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포은선생숭모사업회는
~~~정기총회 및 유적지 탐방하다/경포대<2>~~~
언 제 ; 2015년 6월 10일
어디에 ; 강원도 강릉시 일원
사단법인 포은선생숭모사업회는 지난해에
울산 구강서원에서 정기총회 및 유적지 탐방을 하고 금년에는
강원도 강릉시내에 있는 선생의 영정이 봉안된 전충사 사당을 찾아 모든
회원이 알현하고 부근에 있는 경포대를 탐방후 미리 답사에서 정해 놓은 식당을
찾아 그곳에서 정기총회를 간략하게 거행하였었다.
===鏡浦臺(경포대)===
있는곳 ; 강릉시 경포로 365(저동94)
○ 개 요
경포대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경포호수 북쪽 언덕에 있는 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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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에 입간판을
(경포대와 충혼탑)~~
고려 충숙왕 13년(1326)에 강원도의 한 관리였던 박숙정이 당시 방해정 뒷산 인월사
옛터에 세웠던 것을 조선 중종 3년(1508)에 강릉부사 한급이 지금의 자리에 옮겼고,
여러 차례의 중수 끝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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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는 입구를 늦게 담아서~~~
앞면 5칸·옆면 5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모두 48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졌으며 마루의 높이를 달리하는 입체적 평면을 하고 있다.
이름인 ‘경포대’ 전자체 현판은 유한지의 글씨이고, 해서체 현판은 이익회의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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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의 대성업 비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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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을 멀리서 담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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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 둘레 담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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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의 유형문화재 표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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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 입구에서~~~
경포대 내부에는 숙종의 직접 지은 '어제시'와 율곡 이이가 10세에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비롯해, 조하망의 상량문 등 수많은 명사와 시인묵객의 글이 게시돼 있다.
누각 주위에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들이 알맞게 우거져 운치있는 경관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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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 설명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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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 와서~~~
경포대와 주변호수는 1981년 강원 도립공원으로 지정됐고,
바닷가에는 유명한 경포해수욕장(길이 6㎞)이 있다.
* 시대 - 조선 중종3년(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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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전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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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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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강산"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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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들 기념 촬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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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작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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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으로 내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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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예약하여둔 청룡횟집에서 중식 및 정기총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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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국장과 총무이사,재무이사가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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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참석하신 회장님 인사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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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 거주하시는 회원분들 소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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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님께서 앞에 소개가 시원하질 않아 새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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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앞이 상세히 소개 설명을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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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기념관 표시석을~~~
===매월당 김시습은===
있는곳 ; 강릉시 운정길 85
(운정동 288-1)
***금오신화(金鰲神話)·김시습***
1. 작가 연구
본관 강릉(江陵). 자 열경(悅卿). 호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
벽산(碧山). 법호 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동·신재(神才)로 이름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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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입구를~~~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에게 불려가 총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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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들며~~~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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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안에 기념시비도~~~
이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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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한문을 한글로 설명 하고~~~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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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초서의 글씨체로~~~
1463년(세조 9)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465년(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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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해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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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현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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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을 들면 바로~~~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후지』
(1476)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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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사가 열심히 설명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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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의 시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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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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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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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만들어진 매월당의 모습을~~~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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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의 행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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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의 시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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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가 너무 예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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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훌륭한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