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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홍리 공소
간략설명 병인년 해미 생매장 순교자들의 첫 안식처를 품은 곳
도로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상홍2길 122
상홍리 공소의 설립 서산은 내포(內浦)의 한 지역으로 충청남도 서북단 태안반도에 위치해 있다. 잘 알려졌듯이, 내포는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에 의해 신앙이 전파된 후 ‘한국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가 되었던 지역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 지역에는 오랜 역사를 이어온 본당과 공소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볼 서산 상홍리(上紅里) 공소도 그러한 곳 가운데 하나다.
상홍리 공소는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에 있으며 과거에는 ‘가재 공소’라고 불렸다. 가재는 갈재 밑에 있는 마을로, 가래나무가 많았다 하여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이 마을에 공소가 세워진 것은 적어도 1884년 이전의 일이었다. 1880년대 초, 충청도의 중앙과 서부 지역을 담당하던 두세(C.-E. Doucet, 丁加彌, 1853-1917) 신부의 1883-1884년도 교세 통계표에서 가재 공소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공소 이름만 있을 뿐, 신자 수 등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신자 수는 1884-1885년도 교세 통계표에 처음 나오는데, 당시 81명이었다. 그 이듬해에는 102명으로, 서산에서 가장 큰 공소였다. 그러나 1886-1887년도에는 신자 수가 52명으로 급감하였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1890년대에는 30명 대에 머물렀다.
가재 공소는 1890년까지 두세 신부의 사목 하에 있다가 1890년 양촌 본당이 설립되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되었다. 양촌 본당의 초대 주임 퀴틀리에(J. J. L. Curlier, 南一良, 1863-1935) 신부는 1899년에 양촌이 본당의 중심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본당을 합덕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가재 공소는 1908년 수곡 본당이 설립되어 그 관할 공소가 될 때까지 18년 동안 양촌(1899년 이후 합덕) 본당 신부의 사목 하에 있었다.
2011년 보수공사를 마친 구 사제관. 바로 오른쪽에 상홍리 공소 성당이 있다.수곡 본당의 설립 충청남도 홍주(洪州)에 수곡(결성)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08년이다. 당시 홍주 지역의 신자들은 뮈텔(G.-C.-M. 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에게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합덕 본당의 크렘프(H. J.-M. Krempff, 慶元善, 1882-1946) 신부도 그것을 희망하였다. 1907년도 서울교구 연보에 따르면, 크렘프 신부는 결성 지역의 개종 운동을 설명하면서 많은 예비 신자들의 교육을 가까이에서 보살필 수 없음을 토로한 바가 있었다. 뮈텔 주교는 크렘프 신부에게 주어진 부담이 과중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본당의 설립을 결정하였다. 그 결과 1908년 수곡 본당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로 폴리(J. M. D. J. B. Polly, 沈應榮, 1884-1950) 신부가 부임하였다. 본당 설립 당시의 교세 통계표가 없어 관할 구역과 신자 수를 파악할 수 없지만, 다만 1909-1910년도 통계표를 보면, 관할 구역은 덕산, 해미, 서산, 홍주, 결성이었고, 신자 수는 본당과 공소를 합쳐 1,305명이었다.
20대의 젊은 폴리 신부는 열의에 찼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11년 서산과 태안에 2명의 전교 회장들을 보냈으며, 1913년경에 회장들을 위한 피정을 마련하여 기도와 교리 강의 등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희망했던 것만큼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특히 수곡 본당과 인근 지역이 그의 근심거리였다. 결성에서 생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신자들이 그곳으로 이주하는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게다가 본당 주변의 마을들에는 천도교(天道敎)인들만 살았기 때문에 새 신자들을 얻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던 폴리 신부는 1914년 본당을 떠나게 된다. 그해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일부가 소집령을 받아 프랑스로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 대상에 폴리 신부가 포함된 것이다. 그와 함께 합덕 본당의 크렘프 신부도 소집령을 받아 본당을 떠나게 되었다. 이에 뮈텔 주교는 라리보(A. J. Larribeau, 元亨根, 1883-1974) 신부에게 합덕 본당과 수곡 본당을 맡도록 하였다. 라리보 신부는 서산, 당진, 예산, 아산, 홍성 등을 맡아 3,500명이 넘는 신자들을 사목했다.
공소 앞마당의 성모상.서산으로의 본당 이전 1917년 4월 19일 서울 대목구장 대리이자 약현 본당 주임인 두세 신부가 선종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 대목구는 인사 이동을 단행하였는데, 라리보 신부가 교구의 당가(경리)로 임명되었다. 이로 인해 합덕과 수곡 본당을 맡을 신부가 공석이 되었지만, 신부들의 수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임명을 그해 9월에 있을 서품식 이후로 미루기로 하였다. 9월 22일 서품식이 거행되어 4명이 사제품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1884-1956) 신부는 합덕 본당, 안학만(安學滿, 루카, 1889-1944) 신부는 수곡 본당의 신부로 각각 임명되었다.
10월 2일 안학만 신부는 서울을 떠나 부임지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수곡 본당이 있는 홍성군 구항면 공리가 아닌, 서산군 팔봉면 금학리(소길리)였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다음의 자료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준다.
그간 금학리의 본당 위치 문제로 공소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즉 모든 교우들이 금학리는 교우들의 중심지가 될 수 없다고 하며, 중심지는 용장리다, 여미다, 해미다, 상홍리다, 산성리다, 이렇게 서로 논쟁하고 있습니다. 산성리 교우들은 본인을 찾아와서 “2천 원으로 50여 칸의 기와집을 마련할 것이니 우리한테 오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금학리는 주교님이 정하신 곳이다. 그러므로 주교님의 지시 없이 이렇게 행동하면 그것은 불복이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좀 진정된 것 같습니다만, 단념한 것은 아닙니다. 폴리 신부의 신부댁은 이미 2,800원에 팔렸는데, 계약금 400원은 전 요왕이 받았습니다.
위 글은 안학만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17년 12월 3일자 서한의 일부다. 본당의 소재지를 두고 서산 지역의 공소 신자들 간에 논쟁이 발생하자, 안 신부는 금학리에 본당이 세워지는 것이 뮈텔 주교가 정한 것임을 명확하게 밝혔다. 이를 통해 뮈텔 주교가 본당의 이전을 결정하고 안 신부를 서산으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뮈텔 주교는 왜 본당의 이전을 결정하였고, 서산의 공소들 가운데서도 소길리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수곡 본당과 인근 지역이 사목상의 어려움이 많았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검토하였다. 라리보 신부도 냉담자가 많고 비신자들의 개종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수곡 본당에 대해 비판적인 전망을 내보였다. 뮈텔 주교는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본당의 이전을 결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본당의 이전지로 서산 금학리를 선택한 이유는 이곳이 오랜 역사를 가진 견고한 신앙 공동체였고, 수곡 본당의 공소들 중에서 가장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금학리 공소는 두세 신부의 1883-1884년도 교세 통계표에 나올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공소였다. 또한 퀴틀리에 신부와 파스키에(P. J. Pasquier, 朱若瑟, 1866-?) 신부가 거처한 적이 있었으며, 여러 명의 신학생들이 배출되었다. 신자도 많아 1916-1917년도 교세 통계표에 따르면 금학리 공소의 신자는 288명에 이르렀다.
2007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38호로 지정된 상홍리 공소 성당. 왼쪽 건물은 구 사제관.1918년 당시, 금학리 본당의 관할 구역은 서산과 홍성으로, 공소는 18개였다. 신자는 본당과 공소를 합쳐 총 1,820명이었다. 상홍리 공소도 금학리 본당의 관할 공소들 중 하나였고, 신자수는 121명이었다.
본당을 금학리에서 상홍리로 1919년 9월 23일 폴리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한국을 떠난 지 5년 만에 돌아온 것이었다. 종군했던 선교사들이 한국에 되돌아옴에 따라 서울 대목구는 인사이동을 발표하였다. 그해 10월 하순, 안학만 신부는 송도(개성) 본당으로 가고, 폴리 신부가 금학리 본당을 맡게 되었다. 폴리 신부는 1920년 3월 25일 본당을 금학리에서 서산군 음암면 상홍리로 이전하였다. 그가 본당을 이전한 이유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위 사료(안학만 신부의 1917년 12월 3일자 서한)를 통해 상홍리 공소 신자들이 본당의 이전에 적극적으로 나섰을 가능성이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본당 이전 직후인 1919-1920년도 교세 통계표에 따르면, 상홍리 본당의 관할 구역은 서산, 홍성, 예산으로, 공소는 18개였다. 상홍리 본당의 신자는 118명이었고, 총 신자 수는 1,805명이었다.
본당을 이전하였으나, 성당과 사제관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을 것이다. 기존에는 상홍리 성당이 1919년에 건축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자료를 확인한 결과, 성당이 세워진 것은 1921년이었다. 1921년 3월 폴리 신부는 “그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을 건축하는 중”임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관보’ 제2718호(1921. 9. 1)의 ‘포교소 설치계’(布敎所 設置屆)를 보면 4월 28일에 상홍리 성당의 설치계가 재출되었다. 이를 정리하면, 상홍리 성당은 1921년 3월과 4월 28일 사이에 완공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당은 전통 한옥 목조 양식 건물이었다. 이때 성당과 함께 사제관도 건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홍리 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조성된 병인년 순교자 묘소. 1935년 해미 생매장 순교자들을 모셨다가 1995년 해미 성지로 이장하였다.상홍리 본당의 신부와 신자들 상홍리 본당의 토대가 마련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21년 8월 1일자로 폴리 신부가 예수성심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초순, 후임으로 멜리장(P. Melizan, 梅履霜, 1877-1950) 신부가 부임하였다. 멜리장 신부는 10여 년간 활동하면서 본당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21년 10월경에는 멜리장 신부의 모친 세사리 여사가 종(일명 ‘세사리 종’)을 기증함에 따라 1923년경에 종루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922-1923년에는 서산 지역의 청년들이 교회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서산 천주교 청년회’를 조직하였다. 서산 천주교 청년회는 1922년 6월 3일에 창립된 경성교구 천주교청년회 연합회에도 참여하였는데, 1923년 2월 당시 회원이 44명이었다. 멜리장 신부는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가져 1922년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을, 1923년경에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습소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1932년 7월, 10여 년간 재임하면서 본당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온 멜리장 신부가 옥천 본당으로 가고, 바로(P. Barraux, 范, 1903-1946) 신부가 부임하였다. 바로 신부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순교자 유해를 발굴 · 안장한 것이었다. 그는 병인박해 때 해미에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고 순교자들의 목격 증인들을 수소문하였다. 그리고 다행히 순교 장면을 직접 목격한 이주필(李周弼), 박승익(朴承益) 등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증언을 토대로 조사를 한 후, 1935년 4월 1일 백락선(白樂善, 요한) 회장 등의 신자들과 함께 무명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해미면 조산리 일대를 발굴하여 유해를 수습하였다. 바로 신부와 신자들은 그날 대곡리 공소에서 1박을 하고, 4월 2일에 만장을 앞세운 유해 상여를 해미읍성 → 음암면 유계리 → 일곱거리를 거쳐 옮긴 후 상홍리 성당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안장하였다.
다시 공소로 한편 바로 신부는 본당의 이전을 모색하였는데, 그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자료가 참고된다.
본인은 (서산) 읍내로부터 5km 거리에 있습니다. 본인은 천주교가 이 읍내에서 발전하기 위해 그곳에 정착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대지가 있고, 소성당으로 개조한 집이 있으며, 또 그 옆에 신부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주교님(인용 주 : 라리보 주교)께서 이미 예측하시고 동의하시리라는 조건에서 좀 서두르고 있습니다.
자료를 통해 바로 신부가 본당의 발전을 위해 본당을 서산 읍내로 이전하는 방안을 모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를 위해 읍내에 성당 부지와 가옥을 매입하였다. 본당 이전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되자, 1936년 여름, 성당과 사제관 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1937년 10월 5일 서울 대목구장 라리보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본당이 서산 읍내로 이전되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서산동문동 본당이다. 본당이 이전됨에 따라 상홍리 본당은 17년 만에 다시 공소가 되었다.
1940년 상홍리 공소의 종루가 낡아 해체하였고, 이때쯤 세사리 종을 동문동 본당의 종과 교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홍리 공소의 종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제에 의해 군수품으로 빼앗기고 말았다고 한다. 동문동 본당에서는 공출을 피하기 위해 세사리 종을 성당 옆 대숲에 묻어두고 대신 안면도 누동리 공소의 종을 대신 공출하였다고 한다. 세사리 종은 광복 이후 동문동 성당에 다시 설치되었고,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상홍리 공소 뒷산에 조성된 병인년 순교자 묘소의 순교탑.순교자 묘역 성역화와 상홍리 공소 보존 노력 1935년에 조성된 순교자 묘역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신앙심을 이어받기 위한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각 공소의 신자들은 1년에 1번 순교자 묘역을 참배하고 순교 사기를 낭독하며 순교자들의 정신과 공적을 묵상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은 순교자 묘역이 일반 묘역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초라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동문동 본당과 상홍리 공소는 순교자 묘역을 성역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1954년 가을, 동문동 본당 주임 신균식(申均植, 도미니코) 신부의 지시에 따라 신자들은 천묘 20주년을 기회로 무덤 수축, 순교자 묘비와 바로 신부의 묘비를 건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성금을 보았고,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에도 원조를 청하여 1955년 4월 2일에 순교탑을 건립하였다. 1977년 11월에는 동문동 본당 회장을 역임한 백낙관(白樂觀, 시몬) 등의 노력으로 순교자 묘역 정화 사업이 이루어졌다.
한편 대전교구에서는 해미읍성과 그 인근 지역을 순교 성지로 조성하기 위한 사업을 전개하였다. 1975년 10월 24일에는 ‘순교복자 79위 시복 50주년’을 기념하여 해미면 조산리에 순교 기념탑을 세우고 교구장 황민성(黃旼性, 베드로, 1923-1984) 주교의 집전으로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1982년에는 읍성 내 감옥터에 순교 기념비를 세웠으며, 1984년에는 순교자들의 생매장터를 매입하였다. 또한 1985년 4월 11일에는 성지 관리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해미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해미 본당에서는 1985년 6월에 ‘해미 순교 선열 현양 협의회’를 조직하여 성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처럼 성지 매입과 조성 사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대전교구와 해미 본당은 상홍리 공소 묘역에 있는 순교자 10여 명의 유해를 본래 순교한 자리인 해미 성지로 이장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95년 9월 20일 한국 순교성인 대축일에 교구장 경갑룡(景甲龍, 요셉, 1930-) 주교의 집전으로 유해 봉안식이 거행되었다. 유해는 해미 성지 순교탑 바로 아래에 안장되었다.
동문동 본당과 상홍리 공소 신자들은 종루 복원 및 노후 시설 보수 등 공소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86년 10월에는 1940년에 해체했던 종루를 다시 복원하고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복원에는 대전교구 백남익(白南翼, 디오니시오, 1925-2004) 신부와 임진창(任珍昌, 루카, 1937-1994) 서강대학교 교수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 종루 복원 공사와 함께 공소 강당 및 사제관 보수 공사도 함께 실시되었다.
상홍리 공소는 전통적 한옥 목조 건축양식을 비교적 온전히 갖춘, 보기 드문 근대 건축물이다. 문화재청은 상홍리 성당이 ‘서양의 종교 공간에 한옥의 구법을 활용한 귀중한 자료’임을 인정하여 2007년 7월 3일 등록문화재 제338호로 지정하였다. [출처 : 양인성,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교회와 역사, 2011년 6월호, 각주가 포함된 내용은 자료실을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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