4)어용공장(御
用工匠)을 위한 시설, (5)주택 등의 다섯 가지를 언급하였으며, 구
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한양의 대로변에 일대미관을
이루면서 대규모로 건조되었던 당시의 행랑은 수도의 사회기반기
설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여,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어진 도시 건축물
로서 지금의 도심복합용도건축(Multi-Use Building)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15].”
주 7) 行廊造成之事, 初皆以爲難, 及其成也, 國家有模樣而可觀矣。 若有餘
力, 則鍾樓東西亦可作也。
주 8) 경복궁 아미사에 관한 논의는 Jung and Sim(2012)에서 자세히 다뤄
졌으므로[26], 여기서는 정전배치에 담긴 풍수구조에 집중하여 논구
하였다.
주 9) 일반적으로 아미사는 나방의 눈썹과 같이 초승달 모양을 갖는 사신
사를 지칭할 때 사용되며, 대개 혈장에서 보이는 안산의 사격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경복궁 아미사를 언급된 유일한 사료인 승정원일
기 고종 12년 3월 29일 기사는 현무봉을 아미사로 인식하고 있다.
이에 본 연구는 경복궁 아미사와 더불어 입수룡이 혈을 맺은 곳이
반원형의 봉긋한 둔덕을 이루고 있는 창덕궁 대조전과 자경전의 현
무봉을 아미사로 보고 논의를 전개하였다.
주 10) 승정원일기 고종 12년(1875년) 3월 29일 기사 참조.
주 11) 이 기사는 고종 10년(1873년) 12월 경복궁 내전에서 발생한 큰 불
로 자경전, 자미당, 교태전 등 364칸 반의 전각과 행랑이 소실된 후
재건을 위한 고종과 대신들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대신
들은 고종이 교태전을 확장하기 위해 아미사를 조금 깎아버리려고
하는 의도에 반대하며 아미사의 정체성과 그것의 풍수적 가치를
논설하고 있다.
주 12) 上曰, 自蛾眉砂至勤政殿, 素有脊脈也。
주 13) 경복궁에서 전통적 궁실구조로 자리 잡은 정전축은 풍수적 의미의
좌향으로 읽을 수 있다. 이를 직접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개념
은 바로 척맥이다. 승정원일기 고종 12년 3월 29일 기사에 나타
난 척맥은 척추가 되는 내맥이란 뜻으로, 정전축 성립의 근거가 되
는 지형적 조건을 말한다. 경복궁은 이러한 척추를 중심으로 핵심
전각이 건립되었고, 뼈대와 살이라 할 수 있는 행랑과 다수의 부속
건물들이 부가되었다. 정전축의 양옆으로는 그와 평행한 행랑이 설
치되어 기능적 영역을 획정했고, 구획된 곳곳에는 대칭적으로 배치
된 소실[함원전, 인지당], 소침[연생전, 경성전] 및 소편전[만춘전,
천추전]이 건립되어 공간적인 부피를 갖게 되었다.
주 14) 흔히 병렬식 배치 또는 동서축 배치라고 표현되는 창덕궁의 구조는
이후의 궁궐들, 특히 경희궁과 덕수궁에 유사한 방식으로 반복해서
나타났다. 병렬식 배치는 축선의 권위적인 배치법에 비해 자유분방
하고 탈규범적이기 때문에, 자연 지형에 순응하는 한국 조경의 특색
이 잘 반영된 또는 조선적인 궁궐 배치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27].
주 15) Park(2013), Park(2014)은 이러한 논지로 궁궐 최고의 혈처에 왕비
의 숙소가 자리하게 되고, 정전은 의례만 이루어지는 곳이므로 굳이
혈처에 배치될 필요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3][4].
주 16) 교태전을 왕재의 생산을 담당한 중궁전과 연관시키는 논리나, ‘큰 공
덕’, 또는 ‘큰 공로와 인덕(仁德)을 갖추었다’는 임금의 성품을 표상
한 말[28]인 대조(大造)를 그와 비슷한 의미로 해설하는 것은 매우
부회한 것이다.
주 17) 정조실록 11년(1787년, 丁未) 9월 18일(壬午)
주 18) 순조실록 9년(1809년, 己巳) 8월 9일(丁酉)
주 19) 大造殿, 卽大殿寢殿. (순조실록 2년(1802년, 壬戌) 8月 10日(戊申))
주 20) 국조보감 제80권 순조조 5, 33년(1833년, 癸巳)
주 21) 傳于禮曹曰: “昌德宮朝啓廳稱宣政殿, 後東別室稱昭德堂, 後西別室
稱寶慶堂, 正殿稱兩儀殿, 東寢室稱麗日殿, 西寢室稱淨月殿, 樓稱澄
光樓, 東別室稱凝福亭, 西別室稱玉華堂, 樓下稱光世殿、廣延殿, 別
室稱求賢殿。
주 22) 현종실록 8년(1667년, 丁未) 11월 11일(辛亥)
주 23) 조선시대 궁궐에는 공식적으로 설정된 편전 외에 내전권역 또는 내
전과 외전의 중간부에 설치되어 편전 기능을 분담하는 전각들이 다
수 나타난다. 이러한 전각은 별전(別殿)․별당(別堂) 또는 소편전
(小便殿), 소침(小寢)으로 분류되며, 왕의 집무실, 독서처뿐만 아니
라 군신간의 만남을 통해 국정을 논의하는 시사지소(視事之所)로
활용되었다. 특히 의례가 정비된 세종대부터 시작된 편전 기능의
분화 현상은 조선 후기에 가면서 두드러지게 되는데, 헌종 연간에
제작된 궁궐지에는 제 2의 편전이 본편전의 위상을 능가하여 공식
적인 편전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괄목할 만한 편전의 운
영상의 변화는 정치체제의 변동이 궁궐 제도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
이었다. 궁궐에서 창건시기에 정해진 공식적인 편전은 후대로 갈수
록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한번
혼전으로 정해지면 일정기간 그 전각이 편전 기능을 상실했다[30].
그 결과, 편전에서 이루어지던 국왕의 정무활동[常參, 視事, 輪對,
經筵, 引見]은 편전 근방에 위치한 별전이 담당하게 되었고 이는
소편전 제도가 고착된 원인으로 지적된다. 또한 경연의 발달로 인
해 일과시간 이후에도 인견과 석강(夕講), 야대(夜對)를 할 수 있
는 별전이 필요해졌던 배경도 본편전과 제2 편전의 이원적 편전체
계를 만들게 한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편전[경복궁 사정전,
창덕궁 선정전, 경희궁 자정전, 창경궁 문정전]은 점차 의례적인 공
간으로 변모되었고 학문소이면서 편전 대용으로 운영되었던 경복
궁 비현당(丕顯堂), 창덕궁 희정당, 경희궁 흥정당(興政堂), 창경궁
숭문당(崇文堂) 등의 별전이 실질적인 편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상 기존 연구에서 다뤄진 본편전의 분화양상 및 양편전 체계에
대한 논의는 공통적으로 궁궐 운영체제의 변화와 정치상황을 연결
지어 설명되어 왔다. 편전체제의 용어도 조금씩 달리 사용되었는데,
Yoon(2000)은 편전1과 편전2로[16], Jang(2009)은 대편전과 소편
전의 용어로 설명하였고[29], Kim(2015)은 편전, 시사전, 별전, 독
서당의 용어로써 세분하고 편전영역의 운영체계를 시기별로 정리
하였다[30].
주 24) Kim(2015)은 조선시대 궁궐 별전을 ‘왕이 편하게 사용하는 사사로
운 공간’, ‘궁궐에서 의례화되지 않으면서도 필요에 의해 존재했던
전각’으로 정의하면서, ‘전각 기능의 보좌’, ‘궁궐의 엄격한 건축 구
성과는 다른 공간 창출’, ‘다양한 용도를 수반’한다는 특징을 제시하
였다[30]. Hong(2000)은 내전에 위치한 별전[시사전]을 ‘실제적인
편전으로 된 전각이지만 규모는 정형화되어 있지 않으며, 내전의
영역에 속해 있어서 기본적으로 외전의 계획원리를 따르지 않고 내
전의 계획 원리를 따르는 전각’으로 설명하였다[31].
주 25) 朝啓廳, 大臣論道之處. (태종실록 17년(丁酉, 1417년) 6월 12일(丙申))
주 26) 세종실록 23년(辛酉, 1441년) 7월 12일(丙午)
주 27) 폭우나 산사태로 주맥의 지형이 손상되면 즉각 복구공사가 시행되
었던 사례가 실록에 자주 나타난다. 다음 기사는 주맥이 훼손되었
을 때, 그 사실이 후원의 초관들에 의해 즉각 임금에게 전해졌고
신속히 정비되었음을 알려준다.: 어영대장 이한풍이 아뢰기를, “응
봉 아래 후원의 주맥에 사태(沙汰)가 난 곳이 많이 있으니, 택일하
여 보축(補築)토록 하소서(정조실록 21년(丁巳, 1797년) 7월 8일
(乙亥)).”
주 28) 조선시대에 도성주맥의 보완공사 및 관리양상은 다음의 논문을 참
조할 것: Kim, H. W.(2004). A Study on the Planning and the
Management of Han-Yang by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Ph.
D. Dissertation. The Graduate of Sungkyunkwan University, Suwon,
Korea.
주 29) 고종 연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많은 경희궁의 전각들이 헐려서 재목
으로 사용되었지만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등 주요 건물은 남겨졌
다. 숭정전은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어 1924년 조계사로 이건될 때
까지 경성중학교의 교실로 사용되었는데, 「조선지형도」에는 중학교
의 부속시설로 그 위치가 기록될 수 있었다.
주 30) 이 때문인지 해방 후 경성중학교의 자리에 문을 연 서울 중고등학
교는 이 위치에 있는 동안 명문학교로 큰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다.
주 31) 광해군일기 9년(1617년, 丁巳) 5월 20일(癸未), 9년 6월 21일(甲
寅) 기사 참조.
주 32) 융복전, 회상전의 두 침전 건물을 침전영역의 최후방에 양립시키는
구성은 창덕궁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되지만, 크기와 모양이 흡사
한 두 침전을 나란히 두는 배치방식은 이전 궁궐에서 찾아볼 수 없
던 새로운 것이었다. 현종 8년(1667년) 창덕궁 대조전 뒤편에 건립
된 집상전도 대조전과 크기․모양이 동일한 건물이었으나, 현종의
모후인 인선왕후를 위한 대비전의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었지 양침
전의 형식으로 계획된 ‘침전-별전’ 개념은 아니었다.
주 33) 선행연구에서 제시된 경덕궁 양침전에 관한 의견은 두 가지로 나뉜
다. 먼저 Hong(2003)은 융복전이 왕비의 정침전이고 왕의 침전은
회상전이라 하였고[32], 비슷한 시각에서 Yoon(2009)도 두 침전을
모두 정침전으로 보았다[16]. 이러한 의견은 양침전 각각을 왕의
침전과 왕비의 침전으로 나누고 회상전을 왕이 전용했던 건물로 파
악한다. 반면 Kim(2015)은 융복전을 왕과 왕비의 공동침전이며 회
상전을 왕의 별전으로 구분하였다. 특히 공동침전인 융복전을 왕비
가 주연이 되는 궁중 의례 또는 연향의 공간이 되는 궁궐의 중심
침전이라 함으로써 공동 침전이 왕비를 위한 행사공간으로 사용됨
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회상전이 융복전과 마찬가지
의 침전으로 인식되어 왔고, 정침전 곁의 별전이 수시로 침전기능
을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사실상 같은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정조가
동궁시절에 쓴 「경희궁지」에도 대내의 정침이 융복전이고, 회상전
은 수시로 임어하는 내전(內殿) 즉, 시대에 따라 정침전이나 시사
기능을 수행하는 별전으로 사용되었다고 하여, 기능이 고정되어 있
었던 융복전에 비해 회상전이 필요에 따라 유동적으로 사용되었음
을 알려준다. 따라서 회상전을 정침전으로 볼 수도 있고 별전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주 34) “(회상전은) 본래 원종[정원군]의 잠저였던 옛 궁이다[本元宗潛邸
舊宮].” (궁궐지 회상전조)
주 35) 대조전은 임금의 정침이었기 때문에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마다 오
래지 않아 복구되었다. 태종, 세종, 성종 등이 대조전에서 거처한
후 연산군 2년(1496년) 별다른 이유 없이 한 차례 중수되었던 것으
로 보인다. 뒤로 임진왜란과 인조반정(1623년) 때 각각 불타 없어
지자 광해군 1년(1609년)과 인조 25년(1647년)에 재건되었고, 순조
33년(1833년)의 화재로 전소된 때에는 이듬해에 복구되었다. 1917
년 11월 화재를 당했을 때에도 3년 뒤인 1920년 12월에 경복궁 교
태전 등을 헐어온 재목으로 중건되긴 하였으나, 본래의 위치에서
훨씬 북쪽으로 이동한 옛 집상전 부근에 세워졌다.
주 36) 희정당은 양심합의 남쪽에 있으니 곧 편전이다[熙政堂在養心閤南
卽便殿].
주 37) Kim(1994)은 침전 바로 아래에 위치한 창덕궁 희정당과 경희궁 흥
정당이 편전으로 전용된 것이 두 궁궐만의 예외적인 일이 아니고
조선후기 궁궐의 보편적인 변화로 규정하였다[33].
주 38) 이 사료에서 나타난 태조전은 대조전의 오기로 보인다.: “명하여 태
조전(太造殿)을 중수하고 수문당을 고쳐 짓게 하였다(연산군일기
2년(1496년, 丙辰) 8월 19일(癸巳), 한국고전종합DB).”
주 39) 연산군일기 2년(1496년, 丙辰) 8월 22일(丙申)
주 40) 命改作大造殿前廊。 臣等以謂, 大造殿、修文堂乃成宗二十六年常御之所,
而太宗、世宗亦常御之。 古人云: ‘思其居處。’ 若非傾危, 則何必改作?
주 41) “수문당을 숭문당으로 표기한 것에 대해 ‘修文’의 오기로 추정하였
으나, 이것은 오기라기보다는 왕이 새로 당호를 같이 걸도록 하였기
때문에 실록에서 이 건물을 숭문으로 적은 결과로 이해된다[33].”
주 42) 此堂乃成宗二十六年燕居之所。 旣有仁政殿、宣政殿, 而又以崇文名之
者, 非徒聽政於此也, 修文之意, 蓋亦寓焉。 今以熙政名之, 美則美矣,
但祖宗舊御之堂名, 至此改之, 似爲未穩。
주 43) “왕의 침전 주변에 왕의 학문소를 두는 사례는 이미 고려시대 궁궐에
서도 동일한 수문전(修文殿)이라는 건물을 둔 예를 볼 수 있고, 조선
시대에는 창경궁의 숭문당(崇文堂)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31].”
주 44) 풍수설과 음양오행설은 건물의 배치와 좌향뿐만 아니라 정원의 형
식, 구조, 터의 선정, 수목의 배치 등 동아시아 삼국의 조원에 있어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24].
주 45) 16세기를 전후한 시기인 한국의 조선전기(1392∼1592년), 중국의
명(1333∼1573년) 그리고 일본의 무로마치(室町)시대(1333∼1573
년)에서 모모야마(桃山)시대(1573∼1598년)는 공히 각기 특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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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고 접 수 일: 2015년 8월 12일
심 사 일: 2015년 8월 12일 (1차)
: 2016년 2월 29일 (2차)
게 재 확 정 일: 2016년 3월 14일
3인 익명 심사필, 1인 영문 abstract 교정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