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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장 23-34절. 성찬에 대한 교훈. 요약설교
1. 이번 시간(11:23-34)에는 애찬 후에 거행되었던 성찬(聖餐: the holy supper)의 취지를 밝히고(23-26절), ② 부유한 교인들이 성찬의 취지를 모독함으로써 징계를 받아 병든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27-32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애찬의 문제와 성찬 문제를 종합하여 결론적으로 애찬식으로 모일 때에 먼저 먹지 말고 기다려서, 서로 사랑을 나누고,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교훈입니다. (33-34절)
2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첫째 부분(23-26절)에서 ‘성찬’이란 언약을 범하고 죽게 된 인간을 위해 주님이 대신 죽으신 사랑을 기념하는 것이라는 성찬의 취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둘째 부분(27-32절)은 부유한 성도들이 성찬을 먹으면서 자신이 가난한 성도와 다름이 없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살피지 않고, 가난하고 죄 많은 인간을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성찬을 무분별하게 먹고(모독하고), 더구나 주님이 몸과 피를 희생하여 구원하신 가난한 성도를 배고프게 하고 멸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병든 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셋째 부분(33-34절)은 결론적인 교훈으로서, 애찬과 성찬을 먹기 위해서 모일 때는, 먼저 온 부유한 성도가 나중에 오는 가난한 성도를 기다려서 다 같이 나누어 먹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부분(23-26절)에서 ‘성찬’이란 언약을 범하고 죽게 된 인간을 위해 주님이 대신 죽으신 사랑을 기념하는 것이라는 성찬의 취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23절.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1. ‘내가’(ἐγὼ: I) 주님에게서 받은 사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앞부분(17-22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전통(tradition)을 떠나 그릇된 만찬을 거행한 것과 대조(contrast)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본 절에는 원문상 ‘기교적 표현법’(word's play:말재간)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즉, ‘받다’(παρεδοκα)와 ‘배반하다’(παραδιδοτο)는 원형(παραδιδομι, deliver, 넘겨주다)이 동일합니다.
이 단어들을 통해서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회상케 해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배반하다’의 시제가 미완료형(imperfect)이므로, 밖에서는 배신행위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마가의 다락방에서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고 계시는 역사적 장면(historical setting)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마치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배신적인 ‘만찬’ 행위와 전통적인 ‘만찬식’과의 대조를 연상케 해줍니다.
24절.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절.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1. 이 부분은 구약의 유월절과 관련하여 신약의 성찬식이 제정된 취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신 때도 ‘유월절’ 기간이었습니다 (눅 22:15).
‘떡’(23절)은 유대인들이 출애굽 당시 이집트 탈출을 서두르느라고 발효되지 않는 떡 먹던 것(출 12장)을 회상하면서, 유월절 때 먹던 무교병을 가리킵니다.
‘축사’하고 떡을 ‘떼는’ 것은 유월절 때, 가장(家長)이 식사 기도를 하고 한 덩어리의 떡을 떼어서(찢어서) 나누어주는(분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2. 그리고, 유월절 식사 때는 포도주 잔을 4회 마시는데, 주된 식사(the main meal) 직후에, 세 번째 잔을 마십니다.
이것은 모두 옛 언약 때에 행한 유월절 의식이었습니다.
이 옛 언약(the old covenant)은 ‘내가(여호와께서) 너를(이스라엘인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구속)했다’는 사실을 회상(기억, 기념)케 하는 것이었습니다(출 6:6).
3.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아담)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범죄하여, 언약을 깨뜨린 데 대한 형벌로 죽음에 종노릇 하는 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몸과 피(즉, 생명)를 희생하고, 대신 죽으신 구속 사역을 기념(회상, 기억)케 하기 위해서 성찬식을 제정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신 ‘새 언약’입니다(the new covenant, 렘 31:31-34 참조).
4. 이러한 옛 언약과 새 언약, 유월절과 성찬식의 관계, 그리고 첫 번째 성찬식이 거행되는 것을(눅 22:25) 볼 때, ‘이것은 내 몸이다’는 말씀은 여자적(如字的, literal)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symbolically) 해석해야 합니다.
즉, 성찬식 때, ‘떡’이 예수님의 살로 변하는 것이 아니고, 또 ‘잔’의 포도즙이 예수님의 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5. 따라서, ‘떡’은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의 육체적인 죽음을 나타내는(상징하는) 것이고, ‘잔’은 죄인에게 대한 하나님의 진노(시 75:8, 사 51:7)를 대신 받기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나타내는) 것입니다.
6. 그리고, ‘행하라’(ποιεῖτε, 23절)는 말은 현재형으로서 성찬식을 반복해서 시행하라는 것이고, ‘기념하라’(23, 24절)는 것은 생생하게 회상시켜서 기억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아!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피 흘리시고, 십자가를 지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구원의 은혜를 감격하게 하는 실물 교수 예식입니다.
그냥 말씀만으로 “주님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성찬 예식을 참여하면서, 그 의미를 설명하면, 쉽게 그리고 더욱 감격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체감하는 것입니다.
7. 이러한 주의 만찬을 거행하는 데 있어서, 떡의 분량과 잔의 분량은 원래 풍성했고, 오늘날처럼 약식(略式)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식후에’(25절)란 말은 ‘주된 식사 후에’(after eating the main meal), ‘풍성한 식사 후에’(after the affluent supper)란 뜻이고, 잔도 4회나 마셨기 때문입니다.
26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1. 24-25절은 성찬식의 취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1) 즉, 본 절은 성찬식을 거행할 때마다, 성찬식의 취지 즉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말로써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식 때마다 꼭 목사가 성찬의 취지를 설명합니다.
이 떡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주님이 대신 죽으신 주님의 몸을 의미합니다.
이 잔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의미합니다.
(2) 그러기 때문에, 성찬식 때, 아직 세례받지 못하신 성도님들도 성찬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집에 가시지 않고 방청하도록 참여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2. 그러므로, ‘전하다’(καταγγελλετε)는 것은 구두로 엄숙히 선포하는 것(proclaim)을 뜻합니다.
둘째 부분(27-32절)은 부유한 성도들이 성찬을 먹으면서 자신이 가난한 성도와 다름이 없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살피지 않고, 가난하고 죄 많은 인간을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성찬을 무분별하게 먹고(모독하고), 더구나 주님이 살과 피를 희생하여 구원하신 가난한 성도를 배고프게 하고 멸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병든 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1. ‘그러므로’는 ‘성찬식은 희생적인 사랑을 기념하는 의식이므로’를 뜻합니다.
성찬식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성찬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죄와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몸을 버리시고, 피를 흘리셨다는 말씀을 믿지 않으면서, 성찬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불신앙 행위를 뜻합니다.
세례받는 것은 그 사람이 주님의 속죄의 은총을 확실하게 믿었다는 것을 교회가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 예식은 세례받은 사람만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침례교회에서 예수 믿고 침례를 받았다가 우리 교회로 오신 분이나, 심지어 천주교회에서 영세를 받고 우리 교회로 오신 분들도, 예수님의 속죄를 확실히 믿은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성찬에 동참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신다는 것은 성찬식 때 부유한 교인들이 가난한 교인들을 사랑치 못하고 오히려 가난해서 못 먹고 배고픈 사람을 모욕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부유한 교인들의 처사는 가난한 성도를 사랑하지 않고 멸시할 뿐만 아니라, 그 가난한 성도를 위해서 몸 버리시고 피를 흘리신 주님을 멸시하고, 주님의 몸과 피를 나타내는 성찬 예식 자체를 모독하는(profane) 행위였습니다.
28절.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1. ‘자기를 살핀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부유한 자유인일지라도, 가난한 노예와 똑같이 주님 앞에서 구속받은 죄인(a redeemed sinner)임을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2. 또한, 자기를 살핀다는 것은 정말 자신이 주님의 몸과 피로써 죄를 용서받은 믿음의 사람인가 자신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확신 가운데서 성찬에 참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성찬을 통해서 다시금 구원의 감격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9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1. 성찬의 취지(희생적인 사랑)를 인식하지 못하고 가난한 성도를 억울하게(못 먹게) 하고, 자기들만 포식해버리는 부유한 교인들은 ‘심판’을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2. 원문에 ‘죄’(κρίμα)는 ‘심판’(judgment)을 뜻합니다.
이것은 영원한 심판이 아니고, 육체적 질병이나 죽음 등 징계적인 심판을 뜻합니다.
30절.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1. 부유한 고린도 교인들의 질병은 범죄에 대한 징벌로 인한 것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 절은 독특하게도 범죄와 질병이 인과관계에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신명기 28장 15-22절, 마태복음 9장 1-8절, 요한복음 5장 14절, 야고보서 5장 16절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2. ‘잠자는 자’는 ‘죽은 자’를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법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감추었다가 죽었던 것처럼(행 5:1-11), 부유한 고린도 교인들은 가난한 자의 것을 안 남기고 모조리 먹어치움으로써, 성찬식을 모독했다가, 죽은 자도 있었던 것입니다.
31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1. ‘판단’은 역시 ‘징계적 심판’(disciplinary judgment)을 가리킵니다.
2. ‘징계’란 사랑으로 주시는 채찍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8장 1절 말씀대로, 일단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정죄란 없습니다.
아무리 병들고 죽는 일이 있어도,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2장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 가운데서 신앙생활 하도록 사랑의 채찍을 때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마다 징계하신다고 했습니다.
32절.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1. ‘징계’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사랑의 채찍입니다(히 12:5-11).
‘정죄함’은 불신자에게 최후의 심판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계 20:11-15)
셋째 부분(33-34절)은 결론적인 교훈으로서, 애찬과 성찬을 먹기 위해서 모일 때는 먼저 온 부유한 성도가 나중에 오는 가난한 성도를 기다려서 다같이 나누어 먹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33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1. ‘그런즉’은 ‘가난한 성도가 성찬을 먹지 못하도록 성찬식을 모독하면 질병과 죽음의 징계조차도 받게 되므로’를 뜻합니다.
2. ‘서로 기다리라’는 것은 ‘가난한 성도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서 성찬 음식을 모든 성도들이 적절히 나누어 먹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은 성찬식 때 목사가 분배하지만, 고대에는 성찬의 떡과 잔을 성도 개인이 큰 덩어리와 항아리에서 직접 떼어 먹고, 퍼서 마셨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배불러서 성찬에 대한 경건성이 없었고, 가난한 성도들은 배고파서 성찬의 취지보다는 배고픔 때문에 정신없이 떡을 떼어먹고 포도즙을 퍼서 마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인인 부자 성도들은 노예 출신 성도들이 올 때까지 성찬을 기다리라고 한 것입니다.
34절.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1.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란 말씀대로 ‘애찬’은 2세기 중엽까지 시행되다가, 칼타고 회의(251-256년)에서 정식으로 금지되었습니다.
2. 교회의 모임은 사랑이 중심이 되어야지, 먹고 즐기는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나누고, 희생하고 사랑하며 봉사하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3. <남은 것은 바울 사도가 어느 때든지 갈 때에 바로 잡으리라>는 말씀은 기본적인 것은 말했지만, 그 외에도 가르칠 것이 있는데, 그 남은 가르침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때, 가르치겠다는 뜻입니다.
4. 오늘은, 고린도 교회의 부유한 성도들이 ‘봉사적인 사랑’을 상징하는 성찬식의 취지를 무시하고 가난한 성도들에게 ‘군림하는 자세’를 취했다가 징계받은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도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에 감사 감격하는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하시고,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모임에서, 먼저 믿는 성도님들은 세상적으로 가난하고, 약하고, 천한 성도에 대해, 계급적으로 군림하는 자세를 갖지 말고, 봉사적인 자세를 가지고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교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