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당시 피난은 못갔다 고향이 금산 남일면이다, 남아가 이현상이 고향이다. 마이산이 있는데 산골이고 공비가 많았다 한다.
★진안 운장산이 공비소굴이라 소문이 나있다 그때는 지역빨갱이들이 더 큰소리치고 인민군놈들은 조용히 지켜보았다고 하더라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우익인사나 자주들 죽이고 있는것 찾아 가져오고 때되면 밥 해오고
군인은 보질못했다, 낮에는 경찰이 왔다갔다 하다가 어두워지면 떠나가고 밤에는 공비들이 내려와 잔치를 벌인다
2)행주산성 정규환 회장님 83세, 이곳이 고향
15살에 전쟁이 났는데 피난을 못가고 동네에 있었다, 대부분 동네가 다 그랬다
국군 1사단 병력이 나루터에 왔는데 넘어갈 뱌가 마땅치않아 많이 죽었다 한 소령은 짚차를 돛배에 실으려 하는데 부두가 없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군인들이랑 사람들까지 동원하여 돌을 주워다 턱을 만들고했는데 결국 못실었다 맞은편 개화산을 인민군이 먼저 점령하여 아쪽으로 총을 쏘는 바람에 군인들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져 각자 오합지졸로 강을 건느려 하더라
그러다 배에 줄을 연결하여 거기에 매달려 강을 건너다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 죽는 모습 많이 직접 보았다 강변에 여기저기 국군이 죽었다고 봐야하고 대부분 수해로 쓸려나갔다 한다
당시에는 갈대가 얼나나 큰지 여기서 개화산밑에 수로나 논들이 보이질 않했다고 한다 개화산일대에 가서 알아보면 찾을지 모른다고 한다 ★개화산에 일제시대에 파놓은 굴이 몇개 있는데 그 속에도 있을지 모른다고 한다
솔직히 살아야 하니까 인민군 심부름이나 시키는 일을 다 해야했다 ★죽은 인민군을 로프로 감아서 허리에 차고 지금 강가에서 강너머 틈새골로 옮기기도 했다. 왠만한 밭을 파면 인민군이 나온다~~
그러다 국군과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여 몇일만에 강가에 왔다 이때 ★인민군 700여명이 행주산성에 왔는데 어려보여서 물어보니 비슷한 나이였다 고향이 보고싶고 부모형제 보고 싶다며 울기도 하더라
처음 미군이 오는데 동네 교회나가는 사람이 배를 타고 강너머에 갔다 이 사람은 일본에 탄광 광부로 갔다 태평양 전쟁에도 참여한 배운 어른으로 영어도 조금했다 ★가서는 인민군이 없다고 했는데 막상 지금 카페능선으로 상륙하려는데 인민군이 들이닥쳐 미군이 ★10여명 전사했다
이때 이 동네에 이용복이란 인민위원장이 있었는데 경기도에 거물급이었고 함께 한쪽은 도피로 이산포 쪽으로 할아버지 집안은 피신을 했는데 결국 이위원장은 북으로 도망갔단다 후퇴한 미군이 결국 해병전차(LVT)를 몰고 새벽에 뭍으로 올라와 혼비백산하여 인민군이 도망 갔다고 한다
동네 주변에 엄청 죽었는데 여기저기 방공호에 긁어 묻어버렸다 저 틈새마을 밭에도 묻었고 한 할머니가 고추밭에 ★전사한 미군을 인근지역에 묻었다고도 한다, 지금은 집이 들어서 있다
주변에서 탄띠도 주워 차고 다녔는데 주머니에 예쁜시계가 있더라, 아마 여자친구줄 시계같더라
1.4후퇴시는 피난을 가서 그때부터는 잘 모른다 전쟁이 끝나고 몇년지나 한 아저씨가 찾아와 배를 태워달라해서 한강 중앙까지 갔다가 왔다,★ "26명만 살았어요~!" 탄식의 한마디 남기고 고맙다고 하며 떠났난다
★실제 강변에서 전투화를 주워보니 신발속에 뼈가 그대로 있더라 행주보를 만들기전에 물살이 쌔 많이 사라졌다
3)박창구 80세 , 이곳이 고향
★미군 7~8명 전사, 인천에서 함포가 여기까지 날라왔다, 바로 뒤 능선이 전투장이다 미군은 아마 찾아갔으리라 본다 수륙장갑차가 동네로 올라왔는데 서울로 진격할때 기차길로 올라가 철로가 다 망가져버렸다
여기있는 웬만한 밭은 시체가 다 있다고 본다
4)박길성 80세, 이곳이 고향
저 집지은 곳에 시체가 많이 묻혀 있었다 저기 굴뚝보이는 집 근처는 큰 구덩이가 있었고 시체를 다 집어 넣었다고 알고있다