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12
"무슨 소리야!"
자이커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그러자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카이피스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지능이 없는것입니까. 말한 그대로입니다.
당신이 드린이라 부르는 이 생명체는 모든 드래곤의 제왕 크리니스카이쳐님이 십니다. 그리고 이제 저희 드래
곤들은 전에 크리니추이더스님께서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게......"
"너희들 마음대로 되게 둘 것 같아!"
카이피스트는 무심한 표정으로 자이커를 바라보았다. 자이커는 자신의 눈앞에 놓여진 현실을 도피하고 있는
듯 했다. 카이피스트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지금 당신의 힘이라면 절 이길 수 있습니다. 그것만은 부정하지 못하겠군요. 아까 당신이 보여준 힘은 정말
인간으로써는 가지기 힘든 힘이더군요.
하지만 그게 다입니다. 모든 드래곤이 동시에 일어선다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막을 수 없습니다."
"......"
사실이었다. 세상의 모든 드래곤이 자이커 자신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을 한다면 자신은 살아남을 수 없었
다. 한마리일때는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모이면 엄청난 힘이 된다...... 그건 인간의 경우에서도 잘
알고 있었다. 자이커는 밑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 일을 이 드린이 찬성할 것 같아?"
자이커는 이겼다는 듯이 웃음을 짓고 말했다. 카이피스트는 그의 표정을 보더니 또 다시 고개를 절래절래 흔
들고는 말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크리니스카이쳐님은 크리니추이더스님의 후손이라고.
정신은 그것을 바라지 않아도 육체는 그것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크리니스카이쳐님이 하셔야 할 일
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건 내가 허락하지......"
자이커의 말은 드린, 아니 크리니스카이쳐에 의해서 멈췄다. 크리니스카이쳐가 자이커와 처음 만나던 때처럼
그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린이라면 자신의 의견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던 자이커의 표
정은 굳어버렸다. 작고 보라색눈을 가진 생명체는 드린이라는 이름보다 크리니스카이쳐란 이름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자이커는 믿을 수 없었다.
끼략.
크리니스카이쳐가 작게 내뱉었다. 그 말을 듣자 카이피스트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크리니스카이쳐님이 너희들을 그냥 보내라는군. 운 좋은 줄 알아라. 이 분의 의견이 아니었다면 너희들은 모
두 사라졌을테니......"
카이피스트의 말은 여운을 남기며 점점 사라졌다. 크리니스카이쳐와 함께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자이커는 무릎을 꿇고 쓰러진채 일어서지 못했다.
해가 서쪽으로 고개를 살며시 내고는 사라졌다. 자이커는 아까 자세 그대로 아직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누
스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자이커님......」
"왜......"
「이제....... 정신을 차리셔야......」
"왜......"
「자이커님......」
"왜......"
자이커는 계속해서 왜...... 란 말만 되풀이했다. 아직 그는 드린이 드린이란 이름을 버리고 크리니스카이쳐란
이름을 선택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계속 말했다.
"왜......"
끼략.
자이커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이곳에 와서 얻은 친구인 드린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이커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드린이 없었다. 허무한 어둠만이 잠식하고 있을뿐......
끼략......
다시 한번 드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린의 목소리는 점점 울리고 있었다.
자이커는 당황하며 드린의 모습을 찾았다.
끼...... 략.......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자이커는 당황했다. 소리가 점점 울리며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이커
는 노란검을 빼들어 전기를 방출시켰다. 자신의 몸을 싸고 있는 어둠을 조금이라도 몰아내고 드린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였다. 전기가 방출되며 약간의 어둠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곳에는 자이커가 바라던 사람이 서 있지
않았다.
"이미 늦었다. 크리니스카이쳐님은 너를 버렸어."
자이커의 정신은 일순간 멎어버렸다.
"크리니스카이쳐님은 너를 버렸어."
"너를 버렸어."
"너를 버렸어."
"너를 버렸어."
아니야...... 아니야. 드린이...... 드린이 날 버릴리없어......
자이커의 눈에 작고 보라색눈을 한 귀여운 드린이 나타났다. 자이커는 웃었다.
이것봐...... 드린은 날 버리지......
자이커가 손을 내밀어 드린을 잡으려 하자 드린은 심하게 반항했다. 그리고 드린의 몸은 점점 더 커져갔다.
몸은 계속해서 커졌다. 카이피스트의 몸보다 더욱 거대해졌다. 싸늘한 눈으로 자이커를 바라보던 크리니스카이
쳐는 입을 벌려 보라색브레스를 내뿜었다.
안돼-!!!!!
"안돼-!!!!!"
자이커는 소리를 질렀다. 눈앞에 보이는건 아까전까지 보였던 어둠이 아니었다. 나무와 흙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자이커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까는 꿈이었음을......
자이커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아까 드린을 잡으려 했던 손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그는 드린이 자신의 손에
서 몸부림치던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다. 처음느꼈던 반항...... 그것은 자이커의 정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이커는 눈앞의 나무에 앉은 새를 바라보았다. 자이커가 알고 있는 새였지만 지금 그는 그 새의 이름을 생
각해내기조차 싫었다. 아까의 꿈이 기억났던 것이다. 자이커는 고개를 숙여 더이상 앞을 바라보지 않았다.
【내가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군.】
「그때 막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야 했어...... 이제서야 후회가 되는군.】
가이샤는 힘없이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자이커가 온몸에 힘을 뺀채로 있었다. 온몸에 힘을 뺀채 뒤의 나무에
만 기대어 숨도 억지로 이어가고 있었다.
크리니스카이쳐란 가이샤의 창조물이 아닌 생명체가 그의 정신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
다.
【그때...... 그것을 막아야 했는데......】
가이샤는 그때의 일이 생각났다.
【얘야, 그런걸 만들면 안된단다.】
가이샤가 인자하게 웃으며 자신의 눈앞에 있는 소년에게 말했다. 소년은 엘프같은 귀를 쫑긋 세우며 말했다.
"왜요? 왜 이런걸 만들면 안되요?"
소년이 가르키는 물건은 드래곤같이 생긴것이었다. 드래곤처럼 생기기는 했지만 드래곤은 아니었다. 가이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찰흙에서 막강한 힘이 느껴졌다. 이 세상의 드래곤을 모두 지배할 수 있을 정
도로.
【이런걸 만들어놓으면 인간은 어떻하니. 드래곤은 안그래도 강한데 말이다.】
"그럼 또 인간중에 용사가 나타나 이것을 막겠지요.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에요."
【얘야...... 그러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니. 그리고 그 사이에 너의 종족인 엘프가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야.】
"괜찮아요. 게다가 전 엘프가 아닌걸요."
소년은 유쾌하게 말했다. 가이샤는 그의 대답에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의 표정을 바라보다 소년이 말했다.
"음...... 하지만 아버지가 죽는건 싫으니 이건 버려야겠네요."
【그것을 나에게 주겠니?】
"뭐하시게요?"
【나도 너처럼 장난이나 할까 싶어서.】
"헤헷, 나이는 굉장히 많아보이는데 행동은 어린아이처럼 하네요."
【하하. 그러냐?】
"여기요."
소년은 웃으며 자신이 만들었던 찰흙을 내밀었다. 가이샤는 그 인형을 조심스레 받아들며 말했다.
【이 아저씨는 이제 그만 가야겠구나. 하지만 가기 전에 충고를 하나 하마.
너를 만들어낸 종족을 증오하지 말거라. 그들은 너를 만든 부모님임을 잊지 말고.】
"물론이죠. 제가 증오를 왜 해요?"
환하게 웃는 소년의 얼굴. 현재로부터 1000년전의 이야기였다.
【거기서 얻은 찰흙인형으로 나는 크리니추이더스를 만들었지. 그 녀석이 나에게 반기를 들거라고는 생각지
도 못했지만 말이야.】
가이샤는 웃었다. 세라핌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응? 무엇이 말인가?】
「......가이샤님의 얼굴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응? 그렇구나. 하하. 내가 점점 어려지고 있는 탓인가?】
가이샤의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해가 3번지고 달이 3번 떠올랐다.
하지만 자이커는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일줄 몰랐다. 누스는 이때까지 움직이
지 않던 힘을 이용해 말을 했다. 주인인 자이커가 아무것도 먹질 않아 그의 힘도 약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 차리십시오.」
자이커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눈을 하고 고개를 살짝 들었을 뿐이다. 누스는 또 다시 말을 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몬스터의 밥이 될 뿐입니다. 일어나셔서 크리니스카이쳐의 행동을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
까?」
"......"
자이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주저 앉아 죽으실 생각이십니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방울, 두방울...... 비는 점점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무심하게 앉은 자이커의
몸위로 떨어졌다. 자이커는 피하지도 않고 내리는 비를 모두 다 맞았다. 누스가 또 다시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
「이미 적이라면...... 다시 아군으로 돌리면 되지 않습니까?」
"......"
자이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더이상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더이상 누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자이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
작했다. 그의 흐느낌은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