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4부 면 천 /6 ]
그날 밤 술시,
하루 업무의 마지막 임무인 각전과 각궁의 저녁 문안을 돌 때,
일행을 선도하는 정작에게 허준은 중국행에 대한 자신의 강한 욕구를 토로했다.
동행하던 이공기가 놀란 얼굴로 그 허준을 돌아보았고,
정작도 걸음을 세워 그 자세한 진의를 듣고자 했다.
허준이 일시적인 충동에서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의 소망임을 얘기하자 정작은 그 허준의 손을 잡고 힘있게 흔들었다.
그 아귀힘 속에는 전폭적인 지지와 만강의 경의가 담겨 있었다.
"유념 해주시 오니까?"
정작이 즉답했다.
"이를 말이오.
사행에 배행하는 기회를 한 품계 승차하는 길로 여기는 문신들이나,
한밑천 벌어들이려는 장사치들의 꿍심이 없고선 지원하는 인물이 없는 터인데,
허직장이 솔선한다면 또한 내의원에서 모범이 될뿐더러 나 또한 작은 근심을 하나 더는 길이 되오."
허준은 그 말뜻이 뭔지 알았다.
한 차례에 2백 명을 오르내리는 사신 행차요!
그 일행의 무사 귀환까지의 발병을 막고
병치레의 수발을 맡아 동행하는 배행 의원은 한 사람이 고작이다.
길은 또 얼마나 먼가.
편도 3천1백 리 왕복 6천2백여 리가 되는 그 고된 노정을
나귀 한 마리 배당되지 않은 의원의 신분으로 온갖 상비약통을 둘러메고
죽자살자 좇아가고 오는 그 보행길은 난생 처음 이국 풍정을 구경한다는 호기심 외 건져지는 것이 없다.
더구나,
내의원 의원의 출세는 궐내의 왕족들의 발병과 치료에 있는 것이지,
외국에 대한 견문을 넓히는 따윈 술상머리의 안주감이 고작이다.
뿐이랴.
한번 무사히 다녀오면 그 경험을 사,
2차 3차 다시 선발되는 달갑잖은 선례가 있고 보면,
내의원 의원들에게 있어 사행 배행은 자신의 출세를 방해하는 악운으로 두려워한다.
"순차도 무시하고 불쑥 청하는 것이 딴 사람의 질시를 자청하는 일 같사오나 ..."
허준의 말에 정작이 강하게 고개를 젓고 다짐했다.
"의원의 길이 어찌 의서 속에만 있다 하겠소.
마음을 세우기 따라선 타국의 수토를 밟아보고 맛본다 함은 결코 값싼 경험이 아닐 줄 아오.
내 꼭 허직장으로 하여금 절후가 순탄할 제 떠나는 사행 속에 끼어 가도록 애써보리다."
같은 사신 행차라도 혹서와 엄동을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그 시기를 선택할 수 없는 하급 관원으로서는 행운에 속한다.
허준은 그 세심한 정작의 배려가 고마웠다.
또 새벽녘의 결심이 불과 하루 사이에 성사가 된 데 더더욱 기뻤다.
세상살이를 한낱 구경꾼과 같은 호기심만으로 살 수 있으랴만,
조선 사람에게 있어 중국은 내다볼 수 있는유일한 외국이었다.
더구나,
그 중국의 문명을 수없이 젖줄처럼 빨아들여온 조선으로서는 선비들은 선비들대로 공자가 태어난 나라,
주자학의 본산인 중국의 실체를 보기를 평생 소원으로 삼았다.
선비가 아닌 신분일지라도,
온 세상의 중심에 위치한 나라라 자처하며 국호 또한 중국으로 부르는 대국의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더구나 의술에 관한 많은 지식을 그 중국에서 받아오는 데 관심을 품은 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육지로 이어진 나라요,
개인의 욕망이 아무리 치열할지라도 개인의 자격으로 국경을 넘는 일을 쌍방이 사죄로 다스리고 있는 한,
조선 사람 중 무사히 국경을 넘는 자격은 극도로 한정돼 있다.
그 국경을 넘는 명분이 엄격히 말하여 대등한 나라 간의 대등한 자격으로의 교류가 아닌,
한쪽은 황제가 파견하는 칙사요!
한쪽은 왕이 파송하는 사신인 것이고,
더 사실대로 말하면 조공행차라 하여 과언이 아니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에 이은 우리의 국호를 조선으로 할지,
화녕으로 할지 품신한 끝에 명태조 주원장이 찍어준 대로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된
'조선'으로서는 사대모화는 곧,
부동의 국시였음에서 개국 후,
중국에 보내는 사신 행차는 조선 조정으로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최중요한 국가행사 이기도 했다.
물론,
그건 조선에 대한 중국의 직접 지배를 의미하기 보다 정치적 복종과 견제를 뜻하는 것이지만,
사행 내왕의 명칭, 구성, 여정, 의식, 활동,교역행위 등은 세밀한 규정으로 묶어 통제되고 있었다.
그 통제의 내용은 정기적인 것으로는
한 해가 저물기 전에 가 뵙는 동지사, 새해가 열리는 정초에 가 뵙는 정조사,
황제의 생탄일을 축하차 참례하는 성절사, 황실의 중요 제사에 맞추어 가는 천추사 ...
그밖에 감사할 일로 가는 사은사,
무언가 청할 일이 있어 가는 주청사,
축하할 일로 가는 진하사,
위로할 일로 가는 진위사 등등이 잇따르고 아울러 사신 행차의 삼사로 칭하는 정사, 부사,
서장관은 임명과 함께 한 품계가 특진하는 것이 관례이고,
이들을 중심으로 항시 2백 명을 오르내리는 구성원들 속에는 이 모처럼의 허가받은 외국 나들이를 돈벌이나,
귀한 물품을 사들여오는 절호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 이었다.
더구나 오가는 동안의 식량은 물론,
마소의 먹이조차 자체 부담이요,
그 허드렛 짐들을 운반해 가는 아랫것들의 머릿수는 제한하되,
인물의 선택은 삼사의 재량 이었기에 그 수많은 사신 행차는 또 공공연히 대륙의 문물을 수입해오는 유일한 기회에 속했다.
그러나 비록,
어떤 명목의 사신 행차라 할지라도 화약의 원료인 염초, 허가되지 않은 서적 그러고,
지도의 밀반출은 극도로 엄한 범금사항이었다.
그 소국에 대한 대국의 독선과 편협함은 여말 문익점이 몇 톨의 목화 씨앗을 숨겨 들어오기 위해
붓대통을 이용해야 했던 시대로 부터 결코 더 너그러워져 있지 않다.
"이시진이라 ..."
각전에 대한 밤문안이 끝나고,
정작과 함께 정청으로 돌아가야 할 이공기가 허준의 직처인 내국으로 따라와 퇴궐하는 모습의 이명원을 앞에 두고 말했다.
허준이 말을 이었다.
"물론 의서 속에 본초란 말이 운운된 것이 일이백 년 전 얘기도 아니요,
양나라 때 도흥경이 저술한 본초집주,
당 때 퍼진 신수본초도 귀에 익었고, 또 ..."
"암 많지.
북송 말년 경사증류대관본초 또 당시 태의국의 검사역을 지냈다는 구종석이가 쓴 본초연의도
그 실용적인 가치는 오늘날에로 알아주는 바고,
전의감에 가면 몇 권 결락되긴 했으나
필사한 10여 권은 내 눈으로 본 바도 있네."
이명원이 퇴궐을 미루고 두 사람 사이에 끼여 앉았다.
"헌데 왜 갑자기 본초 얘기가 무성한겐가?"
"허직장이 북경에 가고자 자청했어."
"무슨 소린가? 자청을 해?"
두 친구의 시선 앞에서 허준이 말했다.
"지난번 사행을 배행하여 북경에 다녀온 유봉사로부터 중원의 인전이라는 책을 하나 얻어 보았는데,
그 속에 보제방과 구황본초를 저술한 주숙의 얘기가 있었소."
"주숙이야 불과 100여 년 전 사람 아니오?"
"대개의 의서들이 몇백 년 혹은 천 년도
넘는 고서들로 오늘날에도 참고하는 것이 많은데,
불과 170년 전의 책이라면 보다 새로운
것들을 다시 망라했다는 게 아닐까?"
"그렇게 보아도 되겠지."
이명원의 대답에 이공기가 물었다.
"헌데?"
"그 주숙의 보제방에 집록된 처방이 모두 몇 가진지 아시오니까?"
"그거야 알 수 없지 않소.
그건 왕실 서고 안에도 전질이 없다고 들었고,
남아 있는 권수 속에서도 산일되고
결락된 책장이 한두 군데가 아닌터에."
"이번에 난 알았습니다.
그 보제방 전질에 집록된 각종 처방이 무려."
"무려?"
"...?"
"육만천칠백삼십구 종에 이른다는 것을."
말끝에 허준이 소매 속애서 중원의인전을 내놓자 이명원의 손이 책으로 뻗었다.
"내가 말을 잘 못하고 있는 게 아니오이다.
다시 말하오만,
각 병에 대한 처방이 육만 천칠백삼십구 종이 적힌 책, 상상이 되시오니까?"
주숙의 난을 찾아 책장을 넘겨가던 이명원의 손이 정지했고,
함께 들여다보던 이공기가 말했다.
"생전의 공적을 기리어 시호도 내렸군,
주정왕이라.
의원 이라면 상놈의 사촌쯤으로 여기는 우리 신세에 비해 왕자 붙은 시호를 내리다니,
의원의 씀씀이를 알아주기는 알아주는
땅이로군.
그래 이젠 중국에 가서 왕자 붙은 의원 노릇도 하고 싶소?"
이공기가 자조와 농담을 섞어 책을 다시 이명원에게 남겼다.
"농담이 아니오이다."
"나도 농담이 아니오.
왕자가 붙건 무슨 자가 붙건,
그건 중국에서의 얘기고,
조선 땅에 태어나고서야 고작 바라볼 수 있는 높이란 정해져 있는 터요.
암튼 혼자 육만 종이 넘는 처방을 써냈다는 것만도 보통 의원이 아님은 짐작이 가는군."
허준이 본론을 꺼냈다.
"놀라운 것,
은 주숙의 보제방이 나온 지 불과 100여 년인 지금 새로운 의서가 저술되고 있다는 사실이오."
"새로운 의서?"
"이시진의 책명도 나와 있소. 본초강목."
"책 속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소만."
이명원이 책장을 되넘기며 묻자,
허준이 말했다.
"책장 첫머리 저자의 서문에 언급이 돼 있소."
책장을 되넘기는 이공기와 이명원의 시선이 책장에 박혔다.
내일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