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니 퀸 (Anthony Quinn,1915~2001)
'안소니 퀸' 은 '멕시코 북부 치와와' 태생으로 'Pancho Villa'의 혁명군에
가담했던 아버지는 혁명세력이 와해되자 가족들을 이끌고 미국으로 이주
하여 농업노동자로 전전하다 L.A 에 정착했다. 10세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소년 가장이 되어 구두닦이, 신문팔이, 공사장 심부름꾼, 내기 권투
선수 등을 전전하며 가족들을 부양하는 힘겨운 소년기를 보냈다.
그가 연기자의 길에 들어선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발음을 교정하기 위해서
배우학원에 잡일을 해주는 조건으로 등록한 그는, 연기의 세계에 빠져들어
18세에 《깨끗한 침대》 라는 연극으로 무대에 처음 섰다.
1936년 '패러마운트픽처스'의 단역배우 모집에 응모하여 'Lew Landers'
감독의 《Parole》에 출연함으로써 영화에 데뷔하였다. 이 해에 '세실 B.더밀'이
감독한 《The Plainsman》에 단역으로 출연하였다가 '세실 B.더밀'의 양녀인
'캐서린'과 결혼하였다.
할리우드 실력자의 사위가 되어 차츰 연기자로서의 입지를 넓혀가던 그는,
1940년대 末 '매카시즘'의 광풍(狂風)이 몰아치자, 동료를 '빨갱이'로 고발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할리우드'를 떠나 '뉴욕'의 연극무대로 향했다.
그곳에서 '엘리아 카잔' 감독의 눈에 띈 그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에서
'말론 브랜도'가 맡았던 '스탠리 코왈스키' 역을 맡아 연기력을 인정받고,
1952년 '엘리아 카잔' 이 감독한 《혁명아 사파타 Viva Zapata!》에 출연하였다.
이 영화에서 '사파타(말론 브랜도)'의 동생 역을 맡아 혁명의 조력자에서
술주정뱅이로 타락하는 연기로 1953년 아카데미상의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1954년 '네오리얼리즘'으로 세계 영화의 중심에 있던 이탈리아로 건너가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에서 차력사 잠파노 역으로 출연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희랍인 조르바》에 출연하여 절정의 연기를 펼쳤다.
1956년 《Lust For Life》에 '고갱 역'으로 8분간 출연하여 주인공 '고흐' 역의
'커크 더글러스'보다 빛나는 연기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으며, 두번째 아카데미상의
남우 조연상을 받았다. 1958년에는 '율 브리너'가 주연을 맡은 《해적The
Buccaneer》을 직접 감독하였으나, 비평과 흥행면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64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희랍인 조르바 Zorba The Greek》
에서 그리스인 특유의 낙천성으로 하루하루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농부 '조르바' 역을
맡아 절정의 연기를 보였다. 그는 "내가 바로 조르바"라고 말할 정도로 조르바라는 인물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으며, 1983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한 동명의 뮤지컬에서 다시
이 역을 맡기도 하였다.
《노트르담의 곱추 The Hunch Back Of Notredame》(1957), 《나바론 요새 The Guns
Of Navaron》(1961), 《Requiem For A Heavyweight》(1962), 《Barabbas》(1962),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25시 The 25th Hour》(1967), 《산체스의 아이들
The Children Of Sanchez》(1978), 《사막의 라이온 Lion Of The Deser》(1981) 등을
비롯하여 150편이 넘는 영화에서 거친 남성적 캐릭터로 선 굵은 연기를 보여 영화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그에게 1987년 아카데미상은 평생 공로상인 세실 B.더밀상을 헌정
하였다.
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노년에는 회화와 조각에 몰두하여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1988년 유엔의 세계인권선언 선포 4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에 그의 그림이 실렸으며,
1998년 말에는 조각가인 아들 '로렌조'와 함께 방한하여 예술의 전당에서 작품전을
열기도 하였다. 《원죄》와 국내에서도 출간된 《원맨 탱고》등 두 권의 자서전을
남겼으며, 세 번 결혼하여 9남 4녀를 두었다.
2001년 미국 보스턴에서 폐렴 등의 증세로 치료를 받다 호흡곤란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