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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창조의 깊은 진실: 셀리의 <서풍의 송시>
1.급진적 개혁주의자
셀리(1792-1822)의 여러 측면들 중에서도 독자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은 혁명시인으로서의 셀리이 다. 그는 한 국가의 구성원을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갈라 놓은 정치•사회•종교 제도의 부도덕성과 부당성에 누구
보다도 분개했던 시인이다. 옥스포드 대학 시절 그는 그 같은 정치적 •사회적 모순의 시정을 위해 지배계급을 맹렬히 공격하다가 퇴학까지 당하며, 나중에는 조국을 등지고 이탈리아의 플로렌스로 건너가 살다가 피사 근처 의 어느 해안에서 29세의 젊은 나이로 익사하는 불운을 맞는다. 셀리의 이상주의는 현실의 완강한 벽에 부딪히
자 내면화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세계를 해석
하고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이념세계를 구축함에 있어 그는 기존의 신화체계를 자신의 의도에 맞게 변형•
재창조하는 방향으로 활로를 모색한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서풍의 송가>(Ode to the West Wind)는 내면
화된 이상주의가 새로운 신화의 틀 내에서 탁월하게 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 '피털루 대학살'과 <1819년 영국>
1819년경 영국에서는 수많은 서민들이 실업과 기아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그러던 중 공업도시 맨체스터에서
는 노동자들이 성 베드로 광장으로 몰려가 자신들의 생존권을 주장하게 된다. 이때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
은 모여든 군중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무참하게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4년 전 유럽대륙에서 얻은 명성을 하루아 침에 퇴색시켜 버린다. 워털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역전의 용사들이 '피털루 대학살'(Peterloo Massacre)
의 주구로 전락한 것이다. 이 사태를 지켜본 셀리는 프랑 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군인들의 정신구조와 국내에서 만행을 저지르는 그들의 정신구조는 동전의 양면처럼 동일한 이념체계, 동일한 사회체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기득권세력을 통렬하게 탄핵한다.
3. 나ㅡ그대의 관계
현실개혁의 의지와 이상사회의 꿈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사회변혁을 향한 셀리의 꿈은기득권세력의 강력한 벽을 실감하며 이탈리아로 건너간 뒤(1818)에는 내면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인간성의 전반적 갱생 없이는 사회개혁의 꿈도 무망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변혁의 꿈과 인간성의 전반적 갱생이라는 셀리의 두 측면이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재현된 시가 바로 그 유명한
<서풍의 송시>(Ode to the West Wind)이다.
이 시와 관련하여 셀리는 플로렌스 근처 아르노(Arno)
계곡에서 구상하고 또 대부분 쓰였다면서 서풍의 특성을 이렇게 기술한 바 있다. "그날은 온화하면서도 활기 넘치
는 세찬 바람이 가을의 폭우를 쏟아붓게 될 수증기를 모
아 들이고 있었다. 황혼무렵, 예상했던 대로, 우박과 폭우
가 뒤범벅이된 엄청난 폭풍이 키잘핀 지방 특유의 천둥 번개를 동반하고는 휘몰아치기 시작하였다." 키잘핀 지
방에 일년 내내 부는 서풍들 중에서도 셀리가 관찰하고
경험한 서풍은 가을이 끝나갈 무렵 우기가 다가오고 있
음을 알리는, 습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다. 이 시에서 셀
리는 이 봄바람을 "청람빛 그대 누이"(Thine azure sist er)로 여성화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가 친화를 느끼는 것은 어디까지나 폭우와 천둥번개를 동반한 격렬한 서풍
이다. 그래서 그는 서풍을 "사나운 신령"(Spirit fierce)
으로 의인화하면서 서풍에게 파괴적인 남성 신격을 부여
한다.
해럴드 블룸 (Harold Bloom)에게도 이 시는 셀리 시학의 본질이 가장 잘 재현된 시이다. 블룸은 종교학자
마틴 부버 (Martin Buber)의 핵심개념인 '나ㅡ그대' (IㅡThou)/'나ㅡ그것'(IㅡIt)를 준거점으로 삼아 셀리의
'신화창조'(mythoporia:mythmaking) 과정을 세밀하
게 추적하고 있다. 부버에 의하면,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
는 방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사물을 대할 때 그 사물을 주변에 있는 다른 사물들에 의해 한계가 정해진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경험하는 경우와, "나와의 [의미 있는]관
계" 속에서 그 사물의 참모습을 곧이곧대로 인식•경험하
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 나와 사물과의 관계는 '나ㅡ그
것'의 관계임에 반하여 후자의 경우에는 '나ㅡ그대'의 관
계가 성립된다.
사물을 '그것'이 아닌 '그대'로 경험할 때에는 이념체계
나 사전지식 또는 편견 같은 것이 개입되지 않은 "직접적인"(immediate) 관계라 할 수 있다. 원시인들의
언어를 보면 '나ㅡ그것'의 관계가 아닌 '나ㅡ그대'의 관계
를 보여주는 말들이 대부분이다. 원시인들의 사물과의 관계는 관찰자와 피관찰자,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아닌
"관계로서의 관계", 즉 다른 사물들과는 무관하게 "[둘만의] 테두리가 정해지고 [둘만의] 테두리를 정하는"
관계 (bound and binding)이다.
4.서풍의 신격화
<서풍의 송시>에서 생명 없는 세계를 상정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셀리 시의 본질과 핵심에서 멀어지는 일이다. 이 시의 발화자 '나'는 '나ㅡ그대'로 "관계 지어지는" 원시
적 세계의 '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 속에 존
재하는 '나'/시인은 '너'/서풍을 "경험하고, 의인화하고,
풍유화하고, 상징화하려" 들기보다는 오히려 서풍과의
일치를 염원하며 일치를 모색한다. 첫 행에서부터 서풍 을 "가을의 숨결"이라 부르는 시인은 서풍을 모종의
"살아 숨쉬는 생명체"(animatedthing)로 인식하면서
'나ㅡ그것'이 아닌 '나ㅡ그대'의 관계를 설정한다
1
오, 사나운 '서풍'이여, 그대 '가을'의 숨결이여.
보이지 않는 그대 존재로부터 죽은 잎사귀들이
마법사에게 쫓겨 도망치는 도깨비마냥 혼비백산 내달리네,
누렇고, 거멓고, 유령처럼 창백하고, 열병으로 홍조 띤,
역병에 신음하는 무리들! 오 그대여, 그대는
겨울처럼 차갑고도 어두운 침실로 날개 달린 씨앗들
마차 내몰아, 거기에 그들은, 제각기 무덤 속 시체마냥,
몸 웅크리고 차갑게 누워있나니, 그러다 마침내
청람빛 그대 누이 '봄'이 꿈꾸는 대지 위로 피리를 불어,
산과 호수, 강과 들판에 피리소리 울려퍼질 때면,
(아름다운 꽃잎들을 양떼마냥 창공으로 몰고다니며)
현란한 빛 향긋한 내음으로 들판과 동산을 가득 채우리.
사나운 혼령이여. 돌아다니지 않는 곳 없는 그대,
파괴자이자 보존자여. 귀 기울이소서, 오 귀 기울이소서!
2
산발한 구름들은 가파른 하늘의 격랑 한가운데서
그대의 파도를 타고, 대지의 썩어가는 잎사귀들마냥
하늘과 바다의 뒤엉킨 나뭇가지에서 우수수 떨어지네,
비와 바람의 사자인 이 구름들은.
그대가 동행하는 날렵한 파도의 푸른 표면 위에는,
미친 미나드의 머리에 곧추선 눈부신 머리칼마냥,
희미한 수평선에서 하늘의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다가오는 폭풍의 머리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네.
그대 죽어가는 해의 만가여,
어둠을 감싼 이 밤은 그대의 노랫소리에 맞춰,
빽빽이 모여든 증기의 힘으로 천개를 이루고,
그대 위해 거대한 분묘 둥근 봉분이 되리니,
그러면 그 견고한 대기로부터 검은 비와
불길한 우박이 폭발하리라. 오, 귀 기울이소서!
3
여름날 단꿈 꾸는 푸른 '지중해'를 잠에서 깨운 그대.
지중해를 휘감아도는 수정 잔물결 자장가 삼아
바이만 경석섬 옆에 누워
꿈결 속에서 보나니, 청람빛 이끼와 꽃들로 뒤덮인
고색 창연한 궁전과 탑들이
강렬한 햋빛 어른대는 파도 속에 떨고 있음을.
그 달콤한 느낌, 그 광경 떠올리며 감각은 자진하네!
그때 '대서양'의 대오정연한 군대는
그대 가는 길 방해하지 않으려고 양옆으로 갈라져
깊은 틈새 내고, 저 멀리 바다 깊은 곳에서는
메마른 잎사귀 걸쳐 입은 바다꽃나무와
끈끈한 수액 흘러대는 해초들이 그대 목소리
눈치 채고는,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혼비백산 도망치네. 오, 들어보소서!
4
나 그대가 몰아가는 죽은 나뭇잎이라면,
그대와 함께 빠르게 날아가는 구름이라면,
그대 힘 아래서 헐떡이며 그대 힘 함께 나눌 파도라면,
그리하여 그대 말고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자유로울 수 있다면, 오 통제할 길 없는 존재여!
혹은 하늘을 나는 그대 따라잡는 일이
좀처럼 환상으로 여겨지지 않던 소년시절처럼
그대 하늘 떠돌 때 그대의 단짝친구 될 수 있다면,
나 이토록 절박한 상황에서 이렇게 기도드리며
갈구하진 않았으리. 오! 날 끌어올리소서,
파도처럼, 나뭇잎처럼, 구름처럼!
나는 인생의 가시밭에 넘어져 피 흘리나이다!
시간의 무거운 짐이 그대를 쏙 뺀 날 사슬에 묶고
허리 휘어지게 하나이다,
길들일 길 없이 민첩하고 자부심 넘치던 나를.
5
숲이 그대의 수금이듯이,
날 그대의 수금으로 만들어다오.
내 잎이 나뭇잎마냥 떨어진들 어떠리!
요동치는 그대의 강력한 조화로 인하여
숲과 나 둘 모두가 애잔하면서도 달콤한,
가을과도 같은 깊은 색조를 띠게 되리.
사나운 신령이여, 나의 혼령이 되라!
나로 변하시라, 그대 무모한 자여!
새로운 탄생을 재촉하기 위해, 죽은 잎사귀들마냥,
나의 죽은 생각들을 우주로 몰아가시라!
그리하여 이 시의 주문을 통하여,
꺼지지 않은 화덕의 재와 불씨를 휘젓듯,
사람들에게 나의 언어를 퍼뜨리시라!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대지에, 나의 입을 빌려,
예언의 나팔이 되시라! 오 바람이여,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
서풍이 시인의 영혼과 하나가 될 때 서풍의 사나운 에 너지와 생명력은 곧 시인의 에너지와 생명력으로 화하고 그래서 시인의 얼어붙은 사상에 활력을 불어넣게 될 것 이다. 그러므로 시인과 서풍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호
보완적 존재이다. 시인이 서풍을 필요로 하듯이 서풍 또한 시인을 필요로 한다. 하느님을 전제로 하지 않은 예언자가 있을 수 없듯이 하느님에게도 자기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 과 서풍의 관계는 서풍이라는 광활한 실체 속으로 시인
이 수렴되는 관계가 아니라 두 실체가 만나 서로를 보완
하며 서로를 지탱하는 상호보완적 관계이다.
5.정신계의 입법자
인간을 비롯한 감각을 갖춘 모든 사물의 내부에 존재 하는 원리란 "신화로서의 시, 시로서의 신화를 구성하는
능력"(mythopoeia)을 뜻하는 것으로 콜리지의 '이차 상
상력'(secondary Imagination)이나 키츠의 '부정력(N
egative Capability)의 또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신화
로서의 시를 창조하는 능력은 인간이 사물을 대할 때 '나
ㅡ그것'의 관계과 아닌 '나ㅡ그대'의 관계를 회복하는 능
력, 즉 "공감적 일치"(emphatic identification)를 일구
어 내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서풍의 송시>에서도 '서풍'
은 단지 원인제공자일 뿐, 타오르는 불의 강도와 색깔은
어디까지나 시인의 내면의 원리로 존재하는 시인 고유의
혼불 (the fire of spirit)이 결정한다.
셀리에게 시란 신비한 교감의 순간을 언어화한 것이다.
그런데 교감의 순간을 재현하는 데 언어는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 언어 너머에 존재하는 "깊은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시는 고작해야 상징적인 몸짓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서풍의 송시>에서 시인이 언어의 모
든 가능성을 동원하면서 서풍의 본질로 숨가쁘게 돌진하
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로 언어의 한계를 깨달은 시인
이 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깊은 진실"(deep truth)로 다가가고픈 열망 때문이다.
셀리를 괴롭힌 "악령"은 무엇인가? 키츠에게는 고통이
나 죽음 같은 인간적 한계가 극복되어야 할 악령이었고
그래서 그의 시가 심미적•철학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
다면, 셀리에게는 인간의 이기심과 잔인함과 두려움 같
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부정적 성질들이 곧 그를 괴
롭히는 악령들이었고 그래서 그의 시는 윤리적 성격을 띠게 된다. 최초의 장편시<맵 여왕>(QneenMab:1813)
을 쓸 당시 셀리는 급진주의자답게 인간의 타락은 전적 으로 사회제도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잘
못된 제도만 개혁한다면 인간은 태생적 선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정되어, 인간과 사회는 동시적으로 탄생
하며 사회란 마음의 거울과도 같다는 입장으로 바뀐다.
사회개혁에 인간성의 향상이 전제되어야 한다면 진선
미의 사랑이 부단히 일깨워져야 할 것이다. 시와 예술은
마음이 간직한 진선미의 불씨, 신성의 불씨를 되살리고 그것을 힘찬 불길로 타오르게 한다. 그래서 셀리는 시인
을 가리켜 신성의 부패를 방지하고 신성을 구원하는 "세
상의 공인받지 못한 입법자", 즉 물질계 너머의 정신계를 군림하며 통치하는 예언자이자 사제라고 선언하는 것이
다.
※미나드
머리칼을 곤두세우고 주신 바쿠스를 따라다니는 광란의 여성
※신화
고대인의 사유와 표상이 반영된 신성한 이야기
《영국 낭만시 연구》(김철수 지음)에서 발췌
첫댓글 ㅎㅎ. 정말 어렵게 들어오셨습니다.
앞으로 카페 자주 오세요.
밴드에 글을 올렸다 카페로 본문복사
하다보니 줄 바꾸기가 엉망이네요. 읽기에 불편을 드려서 너무 죄송합니다. 밴드에 들어가셔서 보시면 조금 편하실 것 같습니다.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