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위덕왕의 관산성 재공격
(1) 침현은 어디인가
성왕이 납치되어 죽은 후, 일본서기는 갑자기 여창이 포위를 당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餘昌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筑紫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新羅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트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鞍橋)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餘昌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餘昌이 (筑紫)國造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鞍橋君”이라 이름하였다[鞍橋는 우리말로 矩羅이(くろじ)라 한다.’ 주107)
여창을 포위한 신라군은 어디서 왔을까. 기록은 없으나, 옥천읍 대골(골짜기가 커서 큰골짜기라는 뜻, 마항리, 대천리)에 관산성 전투 시 신라 김무력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이 대골 위쪽 마성산 기슭에 진을 쳤다는 주108) 전설이 있고, 신라·백제격전지(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에 옥천의 전설중 하나로 ‘대골’은 신라 장수 김무력이 백제와 싸울 적에, 관산성을 향하여 대군을 이끌고 행군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이곳에 전군을 집합시켜 진을 치고, 여러날 머물면서 군력을 축척시키고 군비를 가다듬은 뒤 관산성 싸움에 임했다 한다. 주109)
지도 04를 참고하면 대골(마항리)는 관산성에서 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대군을 노출 시키면서 행군해 와서 여러 날 머물면서 정비를 했다는 것은 과장이 되었다고 생각되고, 신라가 영동쪽으로 진출은 관산성 전투를 기점으로 한 것으로 보이고, 백제 역시 영동을 진출했다는 기록이 없어 주110) 그 시기 영동과 옥천사이에 행군하여 올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또한, 신라군이 아주 강하면 청산쪽에서 밀고 나오지, 상대적으로 방어와 경계가 약한 영동쪽으로 우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대골 골짜기 안은 삼성산성이나 삼양리토성에서 즉 관산성에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 날 머물면서 군력을 축적하고 군비를 가다듬었다는 말은 대군이 행군하여 온 것이 아닌 신라군이 조용히 각개로 신라에서 대골로 모인 것으로 보이고, 전설도 그러하나 신라·백제격전지(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에 행군을 했다고 기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라는 영동으로 우회하여 공격할 생각을 했을까. 이는 백제군이 화인진을 점령하고 고립된 관산성을 공격하니 관산성에 주둔했던 신라군은 크게 대항 못하고 탈출을 하였을 것입니다. 지도 09를 참조하고, 옛날 길이 없을 때 물길 따라 길이 난다는 말을 근거로 찾아보면 탈출한 신라군은 옥천에서 남으로 이원의 금강을 따라가면 금강과 초강천이 합류를 하는데 초강천은 핏골 위에 있는 천(川)으로 초강천을 따라 올라가면 금돌산성(660년 신라가 백제 공격 시 신라 무열왕이 머물렀다는 산성)이 있는 백화산이 있고, 여기서 옥천에서 간 만큼 가면 상주가 있어, 이 길로 탈출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왕을 납치나 죽이기 위해 침투하여 매복한 삼년산군 출신인 비장 고간 도도 역시 전에 관산성에 주둔했던 신라군의 탈출해온 길을 따라 침투하였을 것입니다.
지도 09 관산성, 대골, 핏골, 금돌산성 그리고 영동 위치
정리하면 화인진에 상륙한 백제군 주력이 상주쪽으로 공격해갔고, 관산성에 주둔했던 신라군이 도망 간 곳이 이원 쪽의 금강 따라 가다가 초강천을 따라 가서 백화산을 경유 상주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라는 청산쪽으로 공격해오는 백제군을 방어와 관산성으로 우회해서 갈 수 있는 위치로 백화산 즉 금돌산성 위치가 전략상 중요한 위치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일본서기에 의거, 성왕이 온다는 것을 듣은 신라가 매복군사를 파견할 때 관산성 주위를 잘 아는, 전에 관산성에 주둔했었던 신라군이나 관산성 근교 지역 출신의 신라군을 파견했을 것이고, 신라의 매복군들은 전투가 치열한 청산쪽보다는 우회하고 길이 없어 불편하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한 백화산, 영동과 옥천쪽으로 갔을 것으로 추정이 되며, 영동쪽의 백제군 경계가 청산쪽보다 허술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허술한 부분을 공격하여 승기를 잡는데, 신라군은 불리하더라도 청산쪽의 백제군을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와 김무력 장군이 막다가, 백제군이 구타모라 성채를 구축하면서 신라 공격의 강도가 약화가 되고, 관산성에서 탈출한 신라군으로부터 영동쪽으로 관산성을 갈 수 있다는 것과, 그 길을 통하여 신라 매복군이 성왕을 잡아오는(아니면 죽이는) 전과를 올리는 등 신라군의 사기가 올라갔을 때 김무력 장군이 상주, 백화산, 영동, 옥천 댓골로 조용히 신라군을 침투시켜 댓골에서 신라군 정비 후 관산성을 공격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김무력장군이 관산성을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화인진, 청산쪽이 있는 백제의 주력군을 통솔하였던 위덕왕이 바로 공격을 받거나 포위된 것은 아닙니다, 위덕왕이 철수할 일이 있었다면 화인진에서 배를 타고 철수 할 수 있는데 굳이 관산성쪽으로 철수를 하여 옥천 대골에서 관산성을 공격하는 신라군에게 포위를 당한 것은 위급한 것이 아니라 관산성을 공격하는 신라군을 역공하기 위한 작전으로 보입니다.
일본서기에 의거, 위덕왕은 왜군의 외곽 호위를 받으며 철수하다가 신라군에게 포위를 당하는데, 왜군은 관산성에 주둔을 하고 있었으니 위덕왕을 외곽에서 호위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신라군이 관산성을 공격하는 시점에서 신라군을 막아야 할 백제의 동방군 중 왜군을 빼내어 위덕왕의 외곽 호위를 한 것으로 위덕왕이 신라의 공격을 알았고, 고의로 관산성의 백제군을 약하게 하여 신라군이 자만에 빠지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도10은 위덕왕 화인진에서 철수하는 길로 추정이 되는 길을 노란색으로 그렸고, 신라 김무력장군이 대골에서 관산성 공격 시, 삼성산성과 삼거리토성, 삼양리토성쪽으로 직접 공격을 하였겠지만, 삼양리토성을 뒤로 우회해서 공격하게 되면 삼거리와 구읍(구옥천읍)사이에서 백제 위덕왕이 포위 될 수 있는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축자국조(筑紫國造)가 화살 쏘아 신라군의 포위를 뚫고 여창과 여러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서기의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샛길은 포위된 곳으로 추정되는 곳 가까이에 향수마을 아파트 쪽으로 해서 충북인력개발원 옆에 가르뱅이재가 있는데 이 고갯길(샛길)를 넘어 용목리로 빠져 퇴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용목리 주111) 는 이름 그대로 ‘용이 목욕을 했다’라는 전설이 있는데, 지도10를 보면 용목리(지오리) 옆이 논 즉, 습지입니다, 용목리에는 대청댐 담수 후 좋은 논을 많이 잃었다고 말도 있고, 현재는 용목리에 소옥천 인공습지가 있어 습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지도 10. 탄현과 침현
정리하면 위덕왕 여창이 철수를 하다가 신라군에 포위가 되었고, 왜군 축자국조의 활 솜씨로 포위를 뚫고 샛길로 도망을 했는데, 그 샛길에 ‘가르뱅이재’라는 고개가 있고, ‘용이 목욕을 했다’라는 용목리를 경유 퇴각을 한 것으로 보여지고, 위덕왕이 ‘가르뱅이재’를 넘어 용목리를 지나다가 습지에 말이 빠져 왕이 습지에 빠진 것입니다. 그것이 ‘용이 목욕을 했다’라는 전설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침현(沈峴)의 침(沈)자를 뜻을 보면 ‘빠지다, 잠기다, 늪’이라는 뜻을 감안 할 때 가르뱅이재가 침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주107) 日本書紀 卷十九 欽明天皇 十五年(五五四)冬十二月 餘昌遂見圍繞 欲出不得 士卒遑駭不知所圖 有能射人筑紫國造 進而彎弓占擬 射落新羅騎卒最勇壯者 發箭之利通所乘鞍前後橋 及其被甲領會也 復續發箭如雨 彌■不懈 射却圍軍 由是餘昌及諸將等得從間道逃歸 餘昌讚國造射却圍軍 尊而名曰鞍橋君(鞍橋 此云矩羅賦)
주108) 옥천의 마을 유래, 2008년, 옥천문화원, 28쪽
주109) 신라·백제격전지(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 2003, 옥천군, 충북대학교중원문화연구소, 68쪽
주110) 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 가는 추풍령 충북 영동, 경희대학교 중앙박물관 제132회 정기문화답사, 2017. 4. 22. 경희대학교 중앙박물관 3-4쪽
주111) 옥천의 마을 유래, 2008, 옥천문화원, 9, 176쪽 ;
옥천신문 1996. 10.12. 기사 http://www.ok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892 ;
옥천신문 2003. 8. 7. 기사 http://www.ok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