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온 글>
수필의 주제와 소재
」
I. 주제와 소재는 무엇인가
작품을 쓰려는 동기와 욕구가 생기면 먼저 “무엇으로 무엇을 쓸까”를 생각하게 된다. “무엇으로”가 소재라면 “무엇을”은 주제이다. 주제가 추상적, 관념적, 형이상학적이라면 소재는 주제를 형상화하는 구체적인 사물이다. 주제는 글의 중심, 요지, 중심사상으로 비유하면 사람의 척추이고 배의 나침반이며 맥脈이다. 소재는 주제를 이루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가시적인 사물이나 체험으로서 글감을 말한다. 수필의 글감은 무궁무진하다. 같은 소재라 할지라도 작가에 따라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고 해석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가령 봄이라는 소재에서 소생, 희망, 향수, 출발이라는 주제들을 모을 수 있다. 부부간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으면 무엇이 부부애를 가시적으로 나타내는가. 잉꼬, 기러기, 연리지連理枝, 바늘과 실, 식탁, 베게 등으로 주제와 소재간의 궁합을 찾는 감각이 필요하다.
2. 주제의 구체화
가. 주제의 형상화
주제의 의미화는 자기화의 수법이다. 수필은 의미부여의 문학이므로 독창적으로 제재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서 인생무상을 떠올리고, 흐르는 물에서 자연의 무심을 생각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그믐달은 가슴이 저리도록 쓰리고 가련한 달이다”라고 하면 고독을, “그믐달의 굽은 허리가 더욱 고단해 보인다”이면 모정이다. 주제의 형상화에는 은유가 병행되는데 그 형상화가 수필의 품品과 격格을 결정한다.
나. 주제의 체화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주제가 이루어지고, 상상적 기법에 의하여 전달될지라도 독자에게 생생하게 글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체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체화란 주제의 핵심을 개인의 체험, 삶, 인생에 관계지우는 것을 말한다. 순진함은 유년기로, 고독은 홀로 그믐달을 쳐다보던 청춘기로, 고향의 상실은 타향생활로 옮겨내는 것이다. 체화는 머리로 생각하는 주제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독자에게 공강대를 형성시키는 효과를 준다.
3. 주제선택의 조건
가. 구체적이고 선명한 주제
주제는 글의 핵으로서 단순하고 명료하며 한정적이어야 한다. 일상 중에서 낮게, 좁게, 작게 관찰하여 압축적이고 집약된 주제를 찾는다. 사랑이 아니라 모정, 모정이 아니라 내 유년기의 모정, 내 유년기가 아니라 어느 겨울의 모정이 필요하다. 덕이 아니라 고독, 고독이 아니라 나무의 고독이 필요하다.
예) 나무는 고독을 안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덥힌 저녁의 고독을 안다. (이양하, 「나무」중에서)
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
서사수필이든, 서정수필이든 수필은 마주앉아 나누는 대화와 같다. 아무리 차원 높은 내용일지라도 설교, 주장, 논쟁은 공감을 얻지 못한다. 시의적절하고,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이야기와 주제가 필요하다.
예) 세상에 가장 가련한 것은 일하고도 먹지 못하는 것이요, 그 대신 가장 가증한 것은 놀고도 잘 먹는 것이다. 인간의 온갖 불평과 눈물의 반 이상이 여기에 연유함이라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박종화 : 「도하淘河와 청장淸莊」)
다. 독창적이고 참신한 주제
주제는 새롭고 개성적이라야 한다. 가벼우면 평범한 넋두리가 되고, 지나치게 무거우며 설교가 된다. 꽃을 보고 이야기하되 남이 찾지 못한 주제가 독창적이다.
예) 안방의 질화로는 비록 방 한 구석에 놓여있으나, 그 위에 놓인 찌개 그릇에 혹은 ‘에미네’가 ‘남정’을 기다리는 사랑, 혹은 ‘오마니’가 ‘서당아이’를 고대하는 정성과 함께 언제나 따뜻했다. (양주동 : 「잘화로」)
라. 자기 경험의 주제
수필은 ‘자기’에서 출발하는 글이다. 글의 출발인 과거의 경험을 단순히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재배열하고 조합하는 창조적 경험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럴 때만이 생활을 재조명하여 승화가 가능하고 물아일체가 되면서 관조가 가능해진다. 곧 제재는 자기 현실이며 주제는 자기이상이다.
예) 강에서는 앞의 물결이 뒤의 물살을 은근히 끌어당긴다. 뒤의 물살은 살며시 밀어준다. 강물이 찰랑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기름을 먹인 장판 위를 스치는 비단치마의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 강물소리를 눈 감고 들으며 비로소 세상 사는 법을 배워간다. 삶이란 밀치는 것도, 따라잡는 것도 아니라 은근히 끄는 것이라고. (박양근 : 「강변 스케치」)
마. 유익하고 가치 있는 주제
독자가 글을 읽는 목적은 새로운 진실에 눈을 뜨기 위함이다.. 진실은 설득력과 감동을 지닌다. 만일 거짓이거나 가공적인 것이라면 독자는 동화나 설화를 읽을 것이다. 수필은 문학으로서 어느 장르보다 설득의 효용을 지닌다.
예) 소는 군자중의 군자다. 그에게 어찌 배울 것이 없을까. 사람들아! 소해의 첫날에 소의 덕을 생각하며 금년 삼백육십오일은 소의 덕을 배우기에 힘써 볼까나. (이광수 : 「우덕송」」)
4. 수필의 소재
소재를 만날 때 수필은 시작된다. 자신이 생각한 것, 자신에게 일어난 것, 자신이 흥미와 관심을 느끼는 것 등 모든 것이 수필감이 된다. 그러나 소재에서 느끼는 충동만으로 수필이 되지는 않는다. 착상을 통해 흥미와 재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미국의 수필가인 소로우는 “만일 나를 잘 아는 다른 사람이 있다면 내 자신에 대하여 그토록 많이 쓰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삶 자체가 한 편의 수필임을 말한다.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라. 그러나 수필은 사진 찍기가 아니라 자화상 그리기다. 사색의 여과를 거쳐 사상을 결정체를 걸러내는 정화작용임을 잊지 말자.
가. 소재를 보는 자세
소재와 주제는 작품의 내적 요소이다. 수필 창작은 소재의 의미화를 통한 소통행위가 된다. 작가와 독자 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면 소재가 친화성을 지녀야 한다. 한국의 전통적인 수필에서 소재는 대개 “나”의 생활에서 얻고 있다. 그래서 글이 일상적이고 생활적이고 주관적이고 서정적이기 쉽다. 그만큼 글쓴이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수필 소재를 대할 경우 ① 나만의 바라보기라는 개성 있는 시각, ② 나만의 삭히기라는 독창적인 주제화, ③나만의 꿰기라는 창의적인 구성이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면 독자의 공감성을 최대화할 수 있다.
나. 소재의 격
수필은 나의 영혼이 숨 쉬는 집을 세우는 작업이다. 수필의 소재는 시나 소설과 달리 다채롭다. 인간성, 관습, 풍습, 예술, 취미, 과학, 사회성, 시사, 등 모든 것이 수필의 소재가 된다. 소재는 주제와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 수필가는 정원사다. 그가 전지를 하여 분재의 격을 살리듯이 소재도 격을 지녀야 한다. 격은 소재의 품격을 말한다. 가령 스승의 은혜나 부정을 무엇으로 표현하는가. 그 소재를 선정하면 수필의 격이 달라진다. 수필가는 소재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