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8
ㅡ 고려초기 왕위다툼과 광종의 개혁 4 ㅡ
(고려광종과 조선태종의 '평행이론')
역사에는 '평행이론'이 있다.
'평행이론'(Parallel Life)이란 여러가지 뜻이 있지만 일정한 시차를 두고 다른 시대 사람들이 같은 운명을 반복한다는 뜻도 포함된다.
역사 평행이론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미국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과 '존 F.케네디', 이 두 사람 에게 일어난 역사적 암살사건 이다. (아래 사진 참고)
우리나라 역사에도 평행이론에 해당 될만한 인물들이 꽤 있다.
오늘은 가장 비슷한 고려 '광종'과 조선 '태종' 평행이론 이야기이다.
고려광종은 949년 왕위에 오르고 조선태종이 1400년에 왕위에 즉위하니 두 사람 사이에는
약 450년 정도 시간 간격이 존재 한다.
이 시간 간격 차이로 봐서는 조선태종이 고려광종을 따라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광종과 태종은 둘 다 나라를 건국한 태조'왕건'과 태조'이성계' 아들들이다.
그러나 둘 다 맏이가 아니어서 정상적으로는 왕이 될 수 없었다.
광종은 이복 형들인 '혜종'이 2년, '정종'이 4년만에 죽자 고려 4대왕 으로 즉위한다.
태종은 스스로 제1, 2차 왕자의 난이라는 쿠데타로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자기 친 형인 '정종'을 왕 으로 추대했다가 2년만에 스스로 조선 3대왕이 된다.
광종도 이복 형 '혜종'이 즉위 2년 만에 죽고 친 형 '정종'이 즉위했던 것은 '왕식렴'과 정종에 의한 쿠데타였다는 설이 있는데 광종이 실제적 배후로 지목되고 있기도 한다.
광종과 태종 둘 다 강력한 개혁 정치로 왕권확보하고 막 건국한 고려와 조선이 오백년을 유지할 수 있는 확실한 기반을 닦아 놓았다.
또 둘 다 왕권안정에 대한 집념이 아주 강렬했다. 그래서 측근들은 물론 혈육과 친인척 경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 번 의심이 가면 친인척 살육마저도 주저하지 않는 잔인함마저 아주 똑 같았다.
광종은 선대 왕이자 형제였던 혜종과 정종 아들들이 자라서 자기 왕권을 위협할까 봐 친조카 들을 역모를 씌워 살해했다.
태종은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이 된 후 자기 처남들 4명을 모두 몰살시키고 아들 세종 장인도 죽이고 그 집안도 개박살을 낸다.
광종은 왕권강화책 일환으로 호족세력 제거와 956년에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 노비해방법인 '노비안검법'을 실시했다. 958년에는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 건의로 우리역사 최초로 '과거제도'를 시행한다.
960년에는 '백관의 공복'도 제정했다.
광종의 대외정책으로는 중국 여러 왕조와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함 으로써 고려 국제적 지위를 향상 시켰다.
광종은 국방대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고려영역을 서북과 동북방면으로 더욱 확장시키는 동시에 거란과 여진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이외의 치적과 함께 광종개혁 편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조선 태종도 왕위에 오르자마자 태종이 재위하는 동안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왕권강화를 통한 정국 안정이었다.
태종은 먼저 관제개편을 단행해 의정부 서무를 육조가 분장하게 하는 '육조직계제'를 채택한다. 육조직계제는 육조에서 각각의 담당 업무를 왕에게 직접 보고 하는 것이다.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이 대부분의 정사를 직접 처리하기 때문에 재상 권한이 그만큼 줄어들고 왕권을 강화 시킨다.
이는 건국초기 정도전이 펼친 재상중심 정치체제와는 다른 국왕중심 통치체제였다.
그러나 재상 권한을 축소하는 정도로 만족할 태종이 아니었다.
태종이 빼어든 보다 강력한 왕권 강화 카드는 사병혁파와 외척세력 견제였다.
정도전의 요동정벌을 위한 사병 혁파 반발로 쿠데타를 일으킨 태종이방원은 왕이되고 나서는 정반대로 제2차 왕자의 난 때 정종 측근들이 이방간 편에 섰다는 명분으로 대대적으로 사병을 혁파시키고 모든 병권을 왕 아래두어 왕권을 크게 강화 시켰다.
조선태종 또한 고려광종처럼 대외정책도 눈부시다.
태종은 즉위 초부터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개선했다.
첫 신호탄은 명나라 황제로부터 왕의 고명과 인신을 받은 것 이었다. 사실, 태종이 즉위하기 전까지는 조선왕은 당시 대외 외교적으로는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명나라가 조선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러 주고서도 병권을 놓지 않았다. 세종 1년에 일어난 대마도정벌도 사실은 태종이 상왕으로 있으면서 주도했다.
태종 사후에 실현시킨 세종의 4군6진 개척도 태종의 국방정책 강화가 기반이 되었다.
태종은 왕의 외척은 왕이 힘이 없을 때는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 줄 수 있지만 지나치게 득세할 경우에는 오히려 왕권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생각 했다.
그 누구도 넘 볼 수 없는 막강한 절대왕권을 꿈꾸었던 태종에게 외척득세는 용납할 수 없었다.
1406년(태종 6) 8월, 태종은 느닷없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 주겠다고 나섰다. 태종이 선위를 하겠다고 했을 때 태종 처남였던 민무구 형제들이 내심 좋아하면서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그것을 빌미로 이 두 형제를 귀양보내고 귀양지 에서 자진하게 했다. 후에 민씨 형제의 막내인 민무회 가 이 문제로 태종에 대해서 불충 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유배 되었다. 민무회 형인 민무휼 역시 민무회가 불충의 죄를 지은 사실 을 알고도 묵인 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이 두 사람 역시 유배지에서 자진했다.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좌에 오르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운 정실부인 원경왕후 친정인 민씨 집안을 '풍비박산'을 만들어 버렸다.
개인 인간사로 보면 자기 성공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조강지처를 내치는 것도 부족해 처갓집식구를 몰살시켜버렸으니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권력의 비정함을 인정한다해도 너무 지나친 처사였다.
'용의드라마'에서 원경왕후의 피끓는 한이 잘 드러난다.
왕으로서 왕권안정을 통한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고육직책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이 방법 밖에 없었을까?하는 의문은 든다.
태종이 아들 세종 처갓집 장인 '심온'을 비롯한 청송심씨 집안을 개박살 내버린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고려광종도 조선태종 못지 않는 엄청난 피를 뿌리며 왕권 안정을 시켜 갔다.
광종은 후반기에 가서는 미친 광종으로 표현 될만큼 호족세력 숙청 과정이 정도를 넘어 섰다. 당시 감옥에는 항상 사람으로 가득찼고 죄없이 살육당하는 자가 수도없이 많았다고 '고려사'는 밝히고 있다.
태종도 자기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한데 큰 공헌을 한 태종의 최측근 '이숙번', '이무'등을 제거 한다.
이처럼 고려광종과 조선태종,
이 둘은 치적 뿐만 아니라 악행 까지도 닮아있었다.
이 두 사람의 다른 점은 사후에 있었다.
태종사후는 명군 '세종'이 태종이 피로 만들어 논 기반 위에 조선을 찬란하게 꽃 피운다.
광종사후는 '경종'이 광종과는 정반대로 광종이 이룩한 개혁을 후퇴시켜 광종 이전으로 되돌려 놓는다.
이처럼 고려광종과 조선태종 또한 역사 평행이론을 보여주는 전형적 예 중 하나이다.
역사는 똑 같지는 않지만 반복한다는 말이 이래서 나온다.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배워서 잘못된 역사 전철을 밟지 않고 역사의 '오류수정의 법칙'을 깨달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어서 광종의 개혁 편이 계속 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