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인천 검단신도시에서 분양한 단지에 청약자들이 몰려 상담받고 있다. 사진 | 김윤경 기자
[스포츠서울 김윤경 기자] “서울에 번듯한 아파트 한 채 사려면 10억원, 대출이 묶여 청약에 당첨되더라도 중도금의 40% 밖에 안 나오는데 나머지 6억원을 손에 쥐고 있어야 집을 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30~40대 평범한 직장인이 6억원을 주머니에 넣어놓고 살긴 만무하고 대출까지 막아 놓으니 현금 쌓아놓고 사는 부자들만 집을 가지라는 말입니까.”(임태석 씨, 41세)
정부가 서울 집값을 잡겠다고 9.13대책을 시행한 지 1년, 우려하던 ‘규제의 역설’이 현실화됐다. 시장은 정책을 비웃는 듯 멈출 줄 모르고 치솟는 아파트값에 청약통장 탈서울 러시가 일고 있다.
16일 국토교통부(이하 국토부) 아파트 실거래가 자료에 따르면 9.13대책 이후 1년간 거래된 서울 지역 아파트 실거래 가격은 평균 7억5814만원으로 정책 시행 이전 1년 평균 실거래가 6억6603만원 보다 13.8% 상승했다.
아파트 매매 거래량은 절반으로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실거래 가격이 더 높아진 이유는 대출 규제로 거래가 침체된 가운데 9억원 이하의 서민 아파트 보다 오를대로 오른 재건축 아파트나 고급 아파트 거래가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정책 시행 초기 일부 강남 재건축 단지의 가격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지난 7월부터 급매로 나온 재건축 물량이 빠른 속도로 소진됐고, 신축 아파트값은 역대 최고치를 갱신했다. 정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달 말 입주가 예정된 주요 단지는 분양가에서 최대 4억원이 넘게 올랐다.
서울 은마아파트의 한 부동산 앞을 시민이 지나고 있다. 사진 | 서울신문
30일 입주를 시작하는 강동구 고덕동 ‘고덕 그라시움(4932가구)’, 성북구 장위동 ‘래미안 장위퍼스트하이(1562가구)’, 강북구 미아동 ‘꿈의숲 효성해링턴플레이스(1028가구)’ 등 3개 단지의 전용면적 84㎡(34평형) 평균 분양가격은 9억원으로 입주를 며칠 앞 둔 현재 3억원 가량의 프리미엄이 붙었다. 고덕 그라시움의 경우 34평형 기준, 8억원에 분양했는데 지난 7월 분양권이 12억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청약시장에서는 무주택자 우선 청약으로 분양에 당첨되고도 대출 규제로 인해 계약을 포기한 미계약분을 현금부자들이 쓸어가는 분위기다. 최근에는 민간택지 분양가 상한제 시행을 앞두고 오히려 서울 공급물량 부족을 우려로 집값 폭등을 예상하는 이들이 늘었다. 이들은 서울을 벗어난 수도권에 아직 덜 비싼 곳을 지금 분양가에라도 잡아놓자는 심산이다.
주택 구매율이 높아진 3040세대는 경기나 인천으로 발길을 돌렸다. 투자자들 역시 규제가 심한 서울보단 규제 무풍지대로 주택구입 부담이 덜한 수도권으로 옮겨가는 모양새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투자자들이 먹을 것이 더 많은 수도권으로 눈을 돌리며 갭 메우기도 시작됐다. 리딩하는 지역의 아파트 값이 오르고 그와 흐름을 함께하는 지역의 아파트 시세가 덩달아 오르는 갭 메우기는 서울 접근성이 좋은 수도권 남부 신도시인 과천, 분당, 위례와 수도권 서부 신도시인 인천 송도국제도시, 검단신도시에서 조짐을 보였다. 강남이 움직이면 따라서 움직이는 지역에 선투자해 싼값에 사서 차익을 더 많이 거두겠다는 흐름이 확산됐다.
강남의 아파트 단지들이 보이고 있다. 사진 | 서울신문
실제 부동산114의 아파트매매가격 변동률에 따르면 분당과 위례는 지난 4~5월을 변곡점으로 6월부터 가격이 뛰었다. 특히 강남의 집값이 대부분 오름세로 돌아선 이후 추격 상승의 움직임이 가속화 됐다. 분당의 경우 시범단지 삼성한신아파트 전용 84.69㎡ 매매가는 지난 6월 9억5500만원에서 7월에는 10억2000만원으로 한달새 5000만원 가까이 올랐다.
이런 추세는 위례, 과천 등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위례신도시의 대장 아파트 위례 자연앤래미안e편한세상 전용 84.98㎡도 지난 5월 9억8000만원에서 7월 10억5000만원으로 두달새 7000만원이나 올랐다. 강남 대체지로 손꼽히는 과천은 별양동 래미안슈르 전용 84.95㎡ 매매가가 지난 7월 11억4500만원에서 8월 11억9000만원까지 올라 역대 최고가를 경신했다.
특히 서울로 연결되는 교통이 이미 개설됐거나 추가 대책이 있는 곳은 최근 분양시장에서 완판(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검단신도시와 운정신도시는 올해 초 정부의 3기 신도시 발표가 악재가 되며 미분양의 무덤으로 전락하는 듯 보였지만 지난 5월 김현미 국토부 장관이 ‘수도권 서북부 광역 교통망 개선’ 방안을 발표한 뒤 최근 두 달 사이 3000세대가 넘는 물량이 순식간에 다 팔려나갔다. 서울 근교에서 찾아보기 힘든 4억원대 분양가도 한 몫 했다.
검단신도시 ‘대방노블랜드1차’는 청약 당시 청약통장이 100개도 안들어와 대거 미분양이 발생했지만 8월 완판됐다. 제공 | 보물창고
검단과 운정은 지난해 12월 남양주 왕숙·하남 교산·인천 계양, 올해 5월 고양 창릉·부천 대장 등 정부가 3기 신도시 계획을 발표한 뒤 대규모 미분양이 쌓였던 2기 신도시다. 검단에서 올 4~5월 분양한 ‘대방노블랜드1차’와 ‘동양파라곤1차’는 각각 1151가구, 621가구의 미분양이 발생됐다가 모두 소진됐다. 앞서 지난 1~2월 분양한 ‘한신더휴’와 ‘센트럴푸르지오’ 역시 미분양이 847가구, 421가구였다. 하지만 이들 4개 단지의 미분양 물량 3040가구는 최근 두달 새 잇달아 매진되며 완판 현수막을 달았다.
당시 김현미 장관은 인천 도시철도 2호선이 검단·김포를 거쳐 일산까지 연장되는 안을 공개했다. 이렇게 되면 검단, 김포, 일산이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A(파주∼동탄 구간)를 중심으로 연결되고 경의·중앙선, 서울 지하철 3호선, 김포도시철도, 공항철도 등 동서 방향 노선들이 남북으로 이어져 수도권 서북부 교통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전망이다.
또 지난 4일 검단신도시에서 공항철도 계양역까지 인천1호선을 연장하는 공사의 입찰이 당초 계획보다 3개월여 앞당겨 진행됐고, 지난달에는 인천 도시철도 2호선 검단 연장사업이 기획재정부 예비타당성조사 대상에 선정됐다. 오는 10월 대도시광역교통위원회(대광위)가 검단을 지나 김포까지 연결되는 서울지하철 5호선(가칭 한강선) 연장 방안에 대한 발표를 앞두고 있다는 점도 완판을 가속화시켰다. 김포한강신도시나 동탄신도시, 광교신도시 등 여타 2기신도시들이 준공 후에도 몇 년 간 악성 미분양에 시달리며 할인분양까지 했던 것을 감안하면 꽤나 빠른 속도로 미분양을 털어낸 셈이다.
‘인천 검단신도시에서 분양한 동양건설 ’검단파라곤1차‘는 미분양으로 고전하다 9월초 완판 행렬에 합류했다. 제공 | 보물창고
운정도 마찬가지다. 올해 6월 대우·중흥·대방 3개 단지가 동시 분양에 나섰지만 전체 2527가구 중 496가구가 남았다. 그러나 7월부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해 390가구까지 줄었다. 8얼초 ‘중흥S-클래스’와 ‘대방노블랜드’가 완판됐고, 9월초 ‘파크푸르지오’의 분양률도 70% 정도로 올랐다.
운정의 경우 3기 신도시 발표 이후 GTX-A 운정역의 2023년 개통 계획이 확정됐다. 완공되면 운정역에서 서울역까지 20분, 삼성역까지는 30분이 소요된다. 내년에는 서울-문산고속도로도 개통될 예정이다.
인천 송도국제도시에서 분양한 ‘호반써밋’에는 예비 청약자들이 분양을 받기 위해 몰려 줄을 길게 늘어섰다. 사진 | 김윤경 기자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B노선이 확정된 인천 송도국제도시의 경우 청약 경쟁률도 치열했다. 지난 4일 1순위 청약을 진행한 ‘송도더샵센트럴파크3차’는 일반공급 258가구 모집에 5만3181명이 몰려 206.13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웬만한 서울 청약률을 웃도는 수치다. 특히 전용 80㎡는 분양가가 5억7950만원임에도 불구하고 1순위 해당지역 경쟁률만 1463대 1이 나왔다. 같은날 청약한 ‘송도 더샵 프라임뷰’는 398가구 모집에 4만5916명이 몰려 평균 115.37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이날 송도에 몰린 청약통장만 11만2990개로 집계됐다.
임병철 부동산114 수석연구원은 “수도권 서·남부 지역에서 한두달 전부터 거래량이 늘고 호가가 오르는 현상이 보인다”며 “가을 이사철 수요와 함께 강남의 공급 부족이 결국 서울 접근성이 좋고 가까운 지역을 중심으로 파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socool@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