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강 재림교회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율법주의'와 '값싼 구원’
19세기를 지나면서 구원에 대한 문제를 명확히 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많은 교단들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 혹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역사'를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교인들은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죄의 습관으로부터 승리하는 경험을 하지 못합니다. 한편, 많은 교회가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내포된 깊은 의미를 올바로 포착하지 못함으로 교인들은 '율법주의' 행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와 '값싼 구원' 행함이 없는 구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도록 방치되었습니다.
전장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는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재림운동의 초기 선구자들은 종교개혁 당시의 구원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칼뱅주의보다는 아르미니우스주의 진영에 가깝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구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재림운동이 함정을 피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이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랬을지라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하여 명백하게 이해하는데 자그마치 44년이란 기간이 걸렸습니다. 이 사상을 깊이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기 위해 여러 교파에서 모인 매우 진지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시작한 이 운동에 초창기부터 참여한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에 대한 논제를 명확하게 이해하기까지 44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루터가 길을 낸 이후의 일이고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이 주제를 연구하고 저술한 이후의 일입니다. 그럼에도의는 값없는 선물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닫기까지 또다시 44년이 걸린 것입니다.
'입혀 주시는 의'와 '나눠 주시는 의’
'의'에 해당되는 다른 단어는 무엇입니까? '거룩함'입니다. 그 의를 입혀 주실 때 고맙게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리스도의 완전한의를 너의 것으로 여길 것이다. 내가 너를 거룩한 자로 대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의를 나눠 주실 때, 실제로 여러분 안에서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여러분에게 주어질 때 이 모든 것은 100퍼센트 예수 그리스도의 의인 것입니다. 사람이 의를 조금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때는 결코 없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인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재림교회는 가장 심각한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1888년 당시 재림운동의 지도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완벽한 진리를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주의 종 엘렌 화잇Ellen G. White이 존스 A. T. Jones와 와그너 E. J.Waggoner가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지지하는 글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물론 이 빛은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은 그 빛을 거부하는 입장을 취했고 결국 1888년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 빛이 재림운동의 한 부분으로 인정받고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재림교회에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온전한 진리에 대한 논쟁이 오늘날까지 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이토록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갈등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적 마음은 인정받고 싶어 하고 공로를 알아주기 바랍니다. 인정받고 싶은 것은 타고난 성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그들이 생각하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는 문제들을 놓고 흔히 심각한 갈등을 자주 겪습니다. 이를테면 여성이나 동성애자에게 안수할 것인가, 흑인을 사제직에 포함할 것인가의 여부. 영적 권위가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에 부여되었는지 혹은 교회 조직의 계층적 구조에 부여되었는지 등의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물론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넘어서는 중대한 이 주제, 곧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신자를 사로잡을 이 주제와 비교하면 하찮은 문제에 불과합니다. 그 주제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은혜로 구원하시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성경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문제에 있어 우선순위를 올바로 해야 한다고 유대인들에게 도전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태복음 23장 23절).
그렇습니다. 다른 교회들은 여러 다른 문제들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만 재림교회는 1888년 이후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명백하게 깨닫기 위한 시도로 인하여 끊이지 않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거 이삼십 년동안 하나님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을 일으키시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진리를 명백하게 설교하고 가르치도록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진리가 분명하게 제시될 때에 우리는 참으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전율을 느끼며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님을 찬양합니다! 난생 처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내 맘대로 죄를 지을 자유가 아니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이제 기뻐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 반면에 교회 안에서 다른 이들은 이런 느낌을 받습니다. "저렇게 설교하다니, 끌어내려라!"
이 주제에 대하여 얼마나 다양한 생각이 존재하는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 주제를 어느 교회에서 설교해 보십시오. 분명히 누군가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설교자를 쳐다보며, “목사님. 재림교인 맞습니까?"라고 따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와 일반 심리학
그리스도교는 현대의 모든 가르침이나 일반 심리학과는 대조적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죄가 우리를 무가치하고 무기력하고 무용지물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잠재하는 가치를 보십니다. 비록 우리가 타락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갖고자 하십니다. 죄로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려는 크나큰 열망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이 하찮은 미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도 상관없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메시아 시편으로 여기는 시편 22편 6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그리고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상이 주어졌을 때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 다"(이사야 6장 5절)라고 외쳤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영광을 보았다면, 더 이상 인정이나 지지 혹은 칭찬을 받고자 어떤 획기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남을 배려하고 사랑을 베푸는 모든 일은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신약시대에 있어 가장 담대히 복음을 전했던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그는 일체 자신의 공로를 자랑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자랑할 마음도 없을 것입니다.
재림교인들의 문제
많은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인들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것처럼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빠지면 당연히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 불만을 가진 채 여전히 죄에게 종노릇하며 기쁨과 평화가 없는 상태에서 영적 '요요' 현상을 겪게 됩니다. 은혜 안에 있다가, 은혜 밖으로 벗어나기를 반복합니다. 만일 뒤로 물러서거나 실수를 범하거나 죄와 연관되면 우선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으니 이젠 끝이로구나.'
이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에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알 게 뭐야. 아무리 애써 봐도 선하게 될 수 없는 걸. 뭣 하러 이런 고생을 하는 거지?"
이런 결론을 내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선함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본성적으로 선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선을 이룰 수 없습니다. 값으로도 선을 살 수 없습니다. 선하게 될 만한 자격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은혜는 전적으로 값없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 봐주시도록 만들기 위해 힘쓰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대한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경험이 대부분 행위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재림운동에 있어서 계속 씨름해야할 중요한 주제입니다.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하여 매우 분명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이 좋은 소식을 듣지 못하도록 재림교회를 자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이유입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오류를 더 확실히 주입하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참된 지식을 훼손시키려고 작정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 큰 반대가 교회 안에서 일어 날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 주제를 확실하게 이해하려는 교회들마다 심각한 반대나 소동 혹은 분열까지 일어나는 특징을 보입니다.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바로 이 주제 때문에 많은 목회자가 재림교회를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의 흔들림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많은 재림교회 신자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세상과 합하여 세상과 차이점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잘못을 저지를까 두려운 나머지 반대편극단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일생의 습관에 얽매여 종노릇하는 교인들에게 자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해 주시는 은혜의 기별을 전해줄 의의 설교자들이 오늘날 절실히 필요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리스도인 저술가 엘렌 화잇이 기록한 <교육>57페이지에 이것이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상의 가장 큰 결핍은 곧 인물의 부족이다. 그 인물이란 매매 되지 않는 사람, 그들의 마음이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
죄를 그대로 죄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마치 나침판의 바늘이 틀림없이 남북을 가리키 듯이 양심이 그 의무에 충실한 사람,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옳은 일을 위하여 굳게 서는 그런 사람들이다.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는 참으로 이 세상에서 독특한 운동입니다. 세상 끝날에 이 주제에 대한 입장에 따라 교회가 올바로 서거나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내용 복습
1. 재림운동 당시에 분명히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는 주제는 무엇입니까?
2. 의를 다르게 말하면 무엇입니까?
3. '입혀 주시는 의'와 '나눠 주시는 의'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누구의 '의' 입니까?
4.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관련하여 그토록 많은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논쟁의 근본 핵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5.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어떤 단면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까? 성경의 기자 중 이렇게 솔직히 자신의 단면을 드러낸 인물이 누구인지 각각 신약과 구약에서 한 사람씩 말해 보십시오.
6. 교회나 신자들이 사탄이나 심지어 교회 내부로부터 가장 큰 공격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묵상을 위한 질문
여러분이 구원과 성화에 있어서 추호라도 자신의 공로를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여러분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