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말하는 또 하나의 시선
<아무르>(미하엘 하네케, 드라마, 15세, 2012)
고령화 시대의 영화
세계는 지금 고령화 시대를 살고 있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늘어난 덕분이다. 이에 맞게 노년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들이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예전에 노인은 영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나간 세대나 보수성을 대표하고, 대가족의 한 부분을 구성하며, 회상의 한 도구였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노년의 삶 자체가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다. 노년의 삶에 색채를 입히는 작업에서도 많이 달라졌는데, 회색 일변도의 그림에서 칼라로 바뀌었다. 고령화 시대에 따른 변화임에 분명하다. 2012년까지 “노인 영화제”도 다섯 차례나 개최될 정도로 노년의 삶을 스케치하거나 성찰하며 노년 세대를 겨냥하여 제작된 영화들이 많아졌다.
노년의 삶을 생각할 때 중심 주제는 무엇일까?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아마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일 것이다. 인간으로서 여정 중 마지막 단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건져낼 것이 한 두 개이겠는가. 그들의 삶과 지혜의 풍부함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관객에게 노년의 삶은 어딘지 모르게 다르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소재이다. 예컨대 <죽어도 좋아>는 노인들의 성생활을 다루고 있는데, 인간으로서 노인의 삶을 말하는 자연스런 것이지만 젊은 세대들에게는 매우 낯설게 받아들여졌다. 노인은 남성과 여성이 아니라 중성으로 여겨지는 인상을 받을 정도다. 노년 세대가 선호하는 영화를 만드는 일도 독립영화가 아니라면 수익계산에 맞지 않아 제작을 주저한다. 따라서 노년의 삶을 소재로 쓸 때 주의해야 할 부분은 젊은 세대들에게서도 울림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외면당할 뿐이다. 대중문화의 세계는 이처럼 냉혹하다.
박범신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은교>는 나이듦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수작이다. 소설이 가진 아우라가 영화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 젊은 세대와의 관계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노년의 갈등과 한을 잘 풀어낸 이야기다. 그러나 나이듦의 문제를 다룬 것이지 노년의 삶 자체에 대한 성찰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쩌면 젊은 세대들까지도 품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나이듦은 모두에게 예외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강풀의 웹툰을 영화로 만든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그야말로 노인의 사랑 이야기였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대중의 관심을 끈 영화였지만, 전세대의 공감을 크게 얻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노인’의 사랑과 죽음으로만 그쳤기 때문이다. 노년의 삶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젊은 세대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노년의 사랑과 젊은 세대의 사랑은 비슷하면서도 분명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르>는 <하얀 리본>에 이어 연속으로 2012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감독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다. 이 영화 역시 노인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노인의 사랑이야기만으로 볼 수 없는 영화다. 마치 실내악 연주와 같은 구도로 만들어진 <아무르>는-비록 쉽게 소화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라 해도-노년의 삶을 통해서 세대를 아우르는 문제의식을 반영한 이야기여서 공감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곳에서 그 이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스포일러 있음)
제목 “아무르”는 “사랑”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것도 조금은 다른 모습이다. 노년의 삶의 일부인 질병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면서 노인의 삶과 사랑 그리고 그 이상의 의미를 깊이 있게 성찰하고 있다. 관건은 노인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겠는데, 굳이 노인이 아니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의 이야기이다. 감독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매우 간단한 스토리지만 미장센과 몇 개의 메타포를 통해 의미를 확대시켜나가고 있다. 먼저 영화 이야기를 기술하면서 살펴보도록 하자.
영화 이야기
영화는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면서 시작한다. 경찰들이 빈 방에 들어서고, 테이프로 밀폐된 방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주변에 꽃잎이 널려져 있는 상태에서 가지런히 누워있는 여자 시신을 발견한다. 영화는 이런 상황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듯이 전개된다. 그 후에 이어지는 피아노 연주회에 참석한 노부부가 무대가 화면에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무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감독은 비교적 긴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것을 마지막 장면에서 집을 나서는 장면과 연결시켜 보면 마치 서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삶과 죽음의 순환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음악가 출신의 80대 노부부에게 일어난 일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것의 연속이었다. 연주회 후에 집에 돌아온 그들이 자물쇠가 망가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그 첫 번째이다. 그 후 어느 아침 식사 도중에 아내는 갑자기 잠시 동안 의식을 잃었는데, 매사에 꼼꼼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며 살았던 아내가 자신의 상태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예사로 일이 아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해보니 더 큰 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질병으로 판명난다. 결국 갑작스럽게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수술의 후유증으로 그녀는 오른 쪽 손과 발에 마비를 겪게 되었다. 다시는 병원에 보내지 말라는 아내의 부탁을 약속으로 받은 남편은 병이 점점 악화되어 가는 상황에서도 의사의 진찰을 받고 방문 간호사의 도움을 받지만 병원에 입원시킬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가족인 딸의 오해를 사 불편한 일을 겪지만, 남편은 “우리에게도 우리의 삶이 있다”며 이것이 자신들의 삶의 방식임을 주장한다. 또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요양원에서 하는 일은 자신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고집한다. 또 한 차례 갑작스레 찾아온 뇌졸중을 겪은 후 병세가 더욱 악화된 아내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살고 싶지 않다며 음식과 물을 거절한다. 육체적으로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인 남편은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고 결국 고통을 호소하는 아내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에 이르게 한다. 갑작스런 일이었다. 그리고는 남편도 죽었을 것이라는 강한 추측을 일으키는 장면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늦지 않도록 다그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 첫 장면에 나오는 제자의 피아노 연주회에 가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영화는 노년의 삶에서 흔히 일어나는 삶과 죽음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을 뿐이다. 지루할 정도로 서서히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관객은 삶과 죽음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남편의 사랑과 고뇌를 분명 공감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단지 노인의 삶과 죽음을 다루지 않는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묻고 또 대답하고자 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회생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 있을 때 그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무척 감상적일 수 있는 상황이지만 감독은 전혀 감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나갔다. 단순한 이야기를 보다 깊이 있게 해주고 또 노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거쳐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 영화에서 사용된 메타포 때문일 것이다. 단순한 이야기에서 감독은 많은 장치를 곳곳에 심어놓고 그것을 통해서 의미의 확장을 시도하였다. 전반적인 맥락에서 영화의 의미를 생각해볼 때 의미 확장에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것은 부서진 자물쇠와 물 과 비둘기 그리고 집안 곳곳에 붙어 있는 그림들이다. 그림은 방안에만 제한되어 있는 공간을 확장시켜주는 기능을 한다. 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노력만으로 충분히 나타낼 수 없는 감정들을 표현한다.
자물쇠와 물 그리고 비둘기
연주회를 마치고 돌아온 노부부는 집안에 누군가 침입한 흔적을 보게 된다. 자물쇠가 부서진 것이다. 아내는 낯선 자의 침입에 두려워하지만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무감각을 넘어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까지도 무심해지는 노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실제로 그의 얼굴은 영화 내내 주목할 만한 변화가 없다. 갑작스런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지만 그는 여전하다. 심지어 아내를 질식사시킨 후의 모습도 여전하다.
그리고 아내가 잠시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남편은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을 잠그지 않은 상태로 놓아둔다.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두 차례 뇌졸중을 겪은 후에 생의 의욕을 상실한 아내는 물을 마시기를 거절한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며 또한 생명을 상징한다. 두 개의 장면에서 볼 때 물은 아내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비둘기다. 비둘기 장면은 두 차례 등장한다. 한 번은 아내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비둘기가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남편은 그것을 창밖으로 쫓아낸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아내가 죽은 후에 들어온 비둘기다. 남편은 비둘기를 잡고는 그것을 가슴에 품고 보듬는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독교 전통에서 비둘기는 성령에 대한 아이콘으로 등장한다. 인간을 돕는 자로서 보혜사를 상징한다.
이 두 개의 장면은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의 존재나 의미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는 생명을 돕는 자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남자를 만드신 후에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아 여자를 만드셨는데, 돕는 배필로서 만들었다. 창조주의 계획에서 아내는 돕는 자로서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이것은 아내에게 제한되지 않고 인간 일반에 적용되어야 한다. 여하튼 하네케 감독은 바로 돕는 자로서 아내의 의미를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돕는 자가 육신적으로 부재하였을 때 비둘기가 등장한다. 보혜사 성령이 내려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랑이 그리고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이 거듭 확인된다. 둘은 육신적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적으로는 여전히 함께 있는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 곁을 떠나게 되었을 때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말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감독은 도대체 무엇을 두고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곧,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은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함께 고통당하기를 피하지 않는 일이다. 또한 그런 계기를 통해 아내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내가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죽어가는 아내에게 남편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인 것이다.
평생을 살면서도 그 혹은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다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대개는 반려자라는 이름으로 지내다가 이름과 함께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 혹은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또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인간은 부재를 통해 오히려 존재와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 같다.
존엄사 문제
끝으로 영화에 나오는 존엄사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슬란드 영화 <볼케이노: 삶의 전환점에 선 남자>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데, 남편은 중풍으로 고생하는 아내의 건강이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감당하기 힘들어 아내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킨다. 일종의 강제적인 안락사인데, 보기에 따라서 인간답게 죽을 권리에 따른 죽음 곧, 존엄사라고 볼 수도 있다. 영화는 그것 역시 사랑의 하나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과연 적절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많은 논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